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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나이티드 | |
Incheon United | |
정식명칭 | 인천 유나이티드 프로축구단 |
법인명 | ㈜인천유나이티드 |
구단형태 | 시민구단 |
소속 리그 | K리그1 |
창단 | 2003년 12월 30일[1] |
연고지 | 인천광역시 |
홈구장 | 인천축구전용구장 (20,300명 수용) |
구단주 | 박남춘 (인천광역시장)[2] |
마스코트 | |
유티 | |
대표이사 | 전달수 |
단장 | 공석[3] |
감독 | 욘 안데르센 |
주장 | 남준재 |
부주장 | 부노자 |
셔츠 스폰서 | 신한은행, 인천국제공항[4] |
상징색 | 파란색, 검은색[5] |
웹사이트 및 소셜미디어 | |
유소년 시스템 | |
U-18 팀 | 인천대건고등학교 |
U-15 팀 | 인천 광성중학교 |
U-12 팀 | 인천 유나이티드 U-12 |
2018시즌 스폰서 | |
메인 스폰서 | 유니폼 메이커 |
| |
인천축구시대 |
1. 개요
2015년 FA컵 준결승전에서 전남 드래곤즈를 꺾은 뒤 서포터즈와 함께 한 기념촬영. 인천의 창단 최초 FA컵 결승 진출을 축하하는 기념비적인 사진이기도 하다. |
K리그를 대표하는 생존왕
K리그1 소속의 프로 축구단. 연고지는 인천광역시. K리그 13번째 구단으로 2010년대 이후로는 대체로 중하위권을 오가는 시민구단이다. 최고 성적은 2005년 K리그 준우승 및 2015년 대한축구협회 FA컵 준우승이다. 2002 한일월드컵이 끝난 후의 축구 붐에 힘입어, 전국 곳곳에 지어진 월드컵경기장들의 사후 활용과 K리그 저변 확대를 위해서 대도시들을 중심으로[6] 팀 창단을 추진했고, 인천은 할렐루야 유치와 시민구단 창단을 두고 고민하다가 후자로 방침을 바꾸면서 시민구단으로의 창단이 확정되었다.
인천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은 인천시와 시민, 기업이 함께 구단을 출범시킨 ‘연합’의 뜻을 나타내 시민구단의 이미지와 어울려 팀의 명칭으로 선정되었다.#
열악한 재정 기반과 얇은 선수층, 잦은 선수 이탈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신인들과 준척급 선수들이 강한 팀워크와 정신력을 앞세워 분전하는 것이 창단 이후부터 계속된 전통적 팀 컬러. 그 덕에 승강제 도입 이후 단 한 번도 K리그2로 떨어진 적이 없다. 2016년 성남 FC가 강등당하게 되면서 유일하게 K리그2 경험이 없는 시도민구단이 되었다. 그 덕분에 붙은 별명이 K리그의 생존왕. 시즌 시작 전에는 언제나 하위권으로 분류되지만 심심찮게 상위 스플릿을 위협하고 FA컵 결승에 오를 정도로 K리그 내에서는 다크호스로 손꼽힌다.
유달리 8~9월부터 강해지는 모습을 보여 가을 인천이란 별명도 있다.[7]
다만 2000년대부터 인천유나이티드가 매년 중위권 이상에 플레이오프에도 심심치 않게 진출하고 FA컵 4강 이상으로 AFC 진출권도 노린 전력을 지녔던 시절부터 응원한 팀 사정에 정통한 올드팬들의 경우, 구단과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생존왕 이미지에 굉장히 비판적이다. 중위권 이상을 노려야 할 전력까지 올라가 있음에도 단순히 ‘우리는 생존왕이니까 막판에 생존만 하면 돼‘라는 구단의 자화자찬으로 퉁치려는 마인드를 팬들에 대한 기만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살아남은 것에는 당연히 박수들은 치지만, 야구로 따지면 비밀번호 찍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고, 전반기 망쳐서 하위스플릿 떨어져서 겨우 생존하고 있기 때문에, "매년 단순히 생존했다고 환호해야 하나?" 하는 비판이 있다. 이는 씁쓸하지만 K리그 시민구단이라는 태생적 구조의 한계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애초에 시민구단 문서만 들어가도 알 수 있듯이 K리그 부실화의 주범인 시민구단은 1년 반짝 돌풍을 제외하면 상위 스플릿 진입도 힘든 하위권이다. 이전 문단에서 전술했듯 여타 시민구단들은 이미 K리그2로 강등된 경험이 있다. 이때문에 팬들도 선수들의 막판 분전 및 생존본능에는 감동과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구단의 행정 및 눈가리고 아웅식 생존왕 이미지 띄우기에는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 2018년 12월에는 안데르센 감독도 이러한 구단의 생존왕 이미지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내가 와서 겪어 보니 인천은 그렇게 1부 리그에 생존하는 데 만족해선 안 되는 팀이다. 훌륭한 도시, 훌륭한 팬, 훌륭한 경기장과 인프라가 있다. "라고 하며, 구단이 좀 더 좋은 행정을 해주는 조직이 되기를 희망했다.
2. 엠블렘
2003년 12월 23일부터 27일까지 4개 시안을 놓고 온라인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총 5,002명의 응모자 가운데 2,296명(46%)으로부터 1순위로 지정받음에 따라 구단 공식 엠블렘으로 선정됐다.인천 유나이티드 엠블렘은 당시 K리그 다른 구단에서 사용하지 않은 타원형의 모양을 활용하여 창단 주체인 인천시, 시민, 기업이 원만하게 화합하는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엠블렘의 문양은 인천을 상징하는 닻, 바른길로 이끄는 방향키, 비상하는 날개의 형상을 조합하여 인천 구단이 한국프로축구의 새로운 리더가 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담았다. 또 노란색의 문양과 테두리에 해양도시인 인천을 나타내는 블루와 블랙의 줄무늬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인천구단의 역동성과 진취적인 기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축구 팬들 사이에선 멋진 엠블렘으로 손꼽히는 디자인이다.
2.1. 창단 10주년 기념 엠블렘
2013년 시즌 구단 창단 10주년을 맞이하여 구단 정체성 확립과 함께 2013 시즌 K리그 클래식 상위 스플릿 진출 및 시·도민 구단 최초로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달성[8][9]하려는 의미를 담은 창단 10주년 기념 엠블럼을 선보였다.
