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9 10:40:09

김용휘

1. 소개2. 현대 유니콘스
2.1. 프런트로써의 능력2.2. 비판
3. 기타4.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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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2008년 제1차 이사회 당시 모습. 왼쪽 정장을 입은 이가 김용휘 현대 유니콘스 사장. 오른쪽 야구 점퍼를 입은 사람은 故 하일성 KBO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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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 눈앞의 성적을 주로 본다면, 프런트는 그보다 멀리 내다보고 팀을 운영해야 한다.

KBO 리그 현대 유니콘스의 前 사장.

1. 소개

현대 유니콘스 김용휘 사장은 국내 프로야구 사상 손꼽히는 유능한 프런트였다.
- SPORTS2.0 제 96호해당 기사

1950년생. 한국 스포츠에서 유능한 프런트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경동고등학교[1]국민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 현대건설 총무부에 입사했던 그는 "운동부를 좀 맡아봐라"라는 상부의 지시로 1978년 7월부터 현대건설 여자배구팀 관리를 맡게 된다. 그가 운영에 참가하면서 그 해 11월에 3차 실업배구연맹전을 우승했다. 1980년 현대건설이 현대 농구팀 운영을 담당하게 되자[2] 당시 최고의 대어인 이충희 스카우트를 담당해 결국 영입에 성공한 전력도 있다.

이후 역도팀 등을 관리하다 본격적으로 전문 스포츠 경영인이 된 것은 1996년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되고 초대 단장으로 임명되면서 부터이다.

2. 현대 유니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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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국내 굴지의 재벌현대그룹이 프로 야구단을 창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만 이미 프로 야구팀을 운영하고 있던 여타 경쟁 그룹들의 견제로 프로 진입은 무산되고[3] 일단 실업야구 팀인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먼 현대 피닉스는 현대건설에서 관리를 했는데 현대건설 총무과에 근무 중이었던 김용휘가 이 담당자였다.

그리고 1996년 현대그룹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여 현대 유니콘스로 창단하고 초대 단장 직을 김용휘가 맡았다. 태평양을 인수했지만 선수층이 열악했던 터라 선수단 구성에 힘을 쏟았고 전준호, 임선동, 박종호, 조규제 등을 트레이드로 영입했고 당시 삼성 라이온즈만이 가지고 있던 실내 연습장을 현대 유니콘스도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판단, 국내 최고의 연습 시설을 가진 "현대 원당 연습장"을 만든 것도 김용휘 단장의 판단이었다.

그 결과 창단한 지 3년 만인 1998년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2.1. 프런트로써의 능력

기본적인 철칙은 "현장과 프런트는 별개의 업무를 담당해야 된다. 선수 영입과 신인 스카우트의 문제는 프런트가, 경기 내적인 문제는 현장이 담당해야 팀이 돌아간다."라는 것.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고 처음 시작한 현장 업무가 바로 "연봉 고과기준"을 확실하게 확립한 것이다. 연봉 고과기준을 선수들에게 공개하고, 구단이 이러이러한 기준으로 선수 연봉을 책정하니 이에 대해 선수들도 연봉 협상 등에서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 토론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관중 동원과 관련해서도 연봉 고과기준 점수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이 또한 현대 유니콘스가 처음 도입한 것이다. 프로야구 뿐만 아니라 국내 스포츠팀들의 일방적인 프로팀의 연봉 협상 문화를 생각하면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리고 선수단의 장점과 약점,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단적인 예로 1997년 1번타자 전준호를 트레이드로 롯데에서 데려 왔지만 그 해 6위에 머물렀다. 시즌이 끝나고 김용휘 사장이 김재박 감독에게 "이 우승하기 위해서 포수가 필요합니까 아니면 4번 타자인 1루수가 필요합니까??"라고 물었다. 김재박 감독이 "포수가 더 보탬이 됩니다."라고 대답하자 김용휘 사장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합니까?"라는 말을 했었다. 당시 현대에는 둘 다 필요했지만 1루수에는 장타가 받쳐주는 김경기가 있었기 때문에 포수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던졌을 때 이미 김용휘 사장은 판단을 내렸던 상황이었고 자신의 판단이 확실한지 현장에 확인을 했던 것이다.

