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007f55><tablebgcolor=#007f55> | 현대 유니콘스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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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정보 | 선수단|등번호|유니폼|재계 라이벌 시리즈 | ||||
경기장 | 숭의야구장(1996~1999)|수원종합운동장 야구장(2000~2007)|원당 야구장(제2 홈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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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과거 인천 연고 야구팀(삼청태현)이 도원야구장[1]을 홈으로 쓰던 시절 관련 사건 사고 모음.아래 사건들을 보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2000년 SK 와이번스가 입성하기 전까진 인천지역 야구팬들의 상당수는 도원의 전사들이라 불리는 초강성 열혈성향이었다. 그 마산아재들과 견주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마산아재보다도 더 한 적도 많아서[2] 인천팀이 지면 그라운드에 빈병과 깡통 등 쓰레기를 던지는 것은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고 관중석의 의자를 뽑아서 집어던지거나 관중석에 불을 지르고 그마저도 모자라 그물을 타고 넘어 그라운드에 난입하는가 하면 때로는 선수를 향해 음식물까지 집어던졌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온다. 사실 그 마산아재들조차도 일단은 "아재"라고 불리는데, 도원은 '전사'인 점에서 이들이 마산아재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초강성 팬덤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3]
마산아재와 유사한 점은 인근에 산업단지가 있고 그 노동자들이 즐길 문화 생활이라고는 프로야구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인천이나 마산(창원)은 화이트 컬러 노동자보다 블루 컬러 노동자가 많고 문화시설도 인근 대도시인 서울이나 부산에만 국가의 지원 하에 지어져 프로 스포츠를 빼고는 향유할 문화 생활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그나마도 그 당시에 인천에는 프로축구팀도 없었고[4] 오랜 전통의 고교야구 명문 팀도 지역 내에 있어 야구에 대한 친밀도가 매우 높았다. 때문에 스포츠 열기가 야구에 집중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안 그래도 거친 해안도시에 즐길거리라고 야구팀은 하나 생겼는데 그 팀이 하필이면 지구상에 다시 없을 시즌 승률 1할대의 프로야구단이라서 날이면 날마다 지고 매 시즌 꼴찌 혹은 뒤에서 두 번째에 자랑할만한 슈퍼스타 하나 없는데다[5] 구단 운영도 개판에다 모기업마저도 자금력이 약한 기업들만 들어오는 탓에[6] 툭하면 모기업이 바뀌다보니 울분이 쌓인 야구팬들은 점점 과격해져갔고, 특히 사람이 많은 주말엔 매번 시비가 붙거나 하여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실제로 이 시기에 숭의야구장에서는 음식물이[7] 투석전 마냥 날라다니고 그물은 관중 보호망이 아니라 등반대의 역할을 하는 날이 많았으며 쓰레기통과 의자는 요긴한 땔감으로 쓰이는 날이 빈번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현대 유니콘스가 들어온 뒤 우승하여 좀 가라앉...을 뻔했는데, 2000년 현대의 연고지 이동으로 인해 기존 인천야구팬들이 빠져나간 뒤 한동안 인천 야구팬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잠시 침체기를 맞게 된다. 2000년 프로야구 개막 후에 인천 숭의구장에서는 몇 년만에 온 팬들이 "여기 현대 구장입니까?" , "현대가 없네요?" 라고 묻자 다들 "현대가 누구요?" "아 ~ 야반도주팀이요?" 이렇게 무시했다고 한다.[8] 사실 K리그판에서 북패륜, 남패륜 이렇게 하는 것도 여기 야구판쪽에서 패륜 현대라고 한 게 먼저였다.[9]
이후 SK 와이번스가 조범현 감독의 지휘 아래 2003년 구단 사상 최초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하고, 김성근 감독 체제에서 2007년 ~ 2010년의 4년 동안 1121의 호성적을 찍으면서 다시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여 신규팬이 유입된 현재는 인천야구 팬덤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졌다. 지금은 그런대로 얌전한 상태다. 어디까지나, 저 이야기는 2012년 이전이고 현재 인천야구 팬덤은 얌전한 상태가 되었다.
