1. 개요
스포츠에서 선수와 감독 직책을 모두 겸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영어로는 해당 종목의 감독을 매니저라고 부르는지 헤드코치라 부르는지에 따라 플레잉 매니저(Playing Manager), 혹은 플레잉 코치(Playing Coach)로 나뉜다.2. 상세
보통 프로스포츠 구단에서는 선수와 코치, 감독으로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드물게도 고참 선수들 중 코치와 선수 역할을 병행하는 플레잉 코치가 생길 수 있으며 이들 중에서도 가장 드문 사례로 선수단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는 감독이 직접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 역할까지 겸해가며 활약을 펼치는, 선수 겸 감독이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대체로 프로 스포츠에서는 시즌 종료 후 감독직이 비어 있을 시 마땅한 선택지가 없을 경우[1], 선수단 사이에서 인망이 높은 선수를 감독으로 선출하는 게 일반적이다. 아마추어 스포츠에서는 명감독을 영입하기에는 자본이 부족하거나 스포츠단의 투자 부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스포츠 업계와 관련 없는 인물을 감독으로 고용하거나 감독을 바지사장으로 두고 한 선수가 감독을 대신해서 선수단을 통솔하는 케이스도 있다.
옛날에는 선수층이 얇고 감독감도 적어서, 가장 유서깊은 프로스포츠 리그 중 하나인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에서는 선수 겸 감독이 월드 시리즈 우승까지 하는 경우도 1901년 이후 5번 있었다.[2] 가장 최근의 경우는 194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유격수 겸 감독 루 보드로[3][4]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수많은 유망주들 중에서 선수로서의 자질이 있는 몇몇 선수만이 프로에서 살아남는 게 프로스포츠의 법칙인데, 더욱이 선수의 조건에 부합하는 뛰어난 운동능력과 자기관리, 그리고 감독의 조건에 부합하는 선수단 통솔 능력이나 작전 수행능력 등을 동시에 갖추는 선수는 좀처럼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먹구구식으로 팀을 관리하던 과거와 달리 스포츠 의학과 각종 훈련, 분석기법이 고도로 발달된 21세기로 가면서 선수, 코치, 감독 외에도 트레이너, 전력분석원, 팀닥터 같은 프로스포츠와 관련된 전문화된 직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고 감독은 이들 스태프들과 소통하면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하게 됐으며, 선수로서의 자기관리와 기량 유지를 해내면서 이러한 자질을 함께 갖추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됐기에 선수 겸 감독을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 예로 KBO 리그만 해도 선수 겸 감독은 프로 원년 MBC 청룡을 지휘했던 백인천이 유일무이한 사례이며[5], 일본프로야구에서 조차 선수 겸 감독으로 양쪽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인물은 난카이 호크스의 노무라 카츠야 말고는[6] 전혀 없다시피하다.
물론 동호회 수준으로 가면 아직도 있으며, 나름 전문화된 팀의 경우 코치 겸 선수, 트레이너 겸 선수도 있다. 아마추어 대회에서 좋은 기량을 보이기 위해 훈련한다는 명목도 있지만 본질적인 목적은 서로 즐기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프로처럼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 쪽이 될까말까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는 트레이너나 감독을 하다가 경기 당일에는 경기에 출전하면 그게 선수 겸 감독이 되는 것이고, 프로처럼 성적에 목 매는 것도 아니고 다들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취미로 즐기는 것인데다가 선수 풀이 넓은 것도 아닌데더 설렁 넓다고 하더라도 같이 운동함으로써 사교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감독이 직접 출전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다. 오히려 사교를 위해서 감독이 직접 출전함을 권장하는 분위기도 한 몫 한다. 보통 감독을 맡을 정도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기도 잘 뛴다. 그래서 생활체육에서는 선수 겸 감독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2020년대에 들어 K리그와 KBO에서 조만간 지도자를 할 생각이 있는 노장 선수들이 지도자 연수도 받으면서 선수 생활도 마무리할 겸 시작하는, 일종의 지도자 견습 단계로 변하고 있다.[7] 물론 K리그도 자체적인 지도자 준비과정이 잘 되어 있지만 이론밖에 못 가르치기 때문으로, 애초에 이런 경우에는 지도자 면허를[8] 따 놓은 경우도 있으며 특히 염기훈의 경우 플레잉 코치를 하기 전인 2020년에 A급을 취득했다.
