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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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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건국 이전
2.1. 여진족상황2.2. 건주여진의 발흥2.3. 누르하치의 즉위
3. 건국 이후
3.1. 몽골 복속3.2. 조선 복속과 의 패퇴3.3. 명청교체기3.4. 순치제천자 공포3.5. 융화 정책 시도3.6. 전성기: 강희제3.7. 옹정제 시기3.8. 건륭제 시기3.9. 한족 차별 문제3.10. 황후총독 제도3.11. 중앙정부구조3.12. 다중 수도 체제
4. 멸망
4.1. 팔기군의 쇠퇴4.2. 외세에 시달리다4.3. 천자국의 기상을 잃다4.4. 마지막 부흥 시도4.5. 신해혁명과 제정의 붕괴

1. 개요

명나라를 이어 중국을 296년간[1] 지배한 청나라의 역사이다. 역대 중국 왕조중 원나라와 더불어 영토가 가장 넓었으며 여러 이종족들이 소속된 다민족 국가이기도 했다. 본래 전신은 미개인으로 여겨지던 여진족들 이였으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왕조를 띄었고 숭덕제 시기 스스로 황제를 칭했으며 도르곤 섭정 시기에 산해관을 넘어 명나라를 멸망시켰고 강희제 시기엔 잔존세력인 남명동녕 왕국까지 제압하면서 명의 영향력을 완전히 소각해 중원 지배권을 얻었다.

이후 강희제 ~ 건륭제 시기동안 전성기를 유지했으나 제8대 황제이자 19세기 도광제의 임기 중 서방의 침입인 제1차 아편전쟁이 일어난 데 이어 함풍제 시기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제2차 아편전쟁을 계기로 세계에 청의 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남과 동시에 열강의 식민지 취급을 받다가 1912년 철도 국유령에 반대함을 원동력으로 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 왕조는 멸망했다.

1917년 7월 1일 장훈복벽이 발생해 일시적으로 부활했으나 동년 7월 12일 돤치루이의 공격으로 장쉰이 물러나면서 11일만에 폐지되었다.

청나라는 북쪽으론 러시아 제국, 남동쪽으론 조선을, 남서쪽으론 동남아시아(대월후 레 왕조떠이선 왕조, 시암, 버마)를 맞대고 있었고, 복속한 세력으론 명나라(남명), 동녕 왕국, 몽골 제국, 위구르, 토번, 준가르가 있으며 대월의 떠이선 왕조 같은 경우 형식상의 주군-신하 관계를 맺었다. 몽골의 경우 2대 황제인 숭덕제 시기 복속했다.

북쪽에 위치한 러시아 제국과 2차례의 영토에 관한 조약을 맺은 기록이 있다. 첫번째는 강희제 시기 표트르 대제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은 것이고, 두 번째는 옹정제예카테리나 1세가 맺은 캬흐타 조약이다.

2. 건국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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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진족상황

파일:북로남왜 지도.png
15-16세기 명나라와 이민족의 판도
여진족의 분포
15세기경 오이라트의 판도 / 16세기경 타타르(북원)의 판도
15-16세기경 왜구의 활동과 침입 지역

만주족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퉁구스계 여진족금나라를 세워 만주와 화북 일대에 세력을 떨치기도 했지만 몽골의 침공으로 멸망되어 만주의 분열세력으로 여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15세기를 전후해 명나라의 영락제는 요동도사를 설치한 뒤 여진족의 각 부족들을 회유하여 부족명에 위소의 명칭을 갖다붙히고, 아무르강압록강 그리고 두만강 지역으로 팽창을 시도했지만, 선덕제 치세에 누르간도사가 유명무실해지는 등 명의 팽창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명 조정은 여진을 건주삼위 일대의 건주여진과 해서위(海西衛) 일대의 해서여진 그리고 그 동부의 여진족들을 야인여진으로 구분했다.

이후 오이라트와 몽골 세력 그리고 여진 부족들이 요동의 안정을 위협하자, 명나라는 장성지대와 마찬가지로 산해관-개원-봉황성을 연결하여 요동도사를 방어하는 요동변장의 축조를 시작했고, 그리하여 완성된 요동변장은 요동도사에 위협이 되었던 몽골과 여진을 방어하는 방어선이자 명나라의 내지와 외지를 구분하는 국경으로 설정되었다.

요동변장 동쪽의 혼하 유역과 그 부근에는 건주삼위가 있었는데, 이들은 16세기 중반부터 명의 요동 변경을 약탈하는 동시에 동북쪽으로는 해서여진의 여러 부족과 각축전을 벌이며 팽창을 시도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차하르 몽골의 투먼 자삭투 칸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던 건주여진의 세력가 왕고(王杲) 및 왕올당(王兀堂) 등에 의해 여진의 요동 공격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2.2. 건주여진의 발흥

건주여진으로부터 청나라가 발흥하기 시작한다. 건국 시조에 대한 신화는 만주 시조 신화 참조. 한편 먼터무 이래 흥기하여 왕고의 통치를 받은 소자하 유역의 숙수후부(Suksuhu Aiman)의 허투 아라(Hetu Ala)에서 출생한 누르하치는 조부와 부친의 사망을 기회로 계모 컨저(Kenje)를 죽이고 허투 아라의 주인이 돼 누르하치의 조부 교창아(Giocangga)의 여섯 형제의 가족들인 닝구타 일족을 통합하는 등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누르하치는 1586~89년 왕야부(완안부)와 후너허부(혼하부)를 최종적으로 통합하여 건주여진을 모두 합병했다. 그는 세력을 더욱 팽창하여 1606년에는 내칼카의 바야우드 오톡의 엉거더르 타이지에게 '쿤더런 칸'(쿤두런 한)이라는 존호를 받았으며, 1616년 2월에는 '겅옌 한'의 칭호를 취했다.