2. 목록
2.1. 김동철 자살 사건
김동철은 인하대 재학 중 중퇴하고 삼미에 입단했을 정도로 촉망받는 선수였으나 프로 입단 첫 해인 1982년 32경기(15선발)에 출전하여 1승 8패 평균자책점 7.06[10]의 부진한 기록만을 남기고 시즌 후 방출되었다. 이후 현역으로 군대에 입대하여 야구계에서 자취를 감춘 김동철은 이듬해 프로야구 시즌 개막을 하루 앞둔 1983년 4월 1일에 철도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2. 삼미 선수단 청문회 요구 사건
1985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시범경기에서 3승 1무 1패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롯데 자이언츠와의 부산 개막전에서 당대 최강의 에이스 최동원을 상대로 5:1로 승리를 거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삼미는 중위권 도약을 자신하며 시즌을 맞이했다.그러나 1985년 4월이 기나긴 재앙의 터널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 다음날인 3월 31일 구덕 롯데전부터 완봉패를 당하더니 근 한달간 승리와 인연을 맺지 못하며 무려 18연패라는 신기록을 세우고 말았다.[11] 이것은 11연패 기록을 +7연패 늘린 기록. 아이러니하게도 이것 역시 바로 전 해인 1984년에 삼미가 세운 기록이었다.
삼미의 기록적인 부진에 단단히 화가 난 인천 야구팬들은 도원구장 앞에서 구단 버스를 가로막고 김진영 감독의 청문회를 요구함과 동시에 연패의 주범 중 한명이었던 장명부를 퇴출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결국 삼미 구단은 김진영 감독에게 휴가 명령을 내렸고 신용균 감독대행 체제로 잔여 시즌을 치르기로 했다. 결국 4월 30일 MBC 청룡과의 홈경기에서 4:1로 승리함으로써 기나긴 재앙이 마무리됐다. 삼미의 18연패 누적 과정과 빡친 아재들의 시위 장면, 눈물겨운 시즌 2승째 경기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자.
게다가 18연패를 탈출한 그 다음 날인 1985년 5월 1일에 삼미 구단이 청보식품으로 매각된다는 소식이 발표됐다.
김진영 감독은 이후 다시 돌아와서 청보 핀토스의 초대 감독이 됐지만 결국 감독직을 해임당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도원구장 1루 감독석에 앉은 사람은 인프라 밖에 모르는 그 분.[12]
2.3. 파울망 타기
[13]단일 사건이라기보다는 경기 지겠다 싶으면 간간히 일어나던 일종의 관례행사(?)로, 특히 역전 당할 때 그랬다. 파울망 타기 말고도 아예 경기 도중 선수석에 직접 가는 경우도 있었다. 마산아재의 패시브 스킬인 삼겹살과 소주무장과 비슷한 것.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하기 전까지, 즉 삼미-청보-태평양 시절에는 이기기보다 지는 경기가 더 많은 게 당연했고, 술취한 아버님들의 온갖 행패가 있었던(불타는 쓰레기통 투척이나 소주팩(혹은 병) 투척 등)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만취하신 어느 어르신이 맨 위 왼쪽의 사진처럼 꼭 순결하기 짝이 없는 하얀색 순면 100% 삼각 빤스만을 입고 파울망을 타고 올라가서 경기가 이 따위냐!!!!!!!느니, 내가 항상 야구장 올 때마다 진다!!!!!와 같은 내용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그 유명한 도원구장 파울망 타기 사건이다. 다른 어르신들의 환호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진다. 물론 이때엔 경기가 중단되고 경찰이 출동해 아저씨를 끌어내야만 했다. 지금이야 웃긴 추억이지만 야구를 즐기러 간 사람들에게는 민폐 중의 민폐. 심지어 알몸으로 몸에 페인팅을 하며 응원하는 어르신도 있었다. 그리고 알몸으로 파울망도 탔으며, 보기 민망할 정도로 엉덩이로 응원을 하기도 했다.[14]
2.4. 해태 타이거즈 팬 컵라면 투척 사건
