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22:17:57

이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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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2024 이기형감독.pn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이기형
李基珩 | Lee Ki-hyung
출생 1974년 9월 28일 ([age(1974-09-28)]세)[1]
전라남도 화순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1cm
학력 서울은로초등학교 (졸업)
신림중학교 (졸업)
정명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직업 축구 선수 (풀백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6~2002)
성남 일화 천마 (2003~2004)
FC 서울 (2005~2006)
오클랜드 시티 FC (2007~2010)
감독 FC 서울 (2011 / 코치)
FC 서울 2군 (2011~2012)
FC 서울 (2013~2014 / 코치)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5~2016 / 수석 코치)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6 / 감독 대행)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7~2018)
부산 아이파크 (2019~2020 / 코치)
부산 아이파크 (2020 / 감독 대행)
성남 FC (2023~2024)
옌볜 룽딩 (2024~)
행정 한국프로축구연맹 (2021~2022 / TSG 위원)
국가대표 47경기 6골 (대한민국 / 1995~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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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가족 아들 이호재, 아내, 딸
서명 파일:이기형서명.png
별명 캐논 슈터, 이기는
}}}}}}}}}}}} ||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지도자 경력6. 행정가 경력7. 여담8. 수상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현역 시절 포지션은 수비수(우측 풀백). 별명은 캐넌 슈터.

2. 클럽 경력

2.1. 프로 이전

전라남도 화순군 출생으로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은로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체육대회에 출전하여 달리기 우승을 차지했고, 이를 지켜본 축구부 코치의 제안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이 후 뛰어난 축구실력을 바탕으로 신림중, 정명고 모두 체육특기생으로 진학하였고, 고등학교 2학년 청소년 대표에 뽑힌 이후로 태극마크는 늘 그의 가슴에 붙어있었다.

이러한 실력을 바탕으로 이기형은 축구명문 고려대학교 축구부 92학번으로 입학하였고, 대학교 4학년인 1995년,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아시아 예선전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이미 이때부터 공격형 풀백의 이미지가 강했고 매우 강한 킥력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 슈팅이 인상적이었다.

2.2. 수원 삼성 블루윙즈

파일:external/www.kfa.or.kr/201611592715.jpg

고려대를 졸업하던 1996년, J리그행 대신 신생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신생팀 우선 지명으로 계약금 1억 5천만원이라는 당시로써는 거액을 안겨주며 이기형을 영입했고, 이기형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 창단 멤버로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등번호 6번.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가 된 이기형은 입단 첫 해에는 올림픽 대표팀 및 수원 입단 동기인 박충균과 경쟁이 예고되기도 하였으나, 저돌적이고 활발한 플레이로 단숨에 김호 감독이 아끼는 자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활약은 계속 이어져 1998년과 1999년 수원의 K-리그 2연패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게 되었다. 특히 반대편의 신홍기, 수비력이 뛰어난 이병근과 차별성 있는 특유의 킥과 저돌성으로 수원의 첫 번째 황금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99년 말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고, 무리한 재활로 약 1년 반을 쉬며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진 못한다. 그래도 2001년 여름 복귀했고, 아시안 슈퍼컵 2연패와 01-02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에 기여했다.

2002년을 끝으로 FA로 풀리며 계약 만료됐고, 그의 FA 보상금을 낼 만한 팀이 없다고 판단한 수원 구단은 그에게 적은 연봉 제시액을 제안했고, 결국 협상이 결렬돼 다소 초라하게 팀을 떠나게 된다.

2.3. 성남 일화 천마

"수원과 성남에서 정말 강한 팀을 많이 경험했죠. 그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팀을 하나 고른다면 성남에서의 첫해, 그러니까 2003년이에요. 그때 선수와 전술 등 모든 게 가장 강했어요. 지금 저와 함께 생활하시는 김도훈 감독님부터 정환이 형, 신태용 감독님, 이성남, 김대의, 김현수 같은 선수가 다 한 팀에 있었죠. 경기에 나가면 거의 이기는 식이었어요. 지금 전북이 비슷한 수준으로 가고 있지 않나 싶어요."

