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25 14:52:37

브랜치 리키

Wesley Branch Rickey
1881년 12월 20일 ~ 1965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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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로빈슨(왼쪽)과 함께
파일:MLB_logo.png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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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치 리키
헌액 연도 1967년
헌액 방식 베테랑 위원회 추천
1. 개요2. 선수 생활3. 감독 생활4. 리키가 가져온 야구계의 혁명
4.1. 스프링 캠프와 배팅 케이지, 피칭 머신4.2. 팜 시스템의 고안4.3. 다저스 단장 초기4.4. 흑인 선수에게 문호를 열다4.5. 최후의 도전
5. 평가6. 이모저모

1. 개요

"운은 계획에서 비롯된다.(Luck is the residue of design)""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전설적인 단장. 무수한 업적으로 인해 신화가 된 인물. 현대 야구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창조한 인물이다. 야구계의 링컨이요, 다빈치요, 혁명가였던 인물. 김형준 칼럼니스트가 쓴 브랜치 리키의 레전드 스토리

2. 선수 생활

1881년에 태어나 당시 막 태동한 야구계에 투신한다. 법학도였지만, 변호사 대신에 야구 선수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 그러나 장래 야구계의 혁명가가 될 그의 선수 시절 성적은 지극히 초라했다. 단순히 평범한 정도가 아니라, 평균치에도 미달했을 정도.

선수 시절의 포지션은 포수였다. 지금의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되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뉴욕 양키스가 되는 뉴욕 하이랜더스에서 뛰었지만, 선수로서 경력은 대실패였다. 메이저리그의 불명예 기록으로 남기에 손색이 없는 한 경기 13 도루 허용이 말해주듯 어깨가 형편없이 약했고, 설상가상으로 타격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결국 선수로서의 생활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단 세 시즌에 그치고 말았다.

3. 감독 생활

선수로서 은퇴한 후에 미시간 대학교에 진학해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여기서 메이저리그를 풍미한 천재 타자 조지 시슬러와 만나게 되었고, 둘은 그 뒤로 함께 다니게 되었다. 1913년 대학을 마친 후에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의 감독에 취임했고, 그와 친분이 있던 조지 시슬러도 브라운스에 합류하게 되었다.

브라운스의 감독으로서는 하지만 단 세 시즌만 재직했다. 그리고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화학부대 장교로 군복무를 하게 되었고, 이 기간동안 야구계와 잠시 멀어졌다. 제대 후에는 다시 브라운스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구단주가 바뀐 상황이었고, 결국 리키는 브라운스 대신에 카디널스로 감독 겸 단장으로 가게 되었다.

사실 감독 브랜치 리키도 딱히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리키가 성공적이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야구의 순간적인 상황 변화에 대한 임기응변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고, 지나치게 생각이 많고, 경기 외적인 부분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선수와 감독으로서의 단점은 그가 단장으로서 야구계에 혁명을 가져오는데는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1925년 브랜치 리키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감독 자리를 명 2루수인 로저스 혼스비에게 물려주고 단장직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1]

4. 리키가 가져온 야구계의 혁명

4.1. 스프링 캠프와 배팅 케이지, 피칭 머신

먼저 소소한 일화부터 소개하면, 지금의 카디널스의 로고는 리키가 고안한 것이다. 또, 어린이 팬에 주목해서 어린이 무료 입장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도 리키가 최초였다. 이런 마케팅 적인 부분의 혁신 외에도 리키는 경기 내용적으로도 한 단계 진일보한 조치를 취하는데 그게 오늘날 프로야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프링캠프를 현대식으로 발전시킨것이다.

리키의 시대 전에도 스프링캠프는 있었지만 [2] 리키는 이것을 발전시켜서 현대 스프링캠프의 틀을 만들었다.

그는 스프링캠프를 보내기 위한 전용시설 다저 타운도 만들었다. 플로리다주 베로비치의 낡은 군사시설을 구입 및 개조하여 건설된 다저타운은 1948년부터 다저스가 애리조나로 캠프지를 옮긴 2008년까지 60년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스프링캠프로 활용된다[3]. 이렇게 구단 명의로 아예 스프링캠프 훈련장을 사서 매년 같은 장소에서 훈련을 할수 있는 시스템을 시작한것은 다저스가 처음이었다.

여기에 이런 연습을 도와주기 위한 보조 도구를 도입하는데, 그게 오늘날 야구에서 정말 흔히 보는 배팅 케이지와 피칭 머신이었다. 여기에 리키는 이론 교육도 함께 병행했다. 리키는 또한 당시 막 알려진 야구 헬멧의 도입에도 적극적인 인물이었고, 헬멧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곧 다른 구단들도 이런 방식들을 모방했고, 이를 통해 메이저리그 전체의 기술적인 부분이 한 단계 더 나아질 수있었다.