2.3. 누르하치의 즉위

이후 그는 금나라의 계승 의지를 표명하며 자신의 나라 또한 아이신 구룬(Aisin Gurun)[2]으로 칭하고, 자신의 씨족명인 '기오로'에 '아이신'을 덧붙여 아이신기오로(Aisin Gioro)라는 가족도 조직했다. 그는 사르후 전투에서 승전하여 요동 지역을 석권하고 동시에 해서여진의 예허부를 최종적으로 통합하는 등 지속적으로 팽창했지만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이 통솔하는 명군에게 대패하고 몇달 뒤 병사하고 말았다.

3. 건국 이후

3.1. 몽골 복속

누르하치 사후 네 버이러 중 네 번째 버이러(Duici Beile)였던 8남 홍타이지는 2남 다이샨의 지지를 통해 한의 지위를 계승한 뒤, 동북쪽으로는 다구르어웡키, 서북쪽으로는 차하르 몽골, 서쪽으로는 명나라의 요서 지역으로 팽창하면서 후금의 세력을 더욱 키워나갔고, 1635년에 주션(Jušen: 여진)이란 족명을 금지하고 만주로 고쳤다.

그는 청해에서 릭단 칸이 병사하여 와해되어 버린 차하르 몽골을 복속했는데 릭단 칸의 아들인 에제이(어저이 콩고르)는 부마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획득한 대원 전국옥새와 조선 정복 그리고 몽골 통합을 구실로[3] 1636년 4월 11일,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대원을 계승한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 大淸)을 선포했다.

3.2. 조선 복속과 의 패퇴

정묘호란을 통해 사실상 조선 문제를 쉽게 정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1635년 12월부터 '봉서(奉書)'와 '치서(致書)' 문제를 트집잡고 공경을 요구했으며, 1636년 2월에는 자신의 존호례에 조선국왕의 동참을 요구하며 군신관계 수립을 추진했다. 이른바 '대명의리’를 기조로 삼고, 모문룡의 전폭적인 원조 및 후금과의 교섭 단절로 정권을 시작한 인조 정권은 크게 반발했으며, 이 과정에서 화친이 단절되어 전쟁에 대비할 것을 알리는 인조의 교서가 청 측에 입수되고 뿐만 아니라 4월 존호례에서 조선 사신들이 고두를 거부하여 양국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다. 홍타이지는 친정을 통해 삼전도에서 조선국왕의 항례를 받아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고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켰다.

이후 청나라와 명나라는 본격적으로 양국의 국운을 건 전쟁을 계속한다. 명청교체기 혹은 명청전쟁이라 불리는 치열한 전쟁에서 청나라는 대승을 거두고 명나라를 연전연패의 길로 몰아 넣는다.

청 제국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여세를 몰아 1621년에 요동을, 1636년에 막남의 칼카 5부와 차하르 등에 대한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1642년에 송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만리장성 동북 지역을 석권했다. 1629년부터 1643년까지는 여섯 차례 화북을 공격하여 무인지경으로 약탈함으로써 기근과 대규모 반란으로 마비된 행정력에 더욱 악화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북경을 포위하기도 했다.[4]

청나라는 계속된 승전으로 명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결코 명나라를 멸망시킬 수준의 국력은 아니었다. "군사력 = 국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청나라는 기병 중심의 군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회전에서는 보병 중심의, 그것도 쇠퇴한 명군을 압도했다. 하지만 반대로 공성전에서는 기병의 효력이 나오기 어려우며, 명나라와 달리 화기를 다수 보유한 것도 아니었기에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다. 결국 청나라는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산해관을 격파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특히 명나라는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인구에서 여전히 청나라보다 압도적이었으며 오래전부터 서양과의 접촉 덕분에 홍이포와 같은 신형 화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신흥 국가인 청나라는 명나라에 비해 국가의 역량이 한참 모자랐다.

3.3. 명청교체기

그러나 명나라의 대기근 그리고 자연 재해 등으로 반란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청군이 약탈전까지 벌여 명나라가 큰 타격을 받고 있던 상태에서 청나라는 부패한 명 관료들을 최대한 끌어들여 최신 화기와 신식 훈련을 받은 정예 부대를 포함해 상당한 숫자의 명군을 운좋게 얻으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명군의 서광계와 손원화 등은 화기를 발사할 때 필요한 거리 측량과 각도 정위에 관한 학문을 서구에서 배우고 있었고 총규, 총척 및 구도의의 사용 및 탄약 장전 기술을 개선한 훈련을 받은 명군의 정예였다. 또한 이자성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 산해관을 방비하던 오삼계 및 그 휘하의 명군은 만리장성을 우회하여 북경을 점령하려던 청군에 합류하여 산해관을 열어주었다.

한편 당시 명나라에서는 성능이 개선된 신형 화기가 개발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철심동체 주조법과 니형 주조법, 실랍법을 이용해 무게와 비용을 줄이고 내구도가 향상되어 더 많이 쏠 수 있게 된 정료 대장군으로 철심동체 주조법의 원리는 남북 전쟁 때 미군보다도 200년 빠른 것이었다.

하지만 명군과 후금군의 전투를 생각해보면 상당수가 총병일 명군을 상대로 하는 후금군은 최대 사정거리에서 깔짝깔짝 거리다가 기회가 생기면 기동력을 이용해서 측면 공격하거나 여차하면 돌격 후 근접전을 벌였을 테니, 내구력을 늘린 신형 화기라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명군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려면 후장식 소총처럼 연사력이 크게 증가하거나 아니면 대기병 전투에 유리한 대형 총검 같은 것들이 발명되었어야 했다.

