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관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
촉망받던 고졸 강속구 투수였다. 최고구속 140km/h만 넘어도 강속구 투수 소리를 듣던 1980년대 후반에 최고 구속 150km/h에 근접한 강속구를 뿌렸으며, 강속구와 함께 당시에는 희귀했던 낙차 큰 파워 커브를 주무기로 타자를 농락했다.
2. 상세
2.1. 고교 시절
대구고등학교 야구부의 에이스로, 1987년 대붕기에서 4경기 완투를 하며 모교에 우승기를 바쳤으며 본인은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대구경북 지역을 대표하는 유망주로 연세대 진학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삼성 라이온즈의 집요한 구애에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프로로 뛰어들었다. 계약금은 1500만 원.2.2. 1989년
1989년에 데뷔한 그는 당시 투수코치였던 미국인 마티 드메리트에게 파워 커브를 전수받고, 한 해 내내 다듬으면서 절치부심한다.2.3. 1990년
4월 8일 개막전[1]에 선발등판해 9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승리투수가 된다.[2] 이후 선발과 구원을 오고 가면서 12승 18세이브 ERA 2.81의 성적으로 그해 삼성 마운드의 명실상부한 주축을 담당했다.당시만 해도 고졸 출신의 활약이 드물었기에 더욱 인상적인 성적이었다. 그러나 1년 전의 프로 데뷔 때 이미 많은 이닝을 던졌기 때문에, 1990 시즌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신인왕 자격을 얻지는 못했다. 참고로 이 해의 신인왕 후보로는 김상엽의 팀동료 투수인 이태일이 노히트 노런 등으로 주목받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 신인왕은
그해 포스트시즌에서는 영광과 좌절을 모두 맛보았다. 빙그레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 세이브를 시작으로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2승[5]을 기록하면서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끈다. 특히 대구에서의 플레이오프 3차전 마지막 순간을 본인이 직접 장식하면서 포효하는 장면은 백미.
그렇지만 LG와의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는 4회부터 구원등판해 무실점으로 호투하다가 9회 2사에서 김영직에게 동점타를 허용했고,[7] 4차전에서는 선발투수로 등판하지만 부진한 투구를 보이면서 조기강판당하고 팀도 그 경기에서 최종 탈락한다.
2.4. 1991년
1990년에 너무 굴려진 탓인지 1991년에는 신통치 않은 성적을 냈다. 특히 1991년 시즌을 앞두고 전지훈련이 한창이던 어느날 술에 취해 한밤중에 숙소에 돌아온 룸메이트[8]가 곤히 잠들어 있는 김상엽의 발을 밟는 사고를 냈다. 다행히 예상보다 회복이 빨라 4월 5일 개막전[9]에는 나설 수 있었지만[10] 이후에 일종의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과 유사한 증세가 생겨 격년제 에이스라는 달갑지 않은 딱지가 붙게 되었다.[11]특히 5월초에, 당시 선두다툼을 하고 있던 해태와의 3연전에서[12] 혼자 2패를 당한 것은,[13] 본인에게나 팀에게나 치명상이었다.[14] 3연전 첫경기인 5월 3일 경기는 당시 KBS '금요나이트'라는 이름의 지상파 중계였는데, 이 경기에서 선발투수 이태일이 3회초 2실점 후 조기강판한 상황에서 등판한다(팀은 3대2 리드 중). 3~4회에는 투구가 괜찮았는데, 5회 접어들면서 갑자기 스티브블레스 증후군으로 제구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아웃카운트 하나 못 잡고 볼넷 3개를 연달아 허용한 상태에서 강판된다(무사 만루). 이후 다음투수 최일언이 주자 2명의 득점을 허용하면서 점수는 3대4로 역전이 되고, 경기 종반에는 해태 김종모가 3점홈런을 때리면서 점수차를 더욱 벌린다. 김상엽은 패전투수 기록. 그리고 이틀 후 어린이날 경기에서는 선발투수로 등판하지만 역시 부진하면서 또 한번 패전투수가 된다.[15]
이후 조정기를 거쳐 5월 30일 잠실 OB전에 선발등판하지만, 단 1이닝도 버티지 못하고 강판된 후 2군으로 강등된다. 그리고 7월 5일 인천 태평양전에 선발등판해 7이닝 1실점 호투로 승리투수가 되면서, 개막전 승리 후 꼭 3개월만에 승리투수가 되는 감격을 누린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스티브블래스 증후군에 따른 후유증으로 들쑥날쑥한 투구가 계속된다. 다만 9월 12일 대구 OB전에서 최고 151km를 뿌리면서 6이닝 2실점 승리투수를 기록했는데, 이로 인해 포스트시즌에 대한 기대감도 높인다.[16]
그리고 기대대로 그해 포스트시즌에서는 좋았다.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는 패전처리로 등판하지만, 4차전에는 3대2로 쫓긴 7회 1사에 등판해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하고[17]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끈다.경기 마무리순간은 영상 10:30~10:40[18][19]
그리고 빙그레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 선발등판해 9이닝을 1실점으로 막지만, 경기는 무승부로 진행되어 연장에 돌입한다.[20] 첫타자는 잘 잡았지만 다음타자 전대영의 평범한 내야땅볼을 1루수 신경식이 어설프게 처리하다 실책을 범하고 주자 1루 상황에서 강판당한다. 팀도 패배.[21] 그리고 이틀 휴식 후(...) 플레이오프 4차전에 선발등판한다.[22][23] 6회까지는 2실점으로 막았지만, 7회들어 집중 3안타를 맞고 강판당한다.