이렇게 리키가 시작을 한 현대식 스프링캠프의 방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4.2. 팜 시스템의 고안

당시 메이저리그 팀들의 선수 수급은 한 마디로 요약해 경매였다. 독립된 마이너리그 구단이나 아마추어 팀에서 뛰던 선수를 우연히 스카우트가 발견하거나,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 돈을 싸들고 찾아가서 선수와 소유권을 가진 마이너리그 팀들과 교섭을 해야 했다. 이 경우 결국 승자는 돈이 많은 팀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리키가 재직하던 세인트루이스는 그리 돈이 많지 않은 팀이었고, 따라서 우수한 선수의 영입에는 항상 실패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리키가 팀의 전력 강화를 위해 고안한 방법은 아예 직접 마이너리그 구단을 사는 것이었다. 마이너리그 구단을 카디널스의 산하 조직으로 만들고, 카디널스가 직접 선수와 계약을 해서 마이너리그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메이저리그로 올리는 방식이었다. 1928년까지 조용히 마이너리그 구단을 사면서 체계를 만들었고, 이 체계를 통해 선수들은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데뷔하기에 이르렀고, 우수한 선수들을 과거 경매를 통해 비싼 값에 사지 않고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체제를 통해 쏟아진 선수들은 엄청났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멤버들을 거저 얻게 된 것이다. 스탠 뮤지얼을 필두로 디지 딘, 에노스 슬라터, 레드 션딘스트 같은 우수한 멤버들을 얻을 수 있었고, 카디널스는 강해졌다. 결과는? 바로 메이저리그 팬들에게도 존경받는 카디널스의 우승이 이 때 시작되었다. 1926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리키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단장 재직 시절 4번의 월드시리즈 우승과 6번의 내셔널리그 우승 타이틀을 카디널스에 안겨주었다.

리키가 이 시기 저지른 유일한 실수는 전설적인 명 포수 요기 베라를 키가 작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리키가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브루클린 다저스로 이적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베라를 브루클린에 입단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결국 요기 베라가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면서 리키는 유일한 실책을 저질렀다.

카디널스 구단주와 갈등을 빚던 리키는 1942년 브루클린 다저스 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여기서도 신화는 계속 되었다.

4.3. 다저스 단장 초기

다저스 단장으로서 브랜치 리키가 처음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가 처음 부임한 1942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시점이었고, 좋은 선수들은 죄다 군대로 간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키가 다저스 단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리키는 자신의 구상을 착착 실현하고 있었다.

과거 세인트루이스 시절에 봄에 다소 추울 때 스프링캠프를 진행했던 리키는 아예 스프링캠프를 독립적인 곳에서 실시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결과물로 낡은 군사기지로 방치되었던 플로리다주의 베로비치를 매입해서 다저 타운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드디어 실전 훈련과 연습을 따뜻한 곳에서 진행하는 진정한 의미의 스프링캠프를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다저스 단장으로서 리키가 넘어야 하는 과제는 같은 지역의 뉴욕 양키스의 위세였다. 번번히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에게 지던 다저스는 양키스를 넘고 싶어했지만, 리키가 고안한 팜 시스템은 이미 상당부분 보편화되었다. 특히, 카디널스 다음으로 팜 시스템을 도입한 팀이 바로 양키스였다. 결국 리키는 다저스를 위해 또 하나의 혁신을 고안하는 수 밖에 없었다.

4.4. 흑인 선수에게 문호를 열다

리키 자신은 흑인 선수의 영입을 추진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 대학 코치 시절 원정길에 올랐다가 팀내 최고의 선수이자 흑인인 찰스 토머스가 숙박 거부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실랑이 끝에 자기 방에서 재우기로 한 리키는, 토머스가 자신의 검은 피부를 한탄하며 통곡하는 것을 보고 이 잘못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미화된 이야기라는 것도 있으니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리키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랬던 아니면 승리를 위해 반드시 했어야 했던 일이던 간에, 흑인 선수를 영입한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당한 도박이었다. 19세기 말 킵 앤슨에 의해 흑인 선수가 추방된 후, 메이저리그의 또 다른 혁신가인 빌 비크[4]사첼 페이지조시 깁슨영입 시도가 무산되면서 흑인 선수의 영입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는 케네소 랜디스[5] 커미셔너의 반대가 컸는데, 그 랜디스가 1944년 죽었다.[6]

리키는 자신의 오랜 동료인 조지 시슬러에게 흑인 선수를 발굴해 달라고 하면서 조건을 걸었다. 어떤 야유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심장과 여유, 배짱을 가졌으며 백인들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을 가진 선수였다. 이 조건에 부합한 선수는 UCLA 출신에 2차 대전에 참전한 장교 출신인 재키 로빈슨이었다.[7] 그리고 리키는 로빈슨과 계약을 맺었고, 먼저 마이너리그 팀인 몬트리올 로열스로 보냈다. 여기서 로빈슨의 활약으로 백인들이 재키 로빈슨을 연호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1947년 로빈슨을 메이저리그에 데뷔시켰다.[8]