더구나 이자성 등이 명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저런 신형 무기가 명군에 보급되어 전투력이 조금이라도 상승하기 전에 명나라가 이미 구제불능인터라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했다. 특히 청의 북경 점령 과정을 보면 천운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실제로 '하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같은 말들이 많이 있고 당시 상황도 그래서 로또로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때를 기다리며 참고 또 참은 것도 능력은 능력이다.#

사실 명나라는 암군들[5]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도 장거정 등의 무지막지한 제도 개혁과 부유함, 압도적인 인구로 청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명나라는 각종 원인들로 인해 견디지못하고 결국 비참하게 파멸한다. 말기의 명나라의 사정이 얼마나 나빴냐면, 환경 변화와 각종 재해로 쌀값이 7배나 오르는 현상이 무려 7년이나 계속되었고 우수하지 못하고 무능한 황제들로[6] 인하여 재정이 파탄나고 실업자와 반란이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수치적으로도 명나라의 국력이 순식간에 반토막 나고 추락하는 걸 보면 아찔할 정도다. 특히 이때 명나라는 식량난까지 너무 심해서 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풀을 먹고 심지어 썩은 송장을 먹었던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3.4. 순치제천자 공포

순치제와 청나라는 베이징으로 들어온 직후, 자금성에서 정식으로 의례를 거행, 중화의 천자임을 만방에 공포했다. 하지만 이는 청나라 자체의 주장이었을 뿐, 실제로 이때까지만 해도 명나라의 옛 유신들이 오히려 남쪽에서 강력하게 저항하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명나라의 황족들은 이와중에도 정신 못 차리고 갈래갈래 나뉘어 서로 황제를 칭했는데, 이를 남명 정권이라고 한다. 허나 남명은 타고난 무능함 때문에 진격해오는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도망이나 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청나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명 최후의 황제인 영력제를 잡아죽이고 중화권의 유일한 황제를 자처하게 된다.[7] 청나라가 일단 만주족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 나라이며, 초기에 들어왔을 땐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특히 남명 정권이 있던 강남 쪽에서는 사람이 나날이 잔뜩 죽어 나갔다. 지금의 양저우(揚州)나 쑤저우(蘇州) 등이 있는 지방에서는 수십만 단위로 대학살이 저질러졌다고 한다.# 특히 만주족이 강요한 변발은 흔히 중국 무협 영화에 나오는 뒷머리만 남기고 앞머리만 미는 그런 변발이 아니고 뒤통수에 동전 크기만 한 부분만 제외하고 모조리 밀어버리는 일명 '금전서미'라 불리는 변발이다.[8] 이 변발은 19세기 말 조선의 단발령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한족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원나라의 몽골인들도 변발을 했지만 만주족이 강요한 금전서미는 다른 이민족계 왕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압적이라서 한족들에게는 큰 수치였고 컬쳐 쇼크 그 자체였다.[9] 그리고 청나라는 변발을 거부하는 한족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수많은 한인들이 학살당하여 강남은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3.5. 융화 정책 시도

이 모든 저항을 짓밟은 이후 순치제는 간신히 굴복한 한족에게 융화 정책[10]을 펴 한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령 등을 발표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했으며, 그 뒤에도 저항이 있긴 했는데 훌륭한 황제들이 나와 당근과 채찍으로 차례차례 강온 양면술을 써가며 통치해나갔다. 다만 황비홍 머리로 불리는 이 변발만은 철저히 지키게 했고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의 습관을 인정해줄 필요는 있지만 거기에 묻혀서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다만 초기에는 장난에서 수만 명을 죽이고 장인시에서 대략 십만 명을 학살하는 등의 잔혹한 수단으로 강요했으나 나중에는 딱히 적극적으로 안 죽이고 혼란한 정세와 전쟁으로 그렇게까지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여러 이유로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나왔다.[11][12] 의복 역시 관리들에게는 만주족 의복을 강요하고 신민들에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나중에 가자 신민들이 죄다 만주족의 의복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전족은 홍타이지, 순치제, 강희제 등이 적극적으로 전족을 제거하려고 해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청나라 시기에 다른 소수민족들까지 전족을 채택했다. 청나라 황제들은 만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중시하여 전족을 한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죽이기도 했으나 전족만큼은 오히려 만주족에게까지 유행하기도 했다.

특히 청나라가 한족문화를 받아들이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통치에 필요하기 때문이지, 만한차별정책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입관 후 하급 행정구역인 부나 현의 수장은 한족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인구 때문에 한족들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총독과 순무를 비롯한 고위 지방관들은 명나라 때의 총독, 순무가 누리던 권한을 팔기에서 파견된 주방팔기의 장군에게 상당부분 이양해야 했고, 그나마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요충지의 총독, 순무기인 중에서만 보임되었다.

3.6. 전성기: 강희제

청나라는 순치제의 뒤를 이은 강희제 시기에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는다. 강희제는 즉위하고 얼마되지 않아 15세의 어린 나이로 권력을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던 보정대신[13] 구왈갸 오보이를 숙청해버리며 뛰어난 정치 감각을 보여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철번을 실시하며 남방의 후환을 정리했다.[14] 번들은 이에 강력히 반대하며 삼번의 난을 일으켰으나, 혼자 황제가 되겠다는 헛꿈에 빠진 오삼계의 멍청한 헛물켜기로 결국 청나라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망했다.[15]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한 이후에도 외몽골 지역에 군사를 파견하여 그곳을 점거하고 있던 준가르 칸국을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 준가르 칸국의 잔존 세력들이 티베트 지역으로 도망가 달라이 라마의 힘을 빌어 청나라에 대항하려 하자, 심지어 달라이 라마를 갈아치우는 초강수를 두며 아예 티베트까지 청나라의 영향권으로 넣어버렸다.

1683년에는 타이완으로 도망가 끊임없이 저항하던 동녕 왕국(명정)을 펑후해전에서 승리하여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했으며, 명나라 정성공의 손자인 정극상에게는 해징공의 작위를 내려 팔기에 편입하는 노련한 유화책을 선보였다.[16] 또한 사사건건 아무르강 유역에서 충돌하던 러시아와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을 확장했고, 이후 약 200여 년간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을 차단했다. 참고로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이 서양 국가와 맺은 첫 근대적 조약이며, 공문서에서 스스로 '중국'이라 자국을 칭하는 보기드문 예이기도 했다.

