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3:46:37

듀크 스나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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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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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크 스나이더
헌액 연도 1980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6.49% (11회)

듀크 스나이더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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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브루클린 다저스 엠블럼(1945~1957).png파일: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엠블럼(1958~1967).png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1955 1959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50 1951 1952 1953
1954 1955 1956 1963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5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홈런왕
윌리 메이스
(뉴욕 자이언츠)
듀크 스나이더
(브루클린 다저스)
행크 애런
(밀워키 브레이브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5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타점왕
테드 클러주스키
(신시내티 레즈)
듀크 스나이더
(브루클린 다저스)
스탠 뮤지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5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안타왕
스탠 뮤지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듀크 스나이더
(브루클린 다저스)
리치 애시번
(필라델피아 필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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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A9C><colcolor=#FFFFFF>
파일:dukesnider.jpg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No. 4
듀크 스나이더
Duke Snider
본명 에드윈 도널드 스나이더
Edwin Donald Snider
출생 1926년 9월 19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사망 2011년 2월 27일 (향년 84세)
캘리포니아 주 에스콘디도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 81kg
포지션 중견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43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BRO)
소속팀 브루클린-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47~1962)
뉴욕 메츠 (196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64)

1. 개요2. 선수 생활
2.1. 프로 입단 이전2.2. 다저스 시절2.3. 뉴욕 메츠 시절2.4.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3. 말년4. 연도별 성적5. 기타6. 명예의 전당 입성
6.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다저스에서 1950년대를 대표했던 강타자이자, 1950년대 뉴욕의 외야를 삼분하던 중견수 중 한 명.[1] 은빛 여우(Silver fox), 플랫부시 공작(Duke of Flatbush)[2] 등의 별명으로 불리었다.

2. 선수 생활

2.1. 프로 입단 이전

1926년 로스앤젤레스[3]에서 와드 스나이더와 플로렌스 존슨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난 에드윈 도날드 스나이더는, 부모로부터 늘 자신감 있고 영리하게 살라는 뜻으로 불과 다섯 살 때부터 '듀크'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본래 오른손잡이었던 듀크 스나이더는 세미 프로 야구 선수였던 아버지로부터 우투수를 상대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끔 좌타 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신의 한수가 되어 훗날 듀크 스나이더는 우투수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4]

이후 콤프턴 고등학교로 진학한 듀크 스나이더는 야구 뿐만이 아니라 농구와 미식축구 등을 모조리 섭렵하며 주 내 최고의 유망주로 이름을 날렸고[5], 그런 그를 막 브루클린 다저스의 신임 단장으로 부임한 전설의 명단장, 브랜치 리키매의 눈으로 눈독을 들이다 1943년 정식으로 계약을 하게 된다. 당시 그의 계약금은 750달러였다. 만 16세의 어린 소년이 서부의 따뜻한 고향에서 차가운 동부의 대도시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2.2. 다저스 시절

1944년, 만 17세의 듀크 스나이더는 B리그[6]에서 자신보다 평균 6, 7세는 많은 선수들을 상대로 타율 .294 홈런 9개의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잠시 더블 A 맛까지 보게 된다. 이후 듀크 스나이더는 징집되어 해군에서 18개월 동안 복무를 하게 됨으로 1945년 시즌을 통으로 날리고, 전역 후 다시 더블 A에서 타율 .250 홈런 5개로 영점을 조정한다. 듀크 스나이더를 다저스로 데려온 브랜치 리키는 그의 재능이 뛰어나다 여겼기에 이듬해 1947년, 재키 로빈슨이 역사적인 데뷔를 한 이틀 후 정식으로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데뷔를 시켰다[7]. 하지만 아직 만 20세에 불과했던 듀크 스나이더는 47, 48시즌 통합 5홈런 .243의 형편없는 성적을 거두고 메이저리그보다는 트리플 A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그의 재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결국 1949시즌 듀크 스나이더는 에베츠 필드의 중견수 자리를 차지하며 23홈런 92타점 .292의 성적을 거둔다. 이미 앞선 2년 동안 ROY의 자격은 잃었고, 삼진 또한 리그 1위(92개)에 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크 스나이더의 성적은 불과 만 22세의 애송이치고는 대단히 훌륭한 것이었다.