이날 경기에서 아쉬웠던 장면은 2번 있었다.
첫번째는 4회초 1실점 상황이다. 1사 3루에서 투수 앞 땅볼에 3루주자가 홈으로 돌진하는 상황에, 홈을 포기하고 타자주자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김상엽이 바로 홈송구를 했으면 (포스아웃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긴 해도 아웃을 노려볼 만 했고, 실제 경기를 중계하던 하일성 위원도 그 순간 탄식과 함께 김상엽의 소심함(?)을 지적한다.[24] 만약 이때 실점을 하지 않고 경기 후반까지 1점차가 아닌 2점차 리드를 유지했다면, 김상엽이나 삼성 측에서 받는 압박감은 덜했을 것이다.
두번째는 삼성이 3대2로 리드 중이었던 7회초, 집중 3안타로 동점을 허용하는 상황이다. 특히 7회 상황이 두고두고 아쉬웠던 점이, 선두타자 전대영의 출루 허용 이후[25] 다음타자 조양근을 상대할 때 실투 때문이었다. (빙그레가 1점 뒤진 상황에서) 당시 8번타자 조양근은 100% 번트를 시도했지만[26] 다 실패하면서 노볼 투스트 상황.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김상엽은 한가운데 직구를 던지다가 안타를 허용한다. 당시 해설을 맡았던 하일성은, 조양근의 안타 순간, 이건 실투라는 또 한번의 탄식섞인 함성을 지른다.[27] 그리고 무사 1-3루 상황에서 김상국을 상대로도 먼저 2스트라이크를 잡았지만, 바깥쪽 먼 공을 김상국이 허리가 빠진 상태에서 행운의 안타로 연결하면서 3대3 동점. 김상엽은 강판된다.
이후 최일언ㅡ이태일ㅡ성준이 잇달아 등판하지만, 빙그레는 7회에만 8득점을 기록하면서 빅이닝 완성.[28] 그리고 삼성은 최종탈락이 확정된다.[29]
다만 김상엽은 포스트시즌에서의 호투를 바탕으로 다음시즌에 대한 기대치를 높였다.