3. 실존하는 선수 겸 감독
작성 지침- 나열 순서
- 축구: 이름 가나다순
- 야구, 기타 종목: 재직을 시작한 연도 빠른순
- 이름 - 재직 팀(재직년도) 형태로 작성
3.1. 야구
- 타이 콥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21~1926)
- 미키 코크런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34~1937)
- 마츠키 켄지로 - 오사카 타이거즈 (1940~1941, 1950)
- 루 보드로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42~1950)
- 후지모토 히데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44, 1946)
- 츠루오카 카즈토 - 난카이 호크스 (1946~1952)
- 벳토 카오루 - 마이니치 오리온즈 (1954~1957)
- 나카니시 후토시 - 니시테츠 라이온즈 (1962~1969)
- 무라야마 미노루 - 한신 타이거스 (1970~1972)
- 프랭크 로빈슨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75~1976)[9]
- 노무라 카츠야 - 난카이 호크스 (1970~1977)
- 백인천 - MBC 청룡 (1982~1983)[10]
- 피트 로즈 - 신시내티 레즈 (1984~1986)[11]
- 후루타 아츠야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06~2007)
- 다니시게 모토노부 - 주니치 드래곤즈 (2014~2015)
- 구대성 - 질롱 코리아 (2018~2019)
3.2. 축구
-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 미들즈브러 FC (2006~2007)[12]
- 귄뒤즈 클르츠 - 갈라타사라이 SK (1952~1953)
- 권한진 - 부산 아이파크 (2025~)
- 그레이엄 수네스 - 레인저스 FC (1986~1991)
- 글렌 호들 - 스윈던 타운 FC (1991~1993), 첼시 FC (1993~1996)
- 기예르모 고로스티사 - 로그로녜스 (1948~1949)
- 김판곤 - 홍콩 레인저스 FC (2003~2004)
- 네쿠 - SC 코린치안스 (1920, 1927)
- 뉘마 앙드와 - FC 앙티브 (1945~1946)
- 니콜라 아넬카 - 상하이 선화 (2012~2013), 뭄바이 시티 FC (2015)
- 다고베르토 몰 - 알바세테 발롬피에 (1961~1962)
- 다카하라 나오히로 - 오키나와 SV (2016~2023)[13]
- 돈 레비 - 리즈 유나이티드 FC (1961~1962)
- 라몬 무티스 - 알마그로 (1937)
- 라이언 긱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14)[14]
- 라인홀트 뮌첸베르크 - 알레마니아 아헨 (1946~1949, 1950)
- 레오폴트 킬홀츠 - 스타드 드 랭스 (1936~1937)
- 렌초 데베키 - 제노아 CFC (1927~1929)
- 로리 스콧 - 크리스탈 팰리스 FC (1951~1951)
- 로버트 밀라 - 인디애나 플로어링, 뉴욕 내셔널스 (1925~1928)
- 로제 쿠르투아 - AS 트루아사비니엔 (1952~1957)
- 루돌프 겔레슈 - 아인트라흐트 트리어 (1950~1951)
- 루돌프 웨트체르 - ILSA 티미쇼아라 (1934~1936), 로빈 그리비차 크라요바 (1936~1937), 엘렉트리카 티미쇼아라 (1937~1939)
- 루드 굴리트 - 첼시 FC (1996~1998)
- 루이 가브리야르게 - 님 올랭피크 (1942~1943, 1944~1946)
- 루이스 레게이로 - 클루브 아메리카 (1942~1944)
- 루이스 몰로니 - UD 라스팔마스 (1957~1958)
- 루이지 베르톨리니 - 라팔로 (1937~1940)
- 루이지 알레만디 - SS 라치오 (1939)
- 루트비히 골트브루너 - FC 바이에른 뮌헨 (1938~1943), TSV 1860 뮌헨 (1945~1946)
- 뤽 홀츠 - FC 에첼라 에텔브루크 (1998~2008)
- 르네 바더 - FC 바젤 (1952~1955)
- 리카르도 카라펠레세 - 칼초 카타니아 (1957), 테르나나 칼초 (1961~1962)
- 마누엘 플레이타스 - 파라과이 (1922~1929)
- 마르틴 마르쿨레타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35)
- 마리안 스포이다 - 오스트로비아 오스트루프 비엘코폴스키 (1930)
- 마리오 바를리엔 - 산레메세 (1942~1943)
- 마리오 젠타 - FC 프라토 (1946~1947), 비르투스 엔텔라 (1950~1951)
- 마리오 페라촐로 - 브레시아 칼초 (1946)
- 마티아스 신델라 - FK 아우스트리아 빈 (1937~1938)
- 부야딘 보슈코브 - SC YF 유벤투스 (1962~1964)
- 뱅상 콤파니 - RSC 안데를레흐트 (2019)[15]
- 베프 바크하위스 - FC 메스 (1945~1946)
- 빌리발트 크레스 - FSV 프랑크푸르트 (1947~1949)
- 셔페르 얼프레드 - 아마토이어 빈 (1923~1925), AC 스파르타 프라하 (1925~1926)
- 세르빌리우 - SC 코린치안스 (1948)
- 세베리노 미넬리 - FC 취리히 (1943~1946)
- 세사르 로드리게스 - 엘체 CF (1959~1960)
- 수네 안데르손 - IFK 에스킬스투나 (1956~1958), 칼마르 FF (1959~1961), 핀스퐁스 AIK (1962~1963), 쇠데르탤리에 SK (1964~1967), 하가룬스 IS (1968~1971)
