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4:23:35

조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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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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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창단 조동화
(200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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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
(2002~2004)
조동화
(2005~2006)
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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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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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화
(2019~)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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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동화코치 2024.png
<colbgcolor=#ce0e2d><colcolor=#ffffff> SSG 랜더스 No.84
조동화
趙東和 | Cho Donghwa
출생 1981년 3월 22일[1] ([age(1981-03-22)]세)
충청남도 공주시[2]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공주중동초 - 공주중 - 공주고 - (대불대)
신체 172cm | 74kg
포지션 외야수[3]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2000년 신고선수 (SK)
소속팀 SK 와이번스 (2000~2018)
지도자 SK 와이번스 2군 작전·주루코치 (2019)[4]
SK 와이번스-SSG 랜더스 1군 외야수비·주루코치 (2019~2023)[5]
SSG 랜더스 1군 3루 작전·주루코치 (2024~)
등장곡 바다 - 〈Go Go Go〉
BIGBANG - 〈붉은 노을
소방차 - 〈어젯밤 이야기〉 (2013~2018)[6]
응원가 소방차 - 〈어젯밤 이야기〉 (2006~2017)[7][A][9][10]
SK 텔레콤 CM 〈되고송〉 (2014~2018)[11][12][13]
Boys Like Girls - 〈The Great Escape〉 (2014~2017)[14][A][16]
이전 응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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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브레인 - 〈Radio Radio〉 (2016)[17]
병역 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3~2004)
에이전시 스포스타즈[18]
가족 부모님, 남동생 조동찬
아내, 장남 조재범[19], 장녀 조예원
파일:SSG 랜더스 심볼.svg파일:SSG 랜더스 심볼(적색배경).svg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플레이 스타일
4.1. '대체 선수' 개념에 부합하는 선수
5. 연도별 주요 성적6. 여담
6.1. 동생 조동찬6.2. 가을동화6.3. 끝내기
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SK 와이번스의 외야수. 現 SSG 랜더스 1군 1루 베이스 코치.

2. 선수 경력

조동화의 선수 경력
통합 선수 경력: 조동화/선수 경력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9~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아마추어 시절

3. 지도자 경력

파일:조동화 240911.jpg
2019년부터 SK 와이번스 2군의 작전·주루코치로 본격적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9년 4월 19일 김무관 1군 타격코치가 육성군으로 이동하며 2군으로 같이 내려간 백재호 1군 타격 보조코치를 대신해 박재상 1군 1루 베이스 코치가 1군 타격 보조코치로 임명되자 1군 1루 베이스코치로 임명됐다. 2020년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무관중 경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팬들에게 재미를 주고자 코치나 감독, 심판 등에게 마이크를 씌워주는데 중간중간 조동화 코치의 마이크가 잡힐 때 선수들과 하는 대회가 굉장히 친근감이 느껴지고 또한 재미있는말도 많이해서 팬들에게 큰 웃음을 주고있다.

세대교체 자원으로 임재현, 최상민, 채현우를 뽑았다.

현역시절 마지막 년도인 2018년에는 2군에 있던지라 팀의 4번째 우승에 함께하지 못했었는데, 2022년 SSG 랜더스가 통합우승을 차지하면서 코치로써 첫 번째 우승 반지를 끼게 되었다.

2024년부터 SSG 랜더스 1군 3루 작전·주루코치를 맞고 있다. 오랜 기간 1루 코치를 맡았던 탓인지 시즌 초반에는 주루 지도 미스를 종종 보여 평이 좋지 않았으나 시즌 중반부터는 적응했는지 별다른 실수 없이 잠잠해진 상태이다.

