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1 07:27:59

한진중공업

기업개요
파일:JSBxZAw.jpg
정식명칭 주식회사 한진중공업
영문명칭 Hanjin Heavy Industries & Construction Co., Ltd.
설립일 2007년 8월 1일[1]
업종명 강선 건조업,건설업
아파트 브랜드 해모로
상장여부 상장기업
기업규모 중견기업
모기업 한국산업은행
상장시장 유가증권시장(2007년 ~)
종목코드 097230
대표자 이병모
홈페이지

1. 개요2. 연혁3. 지배구조4. 역대 임원
4.1. 민영화 이전4.2. 민영화 이후
5. 영업 현황6. 노동운동7. 한진그룹과의 관계

1. 개요

한진그룹에서 분리된 한진중공업그룹[2]의 핵심 대기업던 회사.

본사는 부산광역시 영도구 태종로 233 (봉래동5가)에 위치해 있다.

2. 연혁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 자본으로 부산 영도에 세워진 조선중공업(朝鮮重工業)을 전신으로 한다. 조선중공업은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합작투자로 설립된 회사로,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자본금 300만원으로 설립되었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 직전에는 자본금 700만원 (현재가치 8천400억원) 의 규모로 성장했다. 이후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 해군으로부터 발주받은 선박 12척 등을 수주 건조하며, 설비와 자본금을 증자하며 (1,500만원-현재가치 1조8000억원) 당시까지 조선 최대 규모인 조선방직을 능가하는 금액이었으며, 해방 직전인 1945년에는 전시특수를 누리며 자본금 3,100만원(현재가치 3조7천억원)의 규모로 큰 성장을 하게 된다. 해방 이후 50년대까지 한국에서 1,000톤 이상의 대형 철선을 건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조선소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중화학 공업시설은 흥남 등 북한지역에 세워졌기 때문에, 조선중공업은 드물게 남한 지역에 온전히 남겨진 중공업 시설이었다.

1945년 8.15 해방 뒤 일본인 경영진과 간부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자, 전 수상서 치안관 박상길을 중심으로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본사를 관리했으나, 대책위원회 측 횡령으로 노동자들이 노조분회를 결성 후 대책위를 축출해 자주적으로 공장을 관리했다. 그러나 미군정 출범 후 군정법령 33호에 따라 일본인 재산은 적산으로 분류되어 미군정청에 귀속되었는데, 조선중공업은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동양척식회사를 이어받은 군정청 산하 신한공사에 귀속되어 관리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조선공사법에 의거 1950년 1월 자본금 3억원의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로 출범했고,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그러나 6.25 전쟁을 거치며 피폐해진 경제상황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선박 수요가 저렴한 일본 중고선박의 수입으로 대체되어 발주되는 선박이 없다시피하다 보니 50년대 내내 대한조선공사는 변변한 선박을 건조할 수 없었으며, 간간히 소형선박이나 수리조선만 간신히 하는 정부의 대표적인 적자 공기업이 되었다. 막대한 원조를 해주던 미국 측에서는 조선공사의 민간매각을 종용했으며, 이에 정부에서는 1958년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를 폐지하고 (주)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하여 주식을 민간에 매각하려 했으나, 매각에 실패하여 형태만 주식회사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국가소유 공기업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5.16 군사정변 직후 재차 국영화하여 정상화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1962년 국내 최초로 공작기계(선반)를 제작 후 1968년 11월 당시 재계순위 10위권 안팎에 있던 극동해운에 매각되면서 재차 민영화됐다. 극동해운의 계열사 편입 이후 남궁연 사장은 부산 영도조선소의 설비를 확충하고, 1969년 대만으로부터 발주받아 국내 최초로 수출선을 건조했고, 1974년 미국 걸프 사로부터 발주받아 국내 최초로 대형 수출선을 건조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소 인근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조선소를 확장하기 힘들어 1972년 즈음 거제도에 옥포조선소를 짓기로 하였으나..... 이듬해 1973년 오일쇼크의 발발로, 조선업 경기가 급강하하면서 휘청거리게 되고, 옥포조선소는 결국 1978년 대우그룹에 분할매각됐다. 이후 옥포조선소는 (주)대우조선공업을 거쳐 (주)대우중공업으로 합병되어 오늘의 대우조선해양에 이르게 된다.