물론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정착은 리키 혼자의 공은 아니었다. 내부의 반발을 찍어누르는 데는 리키의 수완도 있었지만, "쟤가 잘 해야 늬들 연봉이 오르거든?" 이라고 말하며 선수들을 잠재운 레오 듀로셔 감독의 공도 있었다. 원정 경기에서 폭동 가까운 야유를 잠재운 피 위 리즈의 행동(해당 항목 참고)도 있었다. 그리고 로빈슨은 정말 훌륭한 선수였고, 리키에게 약속한 것처럼 어떤 역경도 잘 참아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마음 속에 친 장벽을 깨려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을 때, 과감하게 이를 시도한 리키의 공이 가장 큰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마음의 편견과 장벽을 먼저 깬 다저스는 1921년부터 1946년까지 26년간 리그 우승 1번이 전부였지만 로빈슨이 데뷔한 해인 1947년부터 1956년까지 10년간 6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일약 양키스와 쌍벽을 이루는 뉴욕의 라이벌이 되었다. 로빈슨을 필두로 로이 캄파넬라, 돈 뉴컴을 비롯해 우수한 흑인 선수들이 다저스의 문을 두드렸고, 그렇게 명문 다저스의 전설이 탄생했다.

4.5. 최후의 도전

그러나 리키는 다저스를 떠나야 했다. 바로 새롭게 구단주가 된 월터 오말리와의 갈등으로 인해서였다. 결국 1950년을 끝으로 다저스를 나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단장으로 취임했다. 피츠버그는 브루클린 다저스와 달리 큰 시장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그가 재임하는 당대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드래프트에서 다저스가 그토록 숨기려고 애를 썼던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존재를 알고 있던 것도 리키였기 때문에 클레멘테를 빼오는데 성공했고, 클레멘테는 그렇게 피츠버그의 전설이 되었다[9]. 다른 팀에서 그랬듯이 정비된 팜 시스템을 만들었고, 흑인 선수에게도 문호를 열면서 피츠버그의 기틀을 만들었다. 비록 그가 재임하던 시절에는 우승에 실패했지만, 1960년 우승과 1970년대 벅스의 전성기의 기틀은 그의 재임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평가다.

1955년을 끝으로 벅스를 나온 리키는 아예 새로운 리그의 창설에 도전했다. 당시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 팽창, 경제 성장으로 인해 미국은 호황을 맞이 했지만, 야구 팀은 전쟁 이전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틈을 노리기로 한 리키는 투자자를 모아서 새로운 리그인 컨티넨털리그 창설에 도전했다. 이 시도는 결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메이저리그 사무국도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팀 확장에 나서게 되었다.

컨티넨털리그 창설의 시도가 무산된 후에는 강연을 다니면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1965년 6월 강연 도중 쓰러진 후, 6개월 뒤인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5. 평가

그를 아는 사람은 "야구에 미치지만 않았으면, 작가나 대통령 같은 더 위대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라고 아쉬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리키가 야구계를 선택한 것은 전 세계 야구의 엄청난 축복이었다. 리키가 없었다면? 물론 언젠가 스프링캠프는 도입되었을 것이고, 팜 시스템도 만들어졌을 것이고, 흑인 선수들도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굉장히 늦춰졌을 것이고 발전은 지체되었을 것이다. 혁신가가 위대한 이유는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들이 다 아는 것을 먼저 해결했기 때문이다. 리키는 바로 위대한 혁신가였다. 그는 야구에 일생을 헌신했고, 현대 야구의 기틀을 닦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6. 이모저모

냉철한 사업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통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이었다. 그는 야구에서 출루율과 장타율이 중요하다는 오늘날 세이버메트릭스의 주장을 가장 먼저 했던 사람이었고, 그가 고용한 앨런 로스는 OPS 개념을 도입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런 통계를 어디에 써 먹었냐면... 선수들 연봉 깎는데 썼다. 온갖 통계로 선수들의 연봉이 가치에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했고, 만일 그래도 안 되면 도덕적 엄숙함을 내세워서 연봉 상승을 막았다고 한다. 스캇 보라스의 안티테제인 셈.