강희제는 무려 61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재위하며 외치에 힘을 쏟았고, 타고난 능력으로 내정도 강화하며 청나라의 기틀을 다잡았다.[17]

3.7. 옹정제 시기

강희제의 뒤를 이어 넷째 아들 윤진이 옹정제로 즉위했다.[18] 옹정제는 즉위 직후 흔들리는 황권을 막기 위해 황친들을 엄청나게 옥에 가두거나 죽여버렸고, 이로 인해 청나라의 정세는 다시금 안정을 찾았다.

옹정제는 타고난 일 중독자로,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지 않으면서 나랏일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부친 강희제가 상대적으로 외치에서 업적을 남겼다면, 옹정제는 내정에서 업적을 남겼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지정은제 확립, 강희제 말기의 황권 다툼으로 흔들리던 황권 공고화, 부정부패 근절, 군기처 등의 업적이 있다. 또한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을 한족의 군사작전을 통해 그대로 토벌하여 대만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이었던 다두 왕국을 멸망시키고[19] 그곳의 영토를 청나라의 관할로 만들고 타이완 섬을 청나라의 복건성 영토로 편입시켜 타이난을 중심으로 타이완 섬을 통치했다.

특히 당시 극도로 정교한 동군연합 체제를 확실하게 굳혔고, 이로 인해 청나라의 황제는 한족의 천자이자 몽골의 대칸, 티베트의 법륜성왕이자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전무후무한 칭호를 한꺼번에 거머쥐게 되었다.

한편 옹정제는 이처럼 하루하루 일만 하다 결국 재위한 지 13년 만에 58세의 일기에 과로로 숨졌다. 그의 뒤를 이어 강희제의 손자이자 옹정제의 아들이었던 홍력이 황위에 올랐는데, 이 자가 바로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건륭제이다.

3.8. 건륭제 시기

건륭제는 24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건륭제는 즉위 후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 신장 지역에 대대적인 원정대를 보내 서부 지역에서의 통치권을 공고히 했으며, 중국 남부에서 일어난 반란들도 깔끔하게 쓸어버렸다. 그의 재위기에 청나라의 국력은 정점을 찍었으며, 건륭제 시기의 청나라는 심지어 서양의 프랑스, 영국, 스페인 따위와 견주어도 압도적일 정도였다.

건륭제는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사고전서를 발행하며 문학을 집대성하는 한편 외교적으로도 영국의 조지 매카트니 경을 말년에 접견하며 서양과의 교류를 슬슬 시작했다.[20] 청나라는 이때에 중국 역사상 가장 기나긴 전성기를 맞으며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는데, 무려 130여 년에 달하는 이 청나라의 전성기를 '강건성세'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청나라는 심지어 현재의 중국보다도 더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며, 워낙 풍요로운 문물 탓에 전세계의 상인들이 청나라로 몰려 교역을 하는 통에 세계의 은이 청나라로 빨려들어왔다.[21]

그러나 건륭제의 통치는 말년에 그 빛이 바래기 시작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평화기가 너무 오래가자 부정부패가 점차 판을 치기 시작했고, 군대의 기강은 해이해졌다. 게다가 건륭제가 미남 니오후루 허션에 빠진 바람에[22] 그에게 어마어마한 권력을 부여하면서 청나라의 붕괴는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다. 허션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온갖 비리를 저질렀고[23], 청나라는 외형적으로는 세계 최강대국이지만 속으로는 깊숙히 썩어들어갔다. 건륭제의 실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건륭제는 청나라에 입맛에 맞지 않는 서적들과 학문을 탄압하는 정책, 즉 문자의 옥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물론 강희제와 옹정제도 어느 정도 학문 탄압을 하기는 했지만, 단순하게 청나라의 실정을 지적하는 목소리나 개혁 요구 등까지 모두 없애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건륭제는 그저 청나라 중앙정부의 뜻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학자들을 탄압했고, 이는 결국 중국 학문의 소실과 퇴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후세의 건륭제에 대한 평가는 꽤 엇갈리는데, 청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이라는 평도 있는 반면 부정부패를 심화시키고 나라가 썩어들어가는 것을 보지못한 암군이라는 평도 있다.

어쨌든 60년에 달하는 그의 치세 동안[24] 청나라의 병폐가 눈에 띄일 정도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며, 그 폐해는 그의 후계자인 가경제 시기에 들어서야 보이기 시작했으니 건륭제 시기가 청나라의 최전성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3.9. 한족 차별 문제

청나라는 전성기에도 한족과의 차별이 상당히 심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만주족이 한족화되기는 했으나[25], 그렇다고 만주족과 한족 간의 차별이 완화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청나라 초기에 처음 한족 대신을 임명했을 때 같은 직책이라 하더라도 팔기인이 한족보다 품계가 더 높았다가 나중에 동급으로 조정되지만, 만한차별은 청이 멸망할 때까지 사라지지가 않았다. 애초에 인구비율을 보면 만한병용제부터가 한족에 대한 차별이었다. 거기다 청나라 황제들은 한족들 앞에서는 만주족과 한족은 모두 짐의 자식이라고 립서비스를 하면서[26] 만주족들만 있을 때는 한족들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3.10. 황후총독 제도

또한 황후는 일가가 모두 기인이어야 했으며[27], 공주들도 한족에게 시집보내지 않은데다 한족 후궁의 자식들은 황위계승에서 배제되었다. 대표적으로 건륭제가 있다. 이 경우는 옹정제의 살아있는 아들들 중 건륭제가 유일한 만주족 후궁 소생이었다. 다만 한족 모후의 소생으로 강희제가경제가 있기는 하나, 이들 역시 강희제의 외가는 여진족이 한화했다가 다시 만주족에 편입된 개국공신 집안이었고, 가경제의 외가는 팔기의 포의 출신[28]이라 전혀 아무런 연도 없는 민인 집안은 절대 아니었다.