옥포조선소 매각 후 1977년 사우디아라비아 TAIF 공군기지 시설 공사 및 국내 최초로 석유 시추선 건조 등을 했으며 1981년 동해조선을 인수하고 옥포기업을 합병 후 부산수리조선소를 세웠다. 1982년 국내 최초로 사우디 제다에 해외 수리 조선소를 세우고, 1984년 12월 동양 최초로 수륙양용 공기 부양선을 건조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뒤로 하고 1988년 법정관리되어 1989년 조선산업 합리화 계획에 따라 한진그룹이 본사를 인수하면서 한진중공업이 되었다. 1996년 법정관리 종결 뒤 1999년 3월 경남 마산에서 경비정 등을 제작하던 중소 조선업체였던 코리아타코마[3]를 합병하고, 같은 해 8월 한진건설, 한진종합건설을 합병하였다.

철도차량도 제작한 적이 있었다. 여러 무궁화호 객차들과 DHC 디젤동차 일부 차량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코레일 341000호대 전동차[4]부산교통공사 2000호대 전동차같은 도시통근형 전동차도 생산한 적이 있었다. 이후 철도차량 부문은 현대정공대우중공업과의 빅딜 사업으로 인해 현대로템으로 합병되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첫 VVVF 전동차를 제작한 곳이 한진중공업이다. 물론 대우중공업도 비슷한 시기에 VVVF 전동차를 제작했지만 구 2x30편성이 현재 341x01편성(한진중공업 제작)이라서 대우중공업이 최초는 아니다. 만약 2x30편성이 351x01편성이었다면 대우중공업이 우리나라의 첫 VVVF 전동차를 제작한 회사로 알려져 있을 것이다.

2005년 한진그룹에서 계열 분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막장 드라마를 찍었다. 2008년 ~ 2012년 동안 노사분규가 장기화되어 해양 플랜트 건설에 많이 뛰어들지 못한 게 새옹지마가 되었는지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이 줄줄이 신음하는 2015년에도 그리 큰 적자를 보지 않고 위기를 넘기나 했으나, 2016년 채권단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2019년 2월 필리핀 소재 수빅 조선소가 현지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함에 따라 자본금 대비 자본총계 비율이 -140%를 기록, 완전자본잠식에 빠졌다. 수빅조선소에 대한 한진중공업의 보증채무는 4억1000만달러(약 4600억원) 규모다. 결국 채권단이 6,874억원에 달하는 채권을 출자전환하고, 대주주인 한진중공업홀딩스와 조남호 회장 개인 소유의 지분을 전액 감자하면서 채권단이 소유, 경영하는 회사가 되었다. 수빅 조선소에 2조 원을 투자한 조남호의 결정이 회사의 운명을 좌우한 셈이다. #

3. 지배구조

2019년 10월 기준
주주명 지분율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한국산업은행 16.14%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우리은행 10.84%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농협은행 10.14%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하나은행 8.90%
파일:필리핀 국기.png 리잘상업은행 8.53%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국민은행 7.09%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한국수출입은행 6.86%
파일:필리핀 국기.png 필리핀토지은행 5.01%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우리사주조합 0.60%

4. 역대 임원

4.1. 민영화 이전

  • 관리인
    • 박상길 (1945)
    • 김재련 (1945)
    • 정우조 (1945)
  • 사장
    • 김권태 (1945~1949)
    • 이연재 (1949~1952)
    • 신성모 (1952~1953)
    • 유완창 (1953~1954)
    • 이철원 (1954~1958)
    • 석상옥 (1958~1960)
    • 권태춘 (1961)
    • 이영진 (1961~1965)
    • 김두찬 (1965~1968)

