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9 03:48:44

의순공주


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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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 추존 국왕 · 왕비 · 추존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
후궁 : 환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자 : 목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녀 : 익조 ~ 연산군 · 중종 ~ 철종
※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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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효종의 왕녀
의순공주 | 義順公主
파일:족두리묘(의순).jpg
의순공주 묘역 전경
출생 1635년(인조 13년)[선원록]
사망 1662년(현종 3년)
능묘 의순공주묘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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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애숙(愛淑)[선원록]
부모 생부 - 금림군 이개윤(錦林君 李愷胤)
생모 - 문화 류씨[3]
양부 - 효종
양모 - 인선왕후
부군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봉호 의순공주(義順公主) [4]
}}}}}}}}} ||
1. 개요2. 생애
2.1. 탄생2.2. 정치적인 혼인2.3. 부부 생활2.4. 귀국2.5. 사망
3. 여담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효종인선왕후양녀.

본래 성종의 서9남 익양군의 증손이자 성종의 서7남 봉안군의 양증손인 금림군 이개윤(錦林君 李愷胤, ? ~ ?)[5]과 부인 문화 류씨[6][7]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원래 가계는 다음과 같다.
성종 이혈 - 봉안군 이봉 - 흥원군 이경 - 기성군 이현[8] - 금림군 이개윤(서자) - 의순공주
아버지 금림군은 성종과 후궁 숙의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익양군의 후손이며 익양군의 이복형 봉안군의 양증손이다. 따라서 혈통상으로든 법적으로든 성종의 현손이며 효종에게는 10촌 종조부이다. 그러므로 의순공주는 효종의 11촌 고모가 되나 도리어 효종의 양녀가 되었으니 이는 항렬을 따지지 않은 비정상적인 입적이었다. 양녀가 된 경위는 후술.

의순공주의 삶을 요약하면 종실의 딸로 태어나 공주가 되고, 청나라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의 대복진(大福晉)[9]이 되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인생이었다 할 수 있다.

2. 생애

2.1. 탄생

1635년(인조 13년)에 금림군의 7남 4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10]

2.2. 정치적인 혼인

의순공주의 일이 있기 전인 1637년(인조15) 9월, 청은 조선의 여자를 요구했다. 화친을 맺을 때 '내외의 여러 신하들과 혼인하여 화친을 공고히 할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던 탓에 청의 타타라 잉굴다이와 하다나라 마푸타가 "비록 황제의 분부가 없지만 조선이 성의가 있다면 이치상 먼저 스스로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조선에서 혼인은 큰일이라 이런 식으로 할 수 없다고 쳐냈지만 잠깐 수습한 것뿐이었다.[11] 그 해 11월 20일, 청은 다시 잉굴다이를 통해 칙서를 보냈다.
"시녀를 뽑아 보내는 일은 근거할 만한 문적(文籍)[12]이 있다. 재상의 딸은 몇 사람이나 거두어 기르고 있는가?"
당시 병자호란 직후였기 때문에 오랑캐에 향한 증오와 반감이 매우 높았다. 오죽하면 청의 사신과 정명수가 기생을 바치라고 요구하니 기생들이 죽음으로 항거할 정도였다.[13] 천민에 속하는 기생조차 싫다고 자살하는데, 양반들이 자신의 딸을 선뜻 내놓을 리 없었다. 그러나 국가의 안위가 달려있는 일이었으므로 결국 6명의 여자를 뽑았다. 하지만 정실부인이 낳은 적녀는 죽어도 안 보낸다. 그래서 서자의 딸이 공주까지 된 것이다
비국이 결혼할 여자 여섯 사람을 뽑아 아뢰었다. 나이 8세인 첩손녀(妾孫女)를 변개한 우의정 신경진의 양녀, 8세인 전 판서 이명(李溟)의 첩녀, 8세인 공조 판서 이시백의 양녀, 12세인 전 첨지 이후근의 첩녀, 11세인 전 판서 심기원의 첩녀이며, 종실의 딸 한 사람도 그 가운데에 있었는데 상이 명하여 빼게 하고 드디어 평안 병사 이시영의 첩녀로 그 간선(簡選)을 채웠다.
인조실록》 인조 15년 11월 27일
다행히 마음이 바뀐 숭덕제의 명령으로 혼인은 취소된다.[14] 하지만 시녀는 뽑아 보내라고 닦달을 해서 각사(各司)의 여종으로 10명을 보냈다.[15] 1638년(인조 16) 9월 12일, 숭덕제는 조선이 보낸 시녀 10명 중 4명은 궁중에 들였고, 정친왕 지르가랑과 도르곤에게 1명씩, 나머지는 다른 곳에 분배했다.