- 슈테판 도바이 - 플라커라 메디아슈 (1945~1948)
- 슈테판 아우어 - FC 라피드 부쿠레슈티 (1937~1939)
- 아돌포 페데르네라 - 미요나리오스 FC (1951~1953)
- 아르만도 피키 - 바레세 칼초 (1968~1969)
- 아미우카르 바르부이 - SS 라치오 (1931~1932)
- 아메데오 비아바티 - 이몰레제 칼초 1919 (1949~1950), AC 마젠타 (1950~1951), 만두리아 (1951~1952), AC 시타 디카스텔로 (1952~1953), 몰페타 스포르티바 1917 (1953~1954), AC 벨루노 1905 (1954~1955)
- 아스비에른 할보르센 - 함부르크 SV (1933)
- 아틸리오 데마리아 - AC 레냐노 (1945~1946), 코센차 칼초 (1946~1948)
- 안드레아스 쿠퍼 - 1. FC 슈바인푸르트 05 (1947~1949), 1. FC 슈바인푸르트 05 (1951~1953)
- 안젤로 스키아비오 - 볼로냐 FC 1909 (1933~1934)
- 알레산드로 프리제리오 - FC 키아소 (1947~1948)
- 알빈 키칭거 - 1. FC 슈바인푸르트 05 (1941~1946)
- 알프레드 아스통 - CA 파리 (1948~1949), CS 퐁텐느블뢰 (1949~1950), AC 앙브와즈 (1950~1951), 투르 FC (1951~1956)
- 앙드레 아베글렁 - FC 소쇼몽벨리아르 (1936), 세르베트 FC (1937~1942), FC 라쇼드퐁 (1942~1944)
- 앨런 커비쉴리 - 찰턴 애슬레틱 FC (1991~1993)[16]
- 야코프 슈트라이틀레 - FC 바이에른 뮌헨 (1954~1955)
- 에드몽 델푸르 - FC 루앙 (1940~1945), 레드 스타 파리 (1945~1946)
- 에드문트 코넨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50), FC 영 펠로우스 취리히 (1950~1952)
- 에른스트 알브레흐트
- 에른스트 후프슈미트 - FC 바젤 (1947~1950)
- 에티엔 마틀레르 - FC 소쇼 (1944~1946)
- 에드가 다비즈 - 바넷 FC (2012~2014)
- 염기훈 -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23)[17]
- 오라시오 카사린 - 아틀레티코 사파텍 (1951~1952), 멕시코 대표팀 (1953)
- 오스발도 파토리 - 브레시아 칼초 (1955~1959)
- 오스카르 에세레 - 올랭피크 리옹 (1950~1952)
- 옵둘리오 바렐라 - CA 페냐롤 (1955)
- 요제프 가우헬 - TuS 노이엔도르프 (1946~1948)
- 요제프 라셀른베르크 - 아인트라흐트 바트 크라인츠나힘 (1950~1956)
- 요제프 비찬 - SK 슬라비아 프라하 (1954~1955)
- 요제프 실니 - 하나츠카 슬라비아 크로메르지시 (1935~1940)
- 요제프 우리딜 - AS 바리 (1929~1930)
- 요제프 코슈탈레크 - 스파르타 포바주스카 비스트리카 (1945~1946), SK 라코브니크 (1946~1951)
- 웨인 루니 - 더비 카운티 FC (2020~2021)[18]
- 윌리 왓슨 - 핼리팩스 타운 AFC (1954~1956)
- 윌리암 마르티네스 - 아틀레티코 후니오르 (1967), CA 페닉스 (1969~1970), 센트랄 에스파뇰 (1970)
- 유제프 카우자 - KS 크라코비아 (1927~1928)
- 율리우 바라트키 - FC 라피드 부쿠레슈티 (1941~1945), 리베르타테아 오라데아 (1946~1947), CS 터르구무레슈 (1947~1948)
-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 - CA 오사수나 (1959~1960)
- 이르지 소보트카 - HNK 하이두크 스플리트 (1940~1941), FC 라쇼드퐁(1946~1951)
- 자이미 지아우메이다 - CR 플라멩구 (1946, 1947, 1950)
- 자코모 마리 - US 크레모네세 (1960~1961)
- 잔 클라선스 - R.A.E.C. Mons (1945~1946)
- 잔루카 비알리 - 첼시 FC (1998~1999)
- 재키 밀번 - 린필드 FC (1957~1960), 이유슬리 타운(1960~1962)
- 잭 롤리 - 플리머스 아가일 FC (1955~1957)
- 잭 프로갓 - 케터링 타운 FC (1958~1961)
- 젠겔레르 줄러 - 데포르티보 사마리오스 (1951~1953)
- 조르주 보쿠르 - RC 랑스 (1940~1942)
- 조제프 곤살레스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42~1943, 1944), EF 마르세유프로벵스(1943~1944)
- 존 토샥 - 스완지 시티 AFC (1978~1984)
- 지포 비아니 - US 시라큐사 (1940~1941), US 살레르니타나 1919 (1941~1943)
- 주세페 메아차 - 아탈란타 BC (1945~1946),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46~1947)
- 주세페 카반나 - 베네벤토 칼초 (1936~1937), 아베차노 (1945~1946)
- 쥘 반도렌 - 스타드 드 랭스 (1941~1943), 아라고 스포르트 오를레앙 (1943~1948), SM 캉 (1949~1952)
- 쥘리앙 다리 - CO 루베투르쿠앙 (1949~1952), 몽펠리에 HSC (1953~1954)
- 즐라트코 차이코브스키 - 하포엘 하이파 FC (1959~1960)