청대 지방제도에서 최고 지방관은 총독순무였다. 총독은 초기 정2품이다가 강희, 옹정 연간을 거치며 간혹 병부상서나 형부상서, 도어사 등의 다른 직무를 겸직하는 형태로 종1품이 되고, 순무는 종 2품이다가 병부시랑을 겸직하는 형재로 정2품이 되었다. 총독은 1개 이상의 성을 관할하는 직책으로 명나라 때는 비상설직이었으나 명 말기부터 상설화되었다. 한편 순무는 1개 성만을 관할하는 직책으로 총독과 마찬가지로 명 초기에 비상설직으로 설치되어 말기부터 상설화되었다. 보통은 과거 출신 한족 관료들이 주를 이뤘지만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천섬, 운귀 등의 일부 지역에는 팔기군 출신의 만주족 군인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품계의 차이는 있으나 직무상 동등, 중첩되어 상호 견제를 유도했다. 총독과 순무는 황제에 직속되었고, 황제에게 밀접을 상주할 권한이 있어 황제는 이를 통해 지방을 명확히 파악하고 감시할 수 있었다.

3.11. 중앙정부구조

중앙정부의 경우는 초창기에는 기인들만이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수의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을 임명하는 제도인 만한병용제가 시행된 뒤에는 내각대학사, 6부상서, 6부시랑, 군기대신 등의 직책에 각 1명씩 2명으로 같은 수의 만주족과 한족을 따로 임명했다.

거기다 한족은 군대와 관련된 무관으로 임용될 수 없었다. 군대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녹영(청나라)이라는 조직은 있었다만, 이들은 숫적으로는 많았지만 질적으로는 팔기군의 총알받이 내지 하위호환에 불과했다. 물론 청나라의 팔기군이 쇠락하면서 녹영이 더 강력해지기는 했지만, 하향평준화하여 아편전쟁 즈음이 되면 덤앤더머에 불과했다. 무관직책이 한족에게 개방된 때는 태평천국 운동 때에 가서였는데 당시 팔기군과 녹영군의 군사력이 엄청나게 퇴보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었으며, 이때도 만주족 대신들의 반발이 심했다. 청조 말기 한족(漢族)들에 의해 사용된 청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킴을 의미하는 멸청흥한(滅淸興漢)이니 청을 돕고 서양인을 멸함을 의미하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이니 하는 구호와 쑨원의 삼민주의의 민족의 뜻이 만주족의 청조를 타도하고 한족의 국가를 회복한다는 것만 봐도 한족과 만주족은 청 말기까지 엄격히 구별되었고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적개심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만주족 입장에서도 건륭제 때부터 한족에 동화되는 현상이 심각해지자 한족의 풍습을 금하는 조치가 내려지고 의도적으로 만주족을 강조하기도 했다.

3.12. 다중 수도 체제

청나라는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 - 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묵던(지금의 선양시),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문수보살이 강림했다고 여기는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세 도시를 수도로 운용했다. 건륭 27년(1762) 건륭제가 1년 중 자금성(紫禁城)에서 머문 시간은 넉 달에 불과했다. 특히 티베트달라이 라마는 '황사', 즉 황제의 스승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우를 받았다. 이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연회상에서도 황제와 동석할 수 있었고, 티베트는 거의 자치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자율성이 허락받았다.

4. 멸망

4.1. 팔기군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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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에게 분할 당하는 청[29][30], 르 프티 주르날, 1898년

청나라는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제조 금지 등으로 기술적, 문화적인 발전을 거의 이뤄내지 않았다. 유럽 문명은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이 터지며 급속도로 발전을 하고 있던 반면 청나라는 유럽 문물을 수입하기 전에 보유한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명나라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31] 그리고 기이할 정도의 승마궁술에 대한 집착 혹은 한족의 자체적인 화기 연구 금지[32], 궁기병이 아직도 군사력의 척도나 다름없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팔기군의 기마궁사는 화승총을 쏘는 준가르나 신장 지역 위구르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준가르 정복 전쟁화에서 보듯이 청군도 다수의 포병과 화승총병을 운영했으며, 단지 기병들이 총을 쏘지 않고 활을 쏜 것 뿐이다. 특히 현대식 소총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마상에서는 활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33] 주요 무력 기반이었던 팔기군 역시 금나라의 맹안모극이 쇠퇴하던 테크트리[34]를 따라서 그대로 쇠퇴한지 오래였다. 게다가 그 문제는 무려 전성기라는 강희제 때부터 시작된 현상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팔기군의 쇠퇴는 유목민 정복왕조라면 으레 다 겪는 것이었다. 특히 도시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이 군사력 유지를 하려면 대규모 수렵 훈련을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들의 고향인 만주와 달리 중원에는 이렇다 할 수렵지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건륭제까지는 황제가 직접 나서서 무란위장이라는 군사 훈련 목적의 수렵장을 설치하는 식으로 군사력을 유지했다. 또한 만주족 전통 유희 겸 훈련인 빙희 시합도 주기적으로 열었다. 게다가 건륭제까지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니 실전능력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어찌보면 18세기에도 많은 훈련량이 필요한 궁기병을 운용했다는 건 그들이 얼마나 팔기군의 군사력 유지에 노력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건륭제 이후부터는 실전에서의 전투 능력을 잃고 그나마 조정에서 억지로 시키던 군사훈련도 지지부진해져 팔기군은 전투력을 급속도로 잃게 된다. 신분은 군인인데, 그냥 한족보다 지위가 더 높은 공무원에 불과했던 셈. 즉, 청나라의 군사력 쇠퇴는 당시의 모든 후진적 전제군주제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에 유목민 정복왕조의 문제점이 더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륭제가 물러나고 즉위한 가경제 시기부터 청나라는 갈수록 기울어만 갔다. 특히 건륭제 시기부터 쌓여온 부정부패로 인해 농민들에 대한 세금 압박은 갈수록 심해졌고, 이를 참다못한 농민들은 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35] 게다가 서서히 서양 세력들이 중국 내부에 아편 등 마약들을 수출하며 재정 위기가 도래하기 시작했고, 만주족과 한족 가릴 것 없이 무능과 타락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가경제도 나름 반란을 진압하고, 개혁을 실시하려 들었으나 이미 뿌리가 썩은 청나라에 이는 너무 미약한 시도였을 뿐이었다.