2.5. 1992년
4월 4일 개막전[30] 선발투수로 등판해서 완봉승을 거두는 등 4월에만 3승(모두 선발승)을 거둔다.[31] 그렇지만 그해 마무리투수로 낙점된 김성길의 부진으로 인해 5월초부터는 마무리로 전향한다.[32] 이후 선발과 마무리를 번갈아 맡았는데, 당시 세이브 2위를 기록하기도 하였지만, 마무리를 맡은 것 치고는 평균자책점이 높았다.그렇지만 마무리로서 인상적인 장면도 몇번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5월 17일 인천 태평양전.[33][34] 선발투수 류명선이 8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하면서 완봉을 눈앞에 두었지만 9회 시작하자마자 무사 1-2루를 허용하면서 마운드를 김상엽에게 넘긴다. 그때까지 점수는 4대0으로 삼성이 리드 상황. 태평양은 대타로 좌타자 이광근을 내세운다. 김상엽은 등판하자마자 이광근을 상대로 투볼 노스트라이크를 허용하면서 몰리고, 어쩔 수 없이 3구 한가운데 직구를 던지지만 이광근은 안타성 타구를 날린다. 그 순간 2루수 강기웅이 그림같은 다이빙캐치로 타구를 잡아냈고 내야진[35]이 바로 2루와 1루에 송구하면서 삼중살에 성공한다.영상 0:31~1:04[36][37][38]
6월 6일 대구 빙그레전.[39] 당시 빙그레는 굳건한 선두에 시즌초부터 삼성과의 맞대결에서도 압도적인 우위였다. 일단 그 경기는 5회까지 4대2으로 삼성이 리드 상황에서 선발투수 성준이 6회들어 선두타자를 출루시킨다. 타석에는 그해 홈런 신기록[40]을 세웠던 최전성기 장종훈.[41] 김성근 감독은 즉각 김상엽을 등판시켰고, 김상엽은 바로 장종훈을 유격수 앞 병살타로 잡는다. 이후 4이닝 무실점 세이브.19920607 한겨레신문 그리고 김상엽은 다음날도 8회에 구원등판해 1.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세이브를 거둔다.19920609 한겨레신문[42]
그해 포스트시즌에서는 부진했다.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 선발등판하지만 박계원에게 홈런을 허용하는 등 부진했고영상 0:25~0:39[43][44], 팀도 2패로 탈락한다.[45]
김성근 감독과는 삼성시절 사이가 좋았던 걸로 추측된다. 2008년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보면, 김감독이 취임하고 나서도 김상엽을 좋게 보았는지 무리를 시키지 않고 관리를 해 주었다는 대목도 있고, 인터뷰 중간중간 김성근 감독 관련해서는 은연 중에 믿음이 깔려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2.6. 1993년
4월 10일 개막전[46]에서 17-0 완봉승을 기록했다.[47]시즌 초반은 선발투수로 출발하지만, 그해 마무리투수로 낙점되었던 오봉옥의 부진으로 다시 마무리를 맡게 된다. 그러다가 마무리 타이틀을 반납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생기는데...
7월 22일 잠실 LG전[48] 9회초까지 삼성은 3대1로 앞서 있었고 마운드에는 김상엽이 버티고 있었다. 그렇지만 9회말 동점 허용 후 만루상황이 이어지고 타석에는 최훈재. 김상엽은 기어코 최훈재에게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고야 만다.19930723 동아일보. 이 경기가 더 임팩트있었던 것은, 평일 3경기연속 잠실구장 만원사례 경기, LG의 3연전 스윕, 그리고 당시 LG그룹 고위층에서 이 경기를 직관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참고로 이 경기 이후 김상엽은 은퇴할 때까지 전문 마무리투수로는 다시는 나서지 않는다.[49]
이후 남은 시즌은 완전히 선발투수로 전업하는데, 그때부터 비로소 진가가 나온다. 최고구속 150km 이상에 두자릿수 이상 탈삼진도 심심찮게 기록한다.
특히 그해 가장 하이라이트 경기는 9월 1일 대구 LG전. 당시 치열한 2위경쟁을 펼치던 LG를 상대로, 대구 만원관중[50] 앞에서 14탈삼진 완봉승을 거둔다.19930902 매일신문. 삼성은 이때 LG와의 3연전을 스윕하면서 2위경쟁에서 치고 나기기 시작했고, 결국 플레이오프에 직행한다.
시즌 최종성적은 13승에 탈삼진 170개로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탈삼진왕[51]에 올랐다.
포스트시즌에서는 호투 와중에도 아쉬움을 준다.
LG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1피안타 1실점 완투승을 거두지만, 4차전에서는 5회까지 무실점으로 막다가 6회에 무너진다.[52]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선발투수로 등판해 5이닝까지 무실점으로 역투하면서 그때까지 1대0으로 앞서가며 본격 삼성 라이온즈가 해태 타이거즈와의 한국시리즈 연패를 끊는가 싶었지만 6회 접어들면서 갑자기 제구력이 나빠지면서 연속으로 볼넷을 내주고 (무사 1-2루) 류명선에게 마운드를 넘기고 만다. 일단 6회 류명선은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7회 무너지면서 결국 해당 경기에서는 삼성이 패했다. 4차전에서는 다시 선발등판해 승리투수[53]가 되기는 했지만, 몸상태(허리)가 정상이 아닌 게 눈에 보일 정도였고, 이것은 결국 다음 시즌에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한국시리즈 자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993년 한국시리즈 문서 참조.
