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01:20:13

조청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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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대한제국 청나라

1. 개요2. 역사
2.1. 조선 전기2.2. 후금 수립 과정2.3. 병자호란 이후2.4. 청의 안정기2.5. 아편 전쟁 이후
2.5.1. 청의 주장이 무효하다는 관점2.5.2. 청의 주장이 유효하다는 관점
2.6. 청일전쟁 이후
3.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대한제국청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2. 역사

2.1. 조선 전기

파일:PbRb1YM.jpg
영흥 준원전에 봉안됐던 태조어진 복원본. 준원전은 쌍성총관부에서 대대로 고려군호를 관리하는 천호 겸 다루가치였던 이자춘의 옛 집이었으며, 이성계의 출신지였다.

급진적 신흥유신과 결탁하여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고조이안사타가차르 왕가의 분봉지 오동에 자리잡고 천호장과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 그 아들 이행리는 오동의 고려, 여진 민호를 이끌고 영흥 일대로 남하하여 그곳의 여진, 고려 세력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여진 세력들을 가별초로 거느렸다.[1] 이러한 고려계 몽골 군벌이라는 배경을 지닌 조선 왕실은 건국 이후에도 여진 부족들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왕자의 난으로 여진 부족들과의 관계는 혼란에 빠졌으며, 조사의의 난에 여진 세력가들 일부가 가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이 무렵 영락제의 초유 등도 양자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결국 올적합의 김문내(金文乃)의 경원부 침공을 계기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여진과의 우호적 관계는 마침내 완전한 종언을 맞이했으며, 조선의 방어선은 경원에서 경성까지 몰렸다.

이에 조선은 수차례에 걸쳐 이들을 정벌하거나 입조와 수직(授職) 등의 변경 정책을 사용했다.[2] 방어선 진퇴 문제와 수직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태종의 사후, 세종대에는 동맹가첩목아이만주의 행보 그리고 4군6진을 개척에 맞물려 두만강 인근 향화인들 외에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오도리, 올량합인들을 대상으로 수직 정책을 대거 확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맹가첩목아의 아들인 동창(童倉)을 시작으로 여진 수장들은 부족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 그리고 경제적 목적에 따라 명과 조선으로부터 이중수직을 받기도 하여 조선과 명의 속국관계의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은 기존의 5진과 새로 개척한 6진의 변경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두만강 유역 여진 부족들을 번리화(藩籬化) 하고자 했으며 많은 부족들이 조선의 폭력성과 경제성에 순응하여 복속했다.[3]
이계손(李繼孫)·여자신(呂自新)·이맹현(李孟賢)은 의논하기를, "야인의 성질이 본래 교활하고 간사하므로 비록 여러 모로 깨닫도록 일어주더라도 듣고 따르기를 즐겨하지 아니할 것이니, 은혜와 신의로써 회유하여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성종실록》 150권, 성화 19년 1월 6일 1번째 기사.
조선의 수직 정책은 여진 부족들에게 통교권을 의미하게 되면서 명의 위소 정책과 함께 유력 여진 수장에게 통교권이 집중되어 여진의 성장을 촉진하였으며,[4] 이렇게 여진 수장들은 조선과 명의 대여진 정책을 이중적, 다층적으로 활용하며 초피 등을 통해 공적, 사적 무역을 확대했다. 이때 건주여진은 요동과 만포를 통해, 두만강 유역의 번호달은 5진 지역을 통해 초피를 파는 대신 우마와 철물들을 받아왔으며, 초피 교역으로 여진인들에게 조선 북부의 철물이 유출되자, 여진인들은 철제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게 됐으며, 반대로 조선 북부의 군사력, 농업력은 쇠퇴했다.[5] 이때 실질적인 변경 정책의 기조는 이전과 같은 양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이나, 조선의 유교화가 심화됨에 따라 16세기에 접어들면 여진인에 대한 기록은 점차 소략해진다.

조선 조정의 위정자들의 무관심으로 《조선실록》에서 연산군대부터 이전에 여진 부족들을 세분하여 기재했던 것과 달리 여진 부족들을 야인(野人)이란 표현으로 뭉뚱그리기 일수였다.[6] 이런 조정의 무관심 속에서 변장과 수령들이 침탈의 대상을 민호에서 번호들로 확대하여 여진 수장들을 탄압하자, 선조대에 이르면 1583년 회령의 니탕개의 난을 시작으로 1594년 순응적이었던 온성의 번호들까지, 광범위한 이탈과 반란이 발생했다.[7] 한편 압록강 방면의 여진 부족들은 선조 잔반기 폐사군 방면에서의 여진 부족들을 축출하거나 온하위를 대상으로 벌인 군사행동을 제외하면, 조선 조정과 큰 마찰없이 만포진을 통해 관계를 맺는 정도로 그쳤다.[8]

한편 1594년 이전부터 후룬 4부의 우라국(ula gurun)의 영향력이 두만강 번호들에 직접적으로 미치기 시작했고, 1601년에는 일부 번호들과 연계하여 온성을 포위하고 인근의 번호를 공략하는 등 적대적 행위를 가했다. 조선은 수을허(水乙虛)・교로(交老) 부락 정벌을 단행하는 등 우라의 중개지를 타격하였으나, 사실 로툰을 일대의 최대 위협으로 파악하는 등, 우라의 실체나 군사력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였다. 우라의 하스후 버이러(hashū beile) 부잔타이(bujantai)는 1603년부터 두만강 번호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펼쳤는데,일부 병력을 도강시켜 조선의 진보(鎭堡)들까지 공격했다. 그해 8월 종성과 인근 지역을 침탈하던 부잔타이는 10월부터 12월까지 온성과 경원 일대 번호에 대한 대대적인 침탈을 일으켰다. 이제 조선은 우라의 군사력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풍계 부락 정벌 논의는 이러한 현실적 여건 속에서 무산되었다. 부잔타이는 번호처럼 조선의 직첩을 받아 교역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는데, 조선은 부잔타이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선제적인 군사작전을 시행할 여건도 안되었기 때문에 1년 동안 어떠한 회답도 없이 시간을 날렸다.[9]

1605년 3월, 우라의 대군이 조선을 본격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종성의 동관진을 함락하고, 첨사와 군민들을 도륙냈다. 부잔타이가 수직을 허락하지 않으면 매년 공격하겠다고 협박한 것을 조선이 철저히 묵살하자, 실제로 공격을 단행한 것이었다. 북병사 김종득은 이항(伊項), 우허(牛虛) 부락을 초토화하여 군사작전을 전개하거나 우라군이 회령 인근의 벌이대 부락을 공격하였고, 조선의 원군과 교전까지 벌이는 등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다. 5월, 김종득은 3천여 병과 명이었고, 번호 탁두(卓斗) 휘하의 기병 300명과 연합하여 건퇴 부락의 성채[Sibe]에 진입하여 민가를 약탈하였으나, 매복한 우라 병력의 기습을 받고 패퇴하였다. 졸속으로 이루어진 작전은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으며, 마침내 건퇴 부락을 제거하여 두만강 유역 번호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조선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10]
함경도 안문어사(咸鏡道按問御史) 이정험이 아뢰기를 ... 종성 일로(一路)에는 칼에 찔리거나 화살에 맞은 상처를 싸맨 군사들이 잇달아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 도처의 진보(鎭堡)에 고아와 과부들의 곡성이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망자(戰亡者) 가운데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었던 사람들이 혹 3∼4일이 지난 뒤에 돌아오기도 하므로 현재로서는 그 숫자를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제장(諸將) 가운데 훈융 첨사(訓戎僉使) 임의(任義)가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고 회령 판관(會寧判官) 이상룡(李祥龍)도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탁두의 휘하 군사도 2∼3명이 전사했고, 번호(藩胡) 석을장개도 화살을 맞았으며 그의 아들도 칼에 찔렸습니다. ... 대체로 일도(一道)의 정병을 모은 이번 한바탕 싸움에서는 이익이 없었습니다. 제장들이 벤 것이 50여 급(級)이라고는 하지만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습니다. 인심이 꺾여 싸우기도 전에 저절로 무너질 상황이어서 보기에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 조정에서 조처한 육진(六鎭) 가운데 종성이 더욱 홀라온(忽刺溫; 후룬)[11]의 적과 가까운데 말할 수 없이 탕패되어 군대는 반달치의 군량도 없고 토병(土兵)조차도 매우 잔약합니다. 그러니 만일 조그만 변이라도 발생할 경우에는 우리의 땅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선조실록》 187권, 만력 33년 5월 22일 3번째 기사.

군사적 우위를 명확히 확보한 부잔타이는 조선에게 200여 명의 포로 송환을 댓가로 직첩을 요구했다. 선조는 "제왕(帝王)이 오랑캐를 끝까지 거절하는 도리는 없다."면서 '대이지도'를 내세우며 합리화 했다. 조선은 전략적, 인명 손실을 야기한 우라에 보복은 커녕 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굴욕을 당한 셈이다. 이듬해 5월, 선조는 정충신을 파견하여 100장의 직첩과 그에 상응하는 면포 3천 필을 녹봉 명목으로 지급하고 우라의 약조를 수용하고 화친을 맺었다. 부잔타이의 직첩 요구는 애시당초 교역로 확보를 위한 것에 불과하였으므로, 관직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에다가, 지급한 녹봉 역시도 체면치레에 불과한 사실상의 세폐(歲幣)였다. 거기다 우라는 경원 일대의 번호에 대한 공세를 지속하여 조선을 대놓고 기만했으며, 결국 번호 대부분은 우라에 복속되고 일부는 조선 내지로 이탈했다. 번호로 구성된 번리(藩籬)가 형해화되자, 조선은 내지의 요충지에 산성(山城)을 축조하는 방어전략으로 선회하였고, 자체적으로 여진 관련 사안을 처리할 능력이 없어 요동아문에 여진 정세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제 여진에 대한 '기미'는 여진 세력과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전락한 것이다.[12]

2.2. 후금 수립 과정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상황은 다시 한 번 빠르게 변화하는데, 바로 누르하치의 굴기였다. 그는 1588년 건주여진을 통합하여 칙서 500여 통을 확보함으로써, 이듬해 명으로부터 도독첨사를 제수했으며, 1595년에는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직첩을 받았다. 조선은 건주여진 부족들과의 호시와 개시 관할 구역을 명과 분점했었으나,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모두 정복하고 1601년 해서여진의 하다(Hada) 마저 병합하면서 조선에 서신을 보내어 직첩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이중수직을 받는 여진인이 16세기 중반 이래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임진왜란으로 종주국 명과의 관계가 밀접해진 국제정세에 따라 인신무외교의 원칙을 준수한다는 명분으로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식량난에 시달리던 누르하치는 대신 양곡을 빌리겠다는 타협책을 제시하였으며, 조선 측도 건주여진과의 충돌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1613년까지 해마다 만포에서 수백~수천여 명의 여진인들을 구휼했다. 또한 누르하치에게 복속한 안추라쿠(anculakū) 내하(內河, dorgi birai golo; 동량북)의 로툰(lotun)대해서도 무산을 진으로 승격하고 개시하는 방법을 통해 변경의 안정을 도모했다.[13]
파일:姜功立率兵歸降圖.jpg
1930년 중화민국 랴오닝통지관이 중간한 《만주실록》 〈강공립솔병귀항도(姜功立率兵歸降圖)〉, 후금의 4 버이러가 주석단에 앉아 강홍립(姜功立, giyang gung liyei)이 인솔한 조선군의 항복을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누르하치는 1605년 만포첨사에게, 1607년에는 선조에게 보낸 서신에서 건주등처지방(建州等處地方)의 왕을 자칭하고 건주좌위의 인신도 대체하면서 명의 위소제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군주로 군림하고 있다는 늬앙스를 풍기면서도, 이성량이 경질된 것이나 조선의 대명보고를 의식하여 명에 대한 조공을 재개했다. 한편, 조선과는 허례에 불과하긴 했지만 번호규례(藩胡規例)를 준수해주며 오갈암 전투를 통해 우라(ula) 세력을 축출하고 회령 방면으로 초피무역을 추진하면서 녹봉을 지급받았다. 광해군과 장만 등은 비록 흉폭하긴 하나 우라를 통해서 건주여진을 견제하고자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했으나, 1613년, 누르하치가 우라를 친정하여 국성을 함락하고 버이러(beile)인 부잔타이는 예허(yehe)로 망명함으로써, 대여진 정책은 완전히 일원화 됐다.[14]
비변사가 아뢰기를, "호차(胡差)가 나오면 그 문답할 말을 투서 및 박규영(朴葵英)이 가지고 갈 글의 뜻으로 참작하여 가감하고, 별증(別贈)을 후하게 주어 반드시 환심을 얻도록 하되, 아주 상세하고 신중하게 하여 중국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뜻을 원수(元帥)·찬신(贊臣)·(의주 부윤에게) 치유(馳諭)하여 (어설프게 잘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 적이 바야흐로 (용천에 명 감군어사가 이끄는) 수병(水兵)이 나온 것과 우리 나라가 중국 장수를 대접해 주고 있는 데 대하여 크게 노여워하고 있으니, 이번 문답 때 대답할 말을 상세하게 지시하여 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76권, 천계 2년 4월 16일 4번째 기사.

