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4 16:30:18

네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Neco-Sel-Brasileira.jpg
이름 마누에우 누니스
Manoel Nunes
생년월일 1895년 5월 5일
사망년월일 1977년 5월 31일
국적 브라질
출신지 상파울루
포지션 중앙 공격수, 미드필더
신체 불명
등번호 -[1]
소속 구단 SC 코린치안스 (1913-1915)
A.A. 맥켄지 대학교 (1915)
SC 코린치안스 (1916-1930)
국가대표 15경기 / 8골 (1917-1922)
감독 SC 코린치안스 (1920)
SC 코린치안스 (1927)
SC 코린치안스 (1937-1938)

1. 개요2. 생애
2.1. 클럽2.2. 국가대표2.3. 은퇴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4. 수상
4.1. 클럽4.2. 국가대표4.3. 개인4.4. 감독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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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인.

2. 생애

2.1. 클럽

SC 코린치안스 역사상 가장 오래 뛴 선수이며 히벨리누, 소크라치스 등과 함께 코린치안스 역사상 위대한 선수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의 끈질긴 집념에 어울리는 불같은 성질머리 또한 가지고 있었다. 맥켄지에서 뛸 때 전 소속팀이던 SC 코린치안스와의 경기에선 돈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SC 코린치안스의 도서관에 침입하기도 했으며, 심판을 때려서 18경기 출장정지라는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1915년엔 SC 코린치안스내의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공식게임을 거의 안 뛰기도 했다. 따라서 이 때 잠시 맥켄지 대학교 소속으로 뛴 것. 그리고 종종 선수 겸 감독으로 뛰기도 했다.

2.2. 국가대표

보통 1919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대회의 주인공으로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를 꼽는다. 그 이유로는 최종전에서 당대 남미 최강이던 우루과이를 침몰시킨 프리덴라이히의 결승골 때문이다. 그리고 이 활약 덕분에 프리덴라이히는 대회 MVP가 되었다.

그러나 최종전 이전에 네쿠가 만든 2골로 인해 2대2의 스코어를 만들어 최종전까지 끌고 간 것이며 최종전에서 2차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프리덴라이히의 골이 터졌다. 프리덴라이히의 별명인 El Tigre는 네쿠가 없었다면 불리지 못했을 별명. 또한 이 대회에서 네쿠는 4골을 기록하여 프리덴라이히와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2.3. 은퇴 이후

1930년 은퇴 이후 잠시 친정팀 코린치안스의 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이 동안에도 1년간 머물면서 한 차례 우승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훌륭한 기술과 끈질긴 집념을 보유했고 발이 빨랐다고 전해진다.

4. 수상

4.1. 클럽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 8회: 1914, 1916, 1922, 1923, 1924, 1928, 1929, 1930(SC 코린치안스)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준우승 1회: 1915(맥켄지 대학교)

4.2. 국가대표

4.3. 개인

4.4. 감독

5. 여담

  • 네쿠가 처음 커리어를 시작할 당시의 축구 선수들은 프로의 형태가 아니어서 투잡을 많이 뛰었다. 네쿠는 목수일을 했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 후 일을 빼먹었다고 잘렸다.
  • 1929년 팀의 정원에 동상이 세워졌는데 축구 선수로써 최초로 세워졌다고 한다. 당연히 현역이던 시절이었다.
  • 맥켄지에서 뛸 때 자신의 성씨인 누니스로 불리기를 원했는데 그 이유는 코린치안스에서 뛰지 않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안토니우 호키 시타다니, 코린치안스 전 이사는 2001년에 '네쿠, 첫 우상'이라는 네쿠의 평전을 출간했다.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