2.7. 1994년
허리부상으로 1990년부터 이어져오던 개막전 출전(승리)이 불발된다.[54] 이후 4월 14일 LG의 잠실 홈개막 두번째 경기에, 시즌 첫 등판(선발투수)하지만 난타당하고, 4월말에 허리부상으로 2군 강등된다. 6월초에 다시 1군 복귀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시즌아웃된다.2.8. 1995년
개막 일주일 후인 4월 22일에야 시즌 첫등판을 치른다.[55]이후 본인의 시즌 최고 성적인 17승을 거두며 김상진과 함께 다승 공동 2위에 올랐다.[56] 평균자책점도 2.30으로 리그 4위.
당시 한일 슈퍼게임 발탁도 기대되었지만 엔트리에서 제외되는데, 이것 때문에 한동안 실의에 빠지기도 한다.[57]
그리고 이 시즌부터 김상엽의 직구구속은 하락하기 시작한다.
2.9. 1996년
시즌 전 연봉협상에서 1억원에 도장을 찍으면서, 삼성야구 역사상 첫번째 억대연봉자가 된다.4월 13일 개막전[58]에 선발투수 김태한을 5회 2사부터 구원등판해 4.1이닝 무실점으로 호투, 승리투수가 된다.[59] 그리고 시즌 홈 2번째 경기인 4월 17일 해태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하지만 부진한 투구를 보이고 이후 허리부상에 시달리다 시즌중반쯤에 시즌아웃된다.
이해 새로 부임한 백인천 감독과 극심한 불화를 겪었고, 6월에는 당시 아예 프로에 입단하지도 않았던 LG 1차지명자 임선동과 트레이드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2.10. 1997년
12승을 거두며 마지막 전성기를 보낸다. 특히 쌍방울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호투하면서 시리즈 MVP에 선정되기도 한다.[60]김시진, 이선희 등 삼성 라이온즈의 역대 에이스들이 포스트시즌만 되면 부진의 늪에 빠져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둔 것과는 달리, 김상엽은 예외적으로 큰 경기에 아주 강했던 투수였다. 포스트 시즌에서 거둔 성적이 무려 7승. 그러나 그를 제외한 나머지 동료 투수들이 포스트시즌만 되면 나란히 죽을 쑤는 바람에 가을 무대에서 그 엄청난 성적을 거두고도 한국시리즈 우승은 한 차례도 맛보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특히 1997년 포스트시즌 준 플레이오프에서 쌍방울 레이더스를 상대로 2승을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올라왔고 0:2 상황이었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도 LG 트윈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둠으로서 그 해 포스트시즌에서만 3승을 거두게 되었다. 그 기세로 5차전 5회까지도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이미 그의 어깨는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황이었고 결국 6회말 선두타자 동봉철의 번트를 잘 처리하지 못하고 출루를 허용한 뒤 다음 투수 전병호에게 마운드를 넘긴다. 그리고 전병호와 그의 후속 투수 성준이 8연속으로 안타를 허용하며 순식간에 역전. 1997년 삼성의 가을야구와 함께 김상엽의 포스트시즌 4승도 그렇게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에이스' 김상엽의 모습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2.11. 그 이후
투수진이 열악한 소속 팀 삼성의 특성상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는 무리한 투구로 혹사당한 결과 어깨/허리 부상으로 1998년 이후 전력에서 이탈했다. 1999년에는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하고 재활에만 전념하다가, 12월 삼성 라이온즈가 김동수를 FA로 영입하면서 보상 선수로 LG 트윈스에 이적하게 된다. 보상 선수로 지명된 당시 김상엽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이적 소식을 듣고 숟가락을 내던졌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팀을 위해서 온 몸 바쳐서 열심히 던졌는데, 그에 대한 결과가 부상과 다른 팀으로의 이적이었으니......[61]LG 트윈스로 이적한 후 절치부심하여 재활을 마치고 2000년에 복귀하여 그 해 4월 9일 잠실에서 친정 팀인 삼성을 상대로 선발 등판했으나, 3이닝 4실점으로 조기 강판당하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후 한화전에 등판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해 6월에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2001년에는 또 다시 어깨 부상이 찾아오면서 결국 마운드로 돌아오지 못한 채 LG에서 6.2이닝 2패만 기록한 후 그 해 9월에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통산 승수는 78승.