기존 항구 도시 인천을 상징하는 닻 모양 형태의 형상을 기준으로 한 기본 엠블럼에다가 K리그 클래식 최고의 경기장인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을 단순형상화 하였고 비상의 의미를 담은 날개 형태를 형상화하여 2013년 시즌을 최고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3. 시즌별 역사
인천 유나이티드 시즌별 역사 | |
2003~2011 | 창단부터 2011 시즌까지 |
2012 | 파란만장했던 2012 시즌 |
2013 | 꿈에도 그리던 상위 스플릿! 2013 시즌 |
2014 | 위기에 봉착, 2014 시즌 |
2015 | 모두의 예상을 깬 늑대축구의 돌풍, 2015 시즌 |
2016 | 강등권 탈출을 위한 도전과 기적의 잔류, 2016 시즌 |
2017 | 꼬일대로 꼬였던 전반기와 다시 한 번 보여준 생존왕의 위엄, 2017 시즌 |
2018 | 역대 최악의 위기, 그러나 이번에도 생존왕의 위엄은 이어졌다. 2018 시즌 |
2019 | 안데르센 호의 본격적인 출항, 2019 시즌 |
4. 역대 감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0px" | 2003년 ~ 현재 | ||||
-1 {{{#276FB8 1대}}} 로란트 | -1 {{{#276FB8 대행}}} 장외룡 | -1 {{{#276FB8 2대}}} '''*''' 장외룡 ☆ | -1 {{{#276FB8 대행}}} 박이천 | -1 {{{#276FB8 3대}}} 페트코비치 | |
-1 {{{#276FB8 대행}}} 김봉길 | -1 {{{#276FB8 4대}}} 허정무 | -1 {{{#276FB8 대행}}} 김봉길 | -1 {{{#276FB8 5대}}} 김봉길 | -1 {{{#276FB8 6대}}} 김도훈 | |
-1 {{{#276FB8 대행}}} 이기형 | -1 {{{#276FB8 7대}}} 이기형 | -1 {{{#276FB8 대행}}} 박성철 | -1 {{{#276FB8 8대}}} 안데르센 | -1 {{{#276FB8 }}} | |
* 는 후임 감독(감독대행)에게 팀을 맡긴 뒤 다시 복귀한 경우 |
인천 유나이티드 역대 감독 명단 | ||||||
순번 | 이름 | 국적 | 취임 | 퇴임 | 재임 시즌 | |
초대 | 베르너 로란트[10] | 2003년 9월 25일 | 2004년 8월 30일 | 2004 | ||
대행 | 장외룡 | 2004년 8월 31일 | 2005년 1월 2일 | 2004 | ||
2대 | 장외룡 | 2005년 1월 3일 | 2006년 12월 28일 | 2005~2006 | ||
대행 | 박이천[11] | 2007년 1월 4일 | 2007년 12월 20일 | 2007 | ||
2대 | 장외룡 | 2007년 12월 21일 | 2008년 12월 9일 | 2008 | ||
3대 | 일리야 페트코비치 | 2009년 1월 29일 | 2010년 6월 8일 | 2009~2010 | ||
대행 | 김봉길 | 2010년 6월 27일 | 2010년 8월 21일 | 2010 | ||
4대 | 허정무 | 2010년 8월 23일 | 2012년 4월 11일 | 2010~2012 | ||
대행 | 김봉길 | 2012년 4월 12일 | 2012년 7월 15일 | 2012 | ||
5대 | 김봉길 | 2012년 7월 16일 | 2014년 12월 19일 | 2012~2014 | ||
6대 | 김도훈 | 2015년 1월 13일 | 2016년 8월 31일 | 2015~2016 | ||
대행 | 이기형 | 2016년 8월 31일 | 2016년 11월 28일 | 2016 | ||
7대 | 이기형 | 2016년 11월 29일 | 2018년 5월 11일 | 2016~2018 | ||
대행 | 박성철 | 2018년 5월 11일 | 2018년 6월 8일 | 2018 | ||
8대 | 욘 안데르센 | 2018년 6월 8일 | 2018~ |
5. 역대 유니폼
인천 유나이티드/유니폼 문서 참조.6. 역대 캐치프레이즈
인천 유나이티드 역대 캐치프레이즈 | ||||||
시즌 | 캐치프레이즈 | |||||
2004 | Blue Heart 2004 | |||||
2005 | 푸른물결 2005 | |||||
2006 | 시민속으로 Into the Community[12] | |||||
2007~2010 [13] | My Pride My United | |||||
2011 | Change & Challenge[14] | |||||
2012 | Into the New ERA[15] | |||||
2013 | 인천축구지대본[16] | |||||
2014 | 승리, 그 이상의 감동! | |||||
2015 | Play, Together![17] | |||||
2016~ | 우리는 인천 |
7. 영구결번
인천 유나이티드 영구결번 |
No. 12 |
팬 |
8. 주요 기록
인천 유나이티드/기록 참고.9. 역대 스쿼드
인천 유나이티드/역대 스쿼드 참고.9.1. 등번호
인천 유나이티드/등번호 참고.10. 유소년 시스템
인천 유나이티드/유소년 시스템 참고.11. 마스코트
인천 유나이티드의 공식 마스코트는 유티이다.
인천광역시의 상징새인 두루미를 의인화한 형상으로 프로축구계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는 의지와 인천광역시, 인천시민, 인천 연고 기업이 화합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친근한 이미지로 상징화하였다. 붉은 머리털은 축구에 대한 강한 열정을, 큰 날개는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와 페어플레이의 스포츠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특이사항으로는 대전 시티즌 팬에게 폭행당한 전력이 있다.[19] (...) 자세한 내용은 인천 유나이티드/2012년 참고.
12. 홈구장 : 인천축구전용경기장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 경기장.
창단 첫 해부터 홈구장으로 쓰던 인천문학경기장을 떠나 2012년부터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쓰고 있다.[20]
설계 때부터 오직 인천 유나이티드만을 위해 만들어진 경기장으로 지어졌다. 관중석 의자 색깔도 인천의 유니폼 색인 파란색을 기본으로 하고, 검정색과 노란색으로 수놓았다. 동쪽 관중석에는 의자에 구단 이름을 영문으로 새겨 넣어 인천 팬들의 자부심을 높였다. 이렇게 경기장 전체를 구단의 색상과 이름으로 꾸며놓은 경기장은 대한민국에서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최초이다.
그라운드 터치라인에서 관중석까지 거리를 최소한으로 줄여 축구경기를 가장 생동감있고 역동적으로 볼 수 있다. 골을 넣은 선수가 관중석으로 달려가 팬들과 껴안는 골 세레모니에 최적화 되어있다.[21] 관중석과 그라운드가 가깝다 보니 그라운드를 뛰는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 선수들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다. 국내의 다른 어떤 구장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관중과의 거리를 좁혔다.
K리그 관중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큰 다른 월드컵 경기장들과는 달리 국내의 축구 관중 규모를 고려하여 약 2만 석의 규모로 지어졌다.
훈련장은 연수구 동춘동에 위치한 승기천연구장이다.
