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2:22:45

빌리발트 크레스

독일의 축구감독
파일:Willibald Kreß2.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빌리발트 크레스
Willibald Kreß
출생 1906년 11월 13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헤센나사우프랑크푸르트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사망 1989년 1월 27일 (향년 82세)
독일 헤센기센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신체 183cm / 75kg
직업 축구선수(골키퍼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로트바이스 프랑크푸르트 (1922~1932)
FC 뮐루즈 (1932~1933)
드레스드너 SC (1933~1944)
FSV 프랑크푸르트 (1945~1949)
감독 FSV 프랑크푸르트 (1947~1949)
FSV 프랑크푸르트 (1952~1956)
보르마티아 보름스 (1957~1959)
부퍼탈 SV (1959~1961)
국가대표 16경기(독일 / 1929~1934)

1. 생애
1.1. 선수 생활
1.1.1. 클럽
1.1.1.1. 로트바이스 프랑크푸르트1.1.1.2. FC 뮐루즈1.1.1.3. 드레스드너 SC1.1.1.4. FSV 프랑크푸르트
1.1.2. 국가대표
1.2. 감독 생활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3. 뒷이야기4. 수상
4.1. 클럽4.2. 국가대표

1. 생애[1]

1.1. 선수 생활

1.1.1. 클럽

1.1.1.1. 로트바이스 프랑크푸르트
어린 시절 문제아 수용 시설에까지 다녀왔을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냈던 크레스는 축구와 인연을 맺으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데뷔할 때 크레스는 인사이드 포워드였고 16살에 1군팀에 데뷔하였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로트바이스 프랑크푸르트는 지역에서 손꼽히는 강팀 중 하나였다. 그리고 1926년에 크레스는 골키퍼로 포지션을 변경하였다.
1.1.1.2. FC 뮐루즈
1932년 크레스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프랑스의 FC 뮐루즈로 팀을 옮겼다. 하지만 프로화가 되던 프랑스 축구계와는 다르게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던 독일 축구 연맹은 '전문 도박꾼'이라는 이유로 1년간 크레스의 선수 자격을 정지시켜버렸고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 축구 연맹이 이 결정에 동조하는 바람에 크레스는 알자스에서 친선 경기 하나밖에 뛰지 못하였다. 크레스의 회고에 의하면 로트바이스의 동료들에게는 돈 때문에 파업을 하고 클럽을 버렸다는 식으로 매도당했고 설상가상으로 디프테리아까지 앓게 되며 출전을 거의 못한데다 1000제국 마르크의 벌금까지 내야했다고 한다.

1년 후 독일로 다시 돌아가게 되자 크레스는 대표팀 동료 리하르트 호프만의 설득으로 원소속팀 대신 작센주의 드레스드너 SC로 이적하게 된다.
1.1.1.3. 드레스드너 SC
당시 드레스덴에는 헬무트 쇤 같은 뛰어난 선수들이 있었고 가울리가[2] 작센에서 6회나 우승한 작센 지방의 강팀이 되었다.

크레스가 입단한 첫 시즌부터 드레스드너는 골득실차로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조별예선에서 1. FC 뉘른베르크에 반대로 골득실에 2위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드레스드너는 그 이후에 독일 축구 챔피언십과 참메르포칼에서 각각 2회의 우승을 차지하며 독일 전국에서 통할말한 전력임을 증명하였고 크레스는 이 때마다 항상 뒤에서 골문을 든든히 지켰다.

2차 대전때 크레스는 V로켓 보안 부대에서 복무했다.
1.1.1.4. FSV 프랑크푸르트
2차 대전이 끝나고 크레스는 잠시 감옥살이를 했고, 7월에 고향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38살의 노장 골키퍼는 FSV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여 1947년에는 2경기 연속 페널티 킥 선방을 보여주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4시즌 동안 93경기에 더 출전했다. 크레스의 마지막 경기는 1949년 5월의 VfB 슈투트가르트전이었고 이 경기를 끝으로 27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1.1.2. 국가대표

크레스는 1929년 처음으로 대표팀에 선발되어 그의 우상이던 하인리히 슈툴파우트를 만나게 되었다. 크레스가 자신의 이름을 독일팬들에게 알리게 된 계기는 1930년 5월의 잉글랜드와의 시합이었다. 시합은 3대3으로 비겼지만 크레스의 플레이는 잉글랜드와 독일 팬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930년 슈툴파우트의 대표팀 은퇴 이후 독일 대표팀의 골키퍼진의 주전 경쟁 구도는 처음에는 크레스, 야코프간의 경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크레스의 프랑스 이적으로 인한 선수 자격 정지로 인해 부흐로가 새로 경쟁에 끼어들면서 다른 경쟁 체제가 만들어졌고, 크레스가 1934년 1월에 다시 대표팀에 복귀하면서 3파전으로 바뀌었다.

대표팀 감독 네르츠는 결국 월드컵에 3명의 골키퍼를 모두 데려갔다. 처음 네르츠의 선택은 크레스였고 그는 1라운드, 8강전에서 모두 독일의 골문을 지켰다. 하지만 준결승전에서 크레스는 엄청난 부진을 보이며 올드르지흐 네예들리에게 해트 트릭을 내준 끝에 1대3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결국 3,4위전에서 야코프로 골키퍼가 교체되었다.

크레스는 이후 드레스드너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1.2. 감독 생활

1947년부터 크레스는 FSV 프랑크푸르트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에 선수에서 은퇴한 후로는 대표팀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의 휘하에서 축구 아카데미와 헤센 주 축구 연맹에서 강사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52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더비 매치에서 패배하고 잘린 율리우스 투르나우어의 후임으로 4년 더 FSV를 지휘했으며 그 이후에는 보르마티아 보름스부퍼탈 SV에서 감독을 맡았다. 부퍼탈 감독 생활을 마무리 한 이후에는 주로 아마추어팀 감독과 축구 강사직을 수행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볼에 대한 감각이 좋은 골키퍼. 우아한 플레이 스타일로 schöne Willibald(아름다운 빌리발트)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팬들에게 사랑받았다.

크레스는 리하르트 호프만, 헬무트 쇤 등과 함께 드레스드너를 대표하는 레전드로 대접받고 있으며 유럽 무대로 범위를 넓혀도 스페인의 사모라, 이탈리아의 콤비, 체코슬로바키아의 플라니치카, 오스트리아의 하이덴 등과 더불어 당대 유럽 최고급 골키퍼로 이름을 남겼다.
그는 골라인에만 붙어서 플레이하지 않았고 말 그대로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관리자였다. 위기 상황에서 실수가 적었고 결정적인 개입으로 상황을 끊어냈다. 빌리발트는 자신의 역할을 필드의 열한 번째 선수로 활용했다.
헬무트 쇤
내가 크레스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대표팀에 빨리 자리를 잡는게 쉽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우아한 게임, 뛰어난 위치 선정, 필드 플레이어들을 이끄는 능력은 자극을 주었다.
한스 야코프

3. 뒷이야기

4. 수상

4.1. 클럽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2회: 1943, 1944(드레스드너 SC)
  • 참메르포칼 우승 2회: 1940, 1941(드레스드너 SC)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40(드레스드너 SC)
  • 가울리가 작센 우승 6회: 1934, 1939, 1940, 1941, 1943, 1944(드레스드너 SC)

4.2. 국가대표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나치 독일 시기 최상위 지역리그. 여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진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