- 지노 콜라우시 - AC 티에네 (1948~1949), 테르나나 칼초 (1949~1950), SPD 타로스 (1950~1951), 올비아 칼초 (1951~1952)
- 지미 던 - 샴록 로버스 FC (1937~1942)
- 차초 -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41~1942)
- 체스트미르 비츠팔레크 - 파르마 AS (1956~1958)
- 카를 라판 - 세르베트 FC (1931~1935)
- 카밀로 예루살렘 - FC 그렌첸 (1951~1953)
- 케니 달글리시 - 리버풀 FC (1985~1990)
- 케빈 놀란 - 레이턴 오리엔트 (2016), 노츠 카운티 FC (2017~2018)
- 코라니 러요시 - 로손치 AFC (1941~1943)
- 코후트 빌모시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38~1939), 님 올랭피크 (1939~1940), FC 앙티브(1945~1946)
- 콘 마틴 - 던도크 FC (1959~1960)
- 콘라트 하이트캄프 - FC 바이에른 뮌헨 (1943~1945)
- 클라우지우 - SC 코린치안스 (1948, 1954, 1956)
- 테드 디치번 - 롬포드 FC (1959~1962)
- 토니 카르녤리 - FC 뮐부르크 (1924~1925)
- 토르스텐 린드베리 - IFK 노르셰핑 (1953)
- 티트코시 팔 - 키슈페슈티 AC (1941~1942, 1942~1943)
- 팅 - 올라리아(1947), 보타포구 FC (1947~1949), 아틀레티코 후니오르 (1950~1951)
- 펠리체 보렐 - 유벤투스 FC (1942~1946), 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 (1946~1948), SSC 나폴리 (1948~1949)
- 파울 지엘린스키 - SV 유니온 함본 (1946~1948)
- 페르난두 카브리타 - 포르티모넨스 SC (1959~1960)
- 페르낭 자카르 - FC 바젤 (1937~1939), FC 로카르노 (1939~1943), 세르베트 FC (1943~1945)
- 프란시스코 몰리나 - 코킴보 우니도 (1963~1964)
- 플라비우 코스타 - CR 플라멩구 (1934~1936)
- 피에로 파시나티 - US 크레모네세 (1946~1947)
- 피에트로 라바 - 노바라 칼초 (1951~1952)
- 피터 리드 - 맨체스터 시티 FC (1990~1993)
- 하오하이둥 - 다롄 스더 (2004)
- 헨뤼 요한센 - 볼레렝아 포트발 (1944)
- 호르헤 사르미엔토 - 알리안사 리마 (1935~1936)
- 혼다 케이스케 - 단 이쪽은 프로선수 생활과 캄보디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겸한 것이지, 자신이 소속된 팀의 감독과 선수를 모두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 후안 노게스 - FC 바르셀로나 (1942)
- 훌리오 리보나티 - 리미니 칼초(1937~1938)
3.3. 기타 종목
- 빌 러셀 - 보스턴 셀틱스 (1966~1969)[19]
- 닉 키리오스 - 테니스 선수. 코치가 없으며 본인이 본인의 코치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 레니 윌킨스 - 시애틀 슈퍼소닉스 (1970-1972),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1974-1975)
- 임요환 - SK텔레콤 T1 (스타크래프트 2, 2012~2013)
- 송병구[20] - 삼성 갤럭시 칸 (스타크래프트 2, 2014~2016)
- 류시원 - 팀 106 레이싱팀 감독(2009 ~ )
- 강광배 -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봅슬레이 프론트맨 겸 감독(2010)
- 이형섭 - FXO.KR (스타크래프트 2, 2012 ~ 2013)
- 박상익 - oGs (스타크래프트 2)
- 강근철 - PROPARTY (발로란트, 2020.09~11)
- 김의수 - 제일제당 레이싱 (슈퍼레이스, 2016~2018, 2020~2020.09)
- 고바야시 카무이 - 토요타 가주 레이싱 (WEC, 2022 ~ )
- 김유빈 - FINALE e-sports (카트라이더: 드리프트, 2023.09~12)
4. 실존하는 선수 겸 코치
4.1. 야구
- 임신근 - 삼성 라이온즈 (1982)
1977년을 끝으로 은퇴했으나 고향 출신 선배 야구인이자 대구·경북 야구의 대부로 꼽히는 서영무 감독의 권유로 5년 만에 현역으로 돌아와서 첫 시즌만 선수 겸 코치로 뛰고 다시 은퇴했다. 정확히는 삼성에서 해고됐다. 이후 1985년 한일은행 야구단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응용 감독의 휘하에서 해태 투수코치 생활을 하게 된다. - 우용득 - 삼성 라이온즈 (1982~1983)
1981년 불과 31세의 나이로 현역 생활을 접고 한일은행 코치로 지냈으나 현역 선수로서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부동의 주전 포수 이만수와 백업 포수 박정환이 이미 삼성의 안방을 차지한 상황에서 재일교포 출신 포수 송일수까지 등장하자 현역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완전 은퇴해서 고향팀 삼성의 코치를 맡는다. - 백인천 - 삼미 슈퍼스타즈 (1983~1984)