13. 라이벌
인천광역시를 연고지로 하는 팀답게, 주로 수도권이나 경기도권 팀들과 라이벌 관계에 있다.13.1. 인경전, FC 서울
K리그 팀중에 FC 서울과 사이가 좋은 팀이 얼마나 있을까 싶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인천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서포터즈들 호전성도 강하기 때문인지 미묘한 라이벌 감정과 해마다 끊이질 않는 양 측 서포터즈들간의 충돌로 감정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다. 자금이나 규모면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 두팀이지만 인천의 맹렬한 라이벌 의식 덕분에 상대전적은 그렇게까지 밀리지는 않는 편.그래서 서포터들 중에서는 슈퍼매치를 언론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더비라고 폄하하고, 경인 더비야말로 진짜 더비 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22]
인천이 처음 리그에 참여한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인천의 전적이 약간 앞서있었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인천이 이기질 못했다. 그리고 2010년부터는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는 중.(정규리그 기준) 다만 상암 원정에선 지독히도 승률이 좋지 않았으나 2013년 3월 9일 경기에서 3:2로 승리하며 9년만에 첫 원정승리를 기록하였다. 인천에게 있어서는 서울이 가장 큰 라이벌이라고 봐도 될 것이며, 서울에게는 수원과의 슈퍼매치 다음가는 라이벌 더비로 자리잡았다. 언론과 K리그 팬들은 경인더비란 명칭을 사용하나 인천측은 2016년 7월 17일부터 이 더비를 인천광역시의 인(仁)자와 서울특별시의 경(京)자를 따서 인경전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특히 2015년 FA컵 결승에서 인천이 서울에게 패함에 따라 이들의 적대감은 다음 시즌에도, 그 후로도 계속 표출될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사이 안좋은 것과 별개로 구단간의 선수 이동은 활발한 편이다. 굴지의 대기업 산하 기업구단과 열악한 시민구단 사이의 거래이지만 그 손익이 일방적이었던 적은 별로 없다는 점도 이채롭다.
13.2. 수원 삼성 블루윙즈
반면 수원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약하다. 차범근 시절까진 수원 2중대였고 윤성효 감독 부임 이후엔 그나마 좀 할만해졌지만 여전히 까다로운 상대. 2012년 숭의 아레나 파크에서의 역사적인 홈 첫경기에서도 수원은 자비없이 2:0으로 무참히 홈 첫경기를 패배로 장식해 주었다. 하필 2골 다 인천 출신 라돈치치가 꽂아 넣었다. 반대로 2013년에는 25R에서 인천이 수원을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며 역사적인 첫 상위 스플릿 입성을 결정짓는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13.3. 032[23] 더비, 부천 FC 1995
지리적으로 인천과 부천은 서울보다도 훨씬 가깝다보니 인천 유나이티드가 창단하기전엔 부천 SK를 응원하는 인천 시민들도 많았다. 그리고 2003년 인천 유나이티드가 창단하고 이 두 팀은 032더비라 하여 많은 명경기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부천SK는 이후 제주로 연고지를 이전해 제주 유나이티드가 되었고, 두 팀간의 대결은 역사속으로 사라지나 싶었지만 부천 FC 1995가 K리그 챌린지에 참가하기로 결정하면서 032더비가 다시 부활하였다.재밌는건 前 인천 유나이티드의 감독인 김봉길의 아들 김신철이 부천에서 뛰고 있다는 것. 이래저래 다시 만난다면 재밌는 경기가 될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팀 성적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으며 2014년 봉길매직은 끝났고, 김신철 선수의 부담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2015년 대한축구협회 FA컵 32강전에서 만나게 되어 10년만에 032더비가 부활하였다.
10년 만의 더비 경기에서 2대0으로 완승하자 인천 서포터즈가 선보인 배너. 같은 032 다른 CLASS. 부천이 2부 리그인 K리그 챌린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위트 있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3.4. 전북 현대 모터스?
전북 킬러이상하리만큼 전북을 상대로 강하다. 역대전적도 13승 15무 14패로 백중세다.
한편 2013년에 정혁-정인환-이규로가 세트로 전북으로 이적했고, 2014년에는 김남일과 한교원이, 2015년에는 문상윤까지 전북에 합류해서 이 면에서도 인천은 전북에 경쟁 심리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이적한 선수들 모두가 하나같이 인천에서는 핵심으로 활약한 선수들인 반면 한교원을 제외하면 전북에서의 활용도가 애매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2015년을 마지막으로 인천 선수의 전북 이적은 일단은 사그라들었고 김인성, 박세직, 송제헌 등 반대로 전북에서 인천으로 합류한 선수들도 있어서 이적 면에서 전북의 2중대라는 놀림도 옛말이 됐다. 2019년 초에는 문선민과 이재성의 트레이드로 두 팀 간의 대형 선수 거래가 간만에 일어났는데, 문선민은 2018년 인천 소속으로 전북을 만날 때마다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고전시킨 주인공인만큼 묘한 이적이다.
14. 문제점 및 사건사고
인천 유나이티드/사건사고 참조.15. 그 외
시민구단의 한계상 열악한 재정 탓에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룬 선수들을 다른 돈 많은 구단들에게 팔아 이적료로 수입을 남기는 셀링클럽이다. 그렇게 선수를 팔고도 하위권을 기어다며 적자에 쪼들리는 시민구단들이 비일비재하고 인천도 적자로 인해 재정과 성적에 위기가 왔었다. 인천에서 매각한 선수들을 전부 모아놓으면 리그 올스타에 준할 정도로 훌륭한 선수들이 많다. 이정수, 최태욱, 이근호[24], 최효진, 김치우, 라돈치치, 데얀, 유병수, 정인환, 이석현, 문상윤, 유현 등이 있다. 요즘에는 전북 현대의 선수 셔틀노릇을 하고 있다. 2012 시즌 종료 후엔 사실상 수비진을 뜯어내다시피해서 정인환, 정혁, 이규로를 내주더니 2013 시즌 종료후엔 수비형 미드필더 김남일과 공격수 한교원을 전북으로 보냈다. 그리고 2015 시즌을 앞두고 문상윤까지 전북으로 보냈다. 때문에 구단내 선수들이 특출나게 눈에 띄기 시작하면 팬들은 기쁨 반, 다른 팀에게 뺏길까 노심초사하는 걱정 반의 감정을 느낀다. 다행스럽게도 2015 시즌이 끝난 후 케빈, 이윤표, 박대한, 요니치, 조수혁, 진성욱 등 기존의 주전급 선수들 대다수와 재계약을 체결하면서 전력 유출을 최소화하는데 성공했다.과거 2011년까지 인천 문학 경기장 주 경기장을 홈으로 썼을 땐 바로 옆의 문학 야구장을 홈으로 쓰는 인천 SK 와이번스와 묘한 관계에 있기도 했다. 경기시작전이나 끝난 시간이 되면 서로 원수와 같은 두 스포츠의 팬들이 사이좋게 문학경기장역에서 지하철을 타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진풍경이 펼쳐졌다. 또한 한 쪽에서는 경기를 진행 중인데 다른 한 쪽에서는 폭죽을 터뜨리며 경기에 방해를 주기도 하는 등 구단 간의 협조도 부족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문학경기장이 아무래도 종합 경기장이다보니 축구 관람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기존 숭의야구장을 헐고 그 자리에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을 따로 건설하여 2012년부터 사용 중이다. 중소 구단에 어울리는 작고 아담한 구장으로, 종합 경기장처럼 트랙이 없이 바로 앞에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EPL급 시야를 자랑해 직관하기 매우 좋은 구장이다.