선수 생활은 허무하게 끝났으나, 성준, 박충식, 김태한 등과 함께 1990년대 중반의 암흑기를 누비던 삼성 라이온즈를 온몸으로 지탱한 등불같은 존재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팀을 위해 열심히 고생한 이 선수들은 모두 허무하게 삼성을 떠났다.[62]
[1] 인천 태평양전.[2] 9회까지 0대0 동점. 연장 10회초 이만수의 결승홈런으로 1대0 승리를 거둔다. 세이브는 홍성연.[3] 1990년 시즌 MVP, 신인왕 결정을 위한 기자단 투표는 한국시리즈가 벌어지기 전에 했다. LG의 정규시즌 우승에 대한 기여를 말하는 거라면 대략 맞을수도 있겠지만.[4] 아이러니하게도 김동수는 1999년 시즌 후 FA 자격으로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으며, 김상엽은 보상 선수로 LG 트윈스로 이적하게 되었다.[5] 모두 구원승[6] 3년 후인 1993년, LG의 플레이오프 5차전 승리를 확정짓고 팀을 한국시리즈에 올린 박충식이 나름 비슷한 포효를 보여준다.[7] 팀도 연장 12회 끝에 패배. 김상엽에 이어 나온 투수는 이태일과 정윤수.[8] 당시 1군과 2군을 왔다갔다했던 김상엽과 동갑내기 동기생이라고 한다. 이 조건에 부합되는 선수가 딱 1명 있긴 한데, 추측일 뿐이라 3자 입장에서 실명거론은 곤란하다.[9] 대구 롯데전.[10] 1사 만루 상황에서 앞선 투수 류명선에 이어서 등판한다. 만루상황은 투수 앞 병살타로 극복했고, 이후 2.2이닝 무실점 승리투수가 된다.[11] 4월 19일 잠실 OB전 9회 한점차 마무리 상황에서 이 증상이 처음 엿보인다. 사실 그 전까지는 개막전 1구원승 포함 5경기 연속 세이브 성공으로 페이스가 좋았다.[12] 3연전 직전까지는 삼성이 단독선두였다.[13] 팀은 김상엽의 2패 포함해서 3연전 스윕패.[14] 당시 공격 전부문에 거쳐 수위권에 위치했던 이종두가 4월 26일 부상으로 팀에서 장기이탈한 상태였다. 거기다 류중일과 강기웅도 4월말 부상(류와 강은 5월말에 팀에 복귀하기는 한다)인 상태에서, 팀 에이스 역할을 맡아야 하는 김상엽이 단순부진을 넘어 완전히 투구밸런스를 잃고 만 것이다.[15] 해태는 이 3연전을 모두 승리하면서 삼성을 제치고 단독선두로 나서고, 시즌 종료까지 단 한번도 1위를 놓치지 않고 우승한다.[16] 이 다음날인 9월 13일 삼성vs빙그레전이 KBS 지상파 중계였는데(일명 금요나이트), 당시 정도영 캐스터와 하일성 해설위원이 전날 김상엽이 최고 150km를 넘긴 것을 언급하면서 그의 투구를 칭찬하기도 한다. 참고로 9월 13일 본 경기에서는, 당시 타격왕 경쟁을 하던 이정훈(1963)이 3타수 3안타를 기록하면서 장효조를 제치고 타격 1위로 치고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김영덕 감독의 기록관리가 시작된다.[17] 최종스코어는 10대2. 8회말에 삼성 빅이닝. 이 경기에서 삼성 류중일이 포스트시즌 4경기 연속홈런 신기록을 세운다.[18] 당시 삼성 안덕기 사장이 경기 후 김상엽에게 직접 찾아가 극찬할 정도였다.[19] 4차전 경기 후 김상엽 인터뷰를 보면, 경기당일 아침부터 김성근 감독이 직접 김상엽 집에 전화를 걸어 김상엽의 컨디션을 확인하면서, 중요한 순간 기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20] 이 경기에서 상대투수가 송진우. 10이닝 1실점 완투승을 거둔다. 엠팍에서 종종 나오는 송진우 최고구속 150km설의 근거경기가 바로 이 경기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송진우의 이경기 기준 최고구속은 130km 후반~140km 초반이었다. 애시당초 송진우는 당시 방위복무 중이었다. 그런 선수가 150km를 던진다는 것은 경기를 보고 안 보고를 떠나서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다. 무엇보다 이후 송진우의 퍼팩트 일보직전 경기로 알려진 1991년 한국시리즈 3차전 경기영상만 봐도 송진우의 직구구속은 140km를 겨우 넘는 수준이다.