4. 플레이 스타일

파일:조동화 홈런.gif
통산 9호 홈런이자 커리어 마지막 홈런
vs 송승준 / 2015년 5월 7일
파일:조동화 2008 한국시리즈 5차전 호수비.gif
홍성흔의 안타성 타구를 슬라이딩 캐치로 잡아내는 모습.
vs 두산 베어스 (2008년 한국시리즈 5차전)
타격능력은 답답한 수준. 기본적으로는 2할대 초중반 타율이 팬들이 기대하는 성적으로, 가끔 무섭게 쳐주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타격을 기대할 만한 선수는 아니다. 대신 번트와 수비가 상당히 뛰어나며, 그래서 붙은 별명이 번티스트(번트+아티스트). 또한 수비 능력도 전반적으로 리그 정상급이었다. 때문에 수비수로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인 넓은 수비 범위를 앞세워 좌중우 어느 포지션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한국시리즈에서 2번이나 상대한 두산 팬이라면 치를 떨 정도. 하지만 신체조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발, 어깨 등은 톱클래스라고 보기는 힘들다[20]. 때문에 강한 어깨를 가진 김강민에게 밀려서 우익수로 출장할 때가 많다. 수비와 번트능력으로 1억 가까운 연봉을 받을만큼 가치가 있는지는 팬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 2년 연속 우승의 주역이라는 이미지가 그만큼 강하다는 반증이다.

1.5군 수준의 선수라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조동화의 통산 도루 성공률은 79.3%로 100도루 이상 은퇴 선수 중 역대 3위이다.[21]

4.1. '대체 선수' 개념에 부합하는 선수

발도 빠르고 배트 컨트롤 능력도 있으며, 수비를 잘 하고 번트도 잘 댄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스탯을 뜯어 보면 0.280을 넘은 적도 없는 컨택에 통산 장타율이 말해주듯 파워도 없으며, 선구안 역시 전혀 장점이 아니다. 내야안타 비율도 높기 때문에 BABIP이 타율에 비해 많이 높다. 가장 직관적으로 공격력을 짐작할 수 있는 지표인 OPS를 보더라도 조동화는 OPS 0.690을 넘겨 본 적이 없다. 이대형OPS 0.700 언저리에서 왔다갔다 하면서도 똑딱이, 주루 1툴이라고 까였는데, 조동화는 그 이대형보다도 공격력이 좋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대형만큼 도루를 많이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냉정히 말하면 LG 이대형과 비교해도 오히려 떨어지면 떨어졌지 크게 나은 점이 없다. 게다가 전성기에는 풀타임 중견수였던 이대형과 달리 김강민의 존재로 인해 코너에 주로 서던 선수다.

무엇보다도 통산 WAR가 0에 가깝다는 점이[22] 그를 대체 선수의 훌륭한 표본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조동화로만 타선을 꾸리면 타선의 통산 WAR는 0이고, 조동화 9명으로 이루어진 야구단은 3할보다 약간 아래의 승률을 기록한다는 이야기가 야구팬 사이에서 잠시 유행한 적이 있었다.

발도 빠르고 수비력도 좋기 때문에 훌륭한 백업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주전감으로서는 영 아니다. 이 선수가 어떻게 22억 씩이나 받아갈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는 팬이 적지 않았다.

다만 그의 가치는 공격보다는 주자, 작전 수행, 수비수로서의 가치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도루 자체는 많지 않지만 성공률은 리그 최고 수준으로 높기 때문에 주자로서는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번트가 필요할 때 안정적으로 대줄 수 있는 능력도 그가 종종 2번 타자로 기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며, 수비 범위도 굉장히 넓고 안정적이라 현역 시절에는 뛰어난 외야 수비수를 꼽으라면 항상 나오는 이름 중 하나로 꼽혀 넘쳐나는 SK 외야진에서도 중용되었다.