4.2. 외세에 시달리다

가경제 사후에는 도광제가 제위에 올랐다. 도광제는 가경제 시기에 직접 총을 쏘며 반란을 진압할 정도의 패기를 보였으나, 황제가 된 이후에는 딱히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도광제 시기에는 1차 아편전쟁난징 조약이 맺어지며 홍콩영국에게 할양되는 등 점차 청나라가 서양에 종속되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청나라의 무너지는 국력이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등 청나라는 쇠퇴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 청의 쇠퇴기에서 중국의 불평등조약이 개정된 1940년대까지의 시기를 중화권에서는 백년국치라 일컫는다. 도광제는 무려 30년 동안이나 재위했으나, 별다른 개혁 성과를 보이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후 제위에 오른 함풍제 때에 청나라는 본격적인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한다. 함풍제 즉위 이듬해인 1851년에 중국 최대이자 최악의 민란인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중국 남부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 와중에 약삭빠른 서양 열강들은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엄청난 이권을 떼어갔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황제의 여름궁전원명원을 약탈하고 작살내버렸다. 함풍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튀었고, 이후 속을 끓이며 현실도피를 하고 싶었는지 연회나 즐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4.3. 천자국의 기상을 잃다

함풍제의 사망 이후, 마지막 직계 황제인 동치제가 즉위했다. 이후 함풍제의 부인동태후서태후가 공동으로 섭정을 맡았다. 동치제는 성년이 된 이후 어머니 서태후로부터 권력을 가지고 오려 시도했으나, 고집 센 서태후가 이를 거부하자 실의에 빠져 향락과 여색에 탐닉하다가 죽었다.

동치제 시기에 공친왕, 증국번, 이홍장 등의 주도로 서양의 기술을 대대적으로 도입하는 양무운동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청나라는 어느 정도 통치력을 회복했다는 '동치중흥'이라는 자화자찬을 할 수 있었지만, 그 결과는 속 빈 강정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개혁은 '중체서용', 즉 서양의 기술만을 빌려 온다는 개혁에 가까웠고, 본질적으로 낙후된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은 결과로 인해 일본에게 처절하게 완패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청나라는 이후 서양과 일본에 이중삼중으로 얻어터지며 훌륭한 전투력 측정기 정도로 전락하고 만다. 심지어 한때 반 속국이었던 조선조차 청일전쟁 이후 청군이 일소되자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제후국에서 벗어났으며, 청나라는 종래의 권위있는 황제국의 모습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고 말았다. 결국 말기의 청나라는 그들이 멸망시킨 말기의 명나라와 다를 게 없는 신세가 되었고 거의 반쯤 식민지로 전락했다.

4.4. 마지막 부흥 시도

새롭게 즉위한 광서제는 어느 정도 개혁에 열의를 보였다. 캉유웨이 등을 임용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펼치고, 입헌군주정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변법자강운동은 서태후 등의 보수파들의 극렬한 반발로 100여일 만에 중지되었고, 광서제는 서태후 등을 쫒아내려고 했다는 의심을 받아 자금성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버렸다.[36] 이후 의화단 운동으로 8개국 연합군에게 베이징이 점령당해 신축조약을 체결했다. 얼마 후 광서제는 독살당했고[37], 서태후는 1908년에 청나라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를 2살의 나이에 황제로 옹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 무렵 지방에선 군웅할거가 발생하면서 청나라 정부의 통치력은 상실되었다.

청나라의 끝없는 굴욕으로 청 황실의 명성은 맨틀을 넘어 내핵까지 추락했고, 원래부터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으로 분리된 민족 구성이었기 때문에 한족 지식인들은 '청나라' 자체마저도 일종의 '외래 민족 침략 세력'으로 보고 만주족의 청 왕조로부터 한족 민중의 독립을 추구했으며 이것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태평천국 운동 때도 사망자가 많았던 이유가 태평천국에 가담한 한인들이 만주족과 청에 대한 반감으로 만주족을 학살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청군이 태평천국군 포로들의 항복을 받아주지 않고 학살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군의 지휘관들의 경우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 때문에 한족에게서 만주족에 대한 증오가 커졌고 신해혁명 때는 청이 멸망하자마자 수많은 만주족이 한족들에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만주족의 청나라에 대한 충성을 멈추지 않았던 친청 한족들도 끝내 체념하고 청나라의 멸망을 받아들이거나 혁명군에 적극적으로 투항한 이들을 제외하면 만주족과 함께 학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4.5. 신해혁명과 제정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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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 봉기
신해혁명의 시발점으로 봉기 당일 우창을 점령했으며 본격적인 청 멸망이 시작되었다.

선통제가 즉위하고 난지 3년도 안된 1911년에는 신해혁명으로 산하의 지방 정부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선언했다. 지방의 군 부대들도 청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혁명군에 가담하자 청 왕조는 지방 통제권을 잃고 전국이 한시에 공중 분해되면서 파멸을 선고받았다. 게다가 이듬해에는 이를 진압하라고 보낸 총사령관 위안스카이가 총구를 돌려 청 왕조를 폐지시켜 버림으로써 청나라는 1616년천명제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운 지 296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게 청나라는 한족의 배신으로 흥했다가 한족의 배신으로 망하는 아이러니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서 기원전 221년전국시대 진나라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면서 2천 백여 년 넘게 이어져 왔던 중국의 황제 자리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는 청조 멸망 이후에도 북양정부와 체결한 "청실 우대 조건"에 따라 자금성에 잔류했는데(청나라 소조정),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황실 우대 조건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 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2.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세금 사백만 냥을 사용하며, 이후 신 화폐가 주조되면 사백만 원이 중화민국에 의해 지급된다.
    3.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자금성에 잠정적으로 계속 거주하며, 이후 이화원으로 옮기게 된다. 시위(侍衛)하는 사람 등은 계속 쓸 수 있다
    4.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그 종묘와 능침에 대해 영구히 제사를 받들며, 중화민국은 적절히 호위하는 병사를 두어 그것을 신중히 보호한다.
    5. 덕종(광서제)의 능이 아직 완성이 안 되었으므로, 제도에 맞게 수리하며 옛 예법에 맞게 한다. 그 경비는 중화민국이 지출한다.
    6. 궁중에서 고용하는 집사 인원은 계속 유지되나, 이후에는 환관은 더 고용할 수 없다.
    7.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은 중화민국이 특별 보호한다.
    8. 현재 보유한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에 편제되며, 그 수 및 녹봉은 예전과 같이 한다.

