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시오 카사린의 감독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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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12대 |
이름 | 오라시오 카사린 가르실라소 (Horacio Casarín Garcilazo) |
생년월일 | 1918년 5월 25일 |
사망년월일 | 2005년 4월 10일 (향년 86세) |
국적 | 멕시코 |
출신지 | 멕시코 시티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73cm | 75kg |
소속팀 | 클루브 네카사 (1936-1942) 아틀란테 FC (1942-1948) FC 바르셀로나 (1948-1950) 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1950) 클루브 네카사 (1950-1951) CD 베라크루스 (1951) 아틀레티코 사파테펙 (1951-1953) 아틀란테 FC (1953-1955) 클루브 아메리카 (1955-1956) CF 몬테레이 (1956-1957) |
국가대표 | 4경기 1골 (1950-1956) |
감독 | 아틀레티코 사파테펙 (1951-1952) 멕시코 대표팀 (1953) 아틀레티코 사파테펙 (1978-1979) 테코스 UAG (1979) 아틀란테 FC (1981-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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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어린 시절
멕시코 시티에서 태어난 카사린은 1924년에 가족들과 미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캔자스시티를 거쳐 텍사스의 브라운스빌에서 5년을 거주하다 다시 멕시코 시티에 돌아왔다.멕시코 시티에 돌아온 카사린은 클루브 네카사의 유소년팀에 들어갔고 여기서 그는 헝가리인 코치 로트 지크프리트(Roth Siegfired)를 만났다. 로트는 친절하고 선수를 잘 파악하는 사람이라 카사린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로트는 카사린의 킥 능력을 보고 처음에는 카사린을 수비수로 키웠지만 공격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1936년에 클루브 네카사에서 데뷔한 카사린은 어렸을 때부터 좋은 기량을 보였다. 네카사 시절의 일화로 카사린은 1939년, 아스투리아스와의 경기에서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아스투리아스의 골문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스투리아스의 수비수들은 카사린에게 보복으로 무자비한 파울을 시전했다. 카사린은 무릎을 차였고 이로 인해 결국 전반 20분 만에 부상으로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지만 분노한 네카사 팬들의 소요가 일어났다. 그들은 아스투리아스 경기장에 불을 질러 목조 경기장의 일부가 불에 타버렸다. 카사린은 이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에 1년 넘게 공백을 가져야 했다.카사린을 향한 클루브 아메리카와 아틀란테 FC의 영입 경쟁이 펼쳐졌다. 아틀란테는 아메리카가 제시했던 조건에 은행에서 일을 하길 원하는 카사린의 요구조건을 들어줌으로써 승자는 아틀란테가 되었다. 1942년에 팀을 옮긴 카사린은 1944-45 시즌에 개막 후 8경기 연속골을 넣어 리그 기록을 세웠고 9경기 연속골을 넣는 등 구단의 기대를 제대로 충족시켰다. 그는 이 시즌에 24경기 29골의 상당히 좋은 득점 페이스를 기록했지만 리그 득점 3위에 만족해야 했다.
카사린은 1946-47 시즌에 8분 만에 해트 트릭[2]을 기록하기도 했고 결국 아틀란테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축구를 주제로 한 영화 베나시오의 아들에도 출연해 멕시코에서 더욱 인기를 얻었다. 이 영화는 당시 흥행에 성공했다고 한다.
1948년, 카사린은 멕시코 선수 최초로 FC 바르셀로나에 진출했지만 출전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계약 문제까지 겹쳐 그는 결국 바르셀로나에서 2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카사린은 멕시코로 돌아왔고 여러 클럽을 돌아다녔다.
1950-51 시즌에 카사린은 클루브 네카사에서 그의 커리어에 유일한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1951-52 시즌엔 아틀레티코 사파테펙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재직했다.
카사린은 1956년에 마지막 경기를 치렀고 1957년에 은퇴했다.
2.2.2. 국가대표
카사린은 멕시코 대표팀에서 1950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그는 두 번째 경기였던 유고슬라비아전부터 알폰소 몬테마요르를 대신해 주장이 되었지만 멕시코는 3전 전패로 탈락했다.카사린은 1954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 멕시코 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2.3. 이후
카사린은 감독으로도 여러 팀을 지휘했다. 그는 1977년 U-20 월드컵에서 코치로 멕시코 U-20 대표팀에 있었고 멕시코는 결승에서 소련에 승부차기 끝에 패해 준우승을 거뒀다.2005년, 카사린은 치매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카사린은 1940년대와 1950년대 멕시코 축구계 최고의 필드 플레이어로 평가받는다.4. 사생활
카사린은 1938년에 당시 14세였던 마리아 엘레나 킹(María Elena King)과 만났다. 킹은 클루브 네카사의 팬이었고 네카사의 훈련 세션에 구경을 왔다가 카사린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1941년 12월 10일에 결혼했고 한 명의 자녀와 함께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2005년 2월 21일까지 해로했다.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 프리메라 푸에르사 / 리가 MX 우승 3회: 1936-37, 1937-38(이상 클루브 네카사), 1946-47(아틀란테 FC)
- 프리메라 푸에르사 / 리가 MX 준우승 3회: 1939-40(클루브 네카사), 1945-45(아틀란테 FC), 1952-53(아틀레티코 사파테펙)
- 코파 MX 준우승 4회: 1939-40(클루브 네카사), 1942-43, 1943-44, 1945-46(이상 아틀란테 F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