그로부터 13년 후인 1650년(효종 1) 3월 다시 청이 여자를 요구했다. 3월 5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오던 사환사 내궁 나업(羅嶪)[16]이 같이 오던 청의 사신 파흘내(巴訖乃) 등이 한 말을 효종에게 전한다.
구왕(九王)이 부지(夫之)[17]를 갓 잃어 국왕과 혼인을 맺고자 한다. 국왕의 딸이 몇이며 몇 살인지 우리들이 모두 안다. 만일 혼인이 성사되면 여러 신하가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이며, 대국에서도 전적으로 믿게 될 것이다.
효종실록》 효종 1년 3월 5일
이에 나업이 "현재 있는 공주는 2살"이라고 하니 도르곤은 "공주의 나이가 어리면 종실(宗室) 가운데 적합한 자로 선택하여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사실 내관 나업을 시켜 거짓말을 하게 했는데, 효종에게 혼인 적령기에 해당하는 공주가 없었던 게 아니다. 인조의 고명딸 효명옹주는 이미 가례를 치렀고, 효종의 장녀 숙신공주는 어려서 죽고 없었지만 차녀 숙안공주의 나이가 15세였다. 또한 소현세자의 딸들도 있었다. 그러나 효종은 왕녀를 보낼 생각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3월 20일 청 사신이 창덕궁으로 들어와 후보자들을 보고 금림군 이개윤의 딸을 최종 선택했다. 효종은 그녀를 양녀로 삼아 의순공주(義順公主)로 책봉하고, 생부 금림군은 종1품 가덕대부로 품계를 올려주고, 그녀의 오빠 이준은 장릉 참봉으로 이수는 전설사 별검으로 삼았다. 딸 덕분에 집안이 번성하게 된 셈.

그런데 금림군의 딸을 데리고 갈 때는 인평대군도 같이 가야 한다는 것과 대신들의 딸을 시녀로 충당하라는 추가 요구까지 했다. 당장 시녀 선발이 가장 큰일이었다. 사대부 집안에서는 앞다투어 혼인할 정도였고, 이런 현실을 효종도 알고 있었다.[18] 민간이라고 해서 분위기가 다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반청 분위기는 굉장한 것이었다. 특히 도르곤은 '섭정 도르곤'이라고 불렸는데, 어린 조카 순치제를 대신해 청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어서 거의 황제와 다름없었는데도 말이다.[19]

사실 여기에는 먼저 효종이 즉위하고, 반청복명 성향의 김상헌, 송시열, 김집을 등용한 배경이 있었다. 청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를 트집 잡았는데, 그 중에는 탄핵 당해 관직에서 쫓겨난 김자점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청에서는 그가 큰 공이 있는 사람인데 쫓아낸 이유가 무엇이며, 누가 쫓아내라고 탄핵했는지까지 고하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김자점 부자가 조정의 일을 청에 누설한 것으로 의심했다. 효종도 마찬가지로 김자점을 의심했지만 물증이 없어서 처벌하지는 못했다. 이를 통해 청이 효종의 반청 분위기를 감지하고, 이를 조기에 제압하고 사대 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통치 수단으로 국가 간의 혼인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2.3. 부부 생활

마침내 4월 22일, 공주는 고국을 떠나 청으로 갔다. 이 날은 효종이 서대문 밖 근교까지 나와서 공주를 전송했고, 공조 판서 원두표가 공주를 호위했으며, 시녀 16명과 의녀, 유모, 몸종, 수모(首母)가 그 뒤를 따랐다.