또한 선수단 지원에도 아낌없이 지원해줬는데 현대가 원정경기 때 사용하는 호텔은 연간계약을 맺어 저렴한 값에 숙박을 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4] 유니폼도 미즈노 사에서 스폰서를 받아서 당시 최고 수준의 실착유니폼을 가지게 된 것도[5] 그의 공이다. [6]

당시 42살의 생초짜였던 김재박을 감독직에 앉힌 것도 그의 일이었다. 김재박을 감독에 임명하면서 했던 말은 프런트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신이 감독이고 내가 단장이다. 고유 영역은 서로 건드리지 말자. 코치나 선수를 쓰는 건 당신 마음이다. 대신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거나 트레이드하는 건 내 권한이다. 선수가 필요하다면 계획서를 내라. 계획서대로 선수를 뽑아주는 게 프런트의 일이다. 능력이 이만큼밖에 되지 않는 선수들로 성적을 내지 못했다면 그건 프런트 책임이다. 성적이 나쁘다고 감독의 목을 치진 않는다. 그 걱정은 하지 마라. 좋은 선수를 주지 못한 사장이나 단장이 갈려야지 왜 감독이 옷을 벗어야 하나. 다만 선수는 구단의 재산이다. 구단에 돈이 없으면 팔아먹기라도 해야 한다. 이 부분은 절대 당신이 건드려선 안된다."

이후 김재박은 현대를 10여년을 이끌면서 단 한 번도 프런트 업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거 보면서 찔리는 구단은 반성좀 해라 반성하여 갓런트가 되었다 카더라 코칭스태프의 변화가 거의 없었고 감독이 오래 감독직을 유지했던 것도 김용휘와 현대 프런트의 이런 개념마인드 때문이었다고 한다.

현대 출신 코칭 스태프들은 이상할 정도로 다른 팀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도 김용휘의 능력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대표적으로 LG로 이적한 후의 김재박이나 김용달 등을 봐도 알 수 있다. 프런트가 알아서 선수단 구성과 관리를 도맡아서 다해주고 코칭스탭은 철저하게 현장 경기 운영만 전담하던 현대의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가 코치가 모든 것을 알아서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서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이다.

2001년 이후 모기업의 지원이 사실상 끊어지고, 1차 지명도 못하는 막장 상황에서도 적절한 트레이드FA 제도보상 선수, 신인 육성으로 팀을 우승 2회 포함 4강권으로 유지한 점 때문에 명단장으로 칭송받는다. 프런트와 현장의 역할 분담 등 국내에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식 단장 야구에 가장 근접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2.2. 비판

하지만 비판여론도 있는데, 구단 프런트의 임무 분담이 명확하긴 했지만, 더불어 사장이 현장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평가도 존재했다. 선수단 기용에 있어서 특히, 베테랑 선수와 신인 선수 기용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모습들은 보수적인 야구계에서 바라봤을 땐 썩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7] 대표적으로 주전 기용을 요구했던 신인이 김수경, 이택근, 황재균 등이다. 특히 김수경의 경우 입단 첫해인 1998년에 김용휘는 신인이었던 김수경을 전지훈련에 데려가라고 요구했지만, 김재박은 김수경의 기량이 떨어지고 선수단 정원이 다 찼다며 거절. 이에 김용휘는 1명분 경비를 더 내줄테니까 김수경을 데리고 가라고 했고, 결국 그 해 김수경은 신인왕을 수상할 정도로 활약했다. 본인도 신인 선수 기용문제에 대해서 관여한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것이 본인 입맛 때문이 아닌 구단과 선수의 상품 가치를 높이고 장기적인 팀의 미래를 고려해서라고 밝혔다. 그러나 2005년 말 상무에서 전역한 이종욱을 곧바로 방출하고 두 달 가까이 쉬쉬한 것은 빼도 박도 못할 흑역사다.[8]

현대 유니콘스의 르네상스를 이끈 장본인이었고, 쌍방울 레이더스에 현금과 박정현, 가내영 등을 주고 박경완, 조규제, 김광림 등을 영입하여 현대 유니콘스 왕조를 건설하였으나, 한편으로 무지막지한 현질로 선수들을 싹쓸이하던 삼성 라이온즈와 함께 프로야구 전체의 전력 불균형을 불러와 KBO 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듣는다.