KBO 리그 원년 MBC 청룡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면서 0.412라는 꿈의 타율을 기록했으나 일본에서 쌓은 명성에 비해 감독으로서의 원년 성적은 그저 그랬고 1983년 시즌 초 출발도 좋지 못했다. 결국 본인의 요청으로 감독 지휘봉을 내려놓게 됐는데 이후 삼미 구단의 요청으로 선수 겸 타격코치로 뛰게 됐으나 얼마 못 가서 조용히 은퇴하게 된다. 사실 MBC 감독에서 물러난 것이나 삼미 플레잉 코치에서 물러난 것도 원인은 개인의 간통 사건 때문이었다. - 김재박 - MBC 청룡-LG 트윈스 (1987~1991), 태평양 돌핀스 (1992)
1982년 개구리 번트를 선보이며 한국야구의 역사상 첫 세계 제패를 이끌었을 때도 이미 20대 후반이었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30대에 접어들었다. 결국 MBC 구단 측 제안으로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게 됐는데 후배들보다 압도적인 기량을 뽐내면서 무려 35세 시즌이었던 1989년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받았다. LG 측의 무상 트레이드 이후 태평양에서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며 은퇴 후 수석코치를 역임한 뒤 현대 유니콘스 초대 감독이 된다. - 김봉연 - 해태 타이거즈 (1988)
원년 데뷔 당시 이미 20대 중반에 접어들었으나 경력으로 치면 바로 아래 언급하는 후배 김준환과 동기였다. 어쨌든 1980년대 중반부터 나이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눈에 띄게 됐고 김응용 감독의 권유로 플레잉 코치로 생활하게 된다. 결국 1988년 5개의 홈런을 터뜨린 것을 끝으로 현역 선수로서의 미련을 버리고 해태 타격코치로 전업하게 된다. - 김준환 - 해태 타이거즈 (1988~1989)
1988년 군산상고 동기생인 김봉연이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자 본인도 플레잉 코치로 함께 뛰게 된다. 다만 플레잉 코치로 뛰던 동안에도 전성기 시절처럼 한 시즌에 300타석 이상을 소화했고 100개에 육박하는 안타를 뽑아낼 정도로 안정적 실력을 뽐냈다. 1990년 고향 전북을 연고로 하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하자 이 팀에서도 플레잉 코치로 뛰려는 생각이 있었으나 그냥 코치로만 활동하게 된다. - 김용희 - 롯데 자이언츠 (1989)
동년배인 김봉연, 김준환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중반 이후가 됐을 때는 주전에서 살짝 거리가 있는 선수가 됐고 특히 고질적 지병이었던 추간판 탈출증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된다. 결국 1989년 딱 한 해만 플레잉 코치로 뛰었으나 안타 1개만 기록하고 정들었던 롯데 유니폼을 벗게 된다. 이후 만 38세라는 매우 젊은 나이에 롯데 감독으로 활동하게 된다.[21] - 이상군 - 한화 이글스 (1999~2001)
1996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유니폼을 벗은 뒤 1998년부터 한화 투수코치로 활동했으나 선수 본인이 현역으로서의 미련이 강했고 마침 당시 한화의 투수층이 워낙 얕았던 탓에 현역 투수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1999년부터 두 시즌 반 동안 뛰면서 감격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경험하고 개인의 영예인 통산 100승 고지도 밟게 된다. 다만 은퇴 후 지도자로서의 평가는 꽤 나쁘다. - 김태형 - 두산 베어스 (2001)
2000년 팀의 주장으로서 후배들을 다독이는 리더 역할을 했고 2001년 플레잉 코치 제안을 수락해서 선수와 코치 생활을 병행했으나 그 해 선수로서의 기록은 6경기 출장이 전부였다. 마침 팀에 홍성흔이라는 주전 포수가 있었기에 미련 없이 현역에서 은퇴할 수 있었고 이후 두산이 '포수 사관학교'로 이름값을 다질 수 있게 한 명코치로 활동했으며 2015년부터 2022년까지 두산 감독으로 활동하는 동안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쓰게 된다. - 이호성 - KIA 타이거즈 (2001)
30대에 접어들면서 에이징 커브가 급격히 온 탓에 당시 팀을 지휘하던 김성한 감독의 지시로 플레잉 코치가 됐다. 그러나 2001년 시즌 중 선수로 뛴 기록은 거의 없으며 지도자로서 활동한 기록도 거의 없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회장을 맡은 탓에 구단과의 관계도 썩 좋지 못했고 쓸쓸하게 은퇴하고 만다. 이후 성공한 사업가로서 잘 나가는가 했으나 사업 실패 후 살인을 저지르고 본인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 최해식 - KIA 타이거즈 (2001)
동기였던 이호성이 2001년 시즌 중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게 되자 최해식도 거의 당연한 듯이 플레잉 코치로 뛰게 됐다. 그러나 플레잉 코치로서 현역 선수 활동을 한 기록은 없었다. 1990년대 중후반 거의 기계처럼 굴려지다시피 할 정도로 혹사를 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묵묵히 덕아웃에서 후배 김상훈 조련에 힘을 썼고 조용히 은퇴했다. 은퇴 후 KIA와 화순고 야구부 코치로 활동했고 이후에는 요식업에 뛰어들어 매우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 지연규 - 한화 이글스 (2005~2006)