약간의 추억보정도 있는 편. SK 왕조 시절에는 기동력, 번트 능력, 수비력 등이 선수평가에서 꽤나 주요한 지표로 활용되었는데, 이는 김성근 감독의 지론인 스몰볼 야구에 맞는 지표들이다. 상술한 대로 출루를 많이 하지는 못해도 일단 출루했을 때는 상대 투수를 흔들며 언제나 다음 베이스를 노릴 수 있는 센스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중용받았다. 또한 위 항목에 따로 기술되어 있듯 포스트시즌에 결정적인 활약을 많이 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선수이기도 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OPS
2001 SK 6 6 .167 1 0 0 0 1 0 0 0 .167 .167 .333
2002 4 1 .000 0 0 0 0 0 1 0 0 .000 .000 .000
2003 군복무(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4
2005 110 281 .263 74 2 4
(3위)
1 19 41 19 22 .310 .316 .626
2006 65 139 .201 28 3 4
(4위)
0 12 20 8 13 .281 .266 .547
2007 121 290 .272 79 8 3 0 18 48 25
(5위)
38 .321 .352 .673
2008 103 283 .279 79 4 4 1 26 43 19 36 .332 .357 .689
2009 102 169 .178 30 4 3 0 8 22 7 11 .237 .228 .465
2010 115 250 .244 61 7 1 3 27 38 15 34 .316 .332 .648
2011 114 296 .236 70 9 2 0 16 42 10 28 .280 .302 .582
2012 24 62 .242 15 2 0 0 3 6 3 7 .274 .314 .588
2013 105 332 .256 85 11 3 0 19 52 24 54 .307 .357 .664
2014 125 443 .262 116 12 5 2 52 74 37
(4위)
47 .325 .330 .655
2015 119 245 .261 64 6 1 2 15 38 18 35 .318 .351 .669
2016 76 143 .238 34 5 0 0 16 24 6 19 .273 .323 .596
2017 1군 기록 없음
2018
KBO 통산
(14시즌)
1113 2797 .251 702 68 30 9 216 425 185 325 .306 .327 .633

6. 여담

  • 별명은 가을에 좋은 활약을 보여 가을동화, 번트를 잘댄다고 번트+아티스트여서 번티스트[23][24], 4번 타자 조거포[25], 그리고 결정적으로 X동화가 있는데 역으로 이걸 줄여서 '졷'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 별명은 동생인 조동찬도 마찬가지로 불린다. 그리고 2015시즌, 주장이 되면서 졷장님타이틀 획득했다.
  • 등번호 변천사가 조금 거시기하다. 신인 시절에 48번을 달다가, 이진영이 10번에서 35번으로 옮기자[26], 10번으로 바꿔 달았으나, 트레이드로 고액연봉을 받는 고참선수인 김기태가 오면서 결국 10번을 차지하지 못했다. 2002 시즌을 마치고, 상무에 입대했고, 2005년에 전역하고 복귀했더니, 10번은 아직도 김기태가 달고 있어서, 그 뒷번호인 11번을 강혁이 공익근무로 빠진 틈을 타서 달았다. 김기태가 은퇴하자 용병 시오타니 가즈히코가 10번을 차지했으나 시오타니가 장문석의 공에 손목을 맞고 부상으로 방출되자, 주인이 없어진 10번을 차지해서 그 이후로 쭉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박재상이 심기일전한다는 이유로 1번에서 11번으로 번호를 옮기게 되면서 그 새를 틈타 조동화가 1번을 차지하였다.
  • 2010년 5월 1일 정규시즌에서 홈런을 쳤다.
  • 2010년 10월 15일, 한국시리즈 1차전 시합일 새벽 1시에 자신의 아이디로 00박재홍 엘리트[27] 카드 조합에 성공했다고 한다. 물론 프로야구 선수들의 사이클은 일반인과 조금 달라서 대개 새벽 2~3시에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지만... 일본 전지훈련 중에도 현지의 열악한 인터넷 사정을 뚫고서 마구마구를 하는 게 종종 목격되었다.
  • SBS 안경현 해설위원의 증언에 따르면 식사량이 정말 적다고 한다. 소식하는 수준이 아니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정도라고. 심지어는 하루에 컵라면 한 그릇 먹고 버티는 날도 있단다.[28]
  • 2011년 5월 8일 SK 대 KIA전 문학구장에서 삼중살을 만든 장본인. 연장 승부 2:1로 1점차 승부인 상황, 그것도 무사 1, 3루에서 이루어진 삼중살이란 것이 주목할 만 하다. 보통의 확률로는 게임이 SK 쪽으로 역전되거나 못해도 동점은 나왔을 상황. 과정은 조동화 타격 → 그대로 투수 유동훈에게 라인드라이브(1아웃) → 3루 이범호에게 송구(2아웃) - 1루로 송구(3아웃)의 상황. 여기서의 재밌는 것은 3루수 이범호가 삼중살 상황이란 걸 몰라서 느긋하게 3루 베이스만 태그해 놓고 벙쪄 놓고선 뭔가 혼자 맘을 놓는데 주위에서 전부 1루로 던지라고 난리가 난 것. 1루 주자였던 박진만은 이미 2루까지 발을 옮겨논 후였던 지라 아웃은 불가피했긴 했는데 이범호가 워낙 벙찌고 있던지라 삼중살이 성립 안 될 수도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건 몸개그.
  • 2019년부터 등번호 84번을 달고 있는데 신인 시절 달았던 등번호인 48번의 반대 배번을 골랐으며 루키 때 열심히 했던 열정과 초심의 모습을 코치로서도 보여주기 위해 골랐다고 한다.