2013년 9월 16일,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사회공헌 사업의 일환으로 인천 유나이티드에 5년 간 100억 원 규모의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인천일보 기사 당초 요구보다는 낮은 금액이지만 점차 연간 지원액을 늘려갈 계획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연 20억 지원금액은 그리 크지 않은 숫자고 아니나 다를까 2014년 연말에 2달치 월급이 밀려 일부 선수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는 등 안습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공식 서포터즈는 미추홀 보이즈(MEETYOUHALL BOYS)였으며(2014년 9월부로 해체) 규모는 작지만 적극적인 행동력과 특유의 호전성으로 다른 대형 구단들의 대형 서포터즈들과도 전혀 밀리지 않는 악명과 사건 기록을 자랑했다. 수원의 프렌테 트리콜로, 서울의 타나토스와 함께 클래식에선 제일 악명 높았던 서포터다. 미추홀 보이즈가 해산된 후에는 인천의 각 서포터 소모임이 파랑검정이라는 이름의 현장 연합 팀을 구성하여 응원을 진행하고 있다.
인천 축구 경기장 전광판에 수시로 선수들의 외모 별점이 떠오른다. 경기장 아나운서가 "인천의 소닉붐 김인성!" 이라는 식으로 별명을 부르면 99%의 확률로 전광판에 외모 별점이 나타나는데, 별점이 높으면 기분이 좋을 수 있겠지만 별점이 낮으면 홈-원정 관중 가릴 것 없이 소소한 비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런 연유로 인천의 김도혁 선수는 자신의 얼굴에 매겨진 별점 반 개 (...)에 애교 섞인 항의글을 페이스북 댓글에 올려 작은 논란이 일기도 했다. #
2010년까지 메인 스폰서가 GM대우였고, 초대 단장이자 현 대표이사인 안종복, 전임 감독인 장외룡을 비롯하여, 2005년 원년멤버 선수로 임중용과 김학철 등 부산 대우 출신 선수를 수혈한 상태로 창단하는등, 경영진과 선수단에 과거 대우 로얄즈와 관련된 인물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인유를 로얄즈의 후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양 구단은 직접적인 계승 관계가 아니므로 어디까지나 별개로 취급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대우 로얄즈를 계승하는 팀은 現 부산 아이파크이다.
구단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공식 등록된 중학부 축구 팀이 드는 인천 지역에서 '미들스타 리그'라는 아마추어 중학생 리그를 매년 혹은 격년제[25]로 운영중이다. 인천 지역 남자 중학생들은 이 경기를 통해 어쩌다 부평고나 도화기계공고 같은 축구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뽑히기도 하고, 인유의 U-18팀인 인천대건고등학교에 스카웃되기도 한다. 다만 도서 지역과 강화군 지역은 지역 특성상 참가가 힘들다. 대체적으로 연수구 지역과 계양구 지역 중학생들이 강한 편.
장외룡 감독 시절 언론 인터뷰에서 호나우두나 앙리가 나이 들어 은퇴할 때쯤 되면 데려오겠다고 호언장담한 적도 있다. 그리고 팬들은 이를 그냥 지방구단 흥보 차원에서 한말로 이해했고, 실제로 둘 다 은퇴했지만 안 왔다 (...)
일본어 위키에서는 인유가 '유나이티드'라는 명칭을 유럽에서의 쓰임새와 달리 단순히 이념적으로 사용한 거라고 서술했지만, 사실은 유럽에서도 여러 구단이 통합된 게 아니더라도 '유나이티드'는 뜻이 좋아서 (...) 엄청나게 자주 쓰인다.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을 쓰면서 여러 구단이 통합되지 않은 가장 대표적인 구단이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다. 맨유는 철도 회사의 실업 팀에서 프로 팀으로 전환한 경우이며 통합된 구단은 없다.
2017년 기준 유료 관중 비율이 K리그 클래식 12개 구단중 광주 FC와 더불어 최하위권이라고 한다.
사토미라는 일본인 팬이 있다. # 원래는 고향 팀인 베갈타 센다이를 응원했으나, 한국 여행 도중 인천의 경기를 보고 매료되어 팬이 되었다고 한다.
16. 응원가
인천 유나이티드/응원가 참고.17. 2019 시즌 스쿼드
17.1. 코칭스태프 명단
인천 유나이티드 2019 시즌 코칭스태프 명단 | ||||||
직책 | 이름 | 영문 이름 | 국적 | 생년월일 | ||
감독 | 욘 안데르센 | Jørn Andersen | 1963년 2월 3일 | |||
수석코치 | 임중용 | Lim, Joong Yong | 1975년 4월 21일 | |||
코치 | 박용호 | Park, Yong Ho | 1981년 3월 25일 | |||
골키퍼 코치 | 김이섭 | Kim, Lee Sub | 1974년 4월 27일 | |||
피지컬 코치 | 야스민 무이쟈 | Jasmin Mujdža | 1974년 3월 2일 | |||
트레이너 | 이승재 | Lee, Seung Jae | 1978년 9월 29일 | |||
트레이너 | 이동원 | Lee, Dong Won | 1985년 11월 25일 |
17.2. 선수 명단
인천 유나이티드 2019 시즌[주의] | |||||||
등번호 | 국적 | 포지션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생년월일 | 신체 조건 | 비고 |
1 | | GK | 정산 | Jeong San | 1989년 2월 10일 | 190cm, 83kg | |
2 | | DF | 황정욱 | Hwang Jung-wook | 2000년 3월 27일 | 188cm, 82kg | |
4 | | DF | 김근환 | Kim Kun-hoan | 1986년 8월 12일 | 193cm, 86kg | |
6 | | DF | 김태호 | Kim Tae-ho | 1989년 9월 22일 | 182cm, 72kg | |
7 | | FW | 남준재 | Nam Joon-jae | 1988년 4월 7일 | 182cm, 75kg | 주장 |
8 | | MF | 이정빈 | Lee Jeong-bin | 1995년 1월 11일 | 174cm, 65kg | |
9 | | FW | 무고사 | Stefan Mugoša | 1992년 2월 26일 | 188cm, 81kg | |
10 | | MF | 하마드 | Jiloan Hamad | 1990년 12월 6일 | 173cm, 66kg | |
11 | | MF | 문창진 | Moon Chang-jin | 1993년 7월 12일 | 170cm, 63kg | |
13 | | DF | 김진야 | Kim Jin-ya | 1998년 6월 30일 | 177cm, 63kg | |
14 | | MF | 양준아 | Yang Jun-a | 1989년 6월 13일 | 188cm, 81kg | |
15 | | DF | 이재성 | Lee Jae-sung | 1988년 7월 5일 | 188cm, 80kg | |
16 | | DF | 이윤표 | Lee Yun-pyo | 1984년 9월 4일 | 184cm, 79kg | |
17 | | MF | 박세직 | Park Se-jik | 1989년 5월 25일 | 178cm, 76kg | |
18 | | MF | 김승용 | Kim Seung-yong | 1985년 3월 14일 | 181cm, 75kg | |
19 | | FW | 허용준 | Heo Yong-joon | 1993년 1월 8일 | 184cm, 75kg | |
