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7 14:24:41

이윤서(조선)

이윤서
李胤緖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1574년
사망 1624년 (향년 50세)
선승(善承)
시호 장의(壯毅)
본관 합천 이씨
가족 관계 증조부 - 이희증(李希曾)
부 - 이천수(李天受)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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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무관.

2. 생애

병마절도사 이윤검의 후손이자 이천수의 아들로 1594년 무과에 급제해 1600년 선전관에 임명되어 비변사양감을 겸임했고 청하현감으로 재직중 사소한 일로 파직했다. 1618년 성진첨사로 임명되어 방어 준비에 임한 공로로 절충계까지 올랐고 함흥별장을 지냈다.

1620년 가선대부에 봉해졌고 구성 부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모문룡의 명군이 후금토벌을 명목으로 가도에 주둔하며 주변 조선 마을에 패악질을 일삼았고 각 읍의 수령들에게 모욕을 줬음에도 올바른 정치로 부의 백성들에게 칭송받았다.

좌영장으로 부임당시 후금의 기마대가 조선을 넘어오자 의연하게 대처했으며 1623년 인조반정이후 조정으로 복귀해 위장을 지내고 부원수 이괄과 함께 영변으로 이동해 중군으로 북방의 병력을 조련하고 방어 준비에 힘썼다.

이듬해 이괄이 자신의 아들을 모함하고 자신에게 금부도사를 보내는데 분개하여 거병하자 어쩔수 없이 참가했고 평소 이괄의 오만방자한 성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별장 이순무와 함께 이괄, 한명련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중군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원수 장만에게 투항했다. 이에 한명련의 수하들과 후발대의 김효신까지 관군에게 투항해 반군의 사기를 흔들어놨다.

하지만 죄책감으로 군영에서 자살했다. 그의 행동은 가문의 안위를 본존받았으며 사후 진무공신 1등 우찬성에 추증되었고 장의의 시호를 내렸다. 옥계의 충현사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