30대 중반의 나이에서 은퇴 고민을 하던 찰나에 플레잉 코치로 보직이 변경됐는데 하필 김인식 감독이 적극 중용하면서 말년의 기록이 빛난 케이스다. 플레잉 코치 첫 해였던 2005년 무려 20세이브를 올리며 한화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고 현역 마지막 해였던 2006년에는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인생투를 펼치며 팬들에게 진한 감동을 심어줬다. 이후 은퇴를 결심하고 지도자로 전업한다. - 김동수 - 서울 히어로즈 (2009)
원래는 2008년을 끝으로 은퇴를 하고 친정팀 LG 트윈스의 배터리코치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김시진 히어로즈 감독과의 의리를 지키고자 팀에 남았고 한 시즌 더 선수로 뛰면서 지도자 생활을 병행하기로 했다. 다만 이미 노쇠화가 뚜렷한 시점이었기에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고 결국 2009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유니폼을 벗었다. - 정민철 - 한화 이글스 (2009)
만 37세를 맞았던 현역 마지막 시즌에 에이징 커브가 확실히 찾아왔다. 마침 구단에서도 정민철에 대한 은퇴를 서서히 준비하고 있었고 본격적인 리빌딩을 앞두고 플레잉 코치 제안을 하게 된다. 구단의 제안에 큰 갈등 없이 순순히 응한 정민철은 플레잉 코치가 됐고 그 해 9월 구단 2호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고 은퇴했다. - 김원형 - SK 와이번스 (2011)
1990년대 돌격대의 에이스였고 2000년대에는 비룡군단 투수진의 맏형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2010년대에 접어든 그 시점 팀에는 젊고 유능한 투수들이 즐비했고 나이 든 김원형이 낄 자리는 없었다. 특히 그의 전매특허 구종이었던 커브를 던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2011년 한 해동안 플레잉 코치로서 1군과 동행하다가 은퇴했다. - 류택현 - LG 트윈스 (2012)
2010년을 끝으로 소속팀 LG에서 방출됐고 LG에서도 프런트로 일할 것을 권유했으나 불굴의 의지로 재활에 나섰고 결국 2012년 초 플레잉 코치로 LG에 재입단하게 됐다.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으나 30경기에 등판하며 KBO 리그 투수 개인 통산 최다 등판 기록을 썼고 3승 1패 3홀드의 나름대로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듬해부터는 코치 직함을 떼고 일반 선수로 복귀해서 두 시즌을 더 뛰고 900경기 등판의 기록을 쓴 뒤 은퇴했다. - 허웅 - SK 와이번스 (2017)
1군에서는 존재감이 거의 없는 선수였고 주로 2군에서 뛰었던 선수였는데 2군 플레잉 코치라는 흔치 않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2군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며 본인이 출전한 경기는 달랑 1경기 뿐이다. 플레잉 코치로 뛰는 동안 SK 2군의 배터리코치 역할을 했는데 이 시즌 이후 팀에서 재계약 불가 판정을 받고 은퇴했다. 현재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 나경민 - 롯데 자이언츠 (2020)
크고 작은 부상으로 인해 국내 복귀 5년차가 된 2020년 초 플레잉 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 타격과 수비는 불가능하지만 발은 워낙 빠르기에 대주자라도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육성선수로 등록해 플레잉 코치 역할을 하게 됐지만 실제로 경기에 뛴 기록은 없다. 결국 2020년 5월에 현역 생활을 아예 접기로 하고 2군 주루코치로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 송승준 - 롯데 자이언츠 (2021)
노쇠화가 극심해지면서 2019년부터 레귤러 선발 투수로는 더 이상 활용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2020년에는 1군 최저 연봉 5000만원을 받고 뛰었다. 선수 본인은 언제든 은퇴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구단 측에서 투수진의 중심을 잡아줄 맏형이 필요하다면서 현역 선수 명단에 등록했다. 결국 2021년 한 해동안 선수와 코치는 물론 프런트 업무도 일부 배우는 1인 3역을 하기로 했다. 다만 금지 약물 파동 문제로 1군 마운드에는 오르지 못했고 조용히 은퇴했다. - 김지용 - 두산 베어스 (2023)