20 | | DF | 부노자 | Gordan Bunoza | 1988년 2월 5일 | 197cm, 95kg | 부주장 |
21 | | GK | 이태희 | Lee Tae-hui | 1995년 4월 26일 | 188cm, 81kg | |
22 | | MF | 김강국 | Kim Kang-guk | 1997년 1월 7일 | 181cm, 72kg | |
23 | | FW | 콩푸엉 | Nguyễn Công Phượng | 1995년 1월 21일 | 168cm, 65kg | [a] |
24 | | MF | 이우혁 | Lee Woo-hyeok | 1993년 2월 24일 | 185cm, 77kg | |
25 | | MF | 이제호 | Lee Jea-ho | 1997년 7월 10일 | 184cm, 77kg | |
26 | | DF | 곽해성 | Kwak Hae-seong | 1991년 12월 6일 | 178cm, 73kg | |
27 | | MF | 지언학 | Ji Eon-hak | 1994년 3월 22일 | 175cm, 73kg | |
28 | | FW | 정훈성 | Jung Hoon-sung | 1994년 2월 22일 | 175cm, 73kg | |
29 | | FW | 김보섭 | Kim Bo-sub | 1998년 1월 11일 | 183cm, 73kg | |
31 | | GK | 김동헌 | Kim Dong-heon | 1997년 3월 3일 | 186cm, 80kg | |
32 | | DF | 정동윤 | Jeong Dong-yun | 1994년 4월 3일 | 174cm, 62kg | |
33 | | FW | 이준석 | Lee Joon-suk | 2000년 4월 7일 | 179cm, 69kg | |
34 | | DF | 김한빈 | Kim Han-bin | 1991년 3월 31일 | 173cm, 63kg | |
35 | | DF | 주종대 | Ju Jong-dae | 1996년 4월 23일 | 176cm, 71kg | |
36 | | FW | 김대경 | Kim Dae-kyung | 1991년 9월 2일 | 179cm, 69kg | |
37 | | DF | 김종진 | Kim Jong-jin | 1996년 3월 5일 | 179cm, 75kg | |
38 | | DF | 김채운 | Kim Chae-woon | 2000년 3월 20일 | 176cm, 67kg | |
39 | | MF | 임은수 | Lim Eun-su | 1996년 4월 1일 | 182cm, 70kg | |
40 | | MF | 최범경 | Choi Bum-kyung | 1997년 6월 24일 | 177cm, 73kg | |
41 | | GK | 손무빈 | Son Moo-been | 1998년 5월 23일 | 191cm, 85kg | |
44 | | DF | 김정호 | Kim Jeong-ho | 1995년 5월 31일 | 187cm, 84kg | |
47 | | DF | 김동민 | Kim Dong-min | 1994년 8월 16일 | 180cm, 72kg | |
구단 정보 | |||||||
대표이사: 전달수 / 감독: 안데르센 / 홈 구장: 인천축구전용경기장 | |||||||
출처: 인천 유나이티드 홈페이지 |
인천 유나이티드 2019 시즌 군 입대 및 임대 선수 | |||||||
구단 | 국적 | 포지션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생년월일 | 신체 조건 | 비고 |
아산 무궁화 | | MF | 김도혁 | Kim Do-hyuk | 1992년 2월 8일 | 174cm, 69kg | 2019년 8월 12일 전역 |
상주 상무 | | MF | 이상협 | Lee Sang-hyeob | 1990년 1월 1일 | 177cm, 63kg | 2019년 9월 17일 전역 |
상주 상무 | | MF | 송시우 | Song Si-woo | 1993년 8월 28일 | 174cm, 70kg | 2020년 1월 21일 전역 |
상주 상무 | | FW | 박용지 | Park Yong-ji | 1992년 10월 9일 | 183cm, 71kg | 2020년 1월 21일 전역 |
상주 상무 | | FW | 이호석 | Lee Ho-seok | 1991년 5월 21일 | 173cm, 65kg | 2020년 1월 21일 전역 |
상주 상무 | | MF | 한석종[FA] | Han Seok-jong | 1992년 7월 19일 | 186cm, 80kg | 2020년 8월 27일 전역 |
상주 상무 | | DF | 김대중 | Kim Dae-joong | 1992년 10월 13일 | 188cm, 83kg | 2020년 8월 27일 전역 |
[주의] 이 틀은 기기 환경에 따라 볼 때 상당히 길 수 있습니다. 스쿼드에 대한 간략한 틀은 여기를 참고해주세요. 또한 이 틀을 수정할 때는 여기도 같이 수정해주시기 바랍니다.[a] 호앙 아인 잘라이 FC에서 임대[FA] FA 상태로 군 입대, 전역 후 이적 예상
18. 역대 인천의 주요 선수
18.1. 선수들이 뽑은 10주년 기념 베스트 11들
- 선정한 선수들 본인은 본인을 무조건 엔트리에 포함.
- 뽑은 선수들과 직접 같이 뛰어본 선수로만 선정.
정혁이 뽑은 10주년 기념 인천 유나이티드 베스트 11 (4-4-2)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W 유병수 | FW 설기현 | ||
MF 김민수 | MF 정혁 | MF 김남일 | MF 박준태 | |
DF 전재호 | DF 임중용 | DF 안재준 | DF 박태민 | |
GK 김이섭 |
전재호가 뽑은 10주년 기념 인천 유나이티드 베스트 11 (3-5-2)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W 라돈치치 | FW 데얀 | ||||||||||||||||||||||||||||
MF 전재호 | MF 김치우 | MF 정혁 | MF 아기치 | MF 최효진 | ||||||||||||||||||||||||||
DF 임중용 | DF 이정수 | DF 안재준 | ||||||||||||||||||||||||||||
GK 김이섭 |
박재현이 뽑은 10주년 기념 인천 유나이티드 베스트 11 (4-4-2)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W 유병수 | FW 데얀 | |||||||||
MF 방승환 | MF 김상록 | MF 노종건 | MF 박재현 | ||||||||
DF 전재호 | DF 임중용 | DF 김학철 | DF 최효진 | ||||||||
GK 김이섭 |
임중용이 뽑은 10주년 기념 인천 유나이티드 베스트 11 (3-4-3)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W 셀미르 | FW 데얀 | FW 방승환 | |||||||||
MF 전재호 | MF 노종건 | MF 아기치 | MF 최효진 | |||||||||
DF 임중용 | DF 이정수 | DF 김학철 | ||||||||||
GK 김이섭 |
18.2. 레전드 및 주요 선수들
- 임중용 (2004~2011) : 2018년 12월 기준 인천 유나이티드 역대 최다 출전을 기록한 인천의 상징. 인천의 창단멤버였고 최장기간 주장을 역임한 선수이며, 2005년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됐을 정도로 실력을 갖춘 수비수였다. '라돈 투게더'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인천의 등번호 20번이 의미있는 번호가 된 이유도 20번이 임중용의 번호였기 때문이다. 은퇴 이후에도 인천에 코치가 되어 돌아오는 등 인천 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선수.
