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6:01:23

신축조약

1. 개요2. 원인3. 조약 서명국
3.1. 열강 대표3.2. 청나라 대표
4. 내용5. 결과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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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北京議定書(辛丑條約)

신축 각국 화약, 베이징 의정서, 의화단 의정서로도 불린다. 1901년 9월 7일 체결된, 청과 열강 11개국(영국, 프랑스, 독일국, 미국, 러시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사이의 조약이다.

2. 원인

1899년 청나라에서 부청멸양(扶淸滅洋 : 청을 도와서 서양과 일본을 멸하자!)[1]을 슬로건으로 앞세운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다. 이러자 실권자인 서태후는 의화단 운동을 이용해서 서양 세력들을 혼내줄 계획을 세운다.[2] 그리고 곧 선전포고를 한다. 그에 대항하여 서양과 일본은 8개국 연합군을 결성하여 청나라 군대와 의화단을 박살내고 베이징을 점령한다.[3]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청나라에서 이홍장아이신기오로 이쾅이 전권대표로 나서서 서양의 요구대로 체결한게 바로 베이징 의정서이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사실상 서구열강과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껍데기만 남게 된다.

3. 조약 서명국

3.1. 열강 대표

  •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스페인 왕국 - 전권대사 베르나르도 데 콜로간 이 콜로간(Bernardo J. de Cologan y Cologan, 1847 ~ 1921): 신축조약의 최선임자로 다른 전권대사들보다 베이징 공관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기에 조약 대표를 맡았다. 조약 체결도 스페인 공사관에서 이루어졌다.
  •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 전권대사 어니스트 메이슨 사토우(Ernest Mason Satow, 1843 ~ 1929)
  •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제국 - 전권대사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기르스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фон) Гирс, 1856 ~ 1924)[4]
  •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제국 -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1855 ~ 1911)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 전권대사 폴 보(Paul Beau, 1857 ~ 1926)
  •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 미국 - 특사 윌리엄 우드빌 록힐(William Woodville Rockhill, 1854 ~ 1911)
  •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 전권대사 알폰스 뭄 폰 슈바르첸슈타인(Alfons Mumm von Schwarzenstein, 1859 ~ 1924)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전권대사 모리츠 치칸 폰 발보언 남작(Moritz Czikann Freiherr von Wahlborn, 1847 ~ 1909)
  •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 전권대사 주세페 살바고 라지(Giuseppe Salvago Raggi, 1866 ~ 1946)[5]
  • 파일:벨기에 국기.svg 벨기에 왕국 - 전권대사 남작 아돌프 마리 모리스 주스텡(Adolphe Marie Maurice Joostens, 1862 ~ 1910)
  •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왕국 - 전권대사 프리돌린 마리뉘스 크노벨(Fridolin Marinus (Frits) Knobel, 1857 ~ 1933)

3.2. 청나라 대표

4. 내용

1. 배상금 원금 4억 5,000만냥, 연리 4%로 1902년부터 1940년까지 39년간에 걸쳐 총 9억 8,200여만 량을 지불할 것.
1. 의화단 운동의 주모자를 처벌할 것.
1. 외국군의 베이징 주둔을 허가할 것.
1. 대고포대를 비롯하여 베이징에서 해안가에 이르는 통로에 방해가 되는 각 포대를 모두 철거할 것.
1. 베이징과 산해관에 걸친 철도연변의 주요 지역 12곳(황촌, 낭방, 양촌, 톈진, 군량성, 당고, 노대, 탕산, 난주, 창려, 친황다오, 산해관)에 열강 군대가 주둔하도록 할 것.
1. 청나라는 총리아문 대신 외무부를 설치해 6부의 위에 둘 것.

5. 결과

청나라의 시한부 인생 스타트. 청은 망해가기 시작하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뒤집어진다.

6. 여담

체결에 1년 가량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기네들이 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 조선의 동학 농민 운동때도 척양척왜 구호를 썼다. 여기서 양은 洋鬼子의 줄임말로 양놈이라고 하는게 정확한 번역이다.[2] 당시 광서제는 서양세력과의 타협을 주장했으나 서태후에 묵살당한다.[3] 서양은 아니지만 일본도 있다.[4] 알렉산드르 3세시절 외무장관인 니콜라이 기르스(1820-1895)의 아들이다. 루마니아와 오스만 제국에서 대사직을 수행하였으며 1915년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 전까지는 이탈리아 대사였다.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하였다.[5] 이탈리아의 외교관이자 식민지 총독, 정치인으로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탄생과 죽음을 보았고 죽기 직전에는 이탈리아의 군주제 종식을 승인하는 국민 투표 승인을 보게 된다. 파시즘을 혐오했지만 확고한 군주주의자였으며, 그래서 퇴임 후 사망까지 수년간 유복하지만 정치적으로 고립된 삶을 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