2022년 옆집 팀 두산으로 이적한 이후 2군에서만 좋은 성적을 냈고 1군에 올라오면 연달아 얻어터졌다. 결국 2023년에도 비슷한 양상이었고 팀에서 김지용에게 선수 겸 2군 불펜코치 역할을 제안하게 됐다. 김지용이 이 제안을 수락하면서 플레잉 코치가 됐으나 코치 역할을 겸하게 된 이후부터는 등판 기록이 전혀 없다. 시즌 후 조용히 은퇴했고 두산 투수코치로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 정태승 - 롯데 자이언츠 (2023)
1군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하고 롯데에서 은퇴했으나 쉬면서 몸 상태도 좋아지고 구속이 올라가면서 2023년 롯데에 플레잉 코치로 재등록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당시 롯데의 좌완 불펜 상황이 좋지 못했다지만 정태승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은 없어서 1군의 부름을 받지 못했고 결국 몇 달 뒤에 프로 선수 생활을 포기하고 코치직에만 전념하게 됐다. 다만 현역 선수로서의 미련을 아주 버리지는 못한 모양인지 2023년부터 독립리그에서 뛰고 있다. - 정우람 - 한화 이글스 (2024)
KBO 리그 최초의 투수 개인 통산 1000경기 등판의 대기록을 쓴 후 플레잉 코치로 신분이 달라졌다. 시즌 중에는 2군에서 후배들의 훈련을 도와주면서 코치 경험을 쌓기 시작했으나 1군 등판 기회는 좀처럼 잡지 못했다. 결국 그해 9월 15일 현역 은퇴 의사를 밝혔고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의 역사상 마지막 홈경기이자 본인의 은퇴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하며 현역 커리어를 마감했다. - 이용규 - 키움 히어로즈 (2025~)
구단 측이 플레잉 코치로의 신분 전환을 제안했고 이용규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플레잉 코치가 됐다. 팀의 외야수들이 줄줄이 부진했거나 다치는 바람에 현역 선수로서의 기회를 받았으나 의미 있는 성적은 내지 못했다. 다만 선수단의 맏형으로서 일찌감치 최하위에 처지면서 의욕을 잃은 후배들을 일깨우는 일침 장면("쳐맞고라도 나가!" 발언)은 리더로서의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김성현 - SSG 랜더스 (2026~)
2020년대 초까지는 팀의 센터라인을 책임지는 내야수 핵심 요원이었으나 에이징 커브를 무시할 수 없었고, 마침 박성한과 안상현, 정준재 등의 젊은 내야수 유망주들이 확실히 기회를 받고 성장하게 되면서 팀에서 현역 선수로서의 가치는 급격히 떨어졌다. 그러나 2006년부터 줄곧 팀을 지켜온 원 클럽 플레이어로서 팀에 대한 충성도와 후배들로부터 받은 두터운 리더십을 인정받아 비FA 계약 기간의 마지막 해인 2026년을 플레잉 코치 신분으로 뛰게 됐다. - 이재원 - 한화 이글스 (2026~)
2023년 시즌 후 고향팀 SSG에서 방출 요청 후 새롭게 한화에 둥지를 틀었고 최재훈의 뒤를 잇는 백업포수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특히 멘탈 측면에서 불안함을 여실히 드러낸 마무리 투수 김서현을 다독이고 후배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는 모습이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됐으며 19년 만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에 2026년 플레잉 코치 신분으로 뛰게 됐다.
5. 창작물에서의 선수 겸 감독
- 슬램덩크 - 김수겸 : 창작물에서 가장 유명한 케이스. 로컬라이징 이름부터 선수 겸 감독에서 따왔다고 한다. 다만, 프로리그나 대학리그가 아닌 중고등학교 농구 스포츠 대회에서는 고문 교사가 '일반 교사'일 뿐이기 때문에 선수 겸 감독이 매우 흔할 수 있다. 작가가 그린 완결편 이후 후일담에서 수염을 기르는 모습을 보여줘 이후엔 좀 더 지도자 같은 비쥬얼을 가지게 되었다.
- 아이실드 21 - 히루마 요이치 : 감독, 코치, 트레이너를 혼자 다 하는 괴물이다.
- 쿠로코의 농구 - 하나미야 마코토
- 테니스의 왕자 - 타치바나 킷페이
- ONE OUTS - 토쿠치 토아 : 후반부부터,이쪽은 선수겸 구단주에 가깝지만 감독대신 감독역할도 한다.
- 전직고수 - 엽수
- 내일은 실험왕 - 에릭 우드
- 퍼펙트 게임(웹툰)
- 김현수 : 블루 엔젤스의 감독이지만, 사람이 부족하면 선수로 뛰기도 한다.
- 태달무 : 킹덤의 감독 겸 선수. 타격 랭킹권에 위치할 정도로 실력이 상당하다.
- 최강야구 - 심수창 : 이전 몬스터즈 체제에서는 선수였다가 브레이커스에서는 플레잉 코치로 출연한다.
- 최강야구(스튜디오 C1)/불꽃야구
- 이승엽 : 2022 시즌 원래는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부상 등으로 선수가 부족할때나 직관경기에서 대타로 나왔으며, 성남 맥파이스 전에서는 아예 선발 지명타자로 출장하기도 했다.
- 이택근 : 2023 시즌 부상과 수술로 인해 경기 출장이 불가능해지자 자발적으로 전력분석코치 역할로 플레잉 코치직을 수행했다. 최종전인 대학리그 올스타전에서 대수비로 출장하며 복귀의 여지를 알렸고, 이후 2024 시즌 초반까지 맡다가 회복한 이후에는 다시 주전 선수로 출전한다. 불꽃야구로 개편 된 이후에는 선수로 더 집중하고 있지만 경기 전 전력분석 시간에는 여전히 본인이 전력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한다.