- 전재호 (2004~2011) : 임중용과 함께 인천의 전설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선수로, 출장 횟수도 역대 세 번째 순위에 해당한다. 좌측면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고 2010년에 주장을 역임하기도 한 선수. 강원 FC에서 2013년에 은퇴한 이후 2015년부터 인천대건고의 코치가 되어 인천에 돌아왔고, 2017년에는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 김이섭 (2004~2010) : 인천 역대 골키퍼 중 최고로 인정받는 전설. 창단멤버였고 앞의 두 선수와 함께 언급되는 경우도 많다. 숟한 경쟁을 인천에서 겪었으나 대부분 최후의 승자는 김이섭이었다.
- 노종건 (2004~2010) : 아쉽게도 원클럽맨이 되지는 못했으나, 묵묵히 제 몫을 다한 인천 중원의 살림꾼으로 평가받았다. 2010년까지만 해도 창단 멤버 + 원클럽맨이 가능해 보였지만, 폼이 급락하여 아쉽게 팀을 떠나고 이후 공익 근무를 하다가 은퇴했다.
- 김학철 (2004~2008) : 초창기 인천 수비를 임중용과 함께 이끈 베테랑. 임중용처럼 대구 FC 창단 멤버 - 인천 창단 멤버를 연속으로 거친 선수였다.
- 방승환 (2004~2008) : 초창기 인천 공격진에서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판 항의 사건으로 8개월 간 그라운드를 떠나있기도 했으나, 돌아와서 복귀골을 신고한 뒤 서포터즈에게 절을 하기도 했다.
- 제난 라돈치치 (2004~2008) : 인천 외국인 선수 중 최다 출장, 최다 득점 기록자. K리그의 다른 팀들도 거쳤지만, 인천에서는 특히 그 의미가 깊은 선수이다.
- 최태욱 (2004) : 인천의 창단 멤버 중에서도 최고의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선수. 2004 시즌의 에이스였지만, 한 해만에 결국 팀을 떠난다.
- 이정수 (2004~2005) : 주전 경쟁에서 낙오된 이정수는 인천 이적 이후 엄청난 발전을 보여주었고, 부상에 시달리던 때에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 활약으로 수원 삼성 블루윙즈 이적.
- 김현수 (2004) : 인천의 첫 주장. 경력도 화려한 선수였고, 혼란스러운 창단 시즌을 그래도 지탱해준 선수.
- 미오드라그 안젤코비치 (2004) : 인천의 1호골을 기록한 선수. 그러나 반 시즌만에 팀을 떠나 그 활약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 라디보예 마니치 (2004~2005) : 안젤코비치가 나간 자리에 들어왔고, 2004 시즌 후반기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임팩트를 남겼다.
- 박재현 (2005~2009) : 2005 시즌에 입단하여 2007 시즌에 기량이 만개했다. 다만 적절한 스쿼드 로테이션 플레이어로는 평가받았으나, 핵심 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 최효진 (2005~2006) : 2005, 2006 시즌 우측면을 든든하게 담당한 선수. 당시에는 쓰리백에서 전재호와 양 측면 미드필더를 담당했다.
- 서동원 (2005~2006) : 트레이드로 인천에 합류하여, 과거 국대 출신답게 중원을 안정화시켜 준우승에 공헌한 선수.
- 야스민 아기치 (2005~2006) : 2005 시즌 서동원, 노종건과 중원을 형성하여 대단한 기량을 보여준 핵심 미드필더.
- 셀미르 (2005~2006) : 저니맨 답게 인천에서 뛴 기간은 짧았으나, 그 와중에도 중요한 공격 포인트를 많이 기록하며 좋은 추억을 남기고 떠난 공격수이다.
- 장경진 (2005~2011) : 2005 시즌부터 인천에 합류하여, 긴 기간 수비진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러나 김학철, 임중용 등에 비해 확고한 주전으로 올라간 시기는 짧았다.
- 드라간 믈라데노비치 (2006~2009) : 이름값이 굉장히 높아서 올 때부터 기대를 모았고, 오자마자 코너킥 직접 득점에 최단시간 골 등 화려한 기록을 쓴 미드필더였다. 인천에서 3년 반동안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은퇴했다.
- 김영빈 (2006~2011) : 인천 수비진에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했고 김학철의 노쇠화 이후로 주전으로 승격되었다.
- 김상록 (2007~2009) : 2007 시즌을 이끈 에이스. 방승환, 데얀과 함께 닥공의 주축이었다. 아쉽게도 그 이후로는 감독 교체와 전술 교체로 인해 폼이 급락했다.
- 데얀 다미아노비치 (2007) : 2007 시즌 한 해만을 뛰었으나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고, 인천을 떠난 이후로는 말 안해도 모두가 알 자타공인 K리그의 레전드에 등극했다.
- 안재준 (2008~2010, 2013~2016) : 인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임중용의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실제로 입단 직후부터 잦은 기회를 받았고 또 그를 잘 살렸다. 허정무 부임 이후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지만, 2013 시즌을 앞두고 돌아와서 다시 그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군 입대 이후 노쇠화를 보여주면서 아쉽게 팀을 또 떠났다.
- 유병수 (2009~2011) : 인천 구단 역사 상 최다득점자. 2년 반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을 뛰었음에도 엄청난 스탯을 기록했다. 동시에 인천 역사 상 최초의 리그 득점왕 배출.
- 정혁 (2009~2012) : 부상은 좀 잦았지만, 중원에서 항상 제 몫을 다했다는 평을 들었다. 2013 시즌 시작 전에 정혁 + 정인환 + 이규로 세트 이적에 묶여서 전북 현대 모터스로 떠났다.
- 남준재 (2010, 2012~2014, 2018~ ) : 2010 시즌에 신인임에도 주전으로 기용되면서 가능성을 선보였다. 안재준과 함께 트레이드로 떠났으나, 일이 잘 안 풀리자 2012년에 장원석과 트레이드되어 귀환, 그리고 곧바로 반 시즌만에 8골 1도움을 쓸어담았다. 이후 2018년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다시 한 번 인천에 귀환, 인천 역사 상 최초로 인천에 세 번 합류한 선수가 되었다.
- 이윤표 (2011~ ) : 인천의 차기 레전드로, 별명은 미추홀 파이터. 초창기에는 그리 신뢰를 받지 못했으나, 꾸준히 활약하며 자신의 이름을 팬들에게 점점 각인시켰고, 어느새 인천의 최고참의 자리에 올랐다. 임중용의 후계자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자신만의 등번호 16번에 새 의미를 부여하는 또 다른 레전드.
- 티무르 카파제 (2011) : 인천의 아시아 쿼터로는 첫 성공작이었고, 2011 시즌 인천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 한교원 (2011~2013) : 인천 시절에 좋은 추억을 많이 남긴 윙 포워드. 특히 2012 시즌 후반기부터 2013 시즌까지의 활약은 주목할 만했다. 전북 이적 후 인천과의 경기에서 한퀴아오 사건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팬들에게 아직까지는 좋은 기억에 가깝다.