6.1. 동생 조동찬

파일:/image/076/2010/11/25/2010112501002596300157651.jpg
신인 시절 조동화(우)와 동생 조동찬(좌)의 모습.
파일:조동화 조동찬.jpg
양 팀의 주전으로 활약하던 시절 두 사람의 모습.
파일:조동화 조동찬 코치.png
양 팀의 코치 신분으로 재회하게 된 두 사람의 모습.

삼성 라이온즈 소속인 조동찬과 형제 사이다. 다만 인지도는 조동찬에 비해 조금 밀리고, 덩치도 조동찬보다 작다.[29] 그래서 다들 조동화가 동생인 줄 알지만, 분명 조동화가 형이고, 조동찬은 동생이다. 나성용-나성범, 정영일-정형식, 모상기-모상영, 최정-최항과 함께 형제가 모두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흔치 않은 케이스.[30] 다만 도중에 상무에 뛰었다가 제대를 했기 때문에 현역 활동 시즌은 동생에 비해 적다. 그리고 조동찬이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야구 금메달을 따면서 입대 공백이 없어졌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동생의 커리어를 따라잡는 건 아무래도 어려워졌다.[31] 조동찬이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사이 조동화가 조동찬의 차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동생 조동찬과는 매우 사이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처음 SK에 입단했을 당시 고3이던 동생을 위해 동료들의 장비를 얻어다 줬는데, 이 때문에 팀 내에서의 별명이 '동생주게요'였다고 한다. 첫 우승 소감으로 '동생에게 용돈도 줄 수 있고 할 말도 생겨서 황홀하다'고 했으며 2010년에는 동생 대신 군대를 가 줄 수도 있다는 말까지 했다. 하…한군두!! 그 외에도 인터뷰에서 동생 생각하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한다. 물론 형제선수라는 화제성 때문에 기자들이 많이 묻기도 하지만.

두 형제 중 한 명은 2004~2009년 한국시리즈에 꼭 출전했다. 2004년은 삼성의 준우승, 2005~2006년에는 삼성이 우승했고, 2007~2008년에는 SK가 우승, 2009년에는 SK가 준우승을 해서 부모님께서 흐뭇해했다는 일화가 있다. 2010~201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두 형제의 팀이 맞대결을 펼쳤다. 아버지는 SK 모자를, 어머니는 삼성 모자를 착용했다.

조동화, 조동찬 형제의 우승 반지 갯수는 무려 9개나 된다.(02,05,06,07,08,10,11,12,14) 게다가 만약 09년 기아우승과 13년 조동찬의 부상이 없었더라면 이 형제는 2005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번갈아가며 우승 반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소속팀 SK 와이번스삼성 라이온즈가 2000년 후반~2010년 초반 왕조를 구축했던 팀들이었다보니 이런 기록도 가능할 뻔 했다.
연도 우승 준우승 참가선수
2004 현대 삼성 조동찬
2005 삼성 두산 조동찬
2006 삼성 한화 조동찬
2007 SK 두산 조동화
2008 SK 두산 조동화
2009 KIA SK 조동화
2010 SK 삼성 조동화, 조동찬
2011 삼성 SK 조동화, 조동찬
2012 삼성 SK 조동화, 조동찬
2013 삼성 두산 -[32]
2014 삼성 넥센 조동찬

더불어 재미있는 사실은 조동화는 좌투좌타인 반면 조동찬은 우투우타다. 또 조동화는 외야를 주로 보지만 조동찬은 내야를 주로 보는 점도 대비된다. 반면 비슷한 점도 있는데. 통산 도루 성공률이 굉장히 높다. 역대 100도루 이상 선수 중 조동화가 6위, 조동찬은 1위.