1980년대 후반 해태팬이 드글거리던 시절 숭의야구장은 1루까지도 해태팬이 앉곤 했는데[15] 어느날 태평양이 심하게 지던 경기에서 1루에 앉은 한 해태팬이 나가면서 "해태 화이팅!"이라며 염장을 질렀고 그걸 본 어떤 아저씨가 먹던 사발면을 그대로 집어던졌다. 라면이 해태팬을 정통으로 맞혀버렸고 라면을 된통 뒤집어 쓴 해태팬은 주변 태평양 팬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퇴장했다고 한다. 기사 같은 건 없고 그냥 카더라 통신.2.5. 1989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 관중 추락 사고
1980년대 후반 숭의야구장은 건물 자체가 높지 않아서 맘만 먹으면 벽을 타고 올라가서 관중석으로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였다. 뭐 숭의구장 우측 외야 너머 광성고등학교 동산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관중도 있을 정도였으니. 거기다가 구장에 지붕이 설치된 것도 아니라서 이렇게 들어온 관중들 중에서는 구장 최상단의 난간에 앉아서 경기를 관전하는 도원 전사들도 부지기수였다. 그 시절의 구장답게 당연히 안전장치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었다.문제는 1989년 인천야구의 첫 포스트시즌에서 벌어졌다. 난생 처음 포스트시즌을 구경하는 인천의 야구팬들이 몰려들 것은 당연한 이치고 표를 못 구한 일부 관중들이 담치기를 할 것도 자명한 사실.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이 벌어진 1989년 10월 11일, 인천 야구장을 메운 관중 중의 한명인 40대의 강 모씨가 구장 최상단 난간에 앉아서 경기를 보다가 4회 초 류중일의 동점 적시 2루타가 터지는 순간 흥분하여 중심을 잃고 구장 바깥쪽 7미터 바닥으로 추락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해당 관중은 머리를 다치고 중태라는 신문 기사가 났는데 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89년 10월 12일자 스포츠 면을 참조하자.[16]
파울망 타기를 비롯한 여러 사건이 나온 기사
1989년 10월 12일자 경향신문 스포츠면 9면 오른쪽 구석에 이 사건이 올라왔다.
2.6. 1989 플레이오프 3차전 관중 난동 사건
1989년 태평양 돌핀스는 인천 연고팀 중 최초로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꼴찌만 밥먹듯 하던 가난한 약체팀이 별안간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도 대단한데 그 해 준플레이오프에서 무려 삼성 라이온즈를 2승 1패로 격침하고[17] 당대 최강팀이던 해태 타이거즈와 맞붙는 플레이오프로 진출했기에 인천팬들의 기대치는 그야말로 사상 최고 수준으로 폭발하고 있었다.그러나 태평양이 상대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10월 14일 광주 1차전에서 1-10으로 대패했고 다음날 열린 광주 2차전은 0-1 패. 그런데 2차전에서 문제가 터졌다. 태평양이 0-1로 뒤지던 8회 1사 1,2루 상황에 해태 선발 조계현이 태평양 타자 원원근에게 볼 3개를 연거푸 던졌다. 볼 하나만 더 들어온다면 1사 만루가 되는 상황. 그런데 이날 구심을 맡은 이일복 심판[18]이 살짝 낮게 들어온 조계현의 4번째 공을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는 바람에 볼카운트가 3볼 1스트라이크가 됐다.
그러자 김성근 당시 감독이 득달같이 달려나가 이일복 심판에게 볼이 낮았다며 어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원원근은 한가운데로 들어온 5구를 받아쳤지만 1루수 앞 땅볼이 됐고 이는 3-6-3으로 이어지는 리버스 더블플레이가 됐다. 결국 이 찬스를 살리지 못한 태평양은 경기에서 지고 말았고 김성근 감독은 경기 후 "원원근 타석 때 이일복 심판이 오심을 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안그래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인천팬들은 "인천에서 두고 보자"며 이를 박박 갈았다.