1616년 정월, 누르하치는 겅옌 한(genggiyen han)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사르후 전투 직후인 3월 21일, 천명(天命, abkai fulingga) 2년(1618년)이라는 독자적 연호와 함께 후금국의 한(amaga aisin gurun-i han)과 천명금국한(abkai fulingga aisin gurun han)[15]을 자칭하며, 자신을 조선국왕(solho han)과 대등하게 설정한 국서를 보내어 통교를 요구했다. 광해군은 후금과의 교섭을 통해 난극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며, 신료들과 달리 비록 속국관계와 그에 따른 사대관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누르하치와의 직접적인 대화에 중점을 두었다. 누르하치는 이외에도 4월 4일 칭한(稱汗)은 물론 명을 남조(南朝)라 지칭하는 서신들을 보내왔으며, 1621년 3월과 6월에는 각각 만주국 한을 자칭하며 광해군을 너(si)라고 지칭하거나, 만포진이 아닌 의주로 발송하는 조서를 보내왔다. 조정은 회신은 절대 불가하다고 반발했지만, 광해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서를 받은 것에 대해 개의치 않으며 대화를 강조했다. 그는 즉시 차관을 파견하여 회신을 우호적으로 할 것을 명하는 한편, 회신에 반대하는 비변사 당상들을 세상 물정도 모르는 선비라고 질책했다. 광해군의 독촉에 비변사는 마지못해 그에게 동의했으며, 마침내 누르하치를 '후금국 한 전하(殿下)' 지칭하고 후금과의 신의를 강조하는 답신을 보냈다.[16] 1622년 10월 광해군이 신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국서를 회신하고, 11월 모문룡 휘하 명군을 가도로 이주시킨 이후 1622년 10월 및 조선과 후금 간 긴장관계는 개선되었으며, 누르하치는 요서 공략이 집중했는데, 이런 형세는 정묘호란 발발 직전인 1626년 12월까지 지속되었다.[17]

광해군은 능양군서인에 의해 배명(背明) 행위 등을 했다는 이유로 폐위됐으며, 정변으로 성립된 인조 정권은 명 황제의 책봉을 받기 위해 매달리다시피 하는 것은 물론 모문륭 휘하 명군에게 물자를 쏟아 붇는 등 강한 친명 노선으로 회귀하였다. 다만 요서 전선에 집중한 후금이나 명 모두 조선에 대해 징병과 같은 무리한 요구를 가하지 않았기에 이 국면은 한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18] 그러나 1626년 누르하치의 사후 홍 타이지를 대표로 하는 분권 통치 체제의 권력 투쟁 가운데 아민(amin)의 주도로[19] 가도의 모문룡 휘하 명군에 대한 원정이 단행됐으며, 1월 14일 의주를 완전히 점령하고 남하를 거듭하며 조선에 먼저 화친을 제의했다.[20] 조선과 후금은 3월 3일과 18일 각각 강도맹약과 평양맹약을 맺었으며, 후금은 누르하치 이래로 갈망한 조선과의 국교를 체결하여 명 질서를 교란시켰다. 후금은 형제맹약에 따라 '한 집안'이라는 표현을 통해 조선을 구속하고자 했다.[21]
예부의 사하랸(sahaliyan) 버이러가 올리기를, ... "고려(solgo)를 용서하고, 차하르를 보호하고, 명을 정벌하자"고 하였다.[22]
《만문내국사원당》 천총 7년 6월 18일 기사.

강도맹약 이듬해부터 세폐, 개시 등의 경제적 현안, 피로인 속환 등의 문제를 두고 신경전은 있었으나, # 교섭을 통해 점진적으로 정비되어 나아갔다.[23] 때문에 1633년 명, 조선, 차하르 세 세력 가운데 어느 곳을 먼저 정벌하는 것이 좋겠냐는 문제에 대한 제장들의 진주를 보면, 조선은 스스로 귀부하거나 언제든지 쳐서 복속할 수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으며, 설령 조선이 화약을 잘 지키지 않더라도 경제적 교역을 유지하는 등 화호를 지속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24]

2.3. 병자호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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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xn--hu1boo641bf7o.com/130918018506119_qO67D1HzL2fIXdLpcNUq.jpg
남한산성의 우익문(서문). 강화도의 함락과 산성 내 군란으로 출성을 결정한 인조는 곤룡포를 벗고 신하의 예를 따라 남염의(藍染衣)를 걸치고, 남문이 아닌 서문으로 50여 명의 신하들과 함께 걸어서 삼전도로 향했다.
○ (1636년) 2월 초 2일에, 호부 승정(boigon-i jurgan-i aliha amban) 잉굴다이는 "조선의 왕(solho-i wang)에게 이런저런 말을 전하라"라고, 마푸타는 "조선의 왕의 부인이 죽은 것에 대한 장례의 도리로 조문하러 가라"라고 하며 사신으로 보냈다. 그와 함께 국내의 여덟 호쇼이 버이러(hošoi beile)의 사신, 외번(tulergi gurun) 49 지방 버이러들의 사신이, 한(홍 타이지)에게 (올릴) 존호(amba gebu)를 정하게 하려는 연유로 조선의 왕에게 방문하여 의논하러 갔다.
《만문노당》 천총 10년 2월 2일 기사.

그러나 1634년 릭단 칸의 사후, 홍 타이지는 차하르의 유민들과 함께 대원전국옥새를 취하고 연맹관계에 있던 몽골제부와 제왕들에 대한 군주권을 강화하고, 인열왕후 한씨에 대한 조문을 명분으로 47인의 사신단을 파견하여 조선이 홍 타이지의 황제 존호를 올리는 데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제관이 말하기를, "인신의 처지로 군상(君上)에게 글을 보내는 법은 없다. 인국 군신간에도 일체 서로 공경하는데 어찌 감히 대등한 예로 글을 보낸단 말인가."라고 하며 물리치고 보지 않으니, 용호(잉굴다이) 등이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우리 한께서는 정토하면 반드시 이기므로 그 공업이 높고 높다. 이에 안으로는 8 고산(高山, gūsa)과 밖으로는 제번(諸藩)의 왕자들이 모두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자, 우리 한께서 ‘조선과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각각 차인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 받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하고, 서달(西㺚; 외번 몽골)이 일시에 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천조가 덕을 잃어 북경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은 금국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귀국이 금과 의를 맺어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금한이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처럼 굳게 거절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제관이 군신간의 대의로써 물리치자, 용호가 성이 나서 고산 등의 봉서를 도로 가져가며 말하기를, "내일 돌아가겠다. 말을 주면 타고 갈 것이고 주지 않으면 걸어서 가겠다."라고 하였다.
《인조실록》 32권, 숭정 9년 2월 24일 1번째 기사.

조선 측은 접대인들이 후금 사신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체 소홀히 접대하였으며, 숙위 금군이 장막 뒤 밤낮없이 감시하게 한 것에 후금 사신단은 크게 놀랐으며 # 조정의 척화 분위기를 감지하자, 쫓기듯 한양을 떠나버렸다. 3월 1일 인조는 척화의 뜻을 담은 하유를 내리며,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정의로 결단을 내려 그 글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께 어려운 난국을 구제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하였다.[25] # 이 글은 귀환하던 후금 사신단에게 탈취되어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인조 정권은 내부적으로 교서를 내리면서도 화친을 이어가기 위해 재차 사신을 파견했으나, 나덕헌과 이확이 4월 11일 홍 타이지 존호식에서 배례를 거부하면서 홍 타이지의 친정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26] 홍 타이지가 이 사건을 불문에 부치면서 두 사람은 살아 돌아왔지만 조선에서는 두 사람이 하늘로의 배례를 거부하고, 국서를 버리고 온 일에 대한 정보가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축하 반열에 참가하여 절을 했다는 소문이 무성해졌다. 둘의 머리를 베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였으며, 국서를 버린 것과 별개로 애초에 국서를 받은 사실 자체가 왕명을 욕되게 했다는 비난으로 아예 자결하지 않은 점까지 지적받았다.[27]
난 조선국(coohiyan gurun)의 변심을 조사하여 알았기에, 그가 대비를 마치기 전에 내가 앞지르고자 하여 천지(abka na)에 고하고 다시 전쟁을 시작한 게 이것이다.
《구만주당》

인조는 화친이 단절됐음을 알았지만, 교섭의 끈을 놓지 않으려 6월, 맹약이 깨지게 된 원인이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격문을 작성하여 9월 통역관을 통해 청과 접촉을 시도하나, 청 측은 조선이 대명전쟁에 원병할 것, 척화신과 왕자를 인질로 보내는 등의 요구 조건과 함께 수락하지 않으면 친정이 있을 것이라 협박했다. 그러면서도 존호식에서 조선 사신이 구타를 당한 일 대해서 청 측이 "자못 후회하고 있다"거나 일종의 간첩 역할을 하는 통역관에게 12월 25일까지 사신을 보낼 것을 요구했으며, 조선인 피로인과 병사들을 활용하여 대명전쟁에서 홍 타이지의 동생 아바타이(abatai)가 전사했다거나, 청 측이 대명전쟁을 준비하며 조선과는 화친을 바라고 있다는 정보를 흘렸다.[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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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신(臣, amban) 이종(李倧)은 삼가 대청국(大清國)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ūwangdi)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 지금 그런 까닭으로 칭신(稱臣, amban ofi)과 봉표(奉表, biyoo bithe jafame)하여 번방(藩邦, tulergi gurun)으로 삼아주시기를 원합니다.
《太宗文皇帝實錄》 卷33 숭덕2년 정월 24일 2번째 기사; 《內國史院檔滿文檔案譯註: 崇德二·三年分》 숭덕 2년 정월 24일 기사.[30]

청군은 철저한 준비 끝에 최후통첩의 17일 전인 12월 8일 압록강을 도하하여 조선을 기습했다.[31]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조정은 농성 50여 일도 안된 1월 21일 청의 연호와, 표문의 형식을 갖춘 봉표 칭신의 예를 이행했으며, 25일에는 최후통첩과 함께 홍이포의 위협이 있었다. 신하들의 압박과 군심의 이반이 심화되는 가운데 강화도가 단 하루만에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1월 30일 쪽색 옷을 입고 서문으로 출성하여 홍 타이지를 대면하여 삼궤구고두례를 행했다.[32] 종전 직후 청은 인조의 질자들을 심양으로 끌고갔으며, 때때로 인조의 입조나 소현세자의 왕위 계승 의향을 흘리며 인조를 압박했다. 또한 왕자들과 함께 척화신 세 명도 잡아갔으며, 삼공, 육경을 비롯한 고위 신료들의 질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여 조선의 군신을 모두 길들이고자 했다.[33] 또한 조선은 200년 넘게 유지되어 온 명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을 강요받았고 청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국의 접촉은 비밀접촉의 형태로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조선은 이 과정에서도 소극적, 피동젹으로 대응할 뿐이었다. 대명의리를 대외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추진했던 마지막 노력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34] 이 과정에서 청은 잉굴다이를 보내어 반청인사나 조병 요구 등에 비판적 태도를 보인 신료들을 색출하기 위해 신료들을 평안북도 의주로 모았으며, 지천 최명길, 청음 김상헌, 조한영(曹漢英), 채이항(蔡以恒) 등을 반청 인사로 지목하고 김상헌 등을 심양에 구금했다.(1차 심옥) 2년 뒤에도 홍승주와 체포된 선천부사 이계가 명과의 밀통을 실토하면서 신익성, 신익전, 허계, 이명한, 이경여(李敬與) 다섯을 잡아가고 최명길을 심양에 구금하였다.(2차 심옥)[35]

청은 조공에 있어서도 이전부터 조금씩 바치도록 했던 세폐(歲幣)를 매해 1만 석을 강제로 바치게 했다. 물론 세폐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1639년 요동에는 기근이 벌어지자 대명 약탈전을 준비하던 청은 조선에게 세폐미 1만 석 중 품질이 나쁘다는 이유로 2,250석을 재차 요구했으며, 1640년에는 그 무렵 청에 완전히 복속된 함경북도 경흥군 대안의 천여 명의 둔전민들을 구휼하도록 했다. 다만 그해 청은 세폐미를 1천 석으로 감면해주었으나, 2년 뒤 홍타이지송산전투를 일으키면서 조선에게 그해(1642년)부터 1646년까지 바쳐야 할 쌀 5천 섬을 한달안에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36]

1644년 북경을 정복하고 수탈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속설이 있지만, 청은 입관과 함께 식량사정이 더욱 급해져서 소현세자를 통해 겨울 전에 5,000석을 조공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듬해 2월에는 무려 20만 석을 요구했다가 10만 석으로 감면해주었다. 조선은 전국에서 300척의 배와 7,000여 명의 인원을 모아 곡물을 지급해야 했다. 이 대대적인 수탈은 1645년 청이 강남을 차지하자 2년 뒤 세폐미를 100석으로 감면해준 끝에 종언을 고했다. 일찍이 유례가 없는 수준으로 당시 조선의 조공 마련 비용은 호조 재정 규모 따위는 압도적으로 초과하는 것이었으며, 조정은 백성들에게 결포를 걷어 막대한 대민 폐해를 초래했다.[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말기까지 조청관계에서 조공으로 인한 조선의 부담과 소득품의 가치를 비교했을 때 조선은 국가재정상 연평균 전 20만 량 이상의 손실을, 칙행시에는 40만 량에 달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38]