2013년 8월 조동찬의 부상 소식을 접하고는 분을 못 이겨 핸드폰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본인도 마찬가지로 무릎 부상을 당한 적이 있어 그 아픔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화가 났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2018 시즌 도중 형인 조동화가 현역 은퇴 선언을 했고 같은 해에 조동찬도 방출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두 사람이 같은 해에 야구 선수를 은퇴하게 되었다. 그나마 조동화는 구단 레전드 대접을 받으면서 성대한 은퇴식과 함께 그라운드를 떠났다.

6.2. 가을동화

파일:가을동화.png
조동화가 커리어 통산으로 대체선수급 성적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생 못지않게 팬덤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선수가 된 원동력이다. 사실 전성기와 그 이후 2010년대 중반까지 SK는 유독 가을에 잘하는 선수들이 많았는데, 타자 중에는 미스터 옥토버, 가을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은 내야수 박정권과 가을 동화라는 별명이 붙은 조동화가 대표적인 예다.[33]

2009년엔 1할대 후반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2007~08년 두 시즌 동안에는 2할 7푼대의 타격과 두 자릿수 도루로 하위타선이나 2번 타순에서 활약했고, 번트나 스피드를 이용한 기습적인 작전수행 능력은 꽤 인정받는 편이어서 자주 출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외야수 셋 중 두 자리를 박재홍이진영이 먹고 들어갔기 때문에 남는 한 자리를 두고 김강민, 박재상과 돌아가면서 메우고 있었다.

그러던 2007년 한국시리즈, 통산 홈런이 단 1개에 불과하던 조동화는 2차전 5회말에 두산 베어스의 제 2선발 맷 랜들에게서 우측 담장을 넘기는 솔로홈런을 쳐냈다. 이에 그치지 않고 4차전 5회초에 리그 다승왕이자 1차전 승리투수였던 다니엘 리오스의 공을 당겨쳐 솔로홈런을 만들어 두 점차로 점수차를 벌려 1-0으로 박빙의 리드를 이어가던 SK와 깜짝선발 김광현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홍성흔의 2루타성 타구를 슬라이딩으로 잡아내는 백미를 연출하며 팬들로부터 가을만 되면 미치는 가을동화란 별명을 수여받았다.

여기에 2009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당대 최강의 계투였던 손영민을 상대로 또 한번 솔로홈런을 쏘아올렸고, 4차전 8회말 만루 상황에서 유동훈을 상대로 내야안타를 치면서 1타점을 추가했다.[34] 여담으로 이 해 유동훈의 성적은 57경기 출장(67.1이닝)에 6승 2패 22세이브 10홀드 3블론 4자책점 평균자책점 0.53에 WHIP 0.74를 기록했다. ERA+는 882.2로, 50이닝 이상 기준으로 09유동훈보다 더 높은 조정 평균자책점 시즌을 기록한 투수는 KBO 역사상 단 한명도 없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성적을 거뒀던 93/95선동열, 11오승환, 07정대현도 이 기록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유동훈에게서 내야안타를 쳐낸 것. 유동훈에 가려져서 그러지 손영민도 94이닝 동안 투구하며 5승 2패 12홀드 1세이브에 2.9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KILL 라인임태훈보다 많이 던지고 평균자책점도 더 낮았다.

2009 시즌 1할대 타율에 단 하나의 홈런도 없던 그가 가을만 되면 이렇게 변신하는 걸 보니 가을동화라는 별명은 빈말은 아닌 듯. 참고로 2009년까지는 정규시즌 통산 홈런 개수보다 3년 동안 한국시리즈에서 친 홈런이 더 많았다[35].

