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21:59:16

신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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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신춘호
(1992~2021)
제2대
신동원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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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60013><colcolor=#ffffff> 농심그룹 초대 회장
신춘호
辛春浩|Shin Choon-ho
파일:신춘호.png
출생 1930년 12월 1일[1]
경상남도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
(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2]
사망 2021년 3월 27일 (향년 90세)[3]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영산 신씨[4]
율촌(栗村)
신체 180cm[5]
직업 기업인
학력 경남중학교 (졸업)
동아고등학교 (졸업)
동아대학교 (법학 / 학사)
부모 아버지 신진수[6], 어머니 김순필[7]
형제자매 신격호, 신철호
누나 신소하[8], 신경애[9]
남동생 신선호[10], 신준호
여동생 신경숙[11], 신정숙[12], 신정희[13]
배우자 김낙양[14]
자녀 장녀 신현주[15](1955 ~ )
장남 신동원(1958 ~ )
차남 신동윤[16](1958 ~ )
삼남 신동익[17](1960 ~ )
차녀 신윤경[18](1968 ~ )
종교 불교
파일:롯데 신격호 회장과 농심 신춘호 회장.jpg
젊은 시절 형 신격호와 같이 찍은 사진(오른쪽)
파일:농심그룹 초창기 모습.jpg
농심그룹 초창기 시절 찍은 사진.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신춘호 회장이다.
파일:신춘호 회장 80년대 당시 모습.jpg
1980년 유럽 출장 갔을 때 찍은 사진.

1. 개요2. 생애
2.1. 기업 활동2.2. 작명가 신춘호2.3. 사망
3. 사건사고4. 수훈5. 가족관계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농심그룹 창립자 및 초대 회장.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의 둘째 남동생이며 원래는 형이 운영했던 롯데그룹에서 근무했으나 신격호 회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라면 사업을 위해 1965년 롯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19] 1978년 롯데공업주식회사를 계열분리하고 사명을 농심으로 변경하였다.

흔히 '라면왕'으로 불리며, 한국의 라면산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1932년[20] 3월 27일 경상남도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신진수(辛鎭洙, 1902. 8. 25 ~ 1973. 6. 16)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순필(金順必, 1904. 2. 12 ~ 1952. 10. 26) 사이의 5남 5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혼란 속에 경찰로 군 복무를 마친 뒤 23세에 동아고등학교, 27세에 동아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는데[21], 학업과 병행하면서 국제시장자갈치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당시 유통기한이 지난 을 싸게 팔아 처분하려다 실패한 뒤로 식품의 가격보다 질을 우선시해야 함을 알았다.

1958년에 맏형 신격호의 부름을 받아 일본 (주)롯데의 무역부장으로 시작해 1962년 이사까지 올랐고, 그가 라면 사업에 진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형 신격호 당시 사장이 "라면 사업을 왜 하느냐?"며 신춘호의 계획에 반대했고,[22] 이때부터 형제 간의 갈등이 생겼다. 결국 1963년에 형제 간 사업관계를 정리한 후 1965년 롯데공업을 세웠고 '롯데라면' 등을 만들어서 당시 라면업계를 독주하던 삼양식품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던 와중 신격호 회장이 "롯데라는 이름을 쓰지 말라"며 항의를 했고 결국 1978년 농심으로 이름을 바꾼다.

결국 신춘호 회장은 선친에 대한 제사도 따로 지낼 정도로 형 신격호 회장과는 아예 의절한 상태로 지냈고,[23] 결국 두 형제는 이승에서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2020년 1월 신격호의 사망 당시 신선호 산사스식품 사장이나 신준호 푸르밀 회장 등 다른 동생들은 신격호의 빈소를 찾았지만 신춘호는 영결식까지도 찾지 않았다고 한다. 형한테 끝까지 앙금이 남아있어서 참석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고, 그가 고령이여서 건강 문제로 참석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다. 대신 아들들인 신동원-신동윤 형제가 아버지를 대신해 큰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반면 1년 후 신춘호 회장이 별세하자 큰 집 조카들인 신동주-신동빈 형제의 조문 여부가 관심이었는데 경영 일정 때문에 일본에 있어서 둘 다 장례식과 영결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2020년 1월부터 한국에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 19로 인해 입국 시 2주간 자가격리를 거쳐야 하는 관계로 장례 일정에 맞춘 조문 자체가 불가능했다. 대신 신동빈 회장이 그룹의 2인자인 송용덕 롯데지주 대표이사 부회장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조화를 보내서 작은아버지를 애도했으며,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은 직접 빈소에 조문을 했다. 그리고 신동빈 회장 측이 보낸 조화는 신준호 회장의 조화와 함께 신춘호 회장의 영정 바로 옆에 놓였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신격호 일가와 신춘호 일가의 갈등이 과거보다는 많이 풀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똑같이 맏형과 사이가 안 좋은 막내동생 신준호 푸르밀 회장과는 생전에 사이가 좋았으며, 농심과 푸르밀이 협업해서 출시한 제품도 꽤 있었다. 하지만 둘째 형 신철호 전 롯데 사장[24]이랑은 맏형이랑 똑같이 사이가 안 좋았다.