- 카 시리즈 - 라이트닝 맥퀸
러브라이브 선샤인 - 오하라 마리[22]
[1] 보통은 수석코치나 다른 코치에게 감독 대행을 맡긴다. 허나 그러지 못하는 상황도 드물게 발생한다.[2] 특히, 엔트리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없어서 1907년부터 1920년까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이었던 휴이 제닝스의 경우, 정식 선수라 보기 어려움에도 대타로 9타석, 대수비로 1경기를 출장하기도 하였다.[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마지막 우승이다. 2016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 찬스를 잡았으나 100년 넘게 우승을 못했던 시카고 컵스가 염소의 저주를 깨고 우승하는 데 기여하고 말았다.[4] 이 공적으로 그는 영구결번까지 되었다. 더욱이 선수로서도 뛰어나서 리그 MVP까지 된, 우승 감독 겸 MVP라는 영원히 다시 나올 수 없는 기록을 세웠다.[5] 선수로서는 4할 타율을 올리기는 했지만, 당시 감독 성적은 좋았다고 보기엔 어렵다.[6] 그마저도 말년엔 구단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 롯데 오리온즈, 세이부 라이온즈를 떠돌며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떠난 호크스는 20자리 패스워드행[7] 다만 KBO 리그는 1980년대에도 이런 케이스가 있었다. 베테랑 선수였던 박철순이나 김봉연이 말년을 이렇게 보냈고, 1990년대에도 이런 경우가 제법 있어서 1999년 한화 이글스는 이상군 투수코치(선수 은퇴 후 플레잉 코치로 선수 복귀)가 직접 불펜에서 몸 풀다가 등판한 경우도 있었다.[8] 지도자는 License이므로 자격이 아니라 면허다.[9]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10] 현재까지 KBO 리그 최초이자 최후의 선수 겸 감독. 심지어 백인천은 프로야구 원년에 타율 .412를 기록해 현재까지 KBO 리그 역사상 유일한 단일시즌 4할 타자로 남아있다.[11] 메이저리그 최후의 선수 겸 감독.[12] 이후 전임 감독으로 계약했다.[13] 2023년까지 선수 겸 감독을 역임하고 공식적으로 2024년부터 대표로 활동하고 있지만, 사실상 본인이 창단에 크게 관여했고 2016년때부터 대표였다고 해도 무방하다.[14] 플레잉 코치 신분으로 있다가 2013-14시즌 막바지에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이 경질되면서 선수 겸 감독 대행으로 4경기를 지휘했다. 정식 감독은 아니지만 짧게나마 선수 겸 감독에 부합하는 역할을 했으므로 기재. 실제로 감독 대행으로 팀을 지휘하면서 본인이 직접 교체출전하기도 했다.[15] 2019-20 시즌에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시즌 초반에 팀이 부진하자 수석코치 사이먼 데이비스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전업 선수로 돌아갔다. 이후 데이비스 코치가 팀을 지휘하다가 프랑키 페르카우테런이 임시 감독으로 부임해 잔여 시즌을 이끌었고, 2020-21 시즌부터는 콩파니가 선수 은퇴 후 전업 감독으로 재부임했다.[16] 1990년에는 선수로만/ 91년부터 93년까지 선수 겸 감독으로, 94년부턴 선수 은퇴 이후 감독으로 활약했다.[17] 플레잉 코치 겸 감독대행. K리그 사상 최초.[18] 이후 2021년 1월 15일부터 선수 은퇴후 전임 감독 취임[19] 1968, 1969년에 선수 겸 감독으로 우승한 후 은퇴했다. 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이자 최초의 흑인 감독 우승자이기도 한데, 첫 시즌인 66-67시즌에만 당시 최고전력을 자랑하던 필라델피아와 라이벌 윌트 체임벌린에게 패했을 뿐, 그 다음해에는 같은 식서스에게 1승3패로 뒤지다가 역전해서 업셋, 그 다음해에도 압도적인 전력의 레이커스 (체임벌린이 여기로 이적했다)를 상대로 7차전 만에 원정에서 승리, 역사상 최초로 파이널 7차전에서 원정팀이 승리한 케이스를 만들었다. 여러모로 극적이었던 시절. 69년에 우승 후 러셀은 이전 우승과는 비교도 안된다며 눈물을 흘렸다.[20] 공식 직함은 코치. 그러니까 플레잉 코치(선수 겸 코치)였다. 하지만 삼성 칸은 김가을 감독이 사임한 이후 감독직을 공석으로 두었고, 코치가 감독 역할을 수행했다. 김가을 감독 이후로는 오상택 코치가 감독 역할을 맡다가, 2014년 11월에 오상택 코치가 이탈한 뒤로는 송병구가 플레잉 코치로 전환되며 감독 역할까지 수행했다.[21] 김용희가 롯데 감독으로서 맞이한 1995년 한국시리즈 당시 상대팀 OB 베어스에는 동기생이자 실제로는 1살 형님이었던 박철순이 현역 선수로 뛰고 있었다.[22] 전작인 러브라이브의 미나미 코토리는 이사장의 딸이라는 나름 현실적인 설정이었으나, 본작의 마리는 이사장 겸 학생이라는 흠좀무한 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