하지만 1949년의 성적은, 앞으로 있을 10년의 대폭발을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다.

1950년, 다저스의 주전 중견수 자리를 완전히 굳힌 듀크 스나이더는 그 해 31홈런 107타점 .321 .379 .553을 시작으로 1950년대를 말 그대로 두들겨 팼는데, 그 10년 동안 그가 거둔 성적은 326홈런 1031타점 .308 .390 .569에 달한다. 홈런왕(1956시즌)과 타점왕(1955시즌)에 오른 시즌은 각각 1시즌에 불과했으나, 그는 꾸준한 성적을 거두었다. 홈런과 타점, 장타율은 1950년대 1위이며, 7시즌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5차례 월드시리즈로 팀을 이끌어[8] 그 가운데 2차례 우승을 거두었다. 아쉽게도 MVP는 1955시즌 2위가 가장 높은 성적이었으나 당시 MVP 로이 캄파넬라와는 투표 총점이 5점 차이에 불과했고[9], 모든 성적은 듀크 스나이더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대중들은 듀크 스나이더의 이름과, 다저스의 홈구장인 에베츠 필드가 위치한 뉴욕 브루클린 플랫부시 지역을 빗대 그를 플랫부시 공작이라 지칭할 정도였다.

당시 뉴욕에 위치했던 세 메이저리그 팀 뉴욕 양키스브루클린 다저스, 뉴욕 자이언츠는 각각 팀의 얼굴과 같은 중견수를 보유했는데 바로 미키 맨틀과 듀크 스나이더, 그리고 윌리 메이스였다. 이 셋은 모두 훗날 각 팀의 영구결번이 되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는데 커리어 전체를 보면 단연 윌리 메이스가 우세하고, 그 인기는 뉴욕의 아이콘 미키 맨틀이 가장 앞섰으나 1950년대의 폭발력만큼은 듀크 스나이더가 우세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인기는 대단하여 훗날 "Willie, Mickey and Duke"라는 합창 후렴이 나온 히트송까지 나왔다.

다만 멘탈적인 부분은 약한 편이라, 1951시즌 브루클린 다저스가 뉴욕 자이언츠에 1게임 차로 뒤져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실패하자[10] 구단주에게 직접 트레이드 요청을 하기도 하고[11], 너무 잔걱정이 많아 25살이 되기도 전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또다른 별명인 실버 폭스는 그런 그의 백발 때문에 생겨난 별명이었다.[12] 이 때문에 그의 팀동료들은 그를 울보 혹은 마마보이로 불렀고, 팀의 주장인 피 위 리즈는 그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듀크 스나이더의 하락세는 1958년, 팀이 브루클린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옮기며 시작되었다. 본래 브루클린에서 뛸 당시 홈구장인 에베츠 필드는 우측 펜스까지의 거리가 불과 90미터 밖에 되지 않았고, 펜스의 높이도 2.4미터의 낮은 높이였다. 좌타자에, 당겨치기 위주의 타격을 구사하던 듀크 스나이더를 위한 홈구장이었던 것. 그런데 1958년, 새롭게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이전한 다저스의 새로운 홈구장 메모리얼 콜로세움은 본래 풋볼을 위한 다목적 구장이었던 터라 우측 담장까지 거리가 무려 119미터에 달했다. 1962년 새롭게 다저스타디움이 개장되었으나, 다저스타디움 역시 역대급 투수 구장이다.

비록 로스앤젤레스가 듀크 스나이더에게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었고, 1959년에는 1955년에 이어 두 번째 월드시리즈 제패를 이루었으나 듀크 스나이더는 제2의 고향과 같았던 브루클린을 사랑했고 뉴욕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었다.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5시즌 동안 듀크 스나이더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연평균 100게임에 출장하여 15홈런 53타점 .292 .385 .523의, 이름값에 걸맞지 않는 성적을 남기고 만다.