- 권정혁 (2011~2014) : 故 윤기원 선수의 죽음 이후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대체자로 영입되었고, 유현에게는 계속 밀리는 모습이었으나 본인이 주전이던 때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골킥으로 득점을 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 故 빠울로 (2012) : 빗속의 경인 더비에서 넣은 단 1개의 골로 전설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해당 골 이후로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이후 백혈병으로 투병하다가 2018년 2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김남일 (2012~2013) : 인천 소속으로 국가대표에 뽑힌 몇 안 되는 선수.[26] 특히 2013 시즌에는 축구 도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좋은 기량을 펼쳤다.
- 이보 (2012, 2014) : 짧은 기간이었지만, 엄청난 양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 잠시나마 인천 역대 최다 어시스트 기록을 전재호와 함께 보유했지만, 케빈이 이를 순식간에 앞질렀다.
- 박태민 (2012~2014) : 3년간 측면 수비를 꾸준히 책임진 선수. 2014년에는 주장도 역임했다. 그 뒤 남준재와 같이 성남 이적.
- 문상윤 (2012~2014) : 인천 유스 출신 첫 번째 성공작. 측면과 중앙을 오가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 구본상 (2012~2014) : 데뷔전에서 퇴장을 당하는 불행도 있었지만, 중원에서 김남일의 파트너로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다.
- 최종환 (2012~2018) : 굉장한 킥력을 지닌 측면 플레이어로 측면 미드필더 자리부터 시작해서 풀백까지 다양한 포지션에서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6 시즌부터는 팀의 새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 유현 (2012~2015) : 사실상 유현의 전성기가 인천 시절으로, 그의 존재만으로도 수비가 든든해진다는 인식이 생길 정도였다. 인천을 떠난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 아쉬운 점.
- 진성욱 (2012~2016) : 인천 유스 출신의 두 번째 성공작이고, 4경기 연속 골 등 임팩트로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인천 소속으로 U-23 대표에도 뽑혔었다.
- 이천수 (2013~2015) : 그 이름값으로 인해 올 때부터 많은 주목을, 또 우려를 받았다. 중간에 논란도 일으켰지만, 위기에 빠진 팀과의 재계약을 선택하고 마지막 해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경기장에서 보여주며 마무리만큼은 멋있게 하였다. 이후 인천의 전력강화부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연을 이어나가는 중.
- 이석현 (2013~2014) : 2013 시즌에 보여준 모습만큼은 팀의 에이스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이보의 존재로 인해서 포지션이 애매해지며 아쉽게 인천 생활을 마무리.
- 김대중 (2014~ ) : 초창기에는 불안하다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들었지만, 수비진 로테이션 멤버로는 확실한 능력을 입증했고 거기에 2017 시즌에는 공격수로도 재능이 있음을 입증했다.
- 김도혁 (2014~ ) : 젊은 나이에 부주장, 주장을 모두 경험한 차기 레전드 1순위. 구단에 대한 애정을 항상 드러내온 바 있고, 팬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깊게 남겼다. 2017 시즌에는 최종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잔류에 공헌했다. 2017년이 끝나고 아산 무궁화 FC에 입대했다.
- 김용환 (2014~2018) : 측면이라면 좌측, 우측, 공격, 수비 모두 가리지 않고 소화하는 인천의 만능 자원. 데뷔 초에는 힘든 시기도 있었으나 2016 시즌부터 측면의 확고한 주전으로 올라섰다. 유스 출신인 만큼 특히 주목받는 선수.
- 권완규 (2015~2016) : 트레이드로 인천에 입성하여 초기에는 실책도 간혹 범했지만, 팀 수비의 일원으로 최소 실점을 이끌기도 하고 2016 시즌에는 해결사의 면모까지 보여주며 팬들의 인정을 받았다.
- 박세직 (2015~) : 중원에서 전체적인 흐름을 조율하며 공수 밸런스를 잘 맞췄고, 왼발 킥이 좋아 세트피스 상황에서도 맹활약했다. 2017년 여름 아산 무궁화 FC로 입대했다.
- 박대한 (2015~2016) : 입단 테스트를 거쳐 간신히 들어온 만큼 절박한 플레이를 보였고, 2015 시즌 베스트 11 후보에도 들어갔었다. 권완규와 함께 측면에서 믿음직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 김원식 (2015) : 임대로 짧은 기간 함께 했음에도 인천 팬들의 큰 애정을 받는 선수. 실제로 2015 시즌 전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 김인성 (2015) : 원래부터 빠른 발로 유명했고, 그 발을 살려 한 해동안 공격의 축으로 자리잡았다. 몸값 문제로 아쉽게도 1년만에 보낸 선수.
- 케빈 오리스 (2015~2016) : 단 2년의 활약으로 구단 역대 최다 어시스트를 기록한 선수. 그 2년동안 인천의 공격은 케빈으로 시작해 케빈으로 끝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특히 2016 시즌에는 시즌 전체로 보면 10-10을 한 시즌에 달성하는 면모를 보여줬다.
- 마테이 요니치 (2015~2016) : 2년 연속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발된 인천 역사 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 실력이 정말 탁월한 선수였고, 수비진의 중심으로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 송시우 (2016~ ) : 입단 초기부터 조커로 극적인 득점을 기록하며 시우 타임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2017 시즌에는 팀 내 최다득점자가 되었다.
- 한석종 (2017~2018) : 데뷔전에서 오심으로 퇴장당하는 불운도 있었지만, 어느새 인천 중원의 상징이 되어 상대 중원을 틀어막고 공수 양면에 큰 기여를 하였다.
- 김진야 (2017~ ) : 유스 출신으로 새로이 주목받는 스타. 아시안게임을 거치면서 인천 내에서도 상당한 인지도를 지닌 선수로 성장했다.
- 문선민 (2017~2018) : 인천 역사 상 인천 소속으로 첫 대한민국팀 월드컵 참가자 및 출전자 명단에 포함된 선수. 스웨덴 리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인천에 합류했으며, 특유의 저돌적 플레이로 눈길을 끌었다. 결국 2018 시즌의 맹활약을 통해 국가대표에 데뷔했고, 데뷔전 데뷔골까지 기록했다.
- 스테판 무고샤 (2018~ ) : 제 2의 데얀이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놀라운 활약을 이어가는 특급 공격수.
- 엘리아스 아길라르 (2018) : 과거 이보가 보여주었던 퀄리티를 다시 보여준 코스타리카 출신 미드필더. 인천에서 최초로 MF 부문으로 시즌 베스트 11에 선정된 선수이기도 하다.
18.3. 흑역사
- 알파이 외잘란 (2004) : 굉장한 기대를 받고 영입된 선수이지만, 더티 플레이 논란을 계속 일으켰고 반 시즌만에 팀을 떠난 뒤에는 K리그를 디스하기도 했다.
- 김치우 (2004~2006) : FK 파르티잔 임대 당시부터 구단과 묘한 기류가 흘렀고, 이적 절차에서도 본인은 FC 서울을, 구단은 전남 드래곤즈를 주장하였고 결국 구단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면서 김치우와의 사이가 틀어졌다. 이후 전남 시절 당시 인천의 데얀 다미아노비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모습도 보여줬는데, 결국 나중에 같은 팀에서 만나게 된다.