4.2. 민영화 이후

  • 회장
    • 남궁연 (1975~1988)
  • 대표이사 회장
    • 조남호 (2003~2013)
  • 대표이사 부회장
    • 조남호 (1999~2003)
    • 김정훈 (2004~2007)
  • 대표이사 사장
    • 남궁연 (1968~1975)
    • 남궁호 (1975~1988)
    • 안정모 (1978~1980)
    • 송영수 (1996~2000)
    • 이우식 (2000~2002)
    • 박재영 (2000~2004)
    • 김정훈 (2002~2004)
    • 김정웅 (2004~2007)
    • 홍순익 (2004~2007)
    • 박규원 (2007~2009)
    • 이강록 (2007~2008)
    • 송화영 (2008~2014)
    • 이재용 (2009~2013)
    • 최성문 (2013~2015)
    • 이만영 (2014~2016)
    • 안진규 (2015~2017)
    • 이윤희 (2017~2019)
    • 이병모 (2019~)
  • 법정관리인
    • 조원강 (1988~1989)
    • 이근수 (1989)
    • 송영수 (1989~1996)

5. 영업 현황

2000년대 이후로는 일반 아파트 건설업, 상업시설 건설 등 건설업에 치중하는 모양이며, 실제로 대부분의 매출이 건설업에서 뽑히고 있다. 해모로가 한진중공업의 아파트 브랜드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건설업의 비중이 높을 뿐이지 조선업도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소는 부산의 영도조선소와 필리핀의 수빅조선소를 보유하고 있다. 영도조선소의 경우 부지가 협소한 사정 상 대량건조는 불가능한 대신 각종 첨단기술이 적용된 연구선이나 군함 같은 특수선 위주로 건조한다. 수빅조선소는 상당한 규모의 건조시설을 갖추고 있어 대형 선박은 주로 여기서 건조한다.

영도조선소는 경제성 있는 특수선에 역량을 집중하고 상선의 비중을 점차 줄여나가는 것으로 수익성 강화에 나섰다. 2015년 2월 말 기준 영도조선소의 수주 잔량은 15척으로 일부 벌크선을 제외하면 대부분 특수선 및 중소형 상선이다. 이 중 6~7척은 지난해 한국해양수산연수원, 조달청 등으로부터 수주한 항해 실습선이다. 일반 상선은 2011년 현대상선으로부터 수주한 벌크선 한 척 밖에 없다. 한진중공업을 공동관리하는 채권단은 영도조선소의 상선 부문 비중을 단계적으로 축소하여, 2020년까지 영도조선소를 특수선 전문 조선소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한국 해군 최대의 군함인 독도함이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그리고 후속함인 마라도함(가칭)도 한진중공업이 맡은 상태이다.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위치한 동서울터미널의 부지 소유주이기도 하다. 동서울터미널은 시설의 노후화로 약 32층 규모의 쌍둥이 빌딩으로 재개발이 예정되어있다. 터미널 개발을 위해 그룹 차원에서도 부동산 등 각종 자산 매각을 통해 재무 안전성을 강화하는 등 터미널 개발에 그룹의 사활을 건 초대형 프로젝트인듯하다.

6. 노동운동

타 조선업체들에 비해 노사분규가 크게 이슈화되었다. 일제시대부터 이어진 조선소의 기나긴 역사와 궤를 함께한 노동운동의 역사가 존재하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노동운동 역사의 산증인이라 하겠다.

대한조선공사 시절부터 박정희 정부의 대한노총(현 한국노총) 산하 노조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노동자 권익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대규모의 민주적 노동조합이 존재했다[5], 1960년대 말 조선공사 민영화 반대 투쟁에서 패배한 뒤 70년대에는 당시 대다수 노조들이 그랬듯이 관제적 성격을 띄게 되나, 중공업 부문에서 민주적 노동조합이 대대적으로 부활한 1987년 이후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다시 부산 지역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80년대 이후 활약한 대표적인 노동운동가로는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인 김진숙(이후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있다. 부산 지역에서 노동변호사로 활약하던 노무현 역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 씨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돌연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더군다나 장례를 치르려던 그의 시신을 경찰병력을 동원해 강제로 빼앗아가는 짓거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안기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노태우 정부 시기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꼽히며, 당시의 분신정국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 중 하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2003년에는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85호 크레인에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으며[6], 얼마 후 곽재규 조합원도 따라서 숨을 거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한때 노동자들의 동반자였던 노무현 정권 때였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이 사건 직전에 일어난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분신자살 사건을 두고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라는 발언을 하여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