구두쇠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일화가 남아 있다. 에노스 슬래터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하면서 보너스로 사냥개 두 마리와 엽총 한 자루를 받았다. 하지만 사냥개 두 마리는 데리고 오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훗날 슬래터가 이 이야기를 디지 딘에게 하자 딘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나도 사냥개 두 마리를 받았는데 개들이 받자마자 도망쳤는데?"엽총까지 물고 도망쳤으면 완벽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을 진짜 싫어해서 지각하는 선수들을 엄격히 통제했다. 애당초 클럽하우스에서의 음주와 카드놀이도 금지했던 사람이다. 그가 했던 시간에 관한 말. "한 사람이 1분을 늦게 되면 150명의 2시간 반을 빼앗은 것이다."[10]

아울러 그가 한 또 다른 명언. "운은 계획에서 비롯된다.(Luck is the residue of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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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를 다룬 미국영화 <42>에서는 해리슨 포드가 브랜치 리키 역으로 출연했다. 브랜치 리키의 선구자, 사업가, 수완가, 휴머니스트, 멘토로서의 여러 모습들이 영화에서 주연에 가까운 비중으로 그려졌다. 주인공 재키 로빈슨을 발탁하여 팀의 일원으로 융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재키 로빈슨이 불의에 맞서며 지지 않도록 용기를 불어넣는 모습과 팀의 성장과 이익도 놓치지 않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영화 전반에 보여지는 그 시절의 인종차별 속에서 재키 로빈슨을 이끄는 모습을 보면 시대를 앞서간 휴머니스트임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영화에서 너무 긍정적으로 그려져서 오히려 허구의 인물이거나 각색이 심한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1] 단장인 브랜치 리키와는 달리, 혼스비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이면서 백인우월주의자였다.[2] 이전에는 이 항목에 브랜치키리 전에는 스프링캠프가 아예 없었다고 나와있었는데, 이것은 틀린 정보이다. 스프링캠프는 19세기말부터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스프링캠프를 현재 우리가 하는 방식으로 발전시킨것은 그의 공이다.[3] 이후 방치되던 다저 타운을 구입한 인물이 전 다저스 구단주 월터 오말리였고, 여기에 참여한 인물이 박찬호노모 히데오이다. 여러모로 이야기꺼리.[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 여러 메이저리그 팀들의 구단주를 지냈던 인물로, 혁신가인 동시에 최대의 흥행사였다. 야구단 경영에서의 여러 혁신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 5년만인 1991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정도. 본문에도 언급된 것처럼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만 아니었다면, 최초의 흑인선수 도입의 영예는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흥행에서의 쇼맨쉽도 강해서 1/8이라는 등번호로 유명한, 108cm에 불과했던 왜소증 환자인 에디 가델이 메이저리그 타석에 들어선 것도 이 사람의 작품이다. 결국 재키 로빈슨이 데뷰를 한 3개월 후에 래리 도비 (Larry Doby)라는 흑인 선수를 인디언스에서 데뷔시키고, 이 선수는 어메리칸리그의 첫 흑인 선수가 되고 성적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몇개월 먼저 데뷔한 재키 로빈슨에 비하면 처참한 콩라인이 되버렸다[5] 본래는 판사 출신으로 블랙삭스 스캔들과 반독점법 위반 문제를 담당했던 판사였다. 때문에 블랙삭스 스캔들로 혼돈의 카오스 상태였던 메이저리그가 최초로 모셔오면서 제 1대 커미셔너가 되었다. 랜디스 커미셔너는 블랙삭스 스캔들에 걸린 인물들을 모조리 제명시켜 버리는 등 단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로저스 혼스비가 엮였던 경마문제나 타이 콥이나 트리스 스피커가 관련된 승부조작 사건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는 등 논란의 여지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본문의 흑인 참가 불허로 수구꼴통으로 제대로 찍히게 된다. 하지만 사망시까지 그 독보적 직위를 유지하면서 제왕적 커미셔너로서의 직위를 확립한다.[6] 때마침 새로 오른 커미셔너인 해피 챈들러는 전임자 랜디스와는 반대로 꽤 개방적인 인물이었고, 이분이 흑인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허용하게 되는데, 허용하면서 남긴말이 꽤 유명하다. "흑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태평양도 가고 유럽에도 가는데 메이저리그에도 못갈일이 뭐있나?"[7] 당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백인들 중에서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참전용사에 대한 대우와 존경이 큰 미국 사회에서 장교로 복무했단 것은 큰 메리트였던 것.[8] 몬트리올 로열스가 우승한 날 재키 로빈슨은 기뻐서 난입한 백인 팬들에게 헹가레받고 무등도 태워졌는데 이 무등 태워준 사람의 말이 압권. "검둥이들 여러마리 목매달아 죽여본 적은 많은데 검둥이 무등태워준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흠좀무.[9] 동시에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중남미 선수이기도 하다.[10] 이와 유사한 방식의 말은 지금도 "한 사람이 X분을 늦게 되면 X명의 X시간을 빼앗은 것"이나 비슷한 문구로 자주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