도르곤은 버이러(만주족 귀족 작위)들과 사냥을 한다고 산해관 밖으로 나와 있다가 5월 21일 공주가 도착하자 맞이하여 당일에 성혼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이역만리로 떠나 39세의 도르곤과 부부가 된 것이다. 무려 23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부부 생활은 원만했던 듯 하다. 후일 도르곤은 공주를 맞이할 때 육례를 순서대로 갖추지 못했음을 이해해달라고 했고, 먼저 사신을 보내고 친영을 하려고 했는데 조선은 길이 멀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원두표가 도르곤이 처음에는 만족스러워 했으나 연경에 도착하자 태도를 바꾸어 공주와 시녀들이 못생겼다고 불만족스러워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도르곤의 말을 보면 도르곤의 '진짜 불만'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선한(先汗) 때부터 본국에 은혜를 베푼 것이 매우 두터웠고, 나도 국왕에게 사사로이 베푼 은혜가 있다. 그런데 번번이 왜적과 흔단이 있다는 핑계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겠다고 청하니, 이는 필시 그대 나라가 상하 간에 모두 다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녀를 선발하여 올리는 일은 명나라 때부터 이미 구례(舊例)로 되어 있다. 오늘날 일은 그대 나라의 행동을 보려는 것인데, 그대 나라가 정밀하게 선발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주도 만족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시녀 역시 못생긴 자가 대부분이다. 그대 나라의 불성실함을 여기에서 더욱 볼 수 있다."
《효종실록》 효종 1년 8월 27일
위에서 보듯이 이는 의순공주의 외모가 못생겨서가 아니라 조선의 북벌 준비를 감지하고, 이에 대한 불만을 공주의 외모 핑계를 대면서 으름장을 놓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학자 성해응이 쓴 연경재전집에서는 도르곤이 의순공주를 보고 매우 기뻐하여 '백송골'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백송골은 조선 특산의 사냥용 매로, '흰 빛깔의 매'를 말하는데 몽골만주에서 귀하게 쳤으며, 이는 자태가 뛰어나고 훌륭하다는 뜻이다. 즉 도르곤은 의순공주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정실부인의 으뜸인 대복진에 둔 것이다.

2.4. 귀국

12월 31일, 도르곤이 열하로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진 부상으로 사망했다. 혼인한 지 단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역만리 타국에 시집와 과부가 된 것도 통탄할 노릇인데, 도르곤의 장례를 치르고 한달 반 만에 순치제가 숙청 작업을 시작했다. 도르곤의 묘호, 시호, 존호를 박탈하고 위패를 부수고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목을 잘라 효수했다. 잔혹하지만 도르곤이 조선에서도 주제 넘었다고 평가할 만큼 쌓아온 업보가 있었고, 순치제의 통치에도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의순공주는 다른 황족[20]과 재혼했다. 본래 조선의 종실 여성으로 태어나 교육 받은 그녀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21] 하지만 청나라는 유목민족의 전통인 형사취수제도 있거니와, 역대 중원 왕조들의 화번공주들도 사정에 따라 2번이든 3번이든 혼인했다. 당장 잘 알려진 왕소군만 해도 재혼을 거듭했다.

재혼을 도르곤 사후 불어닥친 역풍에서 보로가 의순공주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보는 설도 있다. 허나 이런 시각도 약간 미묘한 게 이 단친왕 보로는 도르곤이 죽자마자 도르곤의 다른 첩을 건드려서 스캔들이 났던 적이 있고, 도르곤 사후 줄을 갈아타며 도르곤의 정적 지르가랑과 함께 도르곤의 탄핵 상소를 올렸던 인물이기 때문. 어쨌든 정백기에서 군왕까지밖에 못 올랐던 아버지[22]보다 높은 작위까지 오를 정도로 도르곤 밑에서 열일했던 부하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2번째 남편 역시 1652년에 죽어서 또 다시 과부가 되었다.[23]

이런 가운데 사신으로 청을 오고 가던 금림군은 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시 데려오고자 순치제에게 요청했다. 청의 입장에서는 의순공주는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24] '과부로 혼자 사는 게 가여우니 특별히 돌려보낸다'라는 식으로 선뜻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조선에서 의순공주의 귀국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금림군이 조선 조정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추진한 일이고, 일이 잘못 되었으면 청의 질책이 떨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효종이 동정심을 보이며 비호했기 때문에 의순공주는 정기적으로 쌀을 지급 받았고, 금림군이 죽었을 때는 현종의 뜻에 따라 예장되었다.

2.5. 사망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의순공주에 대한 조정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공주 작위를 몰수하고 공식적인 지위도 효종의 양녀에서 '이개윤의 딸'로 격하되었다. 아버지 이개윤도 금림군의 작위를 잃고 삭탈관직되어 평민이 되었다. 그리하여 귀국한 지 5년만인 1662년(현종 3)에 주변의 냉대 속에 28살의 한창 나이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그나마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현종은 특별히 장례비를 넉넉히 지급하라고 명했다. 아버지 이개윤도 딸이 죽은 지 1년만에 사망했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도르곤은 의순공주를 매우 사랑했던 것으로 보이며, 설화에 의하면 의순공주가 귀국 후 세상을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여 무당을 불러 도르곤의 넋을 불러오기도 했다고 한다.