2.3. 뉴욕 메츠 시절

1962시즌 라이벌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 정규 시즌 우승을 빼앗기고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린 듀크 스나이더는 결국 1963시즌을 앞두고 타 팀으로 팔려가게 되는데[13], 그곳은 바로 뉴욕 메츠.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뉴욕에서 야반도주 한 이후 새롭게 창단한 신생팀이었다. 메츠의 연고지는 과거 다저스와 자이언츠 연고였던 맨해튼-브루클린-퀸스였고, 뉴욕의 팬들은 돌아온 플랫부시 공작을 환영했다. 그러나 뉴욕 메츠가 사용하던 홈구장인 폴로 그라운드는 과거 듀크 스나이더의 홈구장이었던 에베츠 필드와 달리 악명 높은 투수 구장이었고, 결국 듀크 스나이더는 그 해 14홈런 45타점 .243 .345 .401에 그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팬들은 돌아온 영웅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그를 통산 여덟 번째 올스타로 뽑아주었고, 그에 보답하듯 듀크 스나이더는 메츠에서 통산 2000안타와 400홈런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듀크 스나이더는 또 다시 팔려갔다. 스스로가 우승 경쟁력이 있는 팀으로 옮겨 가고 싶다고 팀에 요청을 한 것이다. 그런데...

2.4.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1964시즌 개막을 하루 앞두고 듀크 스나이더가 팔려간 곳은 다름 아닌 다저스의 철천지 원수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뉴욕으로 돌아온지 1년만에 다시 서부로 되팔려간, 그것도 최악의 라이벌 구단으로 팔려간 듀크 스나이더는 완전히 의욕을 잃고, 그 해 4홈런 17타점 .210 .302 .323의 초라한 성적을 거둔 뒤 유니폼을 벗고 만다.

3. 말년

듀크 스나이더는 다저스에 있던 시절 캘리포니아 주 폴브룩이라는 곳에 60에이커에 달하는 아보카도 농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노후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은퇴 후 볼링장 사업이 실패하여 아보카도 농장을 말아먹은(...) 듀크 스나이더는 결국 1968년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의 스카우트, 감독 등의 일을 하고, 이듬해인 1969년부터 1971년 까지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중계 방송의 해설자를 하다 1973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라디오 분석가 겸 방송 아나운서 일을 시작했다. 13년간 듀크 스나이더는 매우 부드럽고 차분한 말투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1987년 심장 마비와 다리 부상 등으로 인해 취미로 즐기던 골프를 그만두게 되었고, 1995년에는 과거 소득세 기피로 인해 기소를 당하기까지 한다. 벌금과 이자로 약 5만 7천 달러를 납부한 듀크 스나이더는 이후 2년간 보호 관찰 신세로 전락하고, 2011년 캘리포니아의 에스콘디도의 발레 비스타 컨베일스켄트 병원에서 향년 84세로 별세하였다.

4. 연도별 성적

파일:MLB 로고.svg 듀크 스나이더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47 BRO
-
LAD
40 89 20 3 1 0 6 5 2 3 24 .241 .276 .301 .577 -0.3 -0.4
1948 53 172 39 6 6 5 22 21 4 12 27 .244 .297 .450 .747 0.2 0.3
1949 146 615 161 28 7 23 100 92 12 56 92 .292 .361 .493 .854 5.0 5.4
1950 152 684 199 31 10 31 109 107 16 58 79 .321 .379 .553 .932 5.5 5.6
1951 150 672 168 26 6 29 96 101 14 62 97 .277 .344 .483 .828 3.7 3.7
1952 144 598 162 25 7 21 80 92 7 55 77 .303 .368 .494 .863 4.5 4.5
1953 153 680 198 38 4 42 132 126 16 82 90 .336 .419 .627 1.046 8.8 9.1
1954 149 679 199 39 10 40 120 130 6 84 96 .341 .423 .647 1.071 8.3 8.1
1955 148 653 166 34 6 42 126 136 9 104 87 .309 .418 .628 1.046 7.7 8.6
1956 151 652 158 33 2 43 112 101 3 99 101 .292 .399 .598 .997 7.5 7.6
1957 139 592 139 25 7 40 91 92 3 77 104 .274 .368 .587 .955 5.2 5.0
1958 106 365 102 12 3 15 45 58 2 32 49 .312 .371 .505 .875 0.4 0.4
1959 126 435 114 11 2 23 59 88 1 58 71 .308 .400 .535 .935 2.3 2.3
1960 101 285 57 13 5 14 38 36 1 46 54 .243 .366 .519 .885 1.4 1.5
1961 85 266 69 8 3 16 35 56 1 29 43 .296 .375 .562 .937 2.1 2.4
1962 80 196 44 11 3 5 28 30 2 36 32 .278 .418 .481 .899 1.3 1.2
LAD 통산
(16시즌)
1923 7633 1995 343 82 387 1199 1271 99 893 1123 .300 .384 .553 .936 63.4 65.3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63 NYM 129 415 86 8 3 14 44 45 0 56 74 .243 .345 .401 .746 0.7 1.2
<rowcolor=#FD5A1E>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64 SF 91 189 35 7 0 4 16 17 0 22 40 .210 .302 .323 .625 -0.6 -0.6
MLB 통산
(18시즌)
2143 8237 2116 358 85 407 1259 1333 99 971 1237 .295 .380 .540 .919 63.5 65.9