수원과 협상이 결렬된 이기형은 1996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 시절 트레이너로 사제의 연을 맺던 김학범이 코치로 있던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을 타진했고, 이적료 5억에 연봉 1억 5천만원에 수원의 라이벌 팀인 성남으로 전격 이적한다.[2]

성남에서 등번호 5번을 달았고, 첫 해에 팀의 리그 3연패에 기여했고, 2년 차에는 K리그 리그컵 우승에 기여하며 2년 연속 우승 트로피를 드는 등, 2년 동안 주전으로 뛰며 팀 수비에 크게 기여했다.

2004년 말 차경복 감독이 갑작스레 별세한 후 김학범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하며 팀에선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마침 계약 만료 + 고령 + 고액 연봉자인 이기형은 자연스럽게 팀을 떠나게 됐다.

2.4. FC 서울

2005 시즌을 앞두고 서울 연고 2년차를 맞이한 FC 서울은 어린 선수들의 중심을 잡아줄 빅네임 선수가 필요했고, 이기형을 영입했다. 라이벌 수원 때와 같은 등번호 6번을 달았다.

하지만, 본래 외국인 감독이 내정돼 이기형을 영입한 것인데 이장수가 지휘봉을 잡았고, 이장수 감독과 전술적 견해 차이로 갈등을 빚으며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다.

2005년에 16경기 밖에 출전을 못하였고 2006년에도 17경기 출전에 그쳤다. 2006년 K리그 리그컵 우승에 기여했으나, 2년 연속으로 정규 리그에서 한 자릿수 출전에 그치는 등 전력 외 자원으로 분류됐다.

결국 시즌 종료와 함께 FA로 팀을 나갔고, 그것이 K리그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다.

2.5. 오클랜드 시티 FC

파일:external/spnimage.edaily.co.kr/PP09121300014.jpg

서울과 2년 계약을 마친 후 K리그 중하위권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으나 연봉을 깎아가며 국내에 남기보다는 해외 진출을 경험하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A리그에서 뛰던 신태용의 추천으로 영어 공부와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한 오세아니아행을 결심했다. 처음엔 호주 리그에 참여하는 뉴질랜드의 웰링턴 피닉스 입단을 추진하였으나, 협상 단계에서 결렬된다.

그러다 뉴질랜드 풋볼 챔피언십의 오클랜드 시티로 전격 이적하였다. 당시 세미 프로 리그였던 뉴질랜드에서 월등한 기량을 자랑했고, 국내에서와는 달리 중앙 플레이메이커로 나서며 적지 않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활약으로 정규 주전으로 출전하였으며, 많은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08/09 시즌 리그와 OFC 챔피언스 리그 더블에 기여하며 FIFA 클럽 월드컵 참가권을 얻었고, 5, 6위 결정전에서 아프리카 챔피언 마젬베를 꺾으며 대회 5위에 기여했다. 예상보다 긴 3시즌 동안 활약했고, 2010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최종 은퇴하게 되었다.

3. 국가대표 경력

파일:external/www.kfa.or.kr/201611592716.jpg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데뷔하여[3] 축협은 올림픽 대표팀을 타국 A대표팀과 맞붙는 대회에 참가시켜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이기형은 21세의 나이에 칼스버그컵과 다이너스티컵을 소화하며 대표 선수로 첫발을 뗐다. 그중 다이너스티컵에서 일본을 상대한 결승전은 화제를 모았다. 전반 26분 이우영이 코너킥을 땅볼 패스로 내줬고, 후방에서 달려들던 이기형이 골대와 약 30m 떨어진 곳에서 쭉 뻗는 슛을 날려 골망을 찢을 듯 흔들었다. 4번째 A매치에서 터진 데뷔골로 이기형의 오른발은 뭇 사람에게 알려졌다. 이기형은 이날 한 골을 더 넣어 2-2 동점을 만들었으나 한국은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놓쳤다. 1997년 9월 28일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최종예선 3차전에서 멋진 크로스로 서정원의 동점골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47경기 6골로 꽤 많은 출장 기록을 갖고 있지만 정작 A대표로서 남긴 족적은 다이너스티컵 이후 희미하다. 대회 본선마다 불참했기 때문이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예선 때 붙박이 라이트백으로 뛰며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정작 본선 명단엔 들지 못했다. 차범근 감독이 자신을 외면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고 한다.[4]

