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尹興信1540년 ~ 1592년 (향년 52세)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파평(坡平).
임진왜란 발발 당시 다대포[1]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2]였다.
2. 생애
1540년(중종 35년)경에 중종 때 권신인 윤임[3]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4] 아버지가 을사사화로 숙청될 때는 나이가 어려 죽음을 피한 대신 신분이 노비로 떨어졌지만 선조 때 윤임의 명예가 복권된 후 양반의 신분을 회복하자 바로 무과에 응시해 장수가 되었다.허나 노비의 신분으로 자란 탓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여 명문가의 후손임에도 양반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였으며 특히 진천 현감(종6품)에 재직 중이던 1580년(선조 13)에는 문맹이라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하고 1582년에도 비위 사실이 발견되어 추고(推考)당하기도 했다.
3. 임진왜란
부산진 전투 직후 일본군 일부는 동래성으로 향하고 일부는 다대포와 서평포[5], 서생포[6]로 흩어져서 공격해왔는데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다대포로 진격해온 일본군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은 격퇴하여 시간을 벌었으나 이튿날인 4월 14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휘하 병력이 불과 800명밖에 없어 거의 19,000명에 육박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분전 끝에 전사하였다.# 이에 바닷가의 군현(郡縣)과 진보(鎭堡)의 수령들과 군사들은 모두 소문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자세한 내용은 다대포진성 전투 항목 참조.전사할 때의 나이는 불분명하지만 아버지 윤임이 1545년에 사사되었으므로 그 이전에 태어난 게 거의 분명하며 따라서 나이는 적게 잡아도 40대 후반으로 추정한다. 다만 1545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만 16살이 넘으면 안 되므로[7] 아무리 많이 잡아봤자 60대 초반 정도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생년은 1530~1545년 사이라고 볼 수 있다.[8]
조정에서도 그의 공을 높이 사 선무원종공신 1등 책봉, 정려[9]와 병조참판 증직을 했으며 영조 임금 당시 동래부사와 경상감사를 지낸 조엄이 윤흥신이 용맹하게 싸워 전사한 일에 대해 조정에 포상을 건의했다. 이후 이것이 받아들여져 조엄 당대에 윤흥신의 충렬사 추가 배향이 이루어졌다. 그의 손자 조인영 대에는 윤흥신 순절비가 세워졌다. #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다대초등학교 건너편에 윤흥신을 기리는 '윤공단'이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동래구의 충렬사에도 배향되었다. 그런데 그를 기념하는 석상은 정작 사하구가 아닌 동구 고관입구 인근[10]에 있는데 이 때문에 해당 인물과 관계된 사하구 쪽으로 석상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유야무야되었으며 심지어 석상 자체의 관리도 소홀했다.# 그러다가 2023년 10월 말에 기존의 석상을 철거하고 위치를 약간 옮겨서 연내에 다시 동상을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1]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2] 경상도 다대포는 평안도 만포진과 더불어 정3품 당상관이 첨사직을 맡은 두 군데 중 하나였다. 한 마디로 다른 곳에서는 첨사라고 하면 나으리 소리를 들었지만 위 두 곳의 첨사는 영감 소리를 들었다고 보면 된다[3] 윤원형과 달리 윤임에 대한 평가는 다소 논란이 있는 편이지만 어느 쪽도 '악명'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악명과는 별개로 윤임이 정치력이 뛰어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분위기다. 애초에 정계에서 닳고닳은 문신이 아니라 무장 출신이다. 윤임이 좀 더 현명하게 처신했다면 사화는 피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인종이 일찍 죽고 경원대군에게 전위하기로 결정된 순간 이미 윤임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왕위를 놓고 벌이는 정치투쟁에서 패자에겐 죽음 뿐인데, 처음부터 현명한 처신이고 나발이고 할 여지가 있을리가 없다.[4] 적자로는 막내이다.[5] 현재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일대[6]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7] 역적으로 몰려 구족이 멸하더라도 군주가 연산군 같은 잔혹한 케이스를 빼면 15세 미만이면 살았다. 윤흥신이 1530년 이전 출생자였더라면 이때 아버지와 같이 나란히 사형당했을 것이다.[8] 위키백과에는 1540년 출생으로 서술되어 있다.[9]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10]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 333번길 쌈지공원 안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