2011년에는 희망버스 사건이 있었다. 정리해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위에서 언급된 김진숙 지도위원의 85호 크레인 농성을 계기로 크게 이슈화되었다. 희망버스 투쟁 이후에는 파업에 대한 거액의 손해배상이 원인이 되어 2012년에는 최강서 조합원이, 2013년에는 또 다른 김 모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7. 한진그룹과의 관계

영 좋지 않다.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맏형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으로부터 계열 분리하여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한바탕 막장 드라마를 찍었기 때문이다.

조남호 회장은 지금까지도 한진그룹 일가와 사이가 굉장히 안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앙금의 단적인 예로 본진인 한진그룹에서는 조중훈 전대 회장의 제사를 음력에 진행하는 반면, 한진중공업에서는 양력에 치른다.겹제사 출장갈 때 대한항공진에어를 아예 타지 마라(...)는 내부 지시까지 있을 정도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대한항공에서 할인을 해 주었으나, 이제는 없을 뿐더러 대한항공을 타면 출장비도 정산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시아나항공(!)의 자회사인 에어부산관계가 좋은 편이다. 에어부산은 기업우대 제도로 동남권 소재 기업들에게 할인을 해 주는 게 있어서, 영도구에 본사가 있는 한진중공업으로서는 특기할 사항이 아니다.

이는 GS그룹이 필수 인프라 중 하나인 전화망을 LG U+의 것으로 사용하는 거라던지, 천일고속/천일여객 계열사들이 천일고속천일여객그룹으로 분리되어 남남이 된 것과 대조적이다. 사실 GS그룹도 LG그룹과 싸워서 헤어졌더라면 전화망을 모조리 SK텔레콤이나 KT로 바꿔 버렸을지 모르며, 천일여객의 경우에도 지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식들에게 다른 회사를 물려 줘서 서류상으로 남남이 된 터라 실질적으로는 계열사에 준할 정도로 교류가 많다. 대우그룹 출신 법인들이 자체 버스나 승용차를 자일대우상용차쉐보레(한국GM)로 뽑을 정도로 의리가 강한 것과는 완전 천양지차.

그래도 2019년 4월 13일에 조남호 전 회장이 조양호의 빈소를 찾긴 했다. 시간대는 다르지만 막내인 조정호도 빈소에 갔다 왔다.

2019년 조남호 전 회장의 지분이 완전 소각되면서 조씨 일가와 무관한 회사가 되었기에, 이제는 별 의미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제 대한항공을 타도 출장비 정산받을 수 있는지는 현 재직자들의 추가바람.


[1] 구 한진중공업 법인에서 물적분할한 날짜이다.[2] 2018년 5월 기준 재계서열 56위던 기업집단. 2019년 12월 현재 지주회사인 한진중공업홀딩스 산하에 한일레저(골프), 대륜E&S(도시가스), 대륜발전, 별내에너지(에너지공급)가 남아 있다.[3] 원래 김종필 전 총리의 셋째 형 김종락이 소유했으나, 경영난으로 법정관리를 거쳐 1991년 한진그룹에 인수되었다. VLCC 같은 대형 상선을 건조하지 않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의 상선과 군함 역사에 큰 역할을 한 회사이다.[4] 341x01~341x04편성[5] 이 시기를 상세하게 다룬 연구서로 남화숙 워싱턴대학교 교수의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가 있다.[6] 정은임 아나운서가 이 사건을 소개한 라디오 방송분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8u97Dsgem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