조선은 입관 이후 청의 관심이 중원에 쏠려있다고 판단하고 원만한 관계를 기대하며, 일본 동향을 빌미로 군비 강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순치제에게 일본의 동태가 염려스럽기 때문에 청의 구원을 기다리는 동안에 군사적 강화조치가 필요하다는 주문을 올렸다. 1650년 당시 내부 권력투쟁과, 반청운동 진압, 통치체계 강화 등으로 조선에 대한 의구심이 강했던 청은 조선의 정축조약 위반을 강도높게 징책하고 조선 사신을 감금하고 심문했다. 청은 6명이라는 대단위의 사신을 보내어 2달 동안 조선을 압박했으며, 이 과정에서 정명수는 영의정을 비롯한 정승, 육조, 양사, 승지 등을 취조하여 반청감정을 고조시켰다. 청사들은 세공 감면, 표전 문제, 왜정을 빌미로 한 군비강화 등을 추궁하였으며, 조선은 개별 조항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할 수밖에 없었다. 더나아가 그들은 김자점 등 인조대 친청파가 효종 즉위 후 숙청된 반면, 김상헌 등 반청 인사가 엄히 징계받지 않은 점을 문제삼아, 구체적으로 김자점, 원두표, 구인후, 이시백, 구인기 등 5명에게 국사를 맡길 것을 강요하기까지 했다. 청사들은 심문 끝에 일본 동태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명의를 제공했던 동래부사 노협(盧協), 경상도관찰사 이민(李曼), 의정부 영의정 이경석 등을 징계하고, 주문의 실질적인 담당자였던 예조판서 조경 등도 문책했다.[39][40]
조선국왕이 올린 표주(表疏)를 읽어보니, 인전(印篆)이 단지 청자(淸字: 만문)만 있고 한문(漢文)은 없으니, 예부(禮部)에 명하여 즉각 청한(淸漢)을 겸한 전문(篆文)으로 개주(改鑄)하여 국왕에게 내리고 국왕의 신민들로 하여금 누구나 다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하라.
《청세조실록》 권73 순치 10년 3월 25일 1번째 기사

한편 입관 후 소현세자가 귀국하자, 소현세자로 나타난 과도기적 의례의 층위가 점차 사라지고 명대에 준하는 의례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1653년, 명나라에 조공하던 류큐가 청에 입조하면서, 호부 중심의 대조선 외교는 예부 중심으로 단일화되고, 비정식적 교섭에서 중심 축을 담당했던 정명수는 파면되었다. 청은 류큐에게 류큐국왕지인(琉球國王之印, lio cio gurun-i wang ni doron)을 발급하기 직전, 만문만 각인된 조선국왕의 인장을 대체할 만한합벽 인장을 조선에 하사했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류큐 이래 속국에 모두 만한합벽 인장을 발급하고 북경(연행)에 속국 사신에게 예부연(禮部宴; 명대 상마연)과 회동관연(會同官宴; 명대 하마연)을 베풀도록 하는 규정이 확대, 변용됐다.[41]
주문(奏文)에 의하면 (조선은) 왜국과 서로 미워하여 성을 수축하고 병사를 모으며 기계(器械)를 정돈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 말이 한 두 번이 아니고 너의 선왕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릇 얼마인지 모른다 ······ 이로부터 보건대, 성을 수축하고, 병사를 모으고, 기계를 정돈하는 일은 본디 왜국과는 상관없는 일이고, 오로지 짐을 어려움에 빠지게 하고자 할 뿐이다. 네가 이미 기망하고 교묘하게 속여 은혜와 의리를 저버렸으니 짐은 그에 대비할 따름이다.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청세조실록》 권49 순치 7년 7월 20일 1번째 기사.

병자호란에서 패전하여 속국이 된 조선 위정자들 시점에서는 현실의 성패를 중시하는 권도(權道)보다는 명분을 엄격하게 견지하는 경도(經道)인 의리를 지키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는데, 역대 오랑캐의 왕조들의 운세가 100년을 넘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따라 의리를 지키면 희망은 반드시 찾아온다고 믿었다. 이제 그들에게 의리는 형이상학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이유를 보증하는 신념이자 희망을 담보한 가치였다.[42] 이러한 가치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는 점차 이념화되어갔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북벌론이 부상하여 효종의 군비 강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효종의 즉위 후 친청파였던 김자점은 실각했으며, 남명과 일본 세력들의 연계 등의 요인으로 효종의 군비 확충은 청의 감시와 견제를 받으며 진행되었다. 그런데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을 추진하던 1650년대, 식량난에 허덕이던 러시아의 자유민 카자크들이 송화강변까지 내려오자, 새롭게 닝구타총관으로 부임한 샤르후다(šarhūda)가 카자크 격퇴 작전을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54년과 1658년에 각각 150명, 250명 규모의 함경도 관내에서 소집한 조총 부대가 활약했다.[43] 다만 조선은 청의 삼엄한 견제와 시비 속에서 북변 방어를 구실로도 군비 확충에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결국 군사력 증강은 국왕의 호위와 한양 도성에 대한 수비 그리고 일본 견제를 명분으로 삼았던 만큼 삼남 지역에 국한되었다.[44] 북벌론은 지지부진했지만 효종과 송시열은 《밀물지교》를 통해 안민을 기본으로 한 군사력 확보의 구체적인 계획까지 거론했다. 그러나 그 즈음부터 종기가 악화된 효종은 1659년 5월 4일 죽어버렸다.[45]

2.4. 청의 안정기

강희 전반기 삼번의 난, 대준가르 전쟁, 동녕 왕국 등으로 청 내부가 소란스럽자,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윤휴 일파 등에 의해 북벌론이 재차 부상했다. 그러나 1683년 강희제가 친정에 나서 대만을 정복하고 해금령을 풀자, 이후 조선은 표류 한인을 통한 강남에 대한 정보 수집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더이상 조선을 의심하고 견제할 필요성이 사라지자,[46] 강희제는 1685년, 87년 숙종에게 소 무역 중단과 월경인 채삼 문제로 각각 벌은 1만 냥과 역대 최고액인 2만 냥을 부과하였다.[47][48] 즉 중원의 정세가 안정화되는 양상을 보이자 보다 강력하게 조선을 제재하기 시작한 것이다.[49]

1691년 사문사 싱안(Singgan, 星安)이 숙종에게 은밀히 조총 진상을 요구하여 조선 측이 이에 응하자, 강희제는 3천여 자루의 진공을 공순하다고 하여 세폐 내의 황금 100여 냥과 계획홍목면(藍青紅木棉)을 감액하였으며, 사문사의 파견이 종식되고 사문 자체도 극적으로 감소하였다. 그 결과 조선국왕에 대한 실질적인 벌은 처벌 또한 종식됐다.[50] 1696년, 숙종이 폐위된 장희빈 소생의 이윤을 세자로 삼자, 강희제는 “왕과 왕비가 오십이 될 때까지 적자가 없어야, 비로소 서장자를 왕세자로 세울 수 있다”는 《대명회전》의 조문을 들어 책봉을 불허했다. 숙종은 황제가 책봉을 불허했다는 소식에, 정부사와 서장관 등을 삭탈관직에다 문외출송하고 재차 사신을 보냈다. 이들은 제독 등에게 뇌물을 쓰려했지만 통하지 않자 숙소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곡을 하며 처지를 알리기도 했다.[51] 1697년, 청이 막북 몽골제부에 대한 패권을 두고 준가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동북면 질서를 확립하자, 이제 조선은 변수가 되지 않게 되었다.[52]

경신대기근에 이어 을병대기근으로 조선이 초토화되자 1697년 9월 말, 숙종은 마침내 청국 곡물 교역을 구걸하였다. 경신대기근 당시 조선의 신료들은 운송의 불편함을 들어 청곡 교역을 반대하였는데, 그 속내는 허적이 말했듯이 "청에 은혜를 입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관료들은 대기근으로 백만에 달하는 백성들이 죽어가는 상황에도 그들의 ‘명분’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연이은 대기근으로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고 개시가 불가피하다는 여론도 상당했다. 숙종의 요청을 받은 강희제는 예부의 부정적 의견에도 불구하고 "짐은 마음 깊이 불상하고 측은하게 여긴다"며 신속하게 원조를 단행했다. 강희제는 「해운진제조선기(海運賑濟朝鮮記)」를 지으며 득의를 과시했고, 조선의 신료들은 "개시를 청한 것은 만부득이한 일이었지만 나라를 욕되게 하고 폐를 끼침이 극에 달했다"고 자학하며 청국 곡물을 경멸했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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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장백산심사비(長白山審査碑), 강원비(江原碑), 목극등비(穆克登碑) 등으로도 불리며, 백두산 장군봉(將軍峰, 2,750m)과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사이 대략 중간지점인 해발 2,150m 고지(高地)에 세웠다.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다. 기록상 1931년 7월28일까지 존재가 확인되고 있으나 철거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실제로 1712년 백두산 정계비 설치 당시 강희제의 태도는 과거와 같이 강경하게 속국을 통제하려는 종주국 군주의 모습은 아니었으며, 대조선 정책은 매우 유화적으로 변했다. 이는 대만의 동녕 왕국과 남명 정권을 제압하여 중원을 완전히 통일하는 데 성공한 것에 대한 자신감의 결과로 보이며, 강희시대 중반 이후부터는 중앙의 재정에도 여유가 생기게 되자 더 이상 조선과의 긴장관계를 감수하면서 막대한 공물을 요구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54] 그 결과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의례적인’ 공물만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후 양국 사이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것은 양국이 형식적으로 완전히 동등한 국가로서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하고 자국의 위엄을 손상하지 않는 선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55]

백두산 정계 당시 우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의 양보로, 조선은 천지 남쪽을 강역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56] 그러나 목극등이 두만강의 수원을 잘못 비정하여 경계표지물이 잘못 설치되었으며, 실무자들은 재량에 따라 두만강 발원지까지 표지물을 이어 설치했다. 조선은 청 측에 공사가 시작된 사실만 전언하였으며, 내부적으로는 이듬해 실무자들의 재량에 따른 추가 설치 공사를 추인하였다.[57] 조선을 의심하지 않은 목극등은 자신의 정계가 옳으며, 조선측이 자신의 의도대로 표지물 공사를 진행했으리라 믿었다.[58]

강희제를 이은 옹정제건륭제도 강희 후반과 마찬가지로 공손한 조공국에게 보다 관대한 처우를 내리는 여유를 가졌다. 성경을 비롯한 동북 변경의 지방 관료들은 조선인의 범월을 차단하고 국경지대를 지키기 위해서는 초소 설치와 같은 비롯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두 황제는 조선국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의 요구를 물리쳤다. 그들에게는 오랜 속국의 절의를 확보하는 것이 보편군주의 위상에 부합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59]
상이 이르기를, …… 무릇 대국이 외국에 대해서 특별히 우대하는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대(事大)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 본래 당연한 일인데, 더구나 지금의 황제가 아국(我國)을 대하는 것을 생각하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니,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황제가 아국을 우대해 준 것이야말로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60년 동안 태평스러운 정사를 펼친 것은 진(秦), 한(漢) 이래로 있지 않았던 일인데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정조실록》 43권, 건륭 60년 9월 29일 6번째 기사

건륭연간에 이르면, 숭덕 원년에 무력을 통해 칭신한 조선이 외번 몽골과 함께 명 질서에 대항하는 청 질서의 일원으로서, 그 국왕 인조가 호쇼이 친왕보다 상석에 배치받은 전례를 계승하여, 반차에 있어서 조선 사신들은 류큐, 싸얌(톤부리 왕조), 란쌍 왕국(ລ້ານຊ້າງ, 루앙프라방 왕조)보다 우대받았으며, 조선에 파견하는 청의 칙사들은 모두 3품 이상의 기인으로 확립됐다.[60][61] 더 나아가 1780년대 이른바 '진하 외교' 과정에서 영송, 연회를 통해 조선 사신들의 건륭제와의 대면 접촉이 증가함은 물론이요, 아예 건륭제가 사신들에게 조선국왕의 안부를 구두로 묻거나, 정조의 득남을 걱정하고 기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조선 사신들은 건륭제가 시제나 운을 띄어주면 그에 맞추어 시문을 지어 올려 은상을 하사받기도 했다. 조선 사신들의 시문 실력을 통해 건륭제는 천자의 공덕을 표상하는 문명교화를 보증했으며, 덕분에 《청고종실록》에서 조선은 수차례 가장 공손하고 믿을만한 외번, 번병으로 거론될 수 있었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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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 축에 묘사된 조선 사신 일행, 만국래조도(1761)는 1761년 11월 숭경황태후의 칠순 만수성절을 조하하기 위해 모인 각국, 번부 사신들의 조회를 묘사한 궁정화다. 조선 사신단은 정사와 수역 그리고 군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동사자 좌측 외국, 번부 사신들 중 가장 앞에 배치됐다.