3. 여담

  • 의순공주의 묘지가 있는 의정부 사람들은 한 많은 일생을 살다 간 의순공주의 넋을 기려 정주당놀이라는 민속놀이를 만들었다. #
  • 야사인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금림군 이개윤이 자청하여 딸을 보냈는데, 나라를 위하는 뜻에서 한 일이 아니고 청나라에서 보내는 비단이 많은 걸 탐낸 것이었다. 금림군은 지극히 가난했다가 부유해졌다. 딸은 도르곤이 소박 놓고 도르곤의 하졸에게 주었다. 금림군이 의순공주를 데려왔을 때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했다, 라는 이야기. 야사이므로 실제 역사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26] 이개윤의 실제 의중도 확신할 수 없지만 어차피 이개윤이 감춘들 족보 뒤져서 나오면 끝이었다. 당시 왕실 족보에 아들이고 딸이고 다 기록되어 있는지라[27] 당시 조선에서 이개윤과 의순공주가 얼마나 욕 먹는 분위기였는지 알 수 있다.
  • 의순공주는 외모가 상당히 뛰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따르면 이개윤이 딸을 언급할 때 자색(姿色)이란 말을 썼으며, 그녀의 첫 남편 도르곤도 의순공주를 처음 보고 자태가 빼어나다는 이유로 백송골이라는 말을 썼다.
  • 서유문이 쓴 《무오연행록》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의순공주가 간택되었을 때 정명수가 청 사신을 보좌하는 역할로 왔었다. 정명수는 언제나 그랬듯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은화를 빼앗고자 했다. 그러자 의순공주가 정명수를 불러 곤장을 치고 "내가 혼인한 뒤에 도르곤에게 네가 한 짓을 알리면 목숨이 끊어질 줄 알라"고 꾸짖었다. 정명수가 겁나서 살려달라고 간청했고 조선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숙종 때 우의정까지 역임한 신익상은 의순공주의 묘를 지나면서 의순공주를 왕소군에 비유하는 시를 남겼다.[28] 시는 신익상의 시와 산문을 엮은 시문집 《성재유고》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玉顏當日嫁驕虜

    未老歸來葬故原

    何似明妃遺恨在

    獨留靑塚向黃昏



    당시에 옥 같이 얼굴로 오랑캐에게 시집가

    채 늙기도 전에 돌아와 고향땅에 묻혔다네.

    왕소군이 한을 남긴 것과 어찌 같겠는가?[29]

    홀로 푸른 무덤에 머무노라니 황혼이 지네.



    -申翼相, <過義順公主墓>(醒齋遺稿 冊五)
  • 의순공주가 도르곤과 혼인을 함으로써, 그의 이복형 홍타이지의 비 효장황후민혜공화원비와 동서지간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도르곤과 효장황후의 재혼설의 존재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두 사람의 살아있던 당시에 의순공주와의 혼인이 있던 것으로 보면 불가능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다만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대복진이었던 점을 봤을 때, 황후로 추존이나 격상되지 못한 점을 보면 효장황후와 도르곤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에 대한 요점이기도 하거니와 도르곤 사후 순치제의 숙청 작업이 시작되면서 황후는커녕 원비로 격상은 어려웠을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

  • 조선마술사〉: 극중 명칭은 청명공주인데, '청나라에 시집 가는 공주'라는 대목을 보면 의순공주를 모티브로 한 인물인 듯 하다. 왕족이라고는 하나 잔반에 가까운 이름뿐인 종실을 양녀로 삼아 대신 보낸다.
  • 신쥬신 건국사》: 도르곤 사후 주인공 손월의 첩이 된다. 손월의 죽은 누나와 닮았다는 설정이다. 처음엔 그저 얼굴이나 보려는 생각으로 구해줬고 둘 사이도 냉랭했으나 점차 개선되어 간다.