플레이 스타일을 감안하면 한 수 위의 팀들 상대로 수비력 강화 차원에서 밀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기형 대신 발탁하려 했던 강철이나 강철이 부상으로 낙마하자 최종 발탁된 최성용은 이기형같이 폭발적인 스피드와 킥은 없지만 지구력과 경합 능력이 뛰어나 이를 바탕으로한 대인저지에 두각을 보인 선수들이었다. 최용수와 함께 월드컵 예선을 책임진 이상윤이 있으니 공격력 강화보단 균형을 잡아보려는 시도였던걸로 보이는데 현대축구 트렌드에 깜깜했던 당시 한국은 그런 미봉책으로 보완되는 팀이 아니었고 월드컵에서 찢어발겨졌다.

2002 한일 월드컵 역시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참가할 수 있었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 초창기에는 십자인대 부상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십자인대 부상은 원래 6개월 만에 나을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재활 훈련을 하다 무리하는 바람에 수술에 들어갔고, 그렇게 6개월씩 두 번 회복기간이 연장돼 결국 일년 반 동안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다.

2004 아시안컵도 예선은 주전으로 소화했으나 오만 쇼크로 별다른 족적은 남기지 못했고, 역시 본선행엔 실패했다. 2003년 10월 네팔을 7-0으로 대파할 때 2골을 넣은 것이 이기형의 마지막 A매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공격형 풀백으로 명성이 높았던 선수였다. 수비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 슈팅과 중거리 프리킥에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캐논슈터. 1999년 올스타전에서 123km, 2002년 올스타전에서 138km를 기록하며 최고의 캐논슈터상을 받기도 하였다.

5. 지도자 경력

5.1. FC 서울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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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은퇴 후 2011년부터 황보관 감독이 새로 부임한 친정 FC 서울의 코치로 합류하였다. 이후 서울이 최악의 부진으로 단 11경기 만에 황보관 감독이 사임하고, 코치진이 대거 개편되며 김성재 2군 코치가 1군으로 승격하면서 이기형은 2군 코치로 내려갔다. 2군 코치로서 2012년 서울의 리그 우승에 기여하는 등 1년 반 동안 김성남 2군 감독 아래서 선수 육성에 힘썼다.

2013년에는 1군 코치로 승격하며 ACL 준우승에 기여했고 2014년에는 FA컵 준우승을 1군에서 함께 했다.

5.2. 인천 유나이티드 FC

5.2.1. 수석 코치

성남 시절 연이 있던 김도훈 감독이 인천 유나이티드 FC 감독으로 부임한 2015년, 인천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며 지도자 인생 첫 수석 코치를 역임하게 됐다. 합류한 첫 해에 인천의 돌풍을 이끌며 FA컵 준우승에 일조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2016년에는 8월 말까지 팀이 최악의 경기력을 보이며 꼴찌에 허덕이고 마는데...

5.2.2. 감독 대행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6091801001260300091311.jpg
이기는 형
이기형 감독대행축하[5]

결국 2016년 8월 31일, 김도훈 감독이 경질 당하면서 이기형이 감독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9월 10일 FC 서울과의 경인더비에서 감독 대행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하여 탈꼴지에 성공했고,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었다.

감독 대행 자리에 오를 때 스플릿 라운드 전까지 3승 2무를 해내겠다고 약속한 걸 그대로 지켰다. 그리고 스플릿 라운드에서도 2승 1무를 거둬 대행 부임 이후 5승 3무를 기록, 이름에 빗댄 "이기는 형"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 수원 FC를 이겨 극적인 K리그 클래식 잔류를 이끌어냈다.