10월 17일 플레이오프 3차전이 열린 인천야구장 3루 홈 관중석[19]에는 "이일복 심판 영구제명하라"는 현수막이 등장했고 이 현수막의 철거 문제를 두고 구단 측과 관중들이 옥신각신하면서 경기가 10분 늦게 시작됐다. 2회 해태가 3점을 먼저 내면서 앞서 나가자 김응룡 감독은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를 끝내버리기 위해 에이스 선동열을 4회부터 등판시켰는데 이 때 인천팬들의 불편한 심기를 폭발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선동열은 4회말부터 6회말까지 태평양 타자 8명을 모조리 삼진으로 돌려세웠는데[20] 그 순간 3루 관중석에서 그라운드를 향해 돌과 빈 깡통, 소주병이 마구 날아들었다. 어떤 관중은 폭죽에 불을 켜서 해태 야수들을 향해 집어던지기도 했다. 그러자 김응룡 감독은 수비에 나서는 야수들에게 헬멧을 쓰고 그라운드로 나가게끔 했고 관중의 오물 투척이 그칠 줄을 모르자 선수들의 안전이 우려된다며 선수들을 덕아웃으로 철수하기까지 했다. 있는대로 화가 난 태평양 팬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포수 뒤편 지정석에서 1루 해태 관중석을 향해 오물을 마구 던졌고 가만히 있지 않았던 해태팬들도 같이 오물을 던지며 맞대응했다. 오물 투척전이 사그러지자 이번에는 한 관중이 그물망에 불을 질렀고 이 때문에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러한 난리통 끝에 경기는 태평양의 1-5 패배로 끝났고 경기 후에도 오물 투척은 계속 됐다. 태평양 선수들은 깡통을 맞아가며 관중에게 인사를 해야 했고 해태 선수들은 경찰의 엄호를 받으며 야구장을 떠났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이 당시의 상황이 잘 나와있는 당시 동아일보 기사와 한국프로야구 난투사 기사를 참조할 것.
2.7. 삼성 라이온즈와 현대 유니콘스 트레이드 사건
재계 라이벌 시리즈 라고 불리는 두 팀은 프로야구 창단 시기 때부터 으르렁 거리기 시작했는데 마침내 사건이 터진 것이다. 현대는 1995년(전년)도 팀인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받아 선수들을 중용하는데 힘써왔다. 그러나 태평양은 김홍집, 최창호, 정명원 등 우수한 투수 위주로 승부를 내는 반면, 타자들 타격이 너무 시망이였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선수가 윤덕규, 김경기, 김동기로 대표되는 Y2K 타선 클린업 트리오가 있었지만 하위타선은 염경엽[21], 손차훈 등 1할 타자였고, 테이블 세터 김인호와 이희성은 발은 그나마 괜찮은데 볼 고르는 능력도 극악이었다.[22] 그래서 클린업을 빼면 시체였다. 그 뒤를 이어줄 수 있는 게 94년도 데뷔한 이숭용[23], 권준헌[24] 둘 뿐이었다. 나머지는 청보-태평양을 거친 노장들이자 역시 홈런이 아닌 단타 생산이 많은 타자들이였다. 결국 태평양 시절 물방망이가 그대로였던 현대는 한국시리즈에 겨우 진출했지만 당대의 최고 언더스로 투수 이강철에게 농락당하며 해태 타이거즈에게 8번째 우승컵을 넘겨주고 만다.이런 물방망이에 염증이 난 현대는 마침 삼성과의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현대는 이희성과 최광훈을, 삼성은 강기웅을 교환하는 맞트레이드를 실시하는데 언론들은 충공깽을 해버렸다. 강기웅 본인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렇게 들은 강기웅은 현대로 가지 않겠다고 두문불출을 하고 말았다.[25] 이렇게 임의탈퇴 형식으로 은퇴를 하고 말았다. 결국 박종호를 영입하기 전까지 삼성의 2루수는 그야말로 블랙홀이였다.[26] 트레이드로 데려온 신명철도 잠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렇데 단행한 트레이드 결과는 볼 것도 없는 lose-lose 트레이드였다. 현대는 트레이드로 얻은 소득이 없었고 삼성은 이희성과 최광훈 모두 별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 하고 방출되어 사라졌다. 이렇듯 양 팀의 트레이드가 완전 실패로 끝나면서 삼성은 현대가 해체될때까지 절대로 트레이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27]
2.8. 현대 유니콘스의 기습적인 연고 이전