신춘호 본인은 평생 신격호 회장 및 롯데그룹과의 연을 끊다시피 한 반면 신춘호 회장의 자녀들은 신격호 회장의 자녀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25]

2.1. 기업 활동

국민 라면으로 유명한 신라면을 출시해 라면 업계 판매 1위 자리를 단숨에 거머쥐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신라면을 출시하기 전부터 안성탕면, 농심 너구리를 출시하며 당시 한국 라면 업계 부동의 1위였던 삼양을 바짝 뒤쫒다가 마침내 거둔 승리였다. 국물 라면에 이어 짜장 라면인 짜파게티와 각종 스낵으로 사업을 넓혔다. 1992년에 회장으로 추대된 후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비상임 부회장을 비롯해 1994년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부회장,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도 맡았다.

굵은 면발의 고급 짜장라면 짜왕을 출시했다. 짜왕을 내놓은 지 한 달 만에 국내 라면 시장 부동의 1위인 신라면에 이어 2위에 오를 만큼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농심 신라면 신화를 생수 제품인 백산수로 잇고자 한다. 국내 생수 1위 브랜드인 삼다수과 경쟁하고 있는 중이다.

형과 사이가 안 좋은 것과는 별개로 범롯데가의 다른 가족들처럼 언론에 얼굴을 잘 내비치지 않는데, 신춘호 회장은 유독 심한 은둔형 스타일이다. 그동안 농심그룹 신년사를 직접 연설한 적이 없었으나, 창립 50주년이 되어서야 나서서 직접 소감을 밝혔다. 역시나 그가 나온 사진은 없었다.[26][27]

2021년 2월 사내이사에서 연임을 포기하면서 56년 만에 농심그룹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미 농심그룹의 대표이사는 장남 신동원이 맡고 있었고 본인은 회장직만 갖고 있었지만 사내이사에서도 물러나면서 회사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그리고 본인도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신동원 부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하게 됐다.

2.2. 작명가 신춘호

특이하게도 농심에서 판매하는 유명 제품 중에는 신춘호 회장이 제품명이나 제품 광고 카피를 직접 지은 사례가 많다. 대한민국 부동의 원톱 라면인 신라면은 "한국인 입맛에 맞는 얼큰한 라면"이라는 이미지와 농심 오너로서의 자존심을 걸었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본인의 성씨 글자인 매울 신 자를 직접 썼다. 특히 신라면 광고 카피인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부터 시작해 신라면의 제품 포장 디자인까지 신 회장이 일일이 다 손을 썼다고 한다.

새우깡 역시 신춘호 회장이 지은 이름인데 신춘호 회장의 막내딸인 신윤경이 어릴 적 민요 아리랑을 부를 때 "아리 아리 아라리요"라고 잘못 불렀던 것에서 착안해 '새우깡'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 새우깡이 대히트를 치면서 이후에 나온 스낵 제품에는 유독 "깡"자 돌림으로 끝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양파깡, 고구마깡, 감자깡 등등. 여기에 짜장 라면의 대표 제품 중 하나인 짜파게티라는 이름도 신 회장이 작명했는데 스파게티처럼 짜장 소스를 면에 비벼먹는다는 방법에서 착안해 작명했다고 한다. 이 단순하지만 찰진 이름들은 이후 광고 CM송을 타고 전국적으로 불리우게 된다. 여담으로 생전 마지막으로 작명한 제품은 옥수수깡이라고 전해진다. 작명가로서의 회장이 지어주고 떠난 마지막 선물

2.3. 사망

파일:신춘호 농심 회장 영결식.jpg
2021년 3월 27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형 신격호가 세상을 떠나고 바로 다음 해였으며, 1932년생이 맞다면 89세 생일[28]에 사망한 것이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오랫동안 지병 치료를 받아왔고 사망하기 전 치료에 힘써준 것에 감사를 표하고자 병원 측에 10억 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3. 사건사고

2013년 6월 17일 지점별로 부과된 매출목표를 채우기 위해 농심 직원들이 이른바 삥처리를 강요해 왔다고 주장했다.

국세청은 2014년 7월 농심 본사에 투입해 관련 회계자료를 입수했다. 비자금 조성 혐의를 조사하는 팀을 만들어 세무조사를 진행했다.

결국 공정거래위원회는 농심이 판매목표를 할당하면서 일정수준 이상의 판매를 강제한 행위로 5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4. 수훈

  • 철탑산업훈장 (1984)

5. 가족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범롯데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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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김낙양 사이에 슬하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신동원과 차남 신동윤은 일란성 쌍둥이다.[29]

농심그룹의 회장직은 장남 신동원이 승계했다. 차남 신동윤은 현재 율촌화학 부회장, 3남 신동익은 메가마트 부회장를 맡고 있다. 농심그룹의 준대기업 진입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계열분리가 될 가능성도 있다.[30]

배우자 김낙양은 불자로, 법명은 '덕성화'다. 하동군 쌍계사에 석가모니 대불과 경내 다리(해탈교)를 놓아주었고, 이를 기념해 두 곳에 신춘호 회장 가족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이 설치되어 있다. 관련 기사.