감독 대행으로써 팀을 재빨리 수습한 것, 선수단에 목표의식 부여, 기회를 못받던 르언 쑤언 쯔엉의 기용으로 대표된 폭넓은 선수 기용 등 능력을 인정받아 정식 감독으로 부임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9일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5.2.3. 감독

감독 대행 이후 정식 감독이 된 뒤, 그야말로 버스를 세우는 두줄 수비 축구를 강했다. 또한, 풀백 포변 성애자였다. 주전들을 제외한 서브와 후보 자원 들중에서 사이드를 본다는 선수들은 거진 풀백으로 포지션 변경을 강행하거나, R리그에서 풀백으로 뛰게 되는 괴상한 전략을 썼다. 김진야,김대경,박종진(1987) 등부터 신인들까지 희생양이 되었다.
5.2.3.1. 2017 시즌
야심차게 영입한 달리는 그 피지컬로 6개월 동안 0골 1어시를 기록하고 앉아있고, 땜빵으로 스트라이커로 기용된 웨슬리는 전문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공격이 잘 풀리지 않았으며, 부노자는 자존심이 강해 조직력을 와해시킬 때가 간혹 있어 수비에서 불안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노출하게 되었다. 결국 대행 시절과 달리 팀이 삐걱대며 좀처럼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중후반기에는 전북한테 3대1로 털리고, 서울한테는 5대1로 영혼까지 털리는 등[6]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그나마 후반기에 문선민, 김대중, 채프만 등이 각성한 이후로는 승점을 꽤 따내면서 최종 순위 9위를 기록해 어찌어찌 잔류는 성공했다. 선수단 기용 측면에서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케빈, 요니치, 권완규, 박대한, 진성욱 등 지난 시즌의 주축들을 상당수 잃고 맞이한 시즌이기에 참작의 여지는 있다.
5.2.3.2. 2018 시즌
시즌 시작 전부터 조건부 계약설[7], 대표이사의 월권논란[8], 코치진과의 불화설, 선수단과의 불화설, 달리의 영입과정에 관한 논란 등등 수많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시즌 개막 후, 계약만료로 떠난 하창래, 남은 계약기간을 해지하면서 내보낸 채프만, 군에 입대한 김도혁과 이상협 등을 제외하면 주전급 선수의 유출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무고사, 아길라르, 임은수, 김정호등이 합류하면서 인천 역사에 남을 정도로 수준높은 선수단을 갖추었다고 평가 받았다.

그러나 선수단 운영에 완전히 실패하여 그 잘하던 최종환, 이윤표, 김용환 등은 수비진 붕괴의 원흉으로 전락해버리고, 한석종이나 고슬기 등도 맞지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시즌 초의 폼을 유지하지 못하고 부진에 빠지는 등 스쿼드 수준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팀을 어린 선수가 30대에 접어든 부노자를 무시한다, 선수가 지각 등의 잘못을 저질러 팀의 규정을 어겼어도 벌금도 제대로 못걷는다는 등의 소리가 나오는 말그대로 개판 오분전의 상황에 빠뜨리고 만다. 팀이 이 모양이니 당연히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2R 전북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 이외의 경기는 부진했다.[9]

결국 12R 제주전이 끝나고 얼마 뒤인 5월 11일, 결국 사임을 표하며 팀을 떠났다. 코치진과 주장을 비롯한 선수 두 명이 5월 마지막 두 경기에서 감독에게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서 당초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결국 최종 사임이 결정된 것. 2018 시즌 중 기록은 12경기 1승 4무 7패이다.

인천 역사상 최고의 감독 반열에서 1년 반만에 최악의 감독으로 불리게 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떠나게된다.

5.3. 부산 아이파크 코치, 감독 대행

파일:FB_IMG_1546128605962.jpg

2019 시즌을 앞두고 2018년 12월 20일에 조덕제 감독을 따라 노상래와 함께 부산의 코치로 임명되었다.

직전까지 1부 리그 구단의 감독이었던 이기형과 전남 드래곤즈 전 감독 노상래의 이례적으로 2부 리그 구단의 코치로 복귀한 만큼 상당히 화제가 됐다.[10]

조덕제 감독과는 P급 라이센스를 준비하면서 만났는데 이기형 본인이 먼저 조덕제 감독과 함께 하고 싶다고 먼저 제시했다고 하고, 이후에 연락하니 흔쾌히 코치직을 받아주었다고 하며, 직책은 선수 시절 수비수였던 것을 감안했는지 수비 코치를 맡았다.