  • 청 황족 대우 조건
    1. 청나라 왕공 작위는 예전과 같이 유지된다.
    2. 청 황족은 중화민국 국가의 공권과 사권에 대해서는 보통 국민과 같다.
    3. 청 황족의 사유재산 일체는 보호된다.
    4. 청 황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

  • 각족 대우 조건은 생략

이 조건으로 선통제는 자금성 안에서는 청 황제로 행세할 수 있었고, 자금성 내에서는 계속 선통 연호가(음력과 함께) 쓰였다. 이후 청나라 황족들과 복벽파들이 복벽운동을 전개했지만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1914년 11월 23일 복병 정치 징치령을 발표해 복벽파들을 억눌렀다. 그리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단행함으로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어버렸다(...). 이후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으며 전국 각지가 군벌들이 할거하는 개판으로 떨어진 와중에 복벽파 장쉰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훈복벽을 단행함으로 1917년 7월 10여일 동안 청이 부활하기도 했으나 돤치루이가 이를 진압하면서 복벽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북양정부에 실질적으로 귀속되고 만다.

특히 북양정부는 청실 우대 조건을 지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군주제를 혐오하던 군벌 펑위샹2차 직봉전쟁 와중에 1924년 11월 5일 핍궁사건을 일으키면서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동년 11월 5일에 청실 우대 조건이 수정되면서 사실상 청 황제 존호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선통제는 톈진에 도착한 이후부터 일본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31년 11월장제스는 선통제가 톈진에 남는다면 청실 우대 조건을 회복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도이하라 겐지가 획책한 천진사변을 비롯한 수차례의 암살 협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선통제는 거절한다. 게다가 북벌군이 1928년 베이핑을 점령한 다음에 장쭝창의 부하인 쑨뎬잉국민혁명군에 투항하면서 벌인 동릉 도굴 사건이 처벌당하기는커녕 오히려 방조되었고 서태후의 능묘에서 나온 야명주쑹메이링의 신발을 장식하는 데 쓰였단 소문에 선통제는 난징 정부에 완전히 학을 뗐다.

결국 그 달 10일에 선통제는 만주로 가게 되고, 이듬해(1932년)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 만주국의 황제가 되기에 이른다. 일본은 만주국이 청의 후신이라고 선전했지만 현실은 일제의 괴뢰국이었다.[38]