2000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해체되었고 SK그룹은 쌍방울의 선수들을 모체로 하는 SK 와이번스의 창단을 결정한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해체 과정은 해당 문서 참조.) 동시에 SK는 연고지는 서울로 할 것을 KBO에 강력히 요구한다. 그러나 서울에는 이미 두 팀이나 있을 뿐더러, 국내의 모든 스포츠팀들이 욕심내어 마지않을 서울 연고를 신생팀에게 준다는 것은 기존 구단들로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KBO 역시 기존 구단들의 입장을 수용하여, SK는 결국 서울 또는 수도권 연고를 희망한다며 한발 물러난다. 이는 SK그룹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수원시를 염두에 둔 판단이었을 것이다.이에 KBO는 SK에 지역권을 양보하는 기존 구단에는 서울 또는 기타 도시를 개방한다라고 결의하는데, 어느 구단이 서울을 두고 기타 도시로 가겠는가? 이는 사실상 기존 회원사에게 서울 연고를 허락한다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이에 현대는 수원 지역을 SK에게 개방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결의에 따라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결정한다. 이런 터무니없는 결의에 당연히 나머지 회원사들은 분노를 쏟아냈고, 특히 삼성 라이온즈의 당시 한행수 사장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프로야구 원년 회원사로서 그동안 한국프로야구의 발전에 기여한 노력을 생각하면, 재계 라이벌인 현대는 오히려 자금력을 앞세워 프로야구의 질서를 해치고도 서울 연고라는 엄청난 혜택을 받게 되었으니 당연히 화가 났을 터. 지역권을 침해받게 생긴 LG나 두산보다 오히려 삼성측이 가장 반발했다는 상황 때문에 삼성도 서울 연고를 탐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퍼지기도 했다.[28][29]
SK 역시 이 결의에 즉각 반발했는데, "가장 먼저 서울 연고를 요구한 건 SK인데 왜 현대가 서울로 가느냐"는 논지였다. 하지만 이미 SK의 창단이 결정된 상황에서 KBO는 더이상 급하지 않았다. KBO는 이사간담회를 열어 그 결과를 전화로 구두 통보하는데, 그 내용은 가입금(250억 원)에 추가로 200억의 권리금을 낸다면 서울 연고를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레이더스를 인수하기 싫어서[30] 해체를 지켜본 SK가, 200억이라고 선뜻 내놓을 리 없었다. 결국 SK는 서울 연고에 대한 미련과 수원 연고에 대한[31] 이해관계 때문에 KBO와 수 차례 갈등을 빚은 끝에, 현대가 떠나서 비게 되는 인천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연고 이전에 대한 옹호론과 비판론은 현대 유니콘스/연고 이전 문서를, 이로 인한 팬덤의 분열 과정은 삼청태현 문서를 참조.
[1] 야구장 앞에 도원역이 있고 야구장의 주소가 중구 도원동이어서 도원야구장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정식 명칭은 숭의야구장이었다. 2008년 숭의운동장 인근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야구장은 없어지고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웃터골(현 제물포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된 인천야구 홈 그라운드의 명맥은 도원야구장을 거쳐 현재 인천 SSG 랜더스필드(문학야구장)가 이어가고 있다.[2] 인천 연고팀인 삼청태현은 현대 유니콘스부터 역사가 바뀐 것일 뿐 KBO 리그 초창기 대표적인 만년 꼴찌였다. 1982년 원년에는 시즌 승률 0.188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고 1985년에는 리그 최다 연패 기록인 18연패를 당하는 등 원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바닥을 박박 기었다. 가난한 약체 돌격대 쌍방울 레이더스나 KBO 리그 통산 최다 꼴찌의 주인공 롯데 자이언츠도 있었지만 리그 초창기 만년 꼴찌 이미지는 항상 인천팀에 씌워져 있었다. 그랬기에 팬들도 더 광적인 사람들 위주로 움직였다.[3] 다만 예전같은 파괴력은 이제 없지만 어찌됐든 NC 다이노스 출범 이후 현재까지 꾸준히 열혈 팬덤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마산아재, 삼성왕조로 부활한 대구아재들과 달리 도원전사들은 2000년 엉덩이에 뿔이 난 유목민들의 야반도주를 기점으로 사실상 맥이 끊겼기 때문에 인지도면에서는 마산아재들이 더 널리 알려지긴 했다.