이준영(2005~2011) : 오랫동안 인천에 헌신적이었던 선수라서 레전드의 반열에도 오를 가능성까지 보였던 인물이지만... 충격적이게도 승부조작이 적발되었다. 정황 상 인천에서 승부조작을 한 타 선수들도 이준영에게 포섭당했을 가능성이 있다.성경모(2005~2010) : 김이섭과 오랜 경쟁 구도를 형성한 골키퍼지만, 팀을 떠난 이후 다른 팀에서 승부조작이 적발되어 쓸쓸히 축구계를 떠났다.도화성(2009~2010) : K리그 최장거리 골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 역시도 승부조작이 적발되었다. 게다가 도화성은 브로커로도 활동했고 사설 도박장까지 운영한 만큼 다른 조작범들보다도 죄질이 나쁘다.- 정인환 (2011~2012) : 남준재, 안재준을 정인환, 김명운과 트레이드하면서 인천에 합류했고 실력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선수였지만, 전북으로 이적할 당시 온갖 언플을 선보이다가 인천 팬들에게는 원수같은 존재로 낙인이 찍혔다.
- 설기현 (2012~2015) : 전무후무한 세 개 구단에서 흑역사 취급을 받는 선수. 2015 시즌 개막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돌연 은퇴하여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 수많은 손해를 남긴 장본인. 거기에 이후로도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는 인터뷰를 몇 차례 했다.
- 네이선 번스 (2012~2013) : 큰 마음을 먹고 영입한 대형 외국인이었지만 부상으로 1년을 날리고 이후로도 연봉만을 축내며 즐겁게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 찍혀 팬들의 공분을 샀다.
- 조수철 (2014~2015) : 나름 인생역전의 주인공이었고 국가대표 예비명단까지 이름을 올렸으나, 인터뷰로는 잔류 의사를 말하면서 뒤에서는 시장에서 평가받고 싶다고 한 이중적인 모습이 논란이 되면서 인천 팬들에게 실망감을 남기고 이적했다.
- 달리보르 베셀리노비치 (2017) : 실력으로만 보자면 달리만큼 부진한 선수는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2년간 좋은 활약을 보여줬던 케빈의 후임이었기에 그 충격은 더 컸다. 게다가 달리의 영입 과정에 대한 논란도 이후 불거지면서 더더욱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다.
[1] 2003년에 창단하여 2004년 리그부터 참가했다.[2] 국내의 모든 시민구단이 다 그렇듯 시민구단의 구단주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장이 맡는다.[3] 전력강화부장 이천수가 사실상 단장의 역할과 비슷한 직책에 있다.[4] 인천국제공항공사 운영 공항[5] 쉽게 말해 구단 상징색과 홈 유니폼 디자인 기반으로만 치면 '한국판 인터밀란'. 팀의 유니폼은 물론 홈 경기장 좌석의 의자 배색도 파란색과 검은색이다. 장내 아나운서가 선수를 소개하는 별칭에도 '파검(파랑+검정)의 OOO'라는 명칭을 쓸 정도로 팀의 상징으로 깊게 뿌리 박혀 있다. 물론 2012년에 허정무가 그걸 왜곡해서 욕을 바가지로 퍼먹었다.[6] 당시 팀이 없었던 도시는 인천, 대구, 광주였다. 이 중 대구는 가장 먼저 대구 FC를 창단했으며, 광주는 차선책으로 상무 불사조를 유치했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 시민구단인 광주 FC로 다시 참가했다.[7] 여담으로 같은 동네 야구팀에게도 비슷한 별명이 있다. 정확히는 이쪽이 원조.[8] 2013 시즌에 상위 스플릿 진출은 성공했지만,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은 실패.[9] 시도민 구단 최초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은 2014년 성남 FC가 달성했다.[10] 이스탄불 더비에서 종종 언급되는 페네르바흐체의 6-0 대승리 당시 감독이기도 하였다. 당시 툰자이의 선취골을 보고도 태연히 서서 펩시콜라를 들이키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11] 2007시즌에는 장외룡 감독이 유학을 다녀오면서 한시즌 통째로 박이천 감독대행이 이끌었다.[12] 이 캐치프레이즈는 당시 인천 단장이었던 안종복과 연관이 있다. 안종복이 인천 구단을 떠난 뒤 2013년 경남 FC 사장으로 간 후 2006년 캐치프레이즈와 똑같은 컨셉의 '도민속으로'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경남 FC 캐치프레이즈로 썼으나 팀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자신은 콩밥까지 먹게 됐다.(...)[13] 4년 연속 사용[14] 당시 인천 감독이었던 허정무가 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 언급했던 '유쾌한 도전' 이라는 말에서 차용됐다.[15]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입주 첫 해를 기념하는 의미.[16] '인천이 세상 축구의 중심이다'라는 의미.[17] '투게더'는 2006년에 개봉한 인천유나이티드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에 등장하는 현 인천 U-18팀 임중용 감독의 명대사로 유명하다. 라돈치치 의문의 1패[18] 인천 유나이티드 12번 영구결번[19] 일명 '두루치기' 사건이라 불린다.[20] 물론 여전히 인천문학경기장도 명목상 홈구장 중 하나다. 팀의 흥행이 절정에 다다라서 4만명 이상의 대관중이 들어올 수 있는 경기가 열린다면 인천문학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겠다는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지만 과거와 달리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 제도는 오늘날 폐지됐기에 메가톤급 흥행 이슈가 몇 겹으로 터지지 않는 한 인천문학경기장에서 인천 유나이티드 홈경기가 다시 치러질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여담으로 인천문학경기장을 현재 관리하고 있는 주체는 한때 옆집 팀이었던 SK 와이번스.[21]
2012년 7월 15일 극적인 결승골을 성공시킨 빠울로의 골 세레모니.[22] 다만 이것은 서울과 수원이 서로를 라이벌이라고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로 싫어하기 때문이고, 실제로는 분위기로 보나 뭘로 보나 슈퍼매치가 더 격렬하고 관심을 끄는 매치이다. 게다가 경인더비도 처음에는 서포터들에게 언론이 만들어준 더비라는 소리를 들었다. 인천 관중동원력이 수원보다 훨씬 약한데도 지금의 위상을 갖춘데는 언론의 지원사격 덕이 컸다.[23] 부천은 경기도임에도 지역번호를 031이 아닌 인천과 같은 032를 사용한다. 여기에서 착안한 이름.[24] 인천 시절 2군 MVP를 하긴 했지만 인천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트레이드로 영입한 대구 FC에서 잘 키웠다고 보는 게 맞겠다.[25] 연도개최가 가끔 지연되거나 빨라지거나 할 때가 있다.[26] 국대 출신 내지는 이후 국대급으로 성장한 선수는 좀 있지만, 인천에서 국대에 뽑힌 선수는 유병수, 김남일, 김치우, 정인환, 전재호, 문선민 여섯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전재호는 부상으로 데뷔조차 하지 못했다. 최태욱조차도 인천 시절에는 청소년 대표로만 불려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