평소 조직적이고 수비적인 축구 위주로 배웠던 이기형은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조덕제 감독을 보좌하며 실제 상대가 누구든 모든 전술을 공격에 중점을 두고 고민하며 생각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2019시즌 부산의 극적인 승격에 기여하며 2020시즌 다시 K리그1으로 복귀하게 됐다.

2020년 9월 29일 팀의 조덕제 감독이 사퇴했고, 이기형 코치는 남은 시즌 동안 감독대행을 맡게 됐다. 순위는 12위. 11위 인천과 승점이 같고 득실차에서 3골 뒤지는 상황. 이번에도 강등을 막을 수 있을지 기대되고 있다.

그리고 감독 대행으로서 첫 경기 서울과의 경기에서 2:1로 승리하며 팀은 12위에서 10위로 상승했고 이 날 승리로 이기형 대행 체제는 많은 부산 팬들의 응원을 받는 듯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더 이상 이기는 형을 볼 수 없게 되었다.

26라운드 친정인 생존왕 인천 원정에서 이동준의 선제골로 앞서가다가 후반 들어 쭉 밀리더니 순식간에 두 골을 먹고 역전을 허용, 결국 1:2로 역전패하며 잔류 기회를 미루게 되었다.

결국 27라운드 성남 원정 최종 라운드 단두대 매치에서도 이동준 선수의 환상적인 발리 슛 선제골이 나왔음에도 공격진의 두께를 줄이고 수비를 강화함에도 불안불안한 수비를 보여주다가 결국 역전을 허용하며 1:2로 패배하며 잔류 기회를 날려벼리고 말았으며, 특히 역전을 당한 이후 공격 숫자를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김현을 투입하면서 이정협을 뺀 교체카드가 의아했다.

결국 부산은 1년 만에 강등당하면서 K리그 기업 클럽 사상 처음으로 승격 이후 1년 만에 재강등되었다.

후임으로 히카르두 페레스 감독이 선임되면서 부산을 떠났다.

5.4. 성남 FC 감독

2022년 12월 9일 2부 리그로 강등된 성남 FC 감독직에 선임되며 5년만에 다시 프로팀 감독을 맡게 되었으며, 대략 18년 만에 친정팀 성남에 복귀하였다.

강등 여파와 정치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2023시즌 예산이 대폭 삭감된 것은 물론 그로 인한 주전 선수들의 대거 이탈로 23시즌 상당히 험난할 것으로 전망된다.# 소위 ‘레알 성남’ 시절의 선수가 그 후신 팀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그간 지도자 및 행정가 경험을 발휘할지가 관건이었다.

5.4.1. 2023년

태국 1차 전지훈련 전에 ‘간절한 선수 위주로 팀을 구성했다’고 밠혔다.

홈 개막전에서 안산 그리너스를 상대로 1-1 무승부 상황에서 후반 추가시간 신재원의 극장 헤딩골로 2-1 승리를 가져갔다.

하지만 FA컵 포항에게 패배 후 충남아산, 안양, 부천에게 연달아 패배하며 리그 11위까지 떨어졌고, 충북청주, 김포에게도 무승부를 기록하며 팬들의 여론은 극에 치달았지만, 부산전 진성욱의 멀티골로 선두 경쟁을 펼치며부산에게 찬물을 끼얹어 주었고, 경남에게도 밀림 없이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부산전부터 불안했던 수비가 개선되지 않으며 아쉬움을 남겼다.

결국 7월 23일 연고이전 라이벌 팀이자 최하위팀인 천안을 상대로 무려 전반에만 2골이나 실점했고, 팀은 가브리엘의 캐리로 2:2로 따라왔고 후반전에는 닥공하며 천안을 위협했지만, 추가시간 몇분을 못 버티고 모따에게 추가골을 허용하며 천안의 시즌 첫 승 상대가 되며 자존심을 구겼고, 여론이 안좋아졌다.