[1] 후금이 세워진 1616년 기준이며, 본격적으로 중국대륙을 지배한 기간은 명나라가 망한 1644년 부터이므로 이보다 조금 짧다.[2] '아이신'은 '금'을 의미하고 '구룬'은 '나라'를 의미한다.[3] 실제로 후금은 몽골계 세력을 하나로 합치거나, 조선을 정복한 적은 없다. 국내 호란사 연구에서 지적되듯이 후금은 조선이 신속했다고, 조선은 형제관계라고 여겼다. 일례로 정묘호란 이후 귀국하는 아민을 만난 홍타이지가 조선이 항복했다고 발언한 것이 그것이다.[4] 기사년의 변이라고 부른다. 청군은 영원성을 방비하던 원숭환이 급히 지원하자 한 발 물러서 퇴각했다. 원숭환 참조.[5] 정덕제는 좋은 군주상은 아니었으나, 가정제만력제에 비빌 정도로 암군이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6]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도 일하지 않은 만력제, 천계제와 달리 열심히는 했으나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능력이 너무나 모자랐으며 일처리도 엉망이었다.[7] 이 과정에서 오삼계가 큰 공을 세웠는데, 영력제는 자신의 군대가 대패하자 버마, 즉 현재의 미얀마로 튀었다. 그러자 오삼계가 버마를 협박하여 영력제를 끌고 왔는데, 영력제가 역적의 상판을 보기 싫다고 일갈하자 아무 말 않고 죽여버렸다고 한다.[8] 영화의 변발은 청나라 후기에 생겨났다.[9] 특히 청나라 이전의 한인들은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여겨 승려를 제외하곤 머리를 깎는다는 것 자체를 큰 수치로 여겼다. 실제로 한족 왕조의 형벌 중에서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아 모욕을 주는 형벌도 있었다.[10]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에 의하면 한족을 포함하여 다른 민족들이 만주족의 군사기술을 검증받고 만주로 세탁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만주족들이 나와도 방관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중화권에는 법적으로 만주족이면서도 정작 DNA상으로는 퉁구스인이나 북방 한족보다 남방 한족에 더 가까운 이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11] 대지(the Good Earth)를 보면 한족임에도 변발을 멋있게 여기고 아끼는 사람들이 나온다.[12] 서양으로 치면 오스만 제국에서 튀르크계 무슬림 지배층의 문화를 따라하는 피지배민족들이 점차 생겨난 것과도 비슷하다.[13] 전 황제인 순치제가 죽기 전에 어린 강희제를 보좌하라고 임명한 특별 대신이다. 허나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손에 쥐게 되면서 오히려 황제를 깔보는 수준에 이르자 강희제가 참다참다 숙청해버린 것이다.[14] 번이란 청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3명의 옛 명나라 장군들, 즉 오삼계, 상지신, 경정충 등에게 '번왕'의 칭호를 내리고 각자 운남성, 광동성, 복건성을 자치적으로 다스리게 해준 특권이었다. 허나 이들이 자체적으로 소금을 만들고 동전을 주조하는 등 막나가기 시작하자, 강희제가 이를 정리해버린 것이다.[15] 오삼계는 처음에는 옛 명나라를 재건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반란 초기에는 숭정제와 영력제의 위패에 참배하기도 했다.[16] 하지만 한족의 대만 이주로 인해 툰샤오 사 사건이 벌어진다.[17] 이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는 청나라의 진정한 건국군주가 강희제라는 이야기도 있다.[18] 이 과정에서 옹정제가 강희제를 독살하고 제위를 찬탈했다던가, 아니면 유서를 위조했다는 소문이 많이 떠돌았다. 그러나 2013년에 옹정제가 정상적으로 제위를 물려받은 것이 맞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291년 만에 황위 찬탈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되었다.[19] 이 사건을 대갑서사항청사건(大甲西社抗清事件)이라고 부른다.[20] 물론 건륭제 시기의 청나라는 영국 따위가 눈에 들지 않았고, 건륭제는 영국과 교류를 할 필요가 없다며 매카트니 경을 국외로 쫒아냈다. 이에 앙심을 품고 있던 영국은 몇 십 년 후에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서구 세력을 얕보았던 청나라는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21] 애초에 아편전쟁의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유럽 상인들은 중국의 비단, 차, 도자기 등을 사가기 위해 은을 지불하는데, 정작 중국은 자신들에게서 사가는 것이 없으니 심각한 무역적 불균형이 벌어졌던 것. 영국은 이 손해를 메꾸기 위해서 중독성이 강한 아편을 청나라에 밀매하기 시작했고, 청나라가 이를 금지하려 들자 영국이 반발하며 전쟁이 터진 것이다.[22] 동성애 관계라는 소문도 있었다.[23] 가경제 시기에 황제가 친히 허션을 족친 결과 그의 집에서 무려 청나라 20년치 세입에 달하는 재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재물들은 모두 내탕금에 들어갔다.[24] 건륭제는 89세까지 현재 기준으로도 꽤나 장수했다. 원래 그는 60년을 넘어서 재위할 수도 있었으나, 자신이 존경하는 강희제의 61년 기록을 깨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재위 60년에 양위했다. 다만 양위한 이후에도 태상황으로 올라 거의 막후실세로 군림하기는 했다.[25]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는 만주어를 거의 못할 정도였다.[26] 현대 중화권에서는 만한전석을 재현하는 행사에서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27] 청 초기는 만몽연합으로 몽골족이 황후가 되었다. 후기로 가서도 몽골족 출신의 황후가 나타나기도 했다.[28] 만주족이나 기인이라고 전부 금수저 귀족이지는 않았다. 기인 내에서도 귀족과 하층민이 나뉘어졌는데, 이 중 하층민이 보오이라고 불리는 계층이었고, 이들은 만인, 몽골인, 한인, 심지어는 조선인까지 다양한 혈통으로 이뤄져 있었으나 대다수는 만주족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절대다수의 민인에 비하면 특권층이었다.[29] 왼쪽부터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 독일 제국빌헬름 2세,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 프랑스마리안, 일본 제국사무라이, 그 뒤엔 청의 이홍장을 묘사했다. 당시 청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주요 열강들의 이권 경쟁을 풍자하고 있는데, 독일이 중국이라고 쓰인 파이에 칼을 꽂고 영국을 견제하고 있고 영국 역시 마찬가지로 독일을 견제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과 영국이 싸우는 그 틈에 목을 내밀고 큰 파이 조각이 어디 없는지 유심히 들여다 보고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역시 한 몫을 차지하기 위해 심각한 표정으로 파이를 들여다 보고있다. 뒤에선 이홍장이 열강들에게 중국이 유린당하는 걸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미국은 청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이권 침탈 경쟁에 이 그림에 묘사된 나라들에 비해서는 뒤늦게 합류했기 때문에 묘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0] 사실 이 그림을 서양 왕실 및 황실 간의 혈연 관계를 고려해서 보면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을 다룬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자세한 건 빅토리아 여왕 문서 참조. 요약하자면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이며 니콜라이 2세 역시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사위이다.[31] 다만 만주족 입장에서 한족이 자력으로 주무기인 화기를 발전시키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았다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준가르 정복 당시에 서양식 화포를 쓰긴 썼다.[32] 그런데 적어도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아주 어이없는 일로 보이진 않을 수도 있었다. 청조 황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다스리고 있는 영토가 이전 왕조인 명나라 시절보다 훨씬 넓어졌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고, 이렇게 이룬 대외적 확장 과정에서 팔기군을 비롯한 궁기병들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33] 사실 청 황실에서 피정복민족의 반란 위협을 차단하고자 병법이 쓸모가 없다는 핑계로 한족이 병법을 논하는 것을 금지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무경총요 같은 것들을 살필 때, 중국 군사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병법가들이 중국의 과학 기술을 군사학에 도입하던 것을 생각하면 치명적인 실수였다. 실제로 청나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체적으로 발전한 과학 기술들도 있었는데 정작 그것들은 청군에 거의 도입이 되지 않고 있었다.[34] 만주족과 여진족 모두 사냥이나 군공이 아니라 고리대금이나 지주로서 얻는 수입에 의존하게 되면서 만주족 팔기군과 맹안모극의 구성원들은 전투력이 사라지고 말았다.[35] 이때 가장 거대했던 것이 바로 백련교도의 난이었으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청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했다.[36] 이 사건으로 약간 싹을 틔웠던 청나라의 근대화 정책이 숨을 거두었다는 평을 듣는다. 서태후도 청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개혁 조치를 단행했지만, 그래봤자 이미 늦은 시도였을 뿐이다.[37] 상대적으로 최근에 발견된 사실로, 실제로 비소를 먹여 죽여버렸다고 한다. 역사학계는 광서제를 독살한 진범으로 위안스카이를 지목하고 있으며 서태후가 배후로 독살을 지시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38] 국제 학계에서도 만주국을 청나라의 후신이라고 보는 견해는 거의 없다. 실제로 1930년대 일본에서도 만주국의 시조천명제가 아닌 선통제로 지정했는데, 이는 그가 청나라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고 보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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