청이 대륙을 제패하면서 조선은 사직과 국가의 안위가 청과 직결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비록 임시방편에 불과하나 청과의 우호적 관계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으며, 정조대에 이르러 조정에게 청은 이제 오랑캐보다는 대국 내지는 상국으로 여겨진다. 정조에게 사대란 별다른 은덕이 내려지지 않아도 외국(속국)이 마땅히 정성을 다해야 하는 일이었으며 거기다 건륭제의 각별한 후대를 받은 것을 더하여, 외교 전술을 넘어서 신의와 공경적 태도로 청을 인식했다. 건륭제와 조선 사신 간의 시문 짓기를 전유한 방식으로, 정조대 청사들은 정조에게 시문을 진헌했으며, 이를 통해 동국(東國)을 통치하는 조선국왕의 덕과 교화를 보증해주었다.

한편으로 대명의리는 정조에 의해 철저하게 예(禮)와 사(史)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실천됨으로써 대청 외교의 현실과 충돌 없이 공존하며 현실에 적응해 나아갔다.[63] 이후 청의 성세를 경험한 사인들에 의해 친청 성향을 띄는 북학론이 대두했으며, 19세기 전반 많은 식자층은 더욱 적극적으로 청의 실재와 성세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하늘의 관점에서 이적과 중화가 균등하며, 중화의 복수성과 상대성을 인정함으로써 화이분별의 논리를 분석하고 해체했다. 동시에 지나친 대명의리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는데, 숭정 연호의 사용에 대한 것이나, 청과의 군신지의를 강조한 것이다.[64]
조선은 본조에 신복(臣服)하는 것이 가장 공순한데, 이번에 조선에 토적이 발생하여 무리를 불러 모아 성에 웅거하여 약탈하고 있다. 지금 조선에서 장차 초포(剿捕)할 정황을 알려왔으니 이를 소홀히 여길 수 없다. ······ 조선은 오랫동안 번봉(藩封)을 지켜왔으니 마땅히 넉넉하게 돌보아야 할 것이다. 루청은 유지를 받들어 곧 그대로 처리해야 마땅하다. 이를 (웅악부도통) 루청(Luceng)에게 전하고 아울러 (성경장군) 허닝(Hening) 등에게도 알게 하라.
《순조실록》 15권, 가경 17년 3월 24일 2번째 기사

19세기 초반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자, 북경 조정은 그 여파가 동북 지역에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군사를 파견하여 경계 순찰을 강화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며, 이를 속국에 대한 가경제의 은덕으로 묘사하였다. 조선 역시 청이 요구하는 의례에 따라 청군을 접대하고 북경에 사절을 보내어 소방(小邦)의 변고에 대한 황제의 위덕에 감사함을 표명했다.[65]

2.5. 아편 전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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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대조선 정책의 기획자였던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 이홍장.
그는 한인 출신임에도 태평천국전쟁과 염군의 난 그리고 양무운동을 통해 증국번 등과 함께 팔기의 권력을 지방 엘리트, 즉 자신들에게 이동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25년간 직예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직책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정치 능력을 발취하여 자신의 구상을 총리아문과 청 조정에게 제시하였으며, 국내 여론, 조선, 러시아 등이 엮인 국제 정세 등을 적절히 활용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여 동삼성 변경지역의 안정을 꾀했다.

아편전쟁으로 청이 영국에게 패전하고 난징조약을 체결하여 유럽 국제법 질서의 일원이 되자, 조선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청과 마찬가지로 조선은 국제법 질서에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1845년 영국의 벨처 함장이 이끄는 사마랑호(Samarang)가 약 7주간이나 조선 해안을 측량하자, 북경의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인신무외교의 법도와 지정학적 중요성을 들어 난징조약에서 개항된 다섯 항구 외에 교역이 금지되는 항구[禁斷之地]에 자국을 포함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며, 이에 도광제는 흠차대신 키옝으로 하여금 속국 조선은 금단의 땅에 포함된다는 논리로 영국을 설득했다.[66]

1865년, 프랑스는 자국 선교사 조선을 왕래하는 것이 가능한지 청에 지속적으로 문의했으나, 총리아문은 "조선은 비록 속국으로서 공경히 정삭을 준봉(遵奉)하고 세시(歲時)로 조공하나 해국(該國)이 봉교(奉敎)를 원하는 여부는 중국이 강요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과거 난징조약과 달리 톈진조약에서는 다섯 항구 외에 모든 항구에 대한 여행이 허가되어버렸고, 청은 이제 주장을 번복하여 조선이 톈진조약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으니, 프랑스인들에게 조선 여행 허가증을 발급해주지 않겠다고 권고한 것이다. 벨로네(H. de Bellonné)는 총리아문에 문서를 발신하여, "중국 정부는 고려에 대하여 어떠한 권위나 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u’iln’avait aucun droit, aucune puissance sur la Corée)"고 선언하여 그 종주권을 유명무실화하고자 했다. 벨로네와 로즈는 조선을 쉽게 침공하기 위해서 총리아문의 언설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문서화한 셈이다.[67]

총리아문은 조공국인 조선이 피해를 입는 것을 "어찌 참고 허용하겠는가"라고 하며 진상조사를 주문하고, 프랑스 측에 "조선의 사절단이 북경에 오고, 조선에 중국의 사절이 가는 것은 고래(古來)의 법(法)에서 유래하는 사실로서 조선과 프랑스가 벌이고 있는 전쟁 상황이 결코 그것을 수정하거나 파괴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으나, '자주'와 '속국'이라는 국제법 프레임에 휘말린 이상 양 측의 분쟁에 끌려들어가서는 안되었다. 결국 청은 어디까지나 "양국이 교전하는 것은 모두 백성들의 생명에 관계된다"는 명분으로 프랑스 공사에게 '양국 사이의 중재'[從中排解, mediation]를 제안하고 북경 주재 공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뿐이었다. 한편 프랑스 본국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지 못하고 그것에 대한 어떠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하여 벨로네 등에게 전투 중지를 요구했다. 그리고 예부상서(禮部尙書) 만청려(萬靑藜)는 조선 사신에게 은밀히 프랑스 함대의 동향을 누설하고, 중국이 원병할 역량이 안되므로, 원병을 청하지 말고 심사숙고하여 그들과 타협할 것과, 그들과의 조약문은 표를 갖춘 상주문을 올려 정장(定章)으로 삼을 것을 권고하였다.[68][69]

1871년 청일수호조규 체결할 때 청은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으나 조선을 '소속방토(所属邦土)'로 간주했다. 이때 실무 관료들이 보인 조선을 암중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보였는데, 이러한 입장은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은 하지 않지만 보호는 하겠다는 것이자, 도광연간의 조약관의 연장선이었다. 병인양요 당시의 조선에 대한 불간섭과 불개입의 태도에서 어느 정도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신미양요를 통해 조선은 속국이라는 명분으로 미국에 대한 억제를, 미국은 속국이라는 명분으로 모두 조선을 압박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에서 양측이 청조를 곤경에 빠뜨리려 한다는 인식이 형성되자, 청은 미국의 요구에 대해서는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지만 정교금령을 자주로 하고있기 때문에 조선에게 강요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이 분쟁이 조선의 잘못이라면 중국이 이치로 깨우쳐 줄 수 있지만, 그럴지 않기에 조선을 압박하고 강요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조선의 비호 요청에 대해서도 책임 떠넘기기에 불과하므로 중국은 양자 사이의 중재와 미국이 조선에 가지 말 것을 권고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당시 청은 조선(고려)을 청일수호조규상의 소속방토라고 지칭하면서 조선은 속국이면서 자주이므로 청조는 일본과 조선의 교섭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일본 측은 조선을 자주지방(自主之邦)으로 명시하면서도 종주권을 부정하지 못했으며, 일각에서는 일본이 조선과 대등하게 조약을 맺을 필요가 없다고 보기도 했다.[70]

1878년 12월 7일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章)이 베를린 조약[柏林條約]이 불가리아[博魯哦利亞]를 오스만 술탄[土帝]의 통할(統轄)에 속(屬)한 자주후국(自主侯國)으로 규정하였다는 보고서(出使日本何大臣抄送柏林條約規定博魯哦利亞為自主侯國屬土帝統轄)를 총리아문에 제출하였다. 하여장 등을 통해 총리아문과 이홍장 등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조약을 통한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의 독립 그리고 불가리아의 새로운 지위 등을 확인한 것이다. 청은 이제 불가리아와 같이 조선을 속국으로 유지하면서 열강, 특히 러시아가 진출하거나 그 주권을 차지할 수 없도록, 그에 합당한 국제법적 지위를 조선에 부여해야 했다. 이에 따라 청은, 조선이 주동적으로 서양 각국과 수호조약을 맺어 스스로 안전을 강구할 수 있도록 권유하자는 여서창(丁日昌)의 건의를 채택하여, 조선에게 조약을 권고함으로써 조선을 국제질서 속 주권국가로 자리매김을 시키는 한편 그 조약을 통하여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확인하고자 하였다.[71][72]

1879년 8월, 총리아문은 조선에 각국과의 통교를 상주했고,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조선의 입약을 권고하였다.[73] 그러나 청의 입약 권유에 대해 조선 측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유원은 이홍장에게, 조선은 외교를 돌볼 여유가 없을 뿐 아니라 일본의 류큐 병합의 사례에서 보듯 공법에 의지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반문하였다. 이처럼 조선 측이 회의적인 입장을 내비치자,[74] 이홍장은 "형세가 바뀌면 다시 기회를 엿보아 권고할 일이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기는 곤란하다."며 조선 문제에 즉각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물러서는 한편, 하여장의 건의에 따라 조선 정책을 일본보다는 러시아 견제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75]
중국이 아끼는 나라로는 조선만한 것이 없다. 조선이 우리 번속(藩屬)이 된 지 이미 천년이 지났다. … 서양의 통례는 양국이 전쟁을 할 때 局外의 나라는 그 사이에서 중립하고 치우쳐 도울 수 없지만 속국만은 이 사례에 있지 않다.[76]
조선책략》, p.49.

미국의 슈펠트가 조선과의 수교를 추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하여장은 청 정부에 「삼책」을 제출하여 대조선 정책을 적극적으로 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는 조선을 군현으로 삼아 영토화하는 것을 상책, 주차판사대신을 파견하여 번부화[77]하는 것을 중책, 단지 조약 체결에 간여하는 것을 하책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조선의 외교를 자주에 맡길 것이 아니라 청의 관할 아래 두자는 주장으로, 조선을 서양 국제법적 속국(dependent States) 내지 반주지국(semi-sovereign States)으로 대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청은 하여장에게 수신사 김홍집를 만나 개인적인 서신 즉,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과의 수교를 권유할 것을 지시하여 그의 의견을 사실상 기각했다. 소극적인 권도 문제를 지속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서신은 조선의 집권층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쳐[78] 미국과의 수교가 급물살을 타게 된다.[79]

조선 정부를 설득했다고 판단한 하여장은 1880년 11월 청 정부에 「주지조선외교의(主持朝鮮外交議)」를 제출하여 조선 정책을 전환할 것을 재차 촉구하였다. 그는 앞서 「삼책」이 기각되었음을 감안한지 주장의 강도를 비교적 낮추었다. 당시 하여장은 청의 속방체제가 국제법에 부합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법상 독일 연방국가들의 지위와 권리, 즉 독일 연방에 속한 국가가 대내·대외적 자주권을 누려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국제법에 근거해 청의 속국체제와 속국 체제를 통한 속국 보호를 정당화하려거든, 청의 체제가 국제법에 포함될 수 있어야 하는데, 독일 연방 체제와 가상의 등가적 관계로 설정하여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서양의 속국들은 모두 그 정치를 통할지국(統轄之國)이 주재하는 반면, 아시아의 공헌지국(貢獻之國)이 속토(屬土)로 취급되지 않는 점을 들어 조선이 각국의 조약 체결을 스스로 행할 경우 중국의 속국이라는 것을 홀연히 잃게 될 것이기 때문에, 주차판사대신(駐箚辦事大臣)을 설치하고 입약을 주재하여 속국의 명분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다만, 하여장도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독일 연방 사례를 인용한 것이 부족한 것을 인지한 듯,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조선의 입약에 있어 "조선이 청의 명을 받들어 입약한다"는 문구를 삽입하여 유럽의 속국체제를 모방할 것을 주장했다.[80]

이렇게 하여장을 필두로 청 외교가에서는 일전에 프랑스의 벨로네가 총리아문의 언설을 통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부정한 것이나, 조일수호조규 당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시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환을 두려워 하며,[81] 영국령 인도 제국, 독일의 연방국가 체제, 스위스와 벨기에의 공동보호 사례 등을 인용 내지는 변용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 강화를 추동했다.[82] 외교가의 추동 이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을 대등하게 설정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조선이 속방(Dependent State)임을 조약에 확실히 명시했다. 또한 같은 해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과정에서 이홍장은 하여장이 제안한 차선책을 채택하여, 속방 조관(중국 속국)을 삽입하고자 하였으나, 슈펠트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the suzerainty)과 조선의 준 속국(a semi-dependant state) 내지는 종속국(a dependency, dependent state) 지위를 인정하고, "그(고종)의 종주(his suzerain)인 중국의 황제(the Emperor of China)의 조언에 의하여 통치되는 것은 대단히 적절하며 미국은 어떠한 불평을 할 이유가 없다."[83]고 하며 침묵할 것을 선언하고 어떠한 정치적 동맹도 체결할 권리가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속방조관의 삽입을 거부했다. 결국 이홍장으로서는 더 이상 속방조관을 삽입할 방도가 없었으며, 조선으로 하여금 속방조회(屬邦照會)를 작성하여 미국에게 제출하도록 하였다.[84] 일련의 과정은 이제 청의 조선 정책이 권도 수준을 점차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85]