[21] 이 경기 투구수가 124개였다. 플레이오프 4차전에 선발등판한 김상엽을 소개하던 하일성 해설위원이 직접 언급한 내용.[22] 지금 들으면 경악할 내용이지만, 당시 하일성 위원은 플옵 2차전에서 124개를 던진 게 그렇게 많이 던진 건 아니라고 언급했다. 이건 당시 한계투구수 기준이 지금과는 다른 걸 감안해야 한다.[23] 상대팀이었던 빙그레 한용덕은 1차전에서 완봉승하고 3일휴식 후 4차전에 등판해 완투승을 거둔다. 당시 7회초에 스코어가 10대3으로 벌어졌음에도 김영덕 감독은 끝까지 한용덕을 교체하지 않고 완투시킨다. 김상엽이나 한용덕 사례에서 보듯, 1991년 당시에는 투수보호 개념이 희미했고, 한계투구수 기준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게 문제없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하다.[24] 김성길 같았으면 안 그랬을 거라는 멘트와 함께.[25] 사실 전대영에게도 원볼 투스트라이크, 투수에게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안타를 허용한다.[26] 당시 조양근은 빙그레 팀 내에서 가장 번트를 잘 되는 타자였고, 특히 앞선 2차전에서 연장 10회 기습번트안타는 팀승리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27] 이 당시 조양근은 삼성에는 악몽같은 존재였다. 1차전 0대0 상황에서 조양근의 3루타를 시작으로 빅이닝 완성. 2차전 1대0 리드 상황에서 조양근에게 동점적시타 허용, 그리고 연장 10회 조양근의 기습번트 안타이후 김상국의 끝내기 희플(연장 10회에 조양근과 김상국을 상대했던 삼성투수는 김성길.). 이후 4차전 빅이닝이 된 7회 조양근은 언급된 안타 포함 한이닝 2안타를 기록한다.[28] 이로부터 6년 후인 1997년 플레이오프에서 데쟈뷰 상황이 펼쳐진다.[29] 4차전 최종스코어는 10대3 빙그레 승리.[30] 대구 쌍방울전.[31] 4월에 완봉 포함 3번의 완투도 기록.[32] 그해 6월 21일 펼쳐진 올스타전에도 동군의 마지막투수로 등판한다.[33] 일요일 경기였고 MBC 지상파 중계였다. 캐스터 임주완, 해설 허구연. 여담으로 이날 민자당 이종찬(1936) 의원이 연말 대선 당내경선 거부선언을 했는데,19920517 한국경제신문. 이 소식이 야구중계 도중 자막속보로 떴고, 중계 중이던 임주완 캐스터가 이를 간략히 언급하는 장면도 있었다. 옆자리 허구연은 말없이 가벼운 웃음소리만 연발.[34] 1992년 당시 MBC는 혹서기를 제외하면 주말마다 야구중계가 있었다(혹서기인 7~8월 주말경기는 오후 5시부터 시작인데, 이 시간대는 지상파 기준 일밤 등이 방송되는 황금시간대이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야구중계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캐스터 고창근, 임주완과 해설 김소식, 허구연이 로테이션을 도는 형태. 또 한 명의 메인캐스터였던 양진수 아나운서는 그해 안식년. 참고로 그때까지 송인득, 한광섭 캐스터는 메인중계를 맡지 못하고 보조중계 역할만 맡았다.[35] 2루수ㅡ유격수ㅡ1루수.[36] 링크된 유튜브 자막에 5월 16일 경기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잘못된 정보이다. 당시기사 링크.19920518 경향신문.[37] KBO 역사상 첫번째 끝내기 삼중살이다. 이후 2020년 기준 끝내기 삼중살은 강기웅건 포함해서 총 4번 기록된다.[38] 1992년 올스타전에서 강기웅은 감독추천선수 자격으로 출전한다. 경기후반 강기웅이 대타로 나오자,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KBS 이장우 캐스터가 '5월 17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까지 언급하면서 당시 강기웅의 삼중살을 극찬한다. 옆에 있던 하일성 해설도 당시 모 스포츠잡지에 실렸던 문구를 인용하면서 한마디 거든다. "인간이 보여줄 수 없는 플레이를 보여줬다."