[선원록] #[선원록] [3] 바이두에서는 류정순(柳正顺)으로 적혀있다.[4] 청나라에서는 义顺公主로 표기되어 있다.[5] 조선 왕실과 무관한 청나라 측 기록에는 이개윤이라는 이름이 옹정제의 이름을 피휘하고자 이개'음'(音)으로 기록되기도 했다.[6] 조선전기 대사헌, 병조참판,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류경심(柳景深, 1516~1571)의 딸이다.[7] 금림군 이개윤의 원배는 안산 안씨 안여관의 딸, 재취는 문화 류씨 류경심의 딸, 삼취가 원주 이씨 이익의 딸이다.[8] 본래는 익양군 이회의 적장자 용천군 이수한의 아들.[9]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일부다처제로 정실이라도 서열이 있었다. 여기서 대복진은 정실부인 중 으뜸을 의미한다. 福晉의 만주어 발음은 푸진(fujin)인데, 북원 황실의 단어를 그대로 들여온 것으로 아마 한자어 부인(夫人)이 당시 몽골어로 그대로 전사된 듯하다.[10] 왕실의 족보인 《돈녕보첩》은 여계 후손도 기재하는데, 의순공주는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의도적인 누락일 가능성이 높다.[11] 《심양장계(瀋陽狀啓)》 인조 15년 9월 5일.[12] 조선 초기 명나라의 요구로 시행한 적이 있다. 청나라가 말하는 근거는 명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13]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11월 8일 임신 2번째 기사. #[14] 인조는 "청나라의 속임수는 헤아리기 어려우니, 이것 역시 무슨 계책인지 모르겠다"며 의구심을 표했다. #[15] 이때 청나라 쪽에서는 천한 창기를 뽑아 보냈다고 난리를 쳤다. 박로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기생은 몸 파는 천한 창기가 아니며 우리나라 사대부는 기생을 첩으로 삼고 자식을 낳고 관리가 될 수도 있다고 실드를 쳐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16] 인조와 효종 시기에 활동한 내관이다.[17] 푸진 또는 복진(福晋). 청나라에서는 부인을 이렇게 말했는데, 일부다처제라서 여기서 다시 대복진, 계복진, 측복진, 서복진 등으로 출신과 서열에 따라 나뉘었다.[18] 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3월 23일 병자 1번째 기사. #[19] 위아래 모두 도르곤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그를 감히 직접 마주하여 말을 꺼내지 못하였고, 그가 외출하였다 돌아올 시에는 백관이 정렬하여 그를 알현하였다. 《타타르 전기》 마티노 마티니.[20] 기록마다 각각 다른 사람을 지목하고 있어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의순공주의 새 남편도 재차 요절했다는 점과 청사고에 기록된 생몰년도를 대조하면 누르하치의 7남 아바타이의 3남인 단친왕 보로로 추정된다. 도르곤과는 1살 차이 나는 시조카이다.[21] 조선에서는 왕족이나 사대부 가문의 과부는 개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부가 되어 절개를 지키고자 죽으면 열녀가 되는 나라다.[22] 타타라 잉굴다이가 아바타이의 딸과 혼인했다.[23] 이 때 지르가랑과 함께 탄핵 상소를 올린 네임드급 황족으로는 다이샨의 아들 만다하이, 아바타이의 아들 보로, 추옌의 아들 니칸 등이 있는데, 지르가랑을 제외하면 대부분 도르곤과 비슷한 연배의 젊은 나이었으며 도르곤을 따르거나 도르곤에게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백기, 홍기 출신이었다. 허나 이들 대부분이 1652년 전후로 요절했고, 만다하이와 보로는 도르곤의 유산이 몰수될 때 자기들이 몰래 일부를 착복했다는 혐의로 사후에 후손들이 벌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이는 순치제의 황권 강화를 위한 '토사구팽'이라 볼 수도 있다.[24] 만약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자식을 낳기라도 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대신 아들이라면 도르곤이 부관참시 당할 때 자식이랑 같이 목이 잘렸을 수도 있다.[25] 그리고 이 근처에 의순공주의 이름을 딴 의순초등학교가 있다.[26] 의순공주는 도르곤에게 소박 맞은 게 아니라 총애 받는 정실이었다. 대신 도르곤이 의순공주와 결혼 생활을 오래 못하고 죽었다.[27] 기록되는 족보가 서로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왕실 여인도 족보에 기록하긴 했다.[28] 왕소군과 의순공주는 실제로도 외모가 뛰어나다는 기록이 있으며, 자기 나라의 사정 때문에 자기 출신국에서 오랑캐라 여기는 나라에 보내졌고 권력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녀들의 실제 생애와 달리 자살했다는 야사가 있는 것도 동일하다. 그러나 의순공주는 민간에 환향녀에 대한 악감정의 시선을 받은 게 억울할 만큼 비참한 삶을 살고 요절한 반면, 왕소군은 한나라에서 불쌍히 여겨졌을지언정 실제로는 흉노에 가서 아들딸 다 보고 괜찮은 대접을 받으며 유복한 노후를 누렸다.[29] 한 마디로 "왕소군은 끝내 고국에 못 돌아오고 거기서 늙어 죽었지만 넌 그래도 다 늙기 전에 고국으로 돌아와서 고향 땅에 묻혔잖아? 고마운 줄 알아"라는 뜻이다. 고국에 돌아온 뒤 의순공주가 겪었던 대접이나 의순공주의 아버지까지 싸잡혀서 어떤 루머에 시달렸는지 생각해 보면 과연 그게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 판단은 각자 알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