청이 고문관과 군대를 파견하여 내정에 간섭하는 것에 염증을 느낀 김옥균을 필두로 한 급진 개화파는 청불전쟁으로 청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일본의 배신과 대원군의 귀환을 우려한 고종의 배반으로 자주 독립을 실현하지 못했다.[86] 1885년, 청은 무역장정에 따라 원세개를 상무위원으로서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했으며, 그는 러시아의 남진에 대한 임기응변으로 4차례 가까이 조선국왕의 활동을 규제하여 상무위원으로서의 역할을 범람하기도 했다. 이에 이홍장은 1886년 9~10월 톈진회담에서 속국 조선의 군현화와 감국(監國)의 파견이 없을 것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고 이홍장-라디젠스키와의 협약(천진협정) 초안에서는 조선국왕의 자주지권(自主之權)을 명확히 보장하기도 했다.[87]

한편 원새개는 이홍장에게 고종의 폐위와, 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 김윤식흥선대원군이 국정을 감독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고종은 데니와 민영익의 건의로, 미국과의 연대를 모색했는데, 외국에 공사를 파견하여 청국공사와 대등한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88] 이에 대응하여 원세개는 주필(朱筆), 정문(呈文), 함첩(銜帖) 등 의례적 요소들을 이용하여, 제3국에서의 양국의 위계관계를 관철하고자 하였다.[89]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및 영국과 독일의 총영사는 원세개를 만나 조선의 전권공사 파견을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속방에 대해 상관하여 그 파견을 막아야 한다고 종용하였다.[90] 병자호란 이래 조선이 청에 복속된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던 조선의 각국 상주사절 파견에 대해, 조선은 전통적으로 행했던 통보 형태의 자문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청 측은 상국의 허락 없이 상국 및 제3국에 사절을 파견할 수 없다는 울시(T.D Woolsey)의 《공법편람(ntroduction to the Study of International Law)》 등의 국제법 체계를 염두에 두어, "먼저 지시를 청하고 윤허를 기다린 후에 다시 각국으로 보내는 것"이 속방의 체제에 부합한다는 유지를 조선에 내려, 조선의 외교권을 직접적으로 제한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부임해있던 민영준과 그 수행원을, 그리고 한성을 막 떠난 박정양과 조신희를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91] 또한 이홍장은 전권을 3등공사로 고쳐 파견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러한 청의 요구는 국제법상 문제가 되진 않았으나, 고종은 천하의 신뢰를 잃어 천조의 근심이 될 것이라는 궁색한 논리로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여 이홍장으로부터 전권공사 파견을 수용받았다.[92]

한편 출사미국대신 장음환(張蔭桓)은 영국령 인도 번왕국의 제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영국 사신이 인솔하여 대통령을 면담한 사례를 서양의 예로 일반화하여 조선 사신이 각국에 이르면 중국 사신이 인솔하여 외부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자문을 보냈다. 총리아문을 통해 전보를 받은 이홍장은 원세개로 하여금 조선에게 이른바 '영약삼단'[93]의 준수를 요구했다.[94]
서양 국가들과 조선이 조약을 체결하고 외국인들이 조선에 정착한 후 왕은 종주국(Suzerain)과의 연계를 약화시키고 보다 독립적인 상태(situation indépendante)로 전환시키고자 애썼습니다. 왕을 보좌하고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입증하기 위해서 고문들은 증공국(tributaire)과 속국(vassal) 간에 미묘한 차이를 설정하였습니다. 증공국으로서 야기되는 의무는 부인하거나 져버리기 힘든 것이 1636년 공식 협약(1889년 12월 1일 정치공문 제91호 참고)으로 중국에 대해 이조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조목조목 열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옹호하는 자들에 의하면 현재 증공국으로서 관계는 조선이 보내는 봉물 정도에 그치며 봉신 상태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왕의 고문인 데니 씨는 극동에서 일정한 반향을 일으킨 자신의 책자에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였는데, ... 데니 씨는 조선국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조정에의 즉위 인정 청원, 조선 국왕이 작성하는 문서 및 서신에 날짜를 기입할 때 중국 황제 연호의 명기, 북경에서 매년 보내는 중국 월력의 사용 의무, 특사 일행의 영칙 의례 등 일부 반박의 여지가 있는 요소들은 제외시켰습니다.
《韓國近代史資料集成》 14권 14권 〈프랑스외무부문서〉 4, "Conséquences de la réception faite à l’Ambassade chinoise en Corée."

박정양은 기존의 삼조와 삼단의 준수 의무를 받고 미국으로 갔으나, 제1단을 위반하여 고종의 반청자주를 증명하고자 했으며, 데니(Owen N. Denny)는 《청한론》을 통해 조선의 자주 지위를 강조하였다.[95]. 그러나 박정양은 제3단 등을 준수하였으며, 장음환의 보고에 따라 원세개가 조선 측에 항의하여 귀국할 수밖에 없었으며, 데니 또한 청의 압력으로 축출당하고 말았다.[96]

한편 영국과 러시아 외무부는 청의 제1단을 수락하지 않고, 서양에 이러한 예가 없다고 반박하였으며, 고종도 박정양사건 이후 1893년까지, 국체를 온전케 하기 위해, 제1단에 대한 수정을 요청하면서, 아예 삼등공사의 파견까지 제시하며 청을 설득하였으나, 청국은 매번 조선 측의 수정 요구를 거부했다.[97] 이홍장은 조선과의 쟁론 과정에서 "삼단을 논의하여 정한 것은 원래 중국과 조선 양국"이며, "각국이 어찌 간섭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했으며,[98] 같은 날 원세개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 불가리아 공국이 영국에 사신을 보낼 때 주영 오스만 사신이 영국 군주에게 인솔하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외무부로 가서 그 국서를 전달했을 때 접수를 거부한 공례(公例)가 없다고 하였다.[99]

대미사행(對美使行)을 통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나타내려한 고종에 대해 청 정부 역시 한계에 봉착하지만, 1890년 신정왕후 조씨 조문 칙사를 파견을 계기로 사태가 급변한다. 칙사 접례에서 고종이 두 번이나 도성에서 나와 사신들을 영접, 환송하고, 청 황제의 칙서에 목례 후 무릎을 꿇고 배례를 행하며 조의문을 경청했으며, 자신은 서문을, 청사에게는 정문을 내어주고 사신들이 머무는 관저 초입에서 영빈관까지 걸어갔을 뿐만 아니라 기타 접대에 있어서도 사신들을 우대하게 함으로써 열강들을 상대로 청의 종주권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영국총영사 힐리어(Walter Hillier), 프랑스공사 플랑시(Collin de Plancy), 주청미국공사 덴비(Charles Denby) 등 서양 외교관들은 청의 종주권을 명확히 인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서양 각국의 언론에도 거론되었을 정도였으며, 원세개는 이 의례를 통해 그간 고종의 반청자주를 이론적으로 논증하고자 한 데니가 미국으로 돌아가 매우 한탄하며 본국에 조선을 중국에 종속된 것으로 대하기를 권한 것에 크게 만족하였다. 이후 1893년 8월 고종이 청에 대한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여 러시아 공사 드미트리프스키(П.А. Дмитревский)에게 조선의 속국 지위가 다시 한 번 관철되었다.[100]
파일:삼전도비1916조사보고사진.png 파일:external/www.poongsoojiri.co.kr/db56e21e781ca1512c3ff280336ed391195357.jpg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의 자주권이 주어지자, 비각에서 뽑아 쓰러뜨린 대청황제공덕비(1916년 촬영). 독립협회가 청의 사신을 맞이하고 의례를 행하는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바로 옆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세운 독립문.[101]
원세개가 4월 30일 밤에 전보를 보내어 아뢰기를, “좀 전에 조선 정부의 문서를 받고 열어 보니, …… 임오년과 갑신년에 폐국에서 두 차례 내란이 일어났을 때 모두 중국의 병사들이 대신 평정해 주었습니다. 이에 전의 사례에 의거하여 청컨대 번거롭더라도 귀 총리(總理, 원세개)가 신속하게 즉각 북양대신에게 전보를 보내면 참작하여 몇 개의 부대를 보내어 속히 와서 대신 토벌케 하고, 아울러 폐국의 각 병사들로 하여금 군무(軍務)를 따라 익히게 하여 앞으로 수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사나운 교비들이 섬멸되기를 기다려 즉각 철수를 청할 것이며 감히 계속 머물러 지켜 주기를 청하여 천조(天朝)의 병사들이 외지에서 오랫동안 피로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청컨대 귀 총리가 조속히 적절하게 조력할 방안을 강구하여 급박한 형세를 구원하기를 절실하게 기다립니다."
《이홍장전집》 G20-05-001 광서 20년 5월 1일 7~9시.

조선 왕조의 폭거에 반발한 민중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고 농민군이 전주부성을 함락하자, 조정 내에서 본격적인 청군 차병 논의가 시작되었고, 1894년 4월 28일 고종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묵살한 채 차병 의향을 원세개에게 알렸으며, 원세개와 소통하던 차병론자 선혜청 당상 민영준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도 사직을 수호하여 군국을 보존해준 것을 상기하면서[102] 이틀 뒤 그의 윤허를 받아냈다. 마침내 조선은 차병을 요청하는 공문을 조회했다. 이에 따라 청은 아산을 통해 군함을 곧바로 상륙시켰으며, 톈진조약을 통해 이 사실을 일본에도 알렸다.[103] 당시 관군의 승전보에 조선 조정은 청군에 상륙 중단을 요구하고 함대가 아산 해안에 출몰했을 때 상륙을 허가하지 않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 다만 이홍장은 청군의 움직임을 핑계로 일본 군대가 조선에 주둔할 빌미를 자단하고자 최대한 청군의 움직임을 자제시켰으며, 전주화약 이후에는 조선군에게 뒷처리를 맡기고 조선에서 군대를 빼려 했다.[104]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불식하고자 한 일본군은 발빠르게 한반도의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청의 항의에는 일본은 조선이 청의 속방(tributary state)이라고 인정한 적이 없었다고 무시하면서, 한양에 입성하고 경복궁을 점령했다.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군국기무처로 하여금 무역장정을 폐기했으며, 일본은 마침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홍범 14조를 공표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언하기도 했다. 4월경 청은 일본군에게 패전하였고, 이에 따라 양국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청의 종주권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주국으로 선언됐다. 12월 고종은 "이제 우리의 자주, 독립의 큰 위업을 확고히 세우고 온 나라 백성들에 게 널리 알리노라"라고 윤음했으며, '독립협회'가 창립되면서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문 건립 등이 이루어 졌다.[105]

2.5.1. 청의 주장이 무효하다는 관점

물론, 청측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반론성 검증 견해들 또한 학계에는 존재한다.
19세기 중엽 서양 국가와 일본이 조선에 접근해 왔다. 그러나 이들 열강은 청이 조선에 대한 宗主權을 지니고 있음을 의식하여, 먼저 청에 조선의 국제적 지위에 관해 문의하였다.[106] 병인양요, 신미양요, 그리고 강화도조약을 전후한 시기 청에 주재하던 프랑스공사 벨로네(Henri de Bellonet), 미국공사 로우(Frederich Low), 일본공사 모리 아리노리(森有禮)가 모두 그러하였다. 이에 대한 청의 답변은 “조선은 屬邦이나 自主이다.”라는 것이었다. 베이징에 주재하던 러시아공사 또한 “중국은 이웃국가로서 (서양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불쾌감을 인정하면서도 조선 정부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라고 보고한 바 있다.[107] 이는 명백히 상국이 번속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중화질서의 원리에 따른 것이었다.[108]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 (40 pages)
서양 제국주의의 침입이 본격화된 19세기 중엽 이후에도 중국은 상당 기간 조공과 책봉은 의례에 불과할 뿐, 책봉국이라도 조공국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할 권한은 없다는 전통적 관행을 유지하였음. 예컨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중국은 조선 원정을 앞둔 프랑스 및 미국 공사의 질의에 대해 “비록 조선이 중국에 공물을 바치고 있으나 일체 국사는 모두 그 자주(自主)에 따른다. 그러므로 톈진 조약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성명하는 등 조선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자국은 간섭할 권리도, 책임도 없음을 분명히 하였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김종학)

우선 청측은 《만국공법》 같은 서양 국제법에 근거하여 조선이 청의 오랜 속국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아직까지 국내 학계의 통설은 청이 전통적인 중화질서에 따른 자세로 일관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109] 그리고 그 조공-책봉의 전통적 관행이란 조공과 책봉은 의례에 불과할 뿐, 책봉국이라도 조공국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할 권한은 없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중국은 조선 원정을 앞둔 프랑스 및 미국 공사의 질의에 대해 “비록 조선이 중국에 공물을 바치고 있으나 일체 국사는 모두 그 자주(自主)에 따른다. 그러므로 톈진 조약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성명하는 등 조선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자국은 간섭할 권리도, 책임도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110] 이외에 베이징에 주재하던 러시아공사 또한 “중국은 이웃국가로서 (서양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불쾌감을 인정하면서도 조선 정부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라고 보고한 바 있다.[111]