[39] 토요일 경기였고 MBC 지상파 중계였다. 캐스터 임주완, 해설 허구연.[40] 41홈런.[41] 거기다 당일경기 바로 직전 타석에서 성준을 상대로 홈런을 쳤었다.[42] 기사는 6월 9일에 작성되었지만, 6월 7일 있었던 경기결과이다.[43] 김상엽 입장에서 이 경기는 질 수 밖에 없었는 게, 그날 직구 최고구속이 140km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44] 반면 맞대결투수였던 롯데 박동희는 완봉승을 거둔다.[45] 이 준플레이오프는 당시 3루수 김용국의 엔트리 제외에 따른 삼성 선수들의 태업성 경기이기는 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은 해임된다.[46] 대구 쌍방울전.[47] 이 기록은 개인 최다점수차 완봉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48] 3연전 중 마지막경기(목요일)).[49] 물론 1996시즌 개막전 때 중마무리 승리투수 등 1996시즌에 한해 몇 번 긴급호출식으로 마무리등판을 하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그해 한정 아주 가끔이었다.[50] 이날은 평일이었다. 목요일.[51] 물론 그 이전에도 탈삼진 1위를 기록에 남기긴 했으나, 본격적으로 탈삼진왕을 시상하게 된 것은 1993년이 처음이다.[52] 참고로 4차전에서는 부상 조짐도 보였다. 투구내용도 5회까지 무실점이긴 해도 볼넷 남발에 꾸역투 그 자체.[53] 6이닝 2실점.[54] 김태한이 개막전(롯데전)에 선발등판해서 1실점 완투승을 거둔다. 이때 상대투수가 강상수. 즉, 강상수는 프로 데뷔전을 개막전 선발투수로 시작한 것이다.[55] 사직 롯데전. 7이닝 무실점.[56] 특히 해태전에서만 5승 무패를 기록한다.[57] 지금은 병역이 걸리지 않은 비시즌 국제대회를 선수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크지만, 당시는 이런 대회 참가 자체를 영광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 신성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1998년 방콕 아시아게임에서 전원 병역미필 선수들로 금메달을 따면서부터이다.[58] 잠실 OB전.[59] 김상엽 야구인생에서 마지막으로 거둔 개막전 승리투수 기록이다.[60] 준플레이오프 MVP는 1997년부터 신설.[61] 지금이야 삼성이 프랜차이즈 스타는 물론 가족을 초청하는 등 외국인 선수도 잘 대우해 주고 삼성 트레이닝 센터를 통해 부상/재활 선수들에게도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쓰고 있으나, 당시의 삼성은 쓸모없다고 판단된 선수는 가차없이 내치는 그런 구단이었다. 김상엽 이전의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김시진, 장효조, 강기웅, 김성래, 이만수도 그랬고, 김상엽과 함께 암흑기를 버텨낸 박충식도 결국 김상엽과 비슷한 시기에 부상을 입어서 재활 도중 FA로 영입된 이강철의 보상선수로 해태 타이거즈에 이적하게 된다. 박충식 항목에도 나와있듯 박충식, 김상엽 모두 큰 부상을 입은 상태라 설마 데려가겠니 싶어서 보호선수로 묶지 않았는데 해당 구단에서 보상선수로 덜컥 지명해버려서 프런트가 당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삼성 프런트의 추태를 끝장냈던 인물은 해태제국을 일궜던 코끼리아저씨.[62] 김상엽은 김동수의 보상 선수가 되어서 LG 트윈스로 가서 2001년에 은퇴, 박충식은 이강철 보상선수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해 2003년에 은퇴, 김태한은 김기태, 정경배, 김동수와 묶여서 SK 와이번스로 이적 후 2003년에 은퇴한다. 성준 역시 1999년 롯데 자이언츠에서 선수생활을 마치고 은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