시즌 중반까지 플레이오프권은 고사하고 하위권을 맴돌며 지도력에 의문을 드러냈는데, 특히 선수기용, 교체에 있어서 상당히 의문을 자아냈다.

예를 들자면, 1부 리그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한 안진범은 리그에서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외 좋은 움직임을 보여준 김훈민이나 김원준은 배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가장 심각한건 수비인데, 강의빈-조성욱 조합이 천안전에서 3실점하는데 원흉이 되었지만, 유선, 양시후, 패트릭은 또 잘 기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파일:0000165008_002_20230830224601456.jpg

29라운드에서 김포FC에 2-4로 충격적인 역전패를 하자 경기 결국 종료 후 버스 앞에서 주장단과 같이 성남 팬들과 20여분간의 면담을 가지기도 했다.[11]

성남 서포터즈는 당장 이기형 감독과 주장단의 이야기를 들은 만큼 향후 경기들은 더 지켜볼 예정으로 면담은 했어도 현 상황은 매우 불만족스럽기에 결과, 내용이 지금과 비슷하다면 거취 문제 등에 지금보다 더 강하게 불만을 표할 것이며, 성남과 이기형 감독에 반전이 요구되었다.

성남은 결코 하위권의 수준이 아닌 것이 1부 경험이 풍부한 문창진, 안진범 그 외에 박상혁이나 정한민등 스쿼드가 탄탄하지만, 플레이오프는 커녕 신생팀 충북청주에게도 순위가 밀리니 팬들은 답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9월 3일 전남과의 경기에서 마치 승점관리하는 팀마냥 수비적으로 나오며 말 그대로 수면축구를 선사하였다.

그러나 한달 이후로도 경기력이 나아지지 않았으며, 10월 21일 천안 시티 FC전에서 3:1로 패하며 남은 경기 상관 없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12]

천안의 5승 중 2승이 성남이라는 치욕적인 기록을 쓴 것은 덤.....

K리그2/2023년: 36경기 11승 11무 14패
대한축구협회 FA컵: 3경기 1승 1무 1패

2023년으로 보자면 성남FC 역대최악의 시즌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연승 없는 것은 애교이고, 그야말로 개판을 보여준 시즌이다. 많은 팬들은 시즌 종료 후 이기형 경질을 원하였지만 경질은 되지 않고 내년도 동행을 하게된다.

5.4.2. 2024년

작년에는 구단 안팎으로 논쟁도 많았고, 예산도 적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번 시즌은 K리그1대구 FC보다 예산이 많으며 이정협, 유상훈, 박광일, 윤영선, 알리바예프, 한석종, 김주원, 오재혁, 정원진, 김정환 등 K리그1급 선수 구성을 꾸리며 리그 최고수준의 스쿼드를 꾸릴 수 있게 되었다.

전술한 듯이, 팬들 대부분은 경질을 원하였지만, 프런트는 10R까지 기회를 주겠다고 한다. 사실상 올시즌이 그의 감독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1라운드 FC 안양 와의 원정경기에서 2골을 먹히고 2:0 패배하며 불안한 시작을 알렸다. 선수 보강을 많이 하였음에도 오히려 작년보다 더 심각해진 경기력이었으며, 패배 후 인터뷰에서 "강풍으로 인해 경기 계획에 많은 영향이 있었다."고 말하며 빈축을 샀다.

결국 올 시즌 성남의 전술도 가브리엘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전술이 될 듯 하다.

성남FC 공식 유튜브의 "MAGPIE" 에서 안양전 라커룸 대화가 공개되었는데, 대놓고 "1골 넣고 지킬 생각으로 경기하라"는 식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13]

2라운드 안산 그리너스 와의 홈경기에서 무기력하게 3:1 패배하자 경기 종료이후 일반석 및 서포터석에서 이기형 나가 라고 외치며 팬들의 인내심이 바닥 났음을 보여주었다.