또한 18세기에 편찬된 明史 에서 조선을 ‘외국’으로 분류한 것과는 달리, 1920년대에 초고가 일단락 된 淸史稿 에서는 조선을 ‘속국’으로 분류했다.[112] 이는 조선의 위상이 명・조선 관계에서보다 청・조선 관계에서 더 격하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이는 1920년대 당시에는 중화민국의 지식인들이 이미 서양의 萬國公法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만국공법의 ‘vassal state’를 기존에 이미 널리 쓰이던 屬國이라는 말로 문자적으로 번역해 이해한 결과였을 뿐이었다.[113]

다른 말로, 이전부터 널리 쓰이던 속국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아편전쟁(1839-1842)이후 만국공법이 널리 유통됨에 따라, 또한 1882년 이후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서양 개념의 vassal state로 자의적으로 재해석해 사용한 결과였던 것이다. 오히려, 18세기에 편찬된 '명사'에 조선이 외국으로 분류된 이유는 당시 청에서 조선을 외국으로 보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며, 1920년대에 급조된 청사고에서 조선이 속국으로 분류된 것은 당시 중화민국의 지식인들이 과거의 조선을 그렇게 소급해서 이해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만국공법 이전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쓰이던 속국의 의미가 서양의 근대 개념으로서의 vassal state와 같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 또한 서양의 vassal state의 경우, sovereign state(주권국; 전근대 동아시아라면 책봉국)는 vassal state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개입해 간섭하되, vassal state로부터는 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해갔었다. 그러므로 비록 문자적로는 vassal state를 속국으로 볼 수 있겠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동아시아 문명권의 속국과는 그 의미가 많이 달랐다.[114]

한편, tributary state는 말 그대로 tribute(조공)을 바치는 나라라는 뜻으로, 조공국을 뜻한다. 그런데 ‘조공국’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용어로, 구미 학자들이 속국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헤로도토스(Herodotus)의 역사(The Histories) 에서 차용해 만들어낸 학술용어이다. 어쨌든,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이 조공의 반대급부가 대개의 경우 책봉이었으므로, 조공과 책봉이 제대로 유지되는 한, 책봉국은 조공국의 내정에 굳이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조공국의 국제적 위상은 근대 서양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다. 실제로, 개항(1876) 이전의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을 외국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서양 학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중국의 역사기록에 보이는 속국이나 번국을 각기 독자적 권력체계와 영토주권을 갖춘 외국, 곧 주권국으로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115]

무엇보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제도는 큰나라와 작은나라 간의 국제적 상호승인을 위한 의례적 성격이 강했으며, ‘속국(조공국)’은 책봉국의 정치적 간섭 없이 내정과 외교 등 제반 국사를 자주적으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서양의 ‘피보호국(protectorate)’ 또는 ‘반주권국(semi-sovereign state)’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으며, ‘속국=dependent state’라는 인식 또는 의미의 변질은 19세기 이후 서양 국제법의 전파와 중국의 조선 속국화 정책 추진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116] 실제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속국(屬國)’의 의미는 다양했으나, 일반적으로는 ‘조공국’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만국공법』에 따르면, “만약 그 국사를 자치하여 타국으로부터 명을 받지 않는다면 그 국가는 자주국(independent state)라고 할 수 있다.(凡有邦國 無論何等國法 若能自治其事 而不聽命於他國 則可自主者矣)”라고 규정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르면 전통적 의미의 ‘속국=조공국’은 곧 ‘자주국(independent state)’에 해당하였다.[117]

또한 『만국공법』에서는 조공-책봉 관계에서의 책봉국과 유사한 개념으로서 ‘suzeraineté(suzerainty)’가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명목적이고 상징적인 권위를 인정한 데 지나지 않았다. 특히 suzeraineté와 그 상대 개념인 vassal state의 자격, 권리와 의무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채 국가 간에 위계(hierarchy)가 존재하고 공물(tributes)이 오가는 경우 이를 모두 suzeraineté-vassal state 관계로 포괄하였으므로 그 의미가 매우 모호하였다는 문제점이 있다. 『만국공법』의 suzeraineté는 19세기 오토만제국의 해체과정에서 도출된 개념으로서, 유럽의 역사 용어로 오토만제국과 그 종속국가 간의 관계를 비유, 유추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질서에 곧바로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었고 이로 인해 suzeraineté라는 말 자체는 직접 번역을 하지 못했지만, vassal state는 ‘藩屬’·‘藩邦’ 등으로 옮김으로써 개념상의 혼란을 초래하고, 기존의 조공국을 vassal state로 오인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였다.[118]
속국이라는 용어는 한국인들에게 불편한 기억이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원래 청조가 사용하였던 屬國은 분명 제국주의 국가들이 등장한 이후에 사용된 從屬國(a vassal state)을 의미하는 屬國과는 달랐다. 식민지를 경영하였던 나라들이 사용한 本國·屬國과는 다른 용어였다.
조청관계에 대한 편의적 이해 사례 (동북아역사재단) 2012.03 163 - 196 (34 pages) 이영옥

결국 원래 청조가 사용한 속국의 의미는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이 등장한 이후에 사용된 종속국(a vassal state)과 동일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었다.
《청광서 조중법 교섭사료》

“중국의 이른바 ‘속국’은 바로 외국에서 말하는 ‘보호국’입니다. 이유없이 다른 나라를 침범하거나 화호를 맺은 동맹국을 침범하는 것은모두 만국공법에서 반드시 금하는 것입니다. 살펴보건대 법월화약(프랑스가 베트남을 사실상 보호령으로 삼은 1874년 사이공 조약을가리킴-인용자)에 ‘프랑스는 베트남이 자주권을 가져서 어떤 나라에든지 복종하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혹시 내란 및 외국의침략이 생기면 프랑스가 즉시 원조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베트남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요, 스스로 원조를 할 권한을 인정하여마치 일본이 류큐를 멸망시킨 고지(故智)와 같이 보호를 가탁해서 그 잠식하는 음모를 수월케 하고자 함을 명백히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이 베트남을 다투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속국’의 이름을 다투어야 하고, ‘속국’의 이름을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보호’의 실제를 남겨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清光緒朝中法交涉史料》, 4권,〈​内閣學士周德潤請用兵保護越南摺〉 광서 9년 4월 7일, p. 6., "中國所謂屬國 卽外國所謂保護 無故侵人之國 及侵和好之與國 皆萬國公法所必禁者也 査法越和約云 法國明知越國係操自主之權 非有遵服何國儻有匪梗 幷外國侵擾 法國卽當幫助 是明謂越南非中國之屬國而欲以自許幫助 假託保護 以自便其蠶食之謨 如日本滅琉球故智 然則中國欲爭越南 必先爭屬國之名 欲存屬國 必先存保護之實"

1882년 베트남 문제로 청과 프랑스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청의 내각학사(內閣學事) 주덕윤(周德潤)이라는 인물은 ‘속국’을 지키기 위해선 ‘보호’를 제공해야 함을 상주함은 중국 내에서 ‘속국=조공국’을 ‘속국=dependent state’로 재정의하기 위해선 ‘보호’의 책임이 수반되어야 함을 주장한 최초의 사례로서, 이는 당대 청나라 스스로도 전근대 동북아의 속국과 근대 서양 국제법적 의미의 속국간에 의미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1880년대에 이르러 중국은 ‘속국’의 의미를 전유(appropriation)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조공책봉 질서하의 ‘속국=조공국’을 근대 국제법적 의미에서의 ‘속국=dependent state’으로 일방적으로 재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이러한 규정 자체가 1880년대 중국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일방적 주장으로서 역사적 사실의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119]

이 밖에 당시 조선과 청의 당대 위정자들의 발언들을 통해서도 그 당시 조선의 국제적 위치나 동북아의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속 속방(속국)의 개념이 서양의 속국(vassal state) 개념과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실제로 그 당시에도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대개 속국은 복종하거나 섬겨야 하는 나라의 정령과 제도를 따라야 하고, 국내외의 여러 가지 사무를 자주적으로 처리할 권리가 전혀 없다. 증공국은 강대국의 침략을 면하기 위하여, 자기 나라가 대적하기 어려운 형세인 것을 스스로 헤아려 알고 비록 본심에는 맞지 않더라도 (강대국이 내세운) 조약을 준수하여 공물을 보내고, 그들이 누리는 권리의 한도에 따라 독립 주권을 얻는다. 그러므로 증공국이 다른 여러 독립국과 같은 여러 가지 권리를 행사한다면, 세계 가운데 당당한하나의 독립 주권국이다. 속국은 조약을 체결할 권리가 없지만, 증공국은 다른독립 주권국과 동등하게 수호조약, 항해조약 및 통상조약을 상의하거나 약정한다. 속국은 영사 및 무역사무관 외에 총영사도 파견할 권리가 없지만, 증공국은 그들이 체결한 조약에 따라 조약을 체결한 여러 나라에 각급 사절단을 파견하거나 초빙하고, 교전(交戰)이나 강화를 선언할 권리가 있다. 속국은 이러한 권리가 없다. 증공국은 이웃 나라끼리 군사 행동을 취할 때에 중립을 지킬 권리가 있지만, 속국은 자기 나라가 섬기는 나라에 대하여 이 권리를 행사할 수가 없다. 증공국은 공물을 받는 나라, 즉 수공국과 사절단이나 영사를 서로 파견할 권리가 있지만, 속국은 자기 나라가 섬기는 나라에 대하여 이 권리를 행사할 수가 없다.
《서유견문》(西遊見聞) 유길준
"중국이 속방(屬邦)을 대하는 것은 내정과 외교는 그 자주(自主)로 말미암도록 하는데 서양[泰西]에는 없는 것으로, 오직 늠봉(廩俸)을 세급(歲給)할 뿐이다. ... 프랑스[法國]가 베트남[安南]을 보호(保護)하여 수월에 이르지 않고 이미 그 군(君)을 바꾸었다. 베트남이 앞서 더불어 프랑스의 우롱을 당했는데 지금은 곧 후회가 막심하다. 조선이 우리들의 보호에 귀속되면 도리어 남쪽에 위치하여 배반을 일컫는 날이 있겠는가? 이미 조선이 없을텐데 또 누가 쉽게 업신여기리요!"
(中國之待屬邦內政外交由其自主泰西無之惟歲給廩俸而已 內政外交不得自主征收財賦歸諸上國名曰國君甚於守府法國保護安南未及數月已易其君安南昔亦被法愚弄今則噬臍莫及 朝鮮而歸俄人保護尙有南面稱孤之日哉旣無朝鮮又誰能侮, 《袁世凱全集》 1, pp. 51-52)

실제로 유길준은 1889년에 완성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당시의 조선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증공국(贈貢國)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면서도 조선이 (속국이 아닌) 자주독립국이라고 주장하였으며[120] 이 밖에 당시 청의 대조선 정책 실행자 중 한 명인 원세개는 1885년 적간론(摘姦論)에서 위와 같이 주장하여 당대 청측내에서도 기존 동북아의 조공-책봉 관계속 속방(속국) 개념이 서양에는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실제로 존재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이를 종합하면 서양의 vassal state 개념과 동북아의 속국 개념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현대 학계에서 최근에 제기된 주장이 아닌 조청관계가 현재진행형이던 시절 당대 조선과 청측 인사들도 주장하였던 의견이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한편 전통적 ‘속국’의 의미를 ‘dependent state’로 전유(專有)하려는 청의 시도에 대해 당시 고종의 외교고문이었던 데니(Owen N. Denny)는 1888년 발표한 팸플릿 『청한론(China and Korea)』에서 다음과 같이 국제법적 견지에서 ‘속국=독립국’임을 논증하였다.[121]
① 외국의 간섭이나 지시 없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적 문제를 언제나 스스로 처리해온 나라는 법률적으로 독립국이며, 반드시 주권국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

② 그러나 주권 독립국의 가장 분명한 증거는, 다른 독립 주권국과 교섭하고, 수호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고, 공사를 파견하고, 전쟁과 평화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것들은 주권과 양립 가능하며 일관된 권리들로서, 어떤 국가가 이를 보유했을 때는 그것을 독립국들의 대(大)가족에 포함시켜야 한다.

③ 그에 반해 이러한 권한을 갖지 못한 나라는 그 협약(agreement)의 명시적 표현(expressed terms)에 따라 반독립국(semi-independent) 또는 종속국(dependent)의 반열에 놓여야 한다.[122]

이에 따르면, 아래와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① 전통적 조공책봉 관계에서 한반도의 국가들은 중국의 왕조에 대해 조공과 책봉의 의례를 준행했지만, 실제 내정과 외교에 있어선 자주적 권리를 누렸으며,

② 조선은 이미 1876년에 일본, 그리고 1882년에 미국·영국·독일 등과 대등한 독립국의 자격으로 조약을 체결하였고,

③ 조청 간 조공책봉 관계를 규정한 조약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병자호란 직후 체결한 정축약조(丁丑約條, 1637)인데, 여기에는 조선의 자주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없었다는 점에서 조선은 국제법적으로 독립주권국에 해당하였음.