[4] 명목 상으로는 유공 축구단이 인천 연고 프로축구팀이었으나 그저 명목상 연고팀일 뿐이었고 그마저도 1990년 서울특별시로 연고지가 굳혀지고, 1996년 도시연고제 도입 후로는 부천시에 정착, 목동운동장과 부천종합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썼기에 인천 축구 역사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K리그의 인기는 2002 월드컵 때를 제외하면 프로야구에 한참 못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온전한 의미의 인천 연고 프로축구팀 역사는 사실상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부터 시작된다.[5] 장명부나 임호균 정도가 그나마 삼미가 내세웠을 만한 전국구급 스타였다. 그러나 임호균은 1984년 롯데로 트레이드 됐다가 나중에 인천으로 다시 온다. 그나마 이후 김경기가 나름대로 스타가 되었다.[6]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 모두 모기업의 자금난이 구단 매각의 결정적 원인이 됐고 실제로 야구단을 매각한 후에도 모기업의 경영난은 쉽게 해결되지 않아 결국 삼미와 청보 모두 부도가 났다. 태평양 돌핀스는 모기업 아모레퍼시픽이 화장품업계 순위 1위의 꽤 탄탄한 대기업이었지만 선제적 구조조정 차원에서 야구단이 팔렸다. 그때 야구단 매각을 주도했던 사람이 현 아모레퍼시픽 회장인 서경배. 신격호 남동생인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의 작은사위로도 유명하다. 참고로 신춘호 큰사위가 박재명 천일고속 회장의 사촌형이다. 야구단 매각대금이 야구단 인수대금보다 커서 유일하게 시세차익을 거두었다.[7] 당시 청보 핀토스의 모기업이던 청보식품에서 자기네 회사가 만든 라면을 야구장에 온 관객들에게 자주 실탄 보급나눠 주었다고 한다. 다만 그걸 투석전에 써서 문제지.[8] 즉, 연고지를 이전한 현대를 그대로 응원하는 인천팬, 현대에 배신감을 느껴 SK팬이 된 인천팬, 그리고 연고지 이전 충격에 야구 자체를 끊어버린 인천팬 이렇게 셋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의 경우에는 가수 김광진이 있고 두 번째의 경우는 지상렬,이혁재, 염경환이 있으며 세 번째의 경우에는 지금은 축구 해설 위원으로 있는 장지현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삼청태 문서 참조.[9] 안양 LG가 서울로 연고 이전하고 FC 서울이 된 뒤 패륜이란 멸칭이 붙은거에 야구 팬들은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나마 SK 와이번스 팬들이 이들 심정을 잘 이해하는 이유다.[10] 2021년 현재까지도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 중 역대 가장 높은 평균자책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11] 이 기록은 현재까지 KBO 리그 한 시즌 최다 연패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 시즌 최저 승률(1982년 0.188), 기별 최저 승률(1982년 후기리그 0.125)과 더불어 삼미가 세운 3대 부진 기록의 대표작. 2020년 한화 이글스가 18연패를 당하며, 한 시즌 최다 연패 타이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NPB에서도 이 말도 안되는 기록을 가진 팀이 있으니, 바로 다름아닌 치바 롯데 마린즈. 1998년에 이 기록을 세웠는데 당시 최다연패 기록 갱신이었으며 이 기록은 지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12] 여담으로, 이 때의 문제는 컴투스프로야구2021에 2022년 3월 26일자 문제로도 나왔었다.[13] 2020년 2월 13일 방영된 KBS '다큐 인사이트 - 모던코리아' 왕조 편에서 나온 장면. 당시 청보 핀토스 홈경기에서 분노한 한 관중이 하얀색 순면 팬티를 입고서 파울망을 타는 모습이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광주 연고의 해태 타이거즈를 주제로 했지만 여러 구장의 관중 난동 장면이 나온다. 아재가 파울망을 타는 이 영상 대목에 나온 '고려예식장'이라는 내야펜스 광고나 관중석 상단의 구단 깃발에서 이 영상의 배경이 인천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고려예식장은 주안역 남광장 쪽에 있던 대형 예식장이었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인천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던 결혼식 명소였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과거에 예식장으로 쓰던 건물이 그대로 있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이트클럽이나 기타 다른 업체들의 건물로 쓰여왔고 현재 용도 또한 예식장이 아니다.