3라운드 천안과의 라이벌 매치 원정 경기에선 무승부를 거뒀다. 하지만 작년 꼴찌팀 천안을 상대로 경기 내내 압도당하며 점유율 30%에 그치는 등 졸전을 거듭했다. 사실상 성남 입장에선 비기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약세였으며, 특히 3백을 내놓고 공격 의지가 없는 모습을 보인 건 팬들에게 충격을 줬다는 후문이다.

2024년 3월 20일 성남 구단은 이기형 감독을 경질했다고 공식발표했다. 보통 K리그 구단들은 감독을 경질하더라도 표면상으로는 자진사퇴 형식을 취하거나, 수고의 인사말 정도는 해주는 걸 보면 이례적이다. 이를 보아 아마, 선수단에서나 운영진들과의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리그 개막 후 3경기만에 경질되는 역대급 기록을 작성하며 24시즌 K리그 전체를 통틀어 가장 먼저 낙마한 감독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14]

최종 기록은 42경기 12승 13무 17패 승률 28.572%.

5.5. 옌볜 룽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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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5일 중국 갑급 리그 옌볜 룽딩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생활 첫 해외 무대에 진출했다.

6. 행정가 경력

부산을 떠난 후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기술분석관으로 임명되며 행정가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성남 FC 감독으로 선임되기 전인 2022시즌까지 활동했다.

이 시기에 K리그 모든 구단 경기를 찾아다니면서 큰 공부가 됐다고 하며 감독할 땐 당장 우리 팀, 다음 상대 팀 분석하기에 바빴는데, 디테일하게 장기간 여러 팀을 보면서 팀 성향이나 선수 파악이 되었다고 한다.

막상 성남FC 감독시절때 보면 기술분석관 시절 진짜로 K리그 모든 구단 경기를 찾아만 갔지 공부는 안된거같은 팀 운영을 보여줬다

7. 여담

  • 2002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기록한 138km 캐논슛 기록은 아직까지 K리그 올스타 역사상 최고속 기록으로 남아있다.
  • 1999년 8월 25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홈경기에서 이기형은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해야 했다. 당시 수원은 팀을 이끌던 외국인 선수들이 부상과 경고누적 등으로 모두 결장하는 바람에 국내선수들로만 팀을 꾸려야했고, 전반 박태하고정운에게 연속골을 허용한데 이어 전반 29분 이기형이 상대의 승리를 확정지어주는 듯한 골을 자신의 골문에 집어넣어 0-3이 되고 말았다. 패배의 예감이 수원을 감쌀즈음 수원의 저력이 발휘되며 서정원과 이병근의 골에 힘입어 극적으로 3-3 동점을 만든 뒤 후반 35분. 이기형이 30m 거리에서 대포알 슛을 터트려 4-3 역전극의 대미를 장식했다.
  • 2018 시즌 팀에서 나가기 전까지 인천이 거둔 1승은 전북인데 이 승리가 전북에겐 5월 10일까지 리그에서의 유일한 패배이다.
  • 아들 이호재 역시 축구 선수다. 2019년 대건고를 졸업하고 아빠의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 인천유나이티드 유소년 팀 출신으로 2018년 K리그 주니어 무대뿐 아니라 프로 2군인 R리그에서도 맹활약해 주목을 받았다. 190cm의 장신 스트라이커인 이호재의 합류는 2018년부터 고려대의 약점으로 지적되어 온 정통 스트라이커 부재에 대한 해답이 될 전망이다. 아버지가 인천에서 불명예스럽게 나온 여파인지 본인은 위약금을 주고 인천을 떠나 2021년 포항에서 선수를 시작했고 데뷔전에서 인천 상대로 골을 넣을 뻔 했다.
  • 풀백 포지션 변화를 즐긴다. 2016년 인천 유나이티드 FC 수석 코치 시절 2군 리그인 R리그 감독도 도맡았는데 경기 라인업마다 그 해 신인 선수들이 풀백 포변 시험대에 오르곤 했다. 사실 풀백 말고도 스트라이커센터백으로 포변하거나 중앙 미드필더스트라이커를 보는 괴상한 라인업도 종종 보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가 인천 감독이 된 후 경질되기 직전은 2018시즌 초반에 풀백이 진짜 구멍났다. 주전 풀백이던 김용환과 최종환이 제 폼이 아니자, 이기형이 코치시절 시험무대에 올렸던 박종진이 중용되기 시작했다. 이에 축구 팬들은 진짜 미래를 내다봤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 인천 감독시절 인천 유나이티드 구단 클럽하우스가 짓기 전 승기하수처리장 근처 상가에 당구장에서 쓰리쿠션 당구를 쳤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구를 좋아한다