[1] 음력 10월 12일. 호적상 생일은 1932년 3월 27일이다. 호적상으로는 89세(세는나이 90살) 생일에 사망하였다.[2] 인근의 하잠리, 조일리와 함께 영산 신씨 집성촌이다.[3] #[4] 초당공파(草堂公派) 27세 호(浩) 항렬.[5] 굉장한 장신이다. 지금도 180cm는 큰편인 키에 속하지만, 그가 1930년대생임을 감안하면 굉장한 장신이다.[6] 辛鎭洙. 1902. 8. 25 ~ 1973. 6. 16.[7] 金順必. 1904. 2. 12 ~ 1952. 10. 26. 김해 김씨다.[8] 辛小荷.[9] 辛敬愛.[10] 辛宣浩. 1934년 12월 28일생이다. 일본 산사스식품공업 사장을 역임했다.[11] 辛敬淑.[12] 辛貞淑.[13] 辛貞姬.[14] 金洛陽. 1932년 9월 29일생이다. 김해 김씨 김선출(金善出)의 딸이다.[15] 辛炫周. 1955년 9월 18일생이다.[16] 辛東侖. 1958년 1월 9일생이다.[17] 辛東益. 1960년 2월 13일생이다.[18] 辛倫京. 1968년 1월 7일생이다.[19] 이 때문에 큰형과 멀어지고 각자의 집에서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20] 주류 언론들에 보도된 것처럼 1930년 12월 1일생일 수도 있다. 원래 이 세대 대다수가 호적상 나이랑 실제 나이, 주민등록상 나이가 서로 맞지 않고 오락가락한다.[21] 맏형 신격호는 일본으로 돈 벌러 나간 상태여서 국내에 없는 상황이고 둘째 형인 신철호는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아 돈을 벌 수 있는 건강상태가 아니었다.[22] 신격호가 반대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미 라면시장은 삼양식품이 부동의 1위인 가운데 풍년라면 등 여러 업체가 뛰어들어 포화상태란 것이고, 라면 사업이 한창인 일본은 간편식을 사먹을 만큼 한국보다 훨씬 부자지만 한국은 아직 그 수준은 아니란 것이었다.[23] 후일 농심이 라면업계에서 1등을 차지하던 시점에 어느 날 농심은 롯데 측에서 롯데마트 PB상품 라면 출시와 관련해 도움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하였다. 물론 맏형한테 인정받은것도 있다. 신격호는 라면사업을 굉장히 반대하였음에도 셋째 남동생이 성공하자 신격호도 신춘호를 인정한것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농심은 1985년 이후로 계속 라면업계에서 1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누군가한테 인정 받고 안 받고를 떠나서 자신이 어려울때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았던 맏형이 이제와서 자신한테 도움을 요청한것에 화가 났을것으로 추정 된다. 아무튼 이것이 신격호, 신춘호의 생전 마지막 연락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1999년에 부친의 유골 도난 사건으로 장례를 한 번 치르게 되었는데 이 때 빈소에는 자신과 신격호, 신준호 형제가 빈소에 있었다.[24] 1966년 그룹의 돈을 횡령을 해 형 신격호의 회장 자리를 빼앗으려다가 구속되었다. 그 이후 롯데가랑 단절한 듯하다. 1999년 신격호, 신철호, 신춘호의 아버지인 신진수 옹의 도굴 사건 일어났을 때 장례를 더 치르게 되었는데 그때도 둘째형 신철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해 6월 9일에 사망했다. 이때 신씨 형제들은 아무도 조문을 오지 않았다고 한다.[25] 장남인 신동원 회장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동환 푸르밀 대표이사 등 범롯데가 2세 사촌형제들과는 친목모임을 만들어 허물없이 뭉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친목모임은 범롯데가 1세대들과 달리 2세대들은 화목하게 지내자는 취지에서 꾸려졌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장기적으로 롯데그룹과의 협력관계가 기대된다는 전망이 있다.[26]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의 막내 아들 조욱래 DSDL회장, 하이트진로산업 회장 박문효 등이 있다.[27] 1999년 신춘호 회장이 뉴스 영상에 등장한 적이 있는데 바로 부친인 신진수의 묘소 도굴사건 때문이었다.[28] 구순을 맞이하는 날이 된다.[29] 둘 다 고려대학교 76학번으로, 신동원은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신동윤은 산업공학과이다. 신춘호의 3남 신동익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과 79학번이다. 이 인연으로 인해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에는 농심의 기여금으로 세워진 농심국제관이 자리잡고 있다.[30] 준대기업으로 지정되면 농심이 보유하고 있는 율촌화학, 농심미분 등 상장, 비상장 계열사의 경영사항은 물론 계열사간 거래까지 세부적으로 공시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또한 계열사간의 내부거래도 제한이 생긴다. 그런데 문제는 농심이 계열사간의 거래율이 높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