[14]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삼미 슈퍼스타즈 편에 이야기 친구로 출연한 지상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도원구장에는 이 방면(?)으로 유명한 일명 '고릴라 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15] 이는 당시 해태 타이거즈 팬의 숫자가 워낙 많았던 것도 있고 인천지역에 전라도 출신 출향 거주민들의 숫자가 충청도 출신 출향민 다음으로 많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현재도 KIA의 인천 원정경기 티켓파워는 상당한 수준. 뭐 지금도 다를 게 없는데 2009년 한국시리즈 때만 해도, 타이거즈 팬들은 전날부터 티켓팅하기 위해서 밤을 지새웠다고 할 정도라고.[16]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17] 게다가 2번의 승리가 모두 끝내기 승리다. 1차전은 김동기의 끝내기 쓰리런, 3차전은 곽권희의 끝내기 안타였다.[18] KBO 리그 초창기에 오심으로 몇 번 이름이 오르내린 심판이다. 이 심판 때문에 김응룡 감독이 퇴장당한 적도 있다.[19] 이때는 3루 쪽 관중석이 태평양 홈 관중석이었다. 인천야구장의 홈 관중석이 1루 쪽으로 바뀐 것은 1994년부터다.[20] 이날 선동열의 최종 등판 성적은 6이닝 22타자 상대 11탈삼진이었다.[21] 통산 타율이 무려 .195였다.[22] 그 해 현대에서 대타로만 활약하다가 운좋게 한국시리즈 주전 라인업에도 들어갔고 2차전 연장전 승부에서 끝내기 득점까지 기록하면서 나름대로 활약은 했다.[23] 첫 해는 물방망이었지만 95년도 때 두 자릿수 홈런을 치면서 두각을 낸다.[24] 권준헌은 태평양의 마지막 3할 타자다. 99년 이후 투수로 전향했다.[25] 삼성은 당시 백인천 감독이였는데 2년간 부진했던 강기웅을 자주 기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은근히 젊은 선수들도 자주 엔트리에 넣었기에 선수들이 기회를 많이 받았다. 김재걸, 정경배, 김태균, 최익성 이 선수들은 후에 삼성 내야진을 탄탄하게 잘 막았다. 참고로 그 강기웅의 자리를 넣은 것은 다름아닌 김재걸. 데뷔 초기에는 투고타저다 보니 발이 빠르고 수비에는 적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타고투저의 시대가 도래하며 적합하지 못 하게 되었다.[26] 현재 NC 다이노스에서 은퇴한 박석민도 한 때 2루수 차기 유망주로 낙점찍혔으나 못 하고 군대 보내서 제대 후 체중을 불린 후 홈런 타자로 면모하여 3루수로 전향했다.[27] 사실 모기업의 라이벌리가 심한 팀간에는 가급적 트레이드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전자 라이벌 관계인 삼성과 LG가 2012년까지 단 한 번도 트레이드를 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28] 다만 서울 연고를 원하는 것은 비단 삼성 뿐만 아니라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롯데 역시 프로야구 출범 직전에는 서울 연고를 요구했다는 것이나, 이 문서의 SK가 그 사례이다. 이후 삼성은 2004년에 현대에게 서울 연고권을 사와서 서울로 연고 이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썰이 보도되기도 했다.# 사실 삼성의 수원 삼성 썬더스 농구단은 2001년에 서울로 연고지를 옮겼고, 같은 재계 농구단인 청주 SK 나이츠 역시 같은 시기에 서울로 연고지를 옮겼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29] 또한 수원에 삼성 본사 등 삼성 기업들이 있고 당시 구단주였던 이건희가 엄청난 야구 빠였기 때문에 대구가 아닌 서울에서 하는 홈 경기를 보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또한 당시 삼성은 리그에서 강팀이고 최고 인기팀이었기 때문에 수도권 이전으로 더 많은 팬덤을 구축할 수도 있었으며, 이는 곧 입장권 등 구단의 매출로도 이어지기 때문에 연고지 이전 생각도 충분히 했을 듯하다.[30] 쌍방울은 레이더스의 매각 대금으로 240억을 받기를 희망했으나, 이미 만신창이가 된 이 팀을 이 가격에 사려는 기업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전주 연고 역시 인수를 꺼리게 한 요인이었다. 결국 쌍방울은 위로금 명목으로 SK의 가입금 중 70억을 KBO를 통해 받았다.[31] 당시 수원시의회는 환영은커녕 "수원과 수원 시민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지 설명해라"라는 태도였다. 비협조적인 태도로 현대를 떠나보내고 뒤늦게나마 새로운 구단이 들어오길 바랐던 인천시와 반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