게다가 재밌는 사실은 2009년 한국시리즈 7경기 중 어떤 방식이던지 조동화가 타점을 올린 3경기는 모두 이겼다는 것.(3차전에서는 홈런, 4차전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2사만루서 내야안타, 6차전에서는 선발 윤석민에게서 2:0에서 3:0으로 도망가는 안타로 당시 2루주자 이호준을 불러들여 타점 생산) 반대로 출장을 못했거나 타점을 올리지 못한 경기는 모두 졌다. 이 사실을 알던 몇몇 SK 팬들은 7차전 선발로 나온 조동화가 1사 2,3루의 결정적인 기회에서 타점을 올리지 못하고 왼손 양현종을 상대하기 위해 김강민으로 교체되자 결과를 예상하고 탄식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김강민은 희생플라이로 타점을 하나 올리긴 했다. 이후 박재상의 안타 때 이용규가 홈에서 2루주자였던 정상호를 잡아냈으나 임채섭 주심의 오심으로 점수차를 5대 1까지 벌리는 데 성공했다.

사실 빈말은 아닌게 항상 이기는 경기 후반에서 김성근 감독은 박재홍을 빼고 조동화를 우익수로, 김강민을 중견수로 이동시켜 수비를 강화시키는 용병술을 썼으나 조동화를 대타 김강민으로 교체하는 바람에 우익수를 그대로 박재홍으로 둘 수 밖에 없었고, 6회말 나지완에게 투런 홈런과 7회말 안치홍에게 솔로 홈런을 연달아 허용한 뒤 박재홍최경환의 우중간 타구를 박재홍이 커트해 내지 못해 최경환에게 2루가 아닌 3루를 허용했으며, 이현곤은 스트레이트 볼넷을 얻어 걸어나갔다. 이용규의 땅볼 때 3루주자 최경환을 잡아내 한 점 차 2사 1,2루 상황까지는 만들었으나 정우람 킬러 김원섭이 우익수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날렸으나 박재홍이 노바운드 캐칭을 욕심내 결국 숏바운드 처리하지 못하고 타구를 뒤로 흘려버려 허무하게 이현곤이 홈인, 발빠른 김원섭[36]도 2루까지 보내줘 동점 허용+1사 주자 2,3루에 전타석 추격의 투런 홈런을 친[37] 나지완을 상대하게 만드는 대참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실상 조동화라면 안전하게 원바운드로 잡고 2루주자를 3루에서 묶거나 노바운드로 캐칭할 타구였다. 이후 결과는 모두가 알듯이 홈런을 친 나지완을 거르고 CK포를 잡아내 동점에서 일단 막았지만, 9회말 채병용과 김원형을 제외한 모든 불펜이 소진되어 전날 1.1이닝을 구원 등판한 채병용마저 등판해야 됐으며 나지완에게 비거리 135m의 끝내기 홈런을 맞아 2009년 한국시리즈의 패권을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2010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조동찬박진만과 교체되자마자 박재홍의 대주자로 출루하여 득점 올리는데 성공, 타석에서는 응원가를 채 틀기도 전에 1구를 맞고 1루로 출루, 2차전에서는 우익수 대수비로 교체투입된 후 2타석에 나와 1안타를 기록하면서 1.000의 타율(...??????)을 보여주고 있다.[38]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도 2차전과 마찬가지로 이호준과 교체되며 우익수 대수비 요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올해도 변함없이 2, 3차전 모두 4번타자로 들어갔는데, 이번 3차전의 경우 응원가 틀기도 전에 희생번트를 성공시킬 정도로 뛰어나고 깔끔한 작전능력을 보여줬다. 덕분에 1.000타율(...??????)도 지속됐다.

역시 가을동화답게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지만… 아쉽게도 SK가 2010 한국시리즈를 4연승으로 스윕. 처음부터 작전상 백업 역할이었던 조동화는 2010시즌 가을동화 촬영에는 실패했다. 2011시즌에는 아예 가을야구 직전에 시즌아웃.

2012년 플레이오프와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오랜만에 가을 야구에 복귀했지만, 예전만큼의 명성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동생이 속한 그 팀은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여 이제 우승 반지 커리어도 동생에게 확실히 밀린다.(조동화의 또다른 별명이 원동화 또는 원작동화이다.)

6.3. 끝내기

방송에서 끝내기로 언급될 정도로 조동화의 2010년부터는 끝내기로 재미 좀 봤다.

평소에는 뒷목잡는 타격만 하다가도 끝내기 상황만 되면 이건 뭐 클러치히터. 어쩌면 번트, 수비와 함께 그의 존재감과 가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9월 14일 한화와의 경기에서 첫 끝내기 안타를 쳤다.