또한 미얀마 문제로 영국이 매년 청에 공물을 납부하고, 과거 유럽 연안국가들이 바르바리 국가들(Barbary States)에 공물을 바친 사실이 그 유럽 국가들의 주권을 조금도 손상할 수 없음을 거론하면서, 특정 국가의 주권은 오직 명시적 조약의 형태로 규정될 때만 법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청한론』은 조선의 국제적 지위에 관해 영어로 논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1888년 8월 22일 미국 오리건 주 상원의원 존 미첼(John H. Mitchell)은 미 상원에서 이에 기초하여 조선 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하는 등 미국의 대한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123]
『만국공법』에는 조공-책봉 관계에서의 책봉국과 유사한 개념으로서 ‘suzeraineté(suzerainty)’가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명목적이고 상징적인 권위를 인정한 데 지나지 않았음. 특히 suzeraineté와 그 상대 개념인 vassal state의 자격, 권리와 의무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채 국가 간에 위계(hierarchy)가 존재하고 공물(tributes)이 오가는 경우 이를 모두 suzeraineté-vassal state 관계로 포괄하였으므로 그 의미가 매우 모호하였음.

『만국공법』의 suzeraineté는 19세기 오토만제국의 해체과정에서 도출된 개념으로서, 유럽의 역사 용어로 오토만제국과 그 종속국가 간의 관계를 비유, 유추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질서에 곧바로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었음. 이로 인해 suzeraineté라는 말 자체는 직접 번역을 하지 못했지만, vassal state는 ‘藩屬’·‘藩邦’ 등으로 옮김으로써 개념상의 혼란을 초래하고, 기존의 조공국을 vassal state로 오인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였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김종학)

한편으로는 『만국공법』에서 제시하는 vassal state의 해당 개념의 규정 그 자체가 매우 모호하다는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만국공법에서 vassal state와 suzerainty의 자격, 권리와 의무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채 서술되어 있는 탓에 발생하는 문제로서 해당 만국공법 원문에서 조차 개념 설명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모호했던 탓에 청측이 vassal state를 ‘藩屬’·‘藩邦’ 등으로 번역한 이후 개념상의 혼란이 초래되었고, 이후 기존의 조공국을 vassal state로 오인할 수 있는 여지 또한 생겨나게 되었다.[124]
1880년대에 이르러 중국은 ‘속국’의 의미를 전유(appropriation)하기 시작하였음. 즉, 조공책봉 질서하의 ‘속국=조공국’을 근대 국제법적 의미에서의 ‘속국=dependent state’로 일방적으로 재해석함.

서양 제국주의의 침입이 본격화된 19세기 중엽 이후에도 중국은 상당 기간 조공과 책봉은 의례에 불과할 뿐, 책봉국이라도 조공국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할 권한은 없다는 전통적 관행을 유지하였음. 예컨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중국은 조선 원정을 앞둔 프랑스 및 미국 공사의 질의에 대해 “비록 조선이 중국에 공물을 바치고 있으나 일체 국사는 모두 그 자주(自主)에 따른다. 그러므로 톈진 조약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성명하는 등 조선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자국은 간섭할 권리도, 책임도 없음을 분명히 하였음.

이러한 중국의 대(對)조선 정책은 1880년대부터 급변하였음. 즉, 신장(新疆)의 이리(伊犁) 지역에서 발생한 러시아와의 분쟁, 일본의 류큐(오키나와) 병합, 그리고 1860년대 이후 프랑스·영국의 인도차이나 침략 등으로 인해 전통적 중화질서의 판도가 점차 잠식당하자, 이제 청은 최후의 ‘속국=조공국’인 조선에서의 특수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그 의미를 근대 국제법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함. 그 핵심은 중국이 조선에 보호를 제공하는 대신 그것을 종속국(dependent state) 또는 반주권국(semi-sovereign state)으로 규정하는 데 있었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김종학)

심지어 청측은 정치적인 의도에 따라서 기존 조공책봉 질서하의 ‘속국=조공국’을 근대 국제법적 의미에서의 ‘속국=dependent state’로 일방적으로 재해석하였고 조선에서의 특수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그 의미를 근대 국제법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등 ‘속국’의 의미를 전유(appropriation)하기 까지하였다.[125]

또한 책봉 문제 같은 여러 내정간섭성 사례들의 존재 여부를 주권국이냐 비주권국이냐를 가르는 국제적 지위의 기준으로 삼는다거나 전근대 조공-책봉 관계를 단순히 종속적으로만 바라보는 연구 관점들은 학계내에 다양한 반박 견해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문제의 소지가 있다.
먼저 '내정간섭'의 정의 문제가 있다. 간섭과 불간섭의 경계를 어디에 그을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것이 애매하다. 흔히 내정간섭의 핵심으로는 군사적 사안 외에도, 왕위의 계승, 정책의 입안, 대외 교역, 고위급 인사, 외교 문서의 문투와 내용 등을 꼭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한중관계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왕위계승과 관련된 책봉의 의미 해석이다. (중략..)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이루어진 책봉과 조공에 대해서는 중원국가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실질적 우열을 규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전통적인 견해가 있는가 하면, 국가들 간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알력과 균형을 조절하는 외교적 수단일 뿐이라는 수정주의적 견해도 있다. 이런 문제가 비단 왕위계승에 국한되지는 않지만, 상반되는 견해 가운데 한 쪽을 완벽히 부정하거나 지지할 수 없다면 책봉이 갖는 의미는 모호하게 남을 수밖에 없다.
-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
예를 들어, 많은 서양의 정치학자들이 중국과 조공국의 관계를 서구의 관점에서 단순한 종주국과 종속국의 관계로 표현하면서 조공-책봉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국력의 우열이 아닌 문화와 경제적 맥락으로 연결되고 공통의 군사위협에 대항하는 연합이나 동맹관계로 설명할 수도 있다.

왜란 이후, 조선은 이제까지 누려왔던 중화체제 안의 특수한 지위(형식상 번국이나 실질적으로는 동맹국이었던)를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최용, <비대칭세력연합 이론을 통한 동아시아 외교사의 재해석: 신라-당, 고려-몽골(원), 조선-명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군사학논집 (2020)
그런데 주변국 조선의 입장에서 사대정책과 중화관념은 중국과는 다르게 인식되고 활용되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사대정책과 중화관념이 동시적으로 형성된 것도 아니었다. 한반도가 약소국임을 자각한 가운데 발생한 사대는 현실적으로 강대국 중국으로부터 공격과 위협을 회피하고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주체적인 전략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당대 조공관계의 성립은 중국대륙의 군사적 압력에 의해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인접국과의 역학관계에서 각기 자국의 입장을 유리하게 유도하기 위해서 자주적으로 취해진 실리적인 외교수단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결코 자기보존을 위한 자율성이 상실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연한 외교수단으로서 때에 따라서는 조공 내지 책봉 관계가 다원적으로 편성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조공 내지 책봉관계가 양국간의 힘의 관계를 완화시키는 구체적인 절차를 수반하는 것이라면, 사대는 그와 같은 힘의 관계에서 양국간에 통용된 외교적인 수사였던 것이다.
정용화, <사대중화질서 관념의 해체과정: 박규수를 중심으로>, 한국국제정치학회 (2004)
조선초기에는 유독 활발한 대외정벌(對外征伐)활동이 이루어졌다. 대외 정벌의 주류를 점했던 여진(女眞)정벌은 명목상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명과의 이해관계와 충돌이 불가피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조선이 건국과 함께 내세웠던 사대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조선은 사대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치로 인식했다기보다는 정국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정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활용했다. 조선은 두 원칙이 충돌할 때 당연히 국정목표의 달성을 우선시했다. 사대명분을 따르는 것이 국가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할 경우 이를 굳이 따르지 않았다. 이는 사대가 국가의 보전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부속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동시에 아직 조선에서의 사대가 곧 국익을 의미하지 않았음도 보여준다.
이규철, <조선 태종대 대명의식과 여진 정벌>, 만주연구 (2014)
세조의 집권기까지 조선은 정벌에 관한 문제에서 항상 정치적 현실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세조 같은 집권자는 조선의 외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황제의 지시 등을 사실상 거부하는 행위에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이규철, (조선 성종대 명(明)의 출병 요청과 대명의식 변화, 《한국사연구》)
그러므로 조선전기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심화된 중화 인식은 특정 국가로서의 명 대한 무조건적인 종속을 초래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듯이, 명의 정치·제도·학술·인심을 비판하는 당대 조선인의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물론 이러한 기록이 중화 문명의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나 자주독립의 선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조헌이 선조 7년(1574)년의 북경 사행(使行)에서 중화 문명에 대한 뜨거운 동경을 표출함과 동시에 중화의 이상과 괴리된 명의 현실에 분노를 표출한 바에서 알 수 있듯이, 이와 같은 현상은 명이라는 특정 국가를 조선인이 체득한 중화 문명의 기준에 의해 비판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조선은 예제를 비롯한 명의 문물 제도를 자발적으로 이식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명에서 유행하고 명나라 사람들이 추천하는 것이라 해도 양명학처럼 자신들이 설정한 중화 문명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완강히 거부하였다.

조선과 명의 사대·자소 또는 조공·책봉 관계는 분명 예제상 상하위계적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명의 요구나 지시가 아무런 제한 없이 관철되는 것은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그 원리상으로도 성립하기 어려웠다. 양국의 관계는 세력뿐만이 아니라 의리와 명분이 함께 상호작용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제후국의 분의(分義) 못지않게 천자국의 분의도 양국의 관계를 규범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규정하였으며, 독자의 강역과 인구를 다스리는 외번 제후의 통치권은 침해받지 않는 것이라 당대인들은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만, 재조지은의 형성기인 임진왜란 당시 발생한 조·명 양국의 수많은 외교 현안과 갈등, 천자가 책봉한 조선의 국왕을 다름 아닌 철저한 중화 이념의 소지자로 알려진 이른바 ‘정통성리학자’들이 반정을 통하여 축출한 사실 또한 모순 없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중화 문명의 상징으로서의 명이 보편이라면 특정 국가로서의 명은 특수가 된다고 할 수 있으며, 보편의 틀 안에서 특수를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였다.
허태구, 禮의 窓으로 다시 바라본 병자호란

위와 같은 학계의 여러 의견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전근대 조공-책봉 관계는 단순히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종속을 초래하지도 않았으며 이는 임진왜란 당시 발생한 조·명 양국의 수많은 외교 현안과 갈등, 천자가 책봉한 조선의 국왕을 다름 아닌 철저한 중화 이념의 소지자로 알려진 이른바 ‘정통성리학자’들이 반정을 통하여 축출한 사실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조선과 명의 사대·자소 또는 조공·책봉 관계는 분명 예제상 상하위계적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명의 요구나 지시가 아무런 제한 없이 관철되는 것은 현실에서 뿐만 아니라 그 원리상으로도 성립하기 어려웠다.[126] 애초에 조-명 양국간에 책봉과 관련된 문제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책봉이 갖는 의미 그 자체가 모호하다는 점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127] 그 외 황제의 명령도 조선의 국익에 위배되면 거부하거나 사대명분을 따르는 것이 조선의 국가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할 경우 이를 굳이 따르지 않았다는 점[128] 그리고 당대의 조공 관계의 성립은 자주적으로 취해진 실리적인 외교수단이었다는 점[129]과 중국과 조공국의 관계를 서구의 관점에서 단순한 종주국과 종속국의 관계로만 표현 할 수 없다는 점[130] 등은 전근대 조공-책봉 관계를 단순히 종속적으로만 바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현대 국제사회에서도 수시로 일어나는 내정간섭을 기준으로 삼아 어떤 나라가 주권국인지 주권국이 아닌지 판단하고자 했던 기존의 연구 태도는 지나치게 평면적인 양단논리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131] 서양 학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중국의 역사기록에 보이는 속국이나 번국을 각기 독자적 권력체계와 영토주권을 갖춘 외국, 곧 주권국으로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 (계승범)
조선이 독립국인 이유는 명과 청의 내정 간섭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정치적, 영토적 주권을 언제나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위상을 국제무대에서도 항상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내정간섭 여부를 주권국가 내지 독립국가의 최고 기준으로 들이민다면, 냉전 시기 대한민국은 과연 온전한 의미의 '자주독립국'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 또 지금은 어떠할가? 요컨데, 서양의 기준으로 보더라고 중원국가의 역사 기록에 보이는 속국이나 외국 개념을 독자적 권력체계와 영토를 갖춘 독립국으로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