5. 기타

현역 시절 종종 TV나 영화에서 야구 선수 역으로 출연하곤 했다. 은퇴 이후에도 TV와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이는 사망하기 얼마 전인 2007년까지도 계속되었었다.

58경기 연속 출루라는 내셔널 리그 최다 연속 출루 기록 보유자로, 이는 1954년의 기록이다.[14]

6. 명예의 전당 입성

1980년, 부족한 누적 성적과 8회의 올스타 외에 전무한 수상 실적 탓에 11수만에 간신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듀크 스나이더는, 헌액과 동시에 자신의 등번호 4번이 다저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는 영광을 함께 누린다.

6.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듀크 스나이더 28 183 152 47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Center Field (8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듀크 스나이더 66.3 49.9 58.1
중견수 HOF 입성자 평균 71.2 44.6 57.9

7. 관련 문서




[1] 다른 두 명은 뉴욕 양키스미키 맨틀, 뉴욕 자이언츠윌리 메이스.[2] 플랫부시는 본래 브루클린 다저스의 홈구장인 에베츠 필드가 있던 뉴욕 브루클린의 지명이다.[3] 훗날 소속팀 다저스가 브루클린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연고 이전을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묘한 인연이다.[4] 대신 반대급부로 좌투수 상대로는 많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5] 특히 70야드 이상 패스를 던질 수 있는 강한 어깨의 쿼터백으로 소문났었다. 그리고 이런 강한 어깨는 훗날 강견의 중견수가 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는데, 그의 통산 어시스트 개수는 123개로 현시대의 강견으로 소문난 이치로와 같다.[6] 당시 존재하던 마이너리그의 하나[7] 듀크 스나이더는 재키 로빈슨과 친하게 지낸 선수 중 한명이었다.[8] 총 6차례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으나, 그 중 한 번은 1949시즌이었다.[9] 이 때문에 음모론이 하나 생겼는데, 어떤 필라델피아 출신의 작가가 로이 캄파넬라와 듀크 스나이더의 순위를 서로 반대로 오기하여 투표했다는 설이다. 만약 이 작가의 표가 정상적으로 1위표가 듀크에게, 5위표가 로이에게 갔다면 총점 227-226으로 듀크가 1점차 MVP에 올랐을 것이라는 설인데, 지금에 와서는 모든 투표 용지를 공개하여 단순 음모론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모든 음모론이 그렇듯 투표 오류를 일으킨 작가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작가라고. 무명의 작가가 MVP 투표가 가능하긴 한가?[10] 그 유명한 바비 톰슨의 세상에 울려퍼진 한 방으로 인해 시즌 최종전에 승패가 갈리고 만다. 여담이지만 이 바비 톰슨의 홈런은 사인 훔치기의 결과라는 설이 유력하다.[11] 프레셔를 견딜 수 없다고 징징거렸다고 한다.[12] 훗날 다저스에 입단하기도 하는 체이스 어틀리 또한 백발 때문에 실버 폭스라는 별명을 얻었다.[13] 이때 듀크 스나이더의 룸메이트였던 전설적인 투수 돈 드라이스데일은 듀크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4] 메이저리그 최다 연속 출루 기록은 테드 윌리엄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