2010년 5월 2일 LG와의 경기에서 끝내기 홈런을 쳤다. 이젠 조거포. 이날 경기는 조포대첩으로 기록되었다.

6월 18일에는 KIA와의 경기에서 역전 끝내기 2루타를 쳤다. 그리고 화가 난 윤석민락커룸에 가서…이하생략.

끝내기는 아니지만 6월 30일에 KIA(...)와의 원정 경기에서 11회초 쐐기를 박는 3타점 2루타를 쳤다(...).

2011년 5월 8일 KIA와의 문학 홈경기에서도 끝내기를 기록했는데 이건 끝내기 삼중살(...).

2011년 8월 24일 두산전에는 9회말 끝내기 기습번트를 만들어냈다. 3루주자의 베이스러닝이나 중계를 볼 때 누가 봐도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낸 번트. 이러고도 감독대행에게 공적을 뺏겼다.

2013년 6월 8일 한화와의 경기에서 또 끝내기 안타를 쳤다.

2013년 7월 3일, 또다시 KIA(...)와의 문학 홈경기에서 9회말에 끝내기 중전안타를 쳤다. 주전급이 아님에도 이날까지 조동화가 기록한 개인통산 끝내기 안타는 무려 6회.

7. 관련 문서



[1] 공교롭게도 3월 22일은 조동화가 프로 시절 내내 속해 있었던 SK 와이번스의 법인 설립일이다.(2000년 3월 22일), 다만 동생 조동찬이 프로필 상 음력 생일을 쓰는데, 조동화도 프로필 상 음력일 경우 양력으로 1981년 4월 26일이 된다.[2] SK 와이번스에서 준비한 은퇴 기념 영상에 따르면 거주지는 경기도 김포시로 추정된다.[3] 통산 우익수로 510경기 2,580이닝, 좌익수로 431경기 2,537.1이닝, 중견수로 412경기 2,285.2이닝을 출전하며 좌중우 전 포지션에서 고르게 출전했다.[4] ~4월 18일[5] 4월 19일~[6] 커리어 말년에는 되고송, 날쌘돌이가 조동화의 응원가로 추가되면서 어젯밤 이야기로 변경되었다.[7] (어젯밤엔 난 네가 미워졌어) 안타! 조동화! (어젯밤엔 난 네가 싫어졌어) 안타! 조동화! (빙글빙글 돌아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나 혼자 가슴 아팠어) 안타! 조동화![A] KBO 리그 응원가 저작권 사태로 인해 17시즌부터는 폐기되었고 결국 은퇴식때도 응원가 중 SK 그룹에서 제작했던 되고송만 유일하게 틀 수 있었다. 다만 조동화는 저작권 사태가 있기 훨씬 전인 2016년 10월 8일 삼성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1군에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현역 시절 마지막까지 이 응원가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9] 원래 조원우가 SK 시절 먼저 사용한 응원가를 물려받았다.[10] 안! 타! 조동화! 대신 S! K! 조동화로 부르기도 했었다.[11] 동화가 치면 안타가 되고~ 동화가 뛰면 도루가 되고~ 동화 나가면~ 꼭 점수가 되고~ 언제나 상대팀은 울상이 되고~ 안 되는 게 어딨어 조동화가 있는데 오늘도 동화 고고고고~ 조동화 있으면 언제나 승리~ 조동화 화이팅![12] 이재원이 직접 불러주었다.[13] 전 SK 정근우 응원가와 동일하다[14] 와이번스 날쌘돌이~ 조동화~ 와이번스 날쌘돌이~ 조동화~ 달려라(달려라!) 조동화(조동화!) 와이번스의 동화~[A] [16] 되고송과 The Great Escape 모두 정근우가 썼던 노래다.[17] 조동화 오오~ 조동화 오오~ 오예~ 오예~ 와이번스 조동화~ (×2)[18] 손혁, 박용택, 양현종이 소속되어 있다.[19] 2019년 부활한 프로젝트인 "슛돌이가 돌아왔다"에서 "라이온킹 FC"에 합류했다.[20] 김성근 감독이 처음 부임했을 때, 외야 워닝트랙 부근에서 2루까지도 노바운드로 못던지더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혹독한 훈련을 거친 후 송구도 준수한 수준을 보였다.[21] 재밌는 것은 이 분야 역대 2위는 동생인 조동찬으로, 무려 83.8%.[22] 스탯티즈에서 추산한 결과로는 2016년 시즌 종료 기준 WAR가 1.03이다. 물론 최근 시즌 전까지는 스탯티즈 수비 WAR이 매우 부실하기에 수비가 장기인 조동화로서는 다소간 손해를 보기는 했을 것이다. 