그리고 마케팅 부분에 있어서도 약점을 드러냈는데, 현대가 좋은 성적을 거둠에도 팬층은 두텁지 않았으며, 지역연고 문제에 있어서도 확실하게 일처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 꼽힌다. 다만 기습적인 연고지 이전은 현대그룹 차원의 결정이었고, 이후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망, 왕자의 난, 정몽헌 회장의 자살 등으로 모기업이 흔들리면서 계획이 모두 어그러졌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불가항력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애초에 현대그룹은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200억 정도를 투자해서 목동 야구장을 최신식으로 리모델링하고 그룹 차원에서 대대적인 야구 마케팅을 계획했었지만, 모기업이 흔들리면서 야구단은 완전히 방치되고 모든 게 무산되었다.

3. 기타

2008년에 한 인터뷰에 따르면 구단에선 원래 문학 야구장을 쓰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학 야구장 설계를 3번이나 바꿨다고 한다. 그렇게 지어지던 중에 현대그룹에서 연고이전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고, 선수들 뿐만 아니라 구단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지만 결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양반 밑에서 프런트 직원으로 일한 사람 중 1명이 바로 염경엽넥센 히어로즈 감독이다. 당시 김용휘는 염경엽을 두고 머리가 비상하고 집념이 대단하다고 했다. 김대호 MK스포츠 국장이 회고하는 염감독의 프런트 시절

아버지 김성배강원도지사, 경상북도지사, 서울특별시장,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4. 관련 항목



[1] 백인천 감독이 고교 선배라고 한다.[2] 원래 1978년에 창단해 현대중공업에서 관리했다.[3] 이 과정에서 현대그룹은 당시 프로야구에 관심을 보이고 있던 쌍용그룹, 진로 등 여타 4~5개 재벌을 끌여들여서 독자 리그를 창설하는 방안을 모색하나, 현실적인 제약에 부딪혀서 무산된다. 일단 야구장이 없잖아[4] 실제 하루 숙박비 20만원대의 방을 6만원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2007년에도 이 계약 덕분에 현대가 힘들 때 지원을 쭉 해주던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이 이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고. 실제로 이런 사실을 모르는 다른 7개팀 팬들에게 돈 없다는 팀이 호텔 쓰면서 KBO 돈 낭비하냐고 욕먹었다.[5] 현대 실착 유니폼을 거래해 본 사람이라면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수준이 높다는 걸 안다.[6] 이숭용의 이야기에 따르면 비싼 일제 미즈노 유니폼은 1군 선수들만 주고, 2군은 평범한 국산이었다고 한다. 일부러 1군과 2군 사이에 격차를 둬서 2군선수들의 분발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실제 미국에서도 메이저리거는 천연소가죽 허리띠를 주고, 마이너리거 한테는 중국산 인조가죽 허리띠를 주는 구단도 있다. 다만 이에 대해 현대 유니콘스의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7] 이러한 프론트 감독 구분론의 대척점에 선 이는 다름 아닌 김성근 감독과 삼성 라이온즈 사장 시절의 김응용 감독. 김성근 감독이 가는 곳마다 프론트와 대립을 했던 이유는 감독이 알아서 할테니 프론트는 일체 감독에게 간섭치 말고 지원만 해 주고 성적이 안 나올 때 책임을 물어라는 주장 때문이었고 사장 시절 김응용이 애제자 선동열 당시 삼성 감독에게 보여준 행보는 그야말로 김성근이 원하는 프론트의 모습. 어떻게 보면 대표 라이벌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김성근 감독이 성적부진과 선수단 장악 실패 등 순수하게 본인 실책으로 잘린 곳도 삼성이란 점도 아이러니하다. 이 부분은 본인도 자서전에서 삼성은 최고의 대우를 해줬으나 자신의 실책이 컸다며 지금의 삼성으로 간다면 잘할텐데라고 아쉬워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은 2009년 초다.[8] 2005년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정수성을 믿어서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고교 졸업 당시 2차 2라운드에 지명되었고 고교, 대학 시절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이종욱과 2차 마지막 라운드(12라운드) 지명으로 프로에 발을 디딘 정수성은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종욱 방출은 이후 팀이 넥센 히어로즈로 넘어오면서 전준호의 후임 리드오프를 찾는 데에 애를 먹는 원인이 되었고 2012년 서건창이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해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