8. 수상

  • 2002년 스포츠투데이 - 푸마코리아 선정 7월의 베스트11 (DF 부문)
  • 수원 삼성 블루윙즈
    • K리그 (우승 2회) (1998년, 1999년)
    • K리그 (준우승 1회) (1996년)
    •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 1회) (2002년)
    • 대한축구협회 FA컵 (준우승 1회) (1996년)
    • K리그 리그컵 (우승 4회) (1999년-아디다스컵, 1999년-대한화재컵, 2000년, 2001년)
    • 대한민국 슈퍼컵 (우승 2회) (1999년, 2000년)
    •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2회) (2001년, 2002년)
    • 아시아 슈퍼컵 (우승 2회) (2001년, 2002년)
  • 성남 일화 천마
    • K리그 (우승 1회) (2003년)
    • K리그 리그컵 (우승 1회) (2004년)
    • AFC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1회) (2004년)
  • FC 서울
  • 오클랜드 시티 FC
    • 뉴질랜드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회) (2008-09 시즌)

9. 관련 문서

이기형, 전설의 오른쪽 수비수


[1] 74년 9월생임에도 또래보다 빠른 92학번으로 입학한 것으로 보아, 빠른 년생 적용자인 것으로 보인다.[2] 김학범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성남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김학범은 차경복 감독과 잠시 상의하더니 한 시간 만에 “와라”라는 답신을 보냈다고.[3] 당시 축구협회는 올림픽 대표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4] 충격을 받은 이기형은 대회를 시청하지 않았고, 이웃집의 환호성 소리도 듣기 싫어 한동안 산속에 틀어박혔다고 한다.[5] 인천 팬들이 기적적 잔류를 축하하기 위한 걸개이다.[6] 심지어 둘다 홈경기였다[7] 개막후 10경기동안 승리가 없으면 경질된다는 계약을 체결한다는 설이다.이후 상황들을 보면 말도 안되는 헛소문이었다 판단될 것이다[8] 선발 라인업에 대표이사가 관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출전기회를 얻은 선수들이 잔류의 주축이었다는 내용의 논란이다.[9] 이 과정에서 구단 역사에 남을 5연패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10] 단순히 프로 감독을 하던 사람이 감독이 아닌 코치직을 맡는 경우는 간혹 있는데 최문식, 이영익, 김호영, 노상래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미국 프로 야구 MLB에선 감독 출신 코치를 흔하게 만날 수 있다. 감독에서 해고된 뒤 바로 타 구탄 벤치 코치로 재취업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메이저 리그 구단들은 초보 감독을 임명할 때 거의 반드시 빅리그 감독 출신 벤치 코치를 임명해 리스크를 최소화한다. MLB에서 감독과 코치는 상하 관계, 주종 관계가 아닌 ‘파트너’다. 감독과 코치가 각자 전문 영역으로 뚜렷하게 구분돼 있다. 코치로 잘한다고 다 감독 후보가 되는 것도 아니고, 감독으로 실패했다고 코치 역량이 평가절하되지도 않는다고 여긴다.[11] 무작정 버스를 막는 것이 아닌 아닌 면담 요구를 먼저 한 뒤 약속된 곳에서 통제 아래 진행된 면담이었다.#[12] 이날 경기 패배로 승점 41점이 되었는데, 남은 두경기를 다 이겨도 플레이오프 마지노선인 5위 경남 49점보다도 낮다.[13] 2골차로 이기고 있는데도 볼돌릴 시간에 골을 넣으라고 독려하는 이정효 감독과 큰 차이가 나는 발언이다.[14] 감독 대행은 최철우 수석코치가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