물론 그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었겠지만[23] 항상 대주자, 대수비 등으로 출전하여 기회가 많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KBO 리그 통산 희생번트 4위다.[24] 실제로 안치용 해설위원의 언급으로는 코치가 아닌 조동화 선수가 직접 선수들에게 번트 지도를 한다고 한다. 또한 엠스플 유튜브 프로그램 스톡킹에서 허도환의 증언에 따르면 번트를 댈 시 배트를 정확히 포수의 눈을 가리게 대서 공이 안 보이게 한다고 언급했다. 이러나저러나 번트는 정말 잘 대는게 맞는듯. 때문에 은퇴식에서도 번트시타를 선보인 바 있다.[25] 가을에만 쓸 수 있는 한정적 별명. 하지만 이마저도 소속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해야 한다. 이보다 경기 후반에 수비 강화 목적으로 이호준을 조동화와 교체하면서 이호준이 보던 1루에 박정권이 들어오고, 박정권이 보던 우익수는 조동화에게 넘긴다. 따라서 이호준이 들어가던 4번 타자 포지션에 조동화가 들어간다. 그리고 후반에 경기의 흐름을 바꿀 만한 결정적인 기회가 4번 타자 조동화가 타석에 들어올 무렵 많이 걸리곤 한다.[26] 그 후 이진영을 상징하는 번호가 되었다.[27] 당시 마구마구의 엘리트 카드 중에서는 최상급이었다.[28] 야구선수 중에선 굉장히 희귀한 편이다. 야구선수들은 운동선수 중에서도 식사량이 많은 축에 속한다. 게다가 저 정도면 일반인들 중에서도 소식좌에 속한다.[29] 부모님이 계란 장사를 하셨는데 조동화는 계란을 싫어했고 덕분에 조동찬이 계란을 많이 먹어 덩치도 형보다 더 커졌다는 후문. 또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조동화의 식사량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30] 그러나 2014 시즌 도중 정형식은 음주운전으로 인해 임의탈퇴되었으며, 모상기, 모상영 형제는 시즌 종료 후 둘 다 방출당했다.[31] 조동찬은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야구 대표팀에도 선발됐으나 도하 참사로 금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이 당시 룸메이트가 박재홍이었는데 SK 원정경기 룸메이트가 조동화라서, 이번 국가대표 룸메이트로 박재홍이 원해서 지명했다.[32] 조동찬은 당시 부상으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해 삼성이 우승했기 때문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33] 사실 당시에 이호준을 제외한 대다수의 선수들이 가을 야구에 강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 두명은 시즌 도중에 평범한 성적을 기록하다가도 가을야구만 가면 미친 활약을 해줬기에 이러한 별명들이 붙었다.[34] 팬들은 내야홈런이라고 한다.[35] 2010년 시즌 무려 3홈런이나 기록하면서 이 수치는 일단 역전되었다. 여담이지만 정규시즌 통산 홈런 중 하나는 만루홈런이다.[36] 이 해 타율이 3할 1리에 도루가 무려 20개였다. 이용규가 무등야구장에서 수비하다 발목이 아작난 이후에도 기아가 외야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김원섭의 공이었다.[37] 그것도 국내 야구장 중 가장 큰 잠실구장에서 가장 먼 중앙담장을 한참 넘겼다. 추정 비거리는 133m 상대투수는 당시 최고의 왼손 불펜이던 이승호였다.[38] 나머지 1타석이 8회말 2아웃 상황이었는데, 2루 주자 김강민이 견제사를 당하여 3아웃이 되면서 공수교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경기를 SK가 승리하면서 9회말 공격은 넘어가지 않게 되어 그대로 조동화의 해당 타석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