이와 같이 현대 국제사회에서도 수시로 일어나는 내정간섭성의 사례들만을 기준으로 특정 국가의 국제적 지위를 주권국이냐 비주권국이냐고 따지는 것은 계승범의 주장처럼 평면적인 양단논리의 산물임을 알 수 있으며[132] 만약 기계적으로 내정간섭 여부만을 주권국가 내지 독립국가의 최고 기준으로 들이민다면, 냉전 시기 대한민국과 지금의 대한민국 또한 '자주독립국'이라고 확실하게 장담하기는 힘들 것이다.[133]
한편, tributary state는 말 그대로 tribute(조공)을 바치는 나라라는 뜻으로, 조공국을 뜻한다. 그런데 ‘조공국’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용어로, 구미 학자들이 속국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헤로도토스(Herodotus)의 역사(The Histories) 에서 차용해 만들어낸 학술용어이다. 어쨌든,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이 조공의 반대급부가 대개의 경우 책봉이었으므로, 조공과 책봉이 제대로 유지되는 한, 책봉국은 조공국의 내정에 굳이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명과 청에서도 이런 나라들은 모두 외국으로 분류했다. 전략적 차원에서 중원의 울타리가 되는 번국, 곧 변경 지대에 위치한 외국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조공국의 국제적 위상은 근대 서양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다.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 (계승범)
suzeraineté(suzeraint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종주권(宗主權)’으로 번역되지만, 이 번역어의 유래는 분명치 않음. ‘종주권’은 전근대적 관념과 근대 국제법적 논리가 착종된 것으로, 1880년대 중국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조선 속국화 정책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음. 본래 종주(宗主)는 조상의 신주나 그 제사를 지내는 일족의 적장자를 뜻하는 말로, 근대 이전에 ‘종주국(宗主國)’ 또는 ‘종주권’처럼 국제정치적 용어로 사용한 사례는 찾기 어려움. ‘종주국’이라는 개념은 국제관계를 가족 관계의 유비로 파악한 것으로, 마치 가족 내에서 부형이 다른 가족을 챙기듯이 국제관계에서도 큰 나라가 작은 나라들을 지도하고, 책임지고, 배려해야 한다는 함의가 내포되어 있음. 19세기 서양 국제법의 suzeraineté 개념에는 이와 같은 대가족주의의 함의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근대 동아시아의 역사적, 국제정치적 산물이었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김종학)
이러한 근대적인 종주권 개념은 만국공법이나 공법회통 등의 서양 국제법 서적의 번역을 통해 동아시아에 유입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종주국에는 ‘上國’, 종속국에는 ‘屬國’, ‘屛藩’, ‘藩屬’, ‘屬邦’ 등 다양한 번역어가 사용되었다. (岡本隆司 編, 앞의 책, 2014, 2-3장 참고) 이러한 ‘번역의 중층성’은 중화질서와 조약질서의 혼동을 일으켜 양자의 혼재와 변용을 초래하였다. (정동연, 앞의 글, 2018a, 4장 참고)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 (40 pages)

또한 청측 스스로도 속국과 속방의 개념을 만국공법 같은 서양 근대 국제법상의 여러 개념들로 필요 할 때 마다 계속 의미를 바꾸면서 사용하였다는 사실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청측이 주장한 근대적인 종주권 개념은 만국공법이나 공법회통 등의 서양 국제법 서적의 번역을 통해 동아시아에 유입된 결과물이었는데, 이러한 과정속에서 다양한 번역어가 사용됨에 따라 발생한 ‘번역의 중층성’은 중화질서와 조약질서의 혼동을 일으켜 양자의 혼재와 변용을 초래하였다.[134]

실제로 청측은 1882년 당시 청의 내각학사(內閣學事)였던 주덕윤(周德潤)의 상주문에서는 "중국의 이른바 ‘속국’은 바로 외국(서양)에서 말하는 ‘보호국(protected state)’이다" 라고 주장하였다가[135] 불과 3년 뒤인 1885년에는 당시 청의 대조선 정책 실행자 중 한 명인 원세개가 적간론(摘姦論)에서 직접 "중국이 속방(屬邦)을 대하는 것은 내정과 외교는 그 자주(自主)로 말미암도록 하는데 서양[泰西]에는 없는 것이다" 라고 아예 다른 주장을 하였다.[136] 이 밖에 청측은 동북아의 속국 개념이 만국공법 같은 서양 근대 국제법상의 vassal state에 속한다라고 주장하는 등 청측 스스로도 속국에 해당되는 서양의 개념들이 자주 바뀌고 서로 불일치되는 모습들을 계속 보여주었다.

이 외에도 유사한 사례들로는 종주권과 조공국이 있다. 종주권과 조공국 또한 서양의 만국공법 같은 근대 국제법 개념들이 청측에 소개된 이후에야 탄생한 근대의 번역 단어들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사용된 사례가 거의 전무하였다. 가령 suzeraineté(suzeraint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종주권(宗主權)’으로 번역되지만, 종주권(宗主權)이라는 개념에는 당대 서양 근대 국제법에는 없는 대가족주의의 함의가 포함되어 있는 등 실제 어원상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이 번역어의 유래 조차도 분명치 않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종주권’은 전근대적 관념과 근대 국제법적 논리가 '착종'된 것으로서, 1880년대 중국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조선 속국화 정책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지만 본래 종주(宗主)는 조상의 신주나 그 제사를 지내는 일족의 적장자를 뜻하는 말로서, 근대 이전에 ‘종주국(宗主國)’ 또는 ‘종주권’처럼 국제정치적 용어로 사용한 사례는 찾기가 어렵다.[137]

또한 조공국(tributary state)이라는 단어 또한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무대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용어로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이 조공의 반대급부가 대개의 경우 책봉이었으므로, 조공과 책봉이 제대로 유지되는 한, 책봉국은 조공국의 내정에 굳이 간섭할 필요가 없었으며 명과 청에서도 이런 나라들은 모두 외국으로 분류했다는 점 등을 감안하고 볼 때 동아시아 조공국의 국제적 위상은 근대 서양의 관점으로 보면 분명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존재하였다.[138] 결국 근대 번역어들인 종주권(suzerainty)과 조공국(tributary state)이라는 해당 개념과 용어들이 서양 국제법의 소개 이전에는 전근대 동북아에서 사용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선행 연구에서는 청이 전통적인 중화질서에 따른 ‘屬邦自主’로 일관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신기석, 韓末外交史硏究, 일조각, 1967, 44-58쪽 ; 권석봉, 淸末對朝鮮政 策史硏究, 일조각, 1986, 80쪽 ; 권혁수, 근대 한중관계사의 재조명, 혜안, 2007 참고) 최근에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 청이 서양 국제법에 근거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연구가 제출되었다. (유바다, 「1876년 朝日修好條規의 체결과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 한국근현대사연구78, 2016 참고) 그러나 이 시기 청이 서양 국제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는지, 청의 종주권이 유효한 상황인데도 굳이 서양 국제법에 의존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 (40 pages)

이러한 이유들로 그 동안의 선행 연구에서는 청이 전통적인 중화질서에 따른 ‘屬邦自主’로 일관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139] 물론 이에대한 반론으로 청이 서양 국제법에 근거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연구[140] 또한 일부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 시기 청이 서양 국제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는지, 청의 종주권이 유효한 상황인데도 왜 굳이 서양 국제법에 의존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반론성 의견 또한 학계에는 존재하는 상황이다.[141]

또한 청 말기 청의 대조선 정책을 전통적인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종주관계로 바라보는 주장은 중국내에서도 최근 각광받는 주장이지만 이러한 '종주권' 또는 '종번체제'론에 기반한 주장들은 중국내에서도 반론들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가령 『청사』 ‘방교지’를 맡은 학자들은 ‘종번’을 비역사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이를 반대했지만,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종번’의 언설이 상당히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막상 ‘종번’이 중국과 주변국 관계를 설명하는 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이다.[142][143] 사오쉰정(邵循正)은 1933년 제출한 淸華大學 석사학위 논문인 「중법월남관계시말(中法越南關係始末)」에서 중불전쟁을 논의하면서 청과 베트남의 관계를 종번관계로 규정했다.[144] 장팅푸(蔣廷黻)는 1934년에 출간한 『근대중국외교사자료집요(近代中國外交史資料輯要)』에서 청일전쟁의 한 원인(遠因)을 중국의 전통적 종번 관념과 근대 국제법의 종번 관념 간 충돌로 봤다.[145] 이와 같은 서술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국이 서양 국제법을 번역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종주권’ 관념의 변용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종번’이 문제가된 것은 서로 다른 국제질서의 충돌에 기인한다. 요컨대 ‘종번’은 역사적 용어라기보다는 1930년대 현실의식이 상당히 투영된 개념이었던 것이다.[146]

특히나 ‘종번’을 중심으로 중국의 대외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147] 천즈강(陳志剛) 등은 종번은 서주 시대 세 차례 있었던 큰 규모의 分封과 관련이 있으며, 농후한 혈연 정치의 색채를 띠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선진 시대 이후 대외정책의 기원이 되었으나, 이후 ‘종번’과 그 이전의 ‘종번’의 의의는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한다. 서주 시대 종번 관념으로 대외관계의 성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즉, 청대 종번관계의 기원을 서주 시대의 농후한 혈연정치로부터 찾는 것은 무리이며 가부장제의 시스템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148]

천상성(陳尙勝)은 ‘宗’은 종주국(宗主國)의 약칭이고, ‘藩’은 번속국(藩屬國)의 약칭으로 중국 봉건왕조에서 진공국(조공국)을 ‘번방(藩邦)’, ‘번속(藩屬)’, ‘번국(屬國)’ 등으로 부른 적이 있지만, 이들 국가가 중국을 종주국으로 부른 적은 없었다고 지적하며, 종주국은 서방국가가 식민지와 번속을 지칭하는 명칭이기에 종번관계로 전근대 중국의 대외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즉, 종번관계라는 용어에는 서양 식민주의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149]

리다롱(李大龍)은 종번은 서한 시대부터 쓰인 용어이지만 사서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송대 이후며 그 의미 역시 달라졌다고 지적한다. 송대부터 청대까지 종번은 황실 구성원이나 번왕을 지칭하는 용어였을 뿐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서 사용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150]

가령 왕위안충 같은 중국 학자는 중국과 조공국의 관계를 종번관계로 설명하며, 청에 진공(進貢)을 하고 책봉을 받는 주변국을 모두 ‘외번(外藩)’으로 부른다. 하지만 청대 ‘외번’은 그 대상이 번부(藩部), 속국(屬國), 조공국(朝貢國) 등을 포괄하며 다양한 맥락으로 사용되었다. 그 대상에는 몽고, 신강 그리고 조공국인 조선, 안남, 유구, 심지어 청 중심의 질서 밖에 있는 러시아, 영국, 네덜란드 등을 모두 포함하기도 했다.[151]
중국 내에서도 오해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중국의 극렬 애국주의 네티즌은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한다. 속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 주장에 대한 답은 달라진다. 전근대 사료에 등장하는 속국은 전통적 책봉 조공 관계에서 책봉하는 상국의 정치적 간섭 없이 내정과 외교를 자주적으로 처리하는 국가이다. 따라서 속국은 조공국과 의미 차이가 없다. 그러나 현재 중국과 한국에서 대중은 속국을 실질적으로 종주국의 지배를 받는 국가(dependent state)로 이해한다. 중국의 극렬 애국주의 네티즌이 말하는 속국도 마찬가지이며 이는 전근대 중국의 대외관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 ‘종번(宗藩)’ 해석과 중국 대외관계 인식, 동북아역사 리포트, 2022년 2월 1일 제9호, 동북아역사재단, 손성욱

중국에서 처음 종번체제를 말한 장팅푸(蔣廷黻)는 1933년 영문으로 발표한 「중일 외교관계, 1870-1894」에서 조청 관계를 종번관계(The relations between suzerain and vassal)로 규정하고, 이는 매우 특별한 관계로 조선이 외침을 받거나 내부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청은 군사를 파견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152] 이러한 이유로 19세기 후반 청이 조선에 간섭한 것은 전통적인 ‘중국의 종주권(Chinese suzerainty)’을 강화한 것이며, ‘서양의 종주권(occidental suzerainty)’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을 포함하여 중국의 전통적 관념 속에 서구의 종주권에 비견할만한 권한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153]

또한 전근대 중국 문헌에는 종주권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기에 이를 종번관계로 번역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있다. 『만국공법(萬國公法)』, 『공법회람(公法便覽)』, 『공법회통(公法會通)』 등 한역(漢譯) 국제법 서적은 ‘vassal’을 번방(藩邦), 번속(藩屬), 병번(屛藩)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장팅푸는 전통 중국의 종주권은 서구의 종주권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전근대 중국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종주권' 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에 기초해 '종번관계'라는 용어를 구사한다. 그는 중문논저에서 사료상 용어로 전근대 중국이 조공국에 갖는 모종의 권한을 표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독의 여지가 있는 번역된 개념을 활용한 것이다. 즉, 종번관계는 역사성을 지닌 용어가 아니며 서양의 suzerain과 vassal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차별화한 것에 불과하다.[154]

2.5.2. 청의 주장이 유효하다는 관점

  • 속국(vassal state)의 주권은 아예 결여되어야 할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으며, 당시 국제법 체계에서 조공국(Tributary States)과 속국(Vassal State)은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였다. 이 같은 논리는 조공국(Tributary State)와 주권이 몰수된 속국(Vassal State)을 상정한 유길준과 데니의 무리한 입론을 후대 연구자들이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의 일부 연구들은 조선이 국제법 질서에 편입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만국공법》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를 하지 않음으로써, 19세기 후반 조선의 지위에 대하여 '식민지'를 전망할 수밖에 없었다.[155] 《만국공법》은 "조공 그리고 속국들. 조공국과, 봉건적 질서를 맺는 서로 다른 나라들은 그들의 주권이 해당 질서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주권국가로 인식된다."[156]고, 《공법회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속국(vasallenstate)이 주권 국가로 격상하여 종주권이 점점 유명무실화 되고 무력해지거나, 종주국이 다시 무너져가는 주권을 취하여 속국을 병합한다."[157]고 하는 등 속국에게 주권의 여지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58]
    • 학계 일각에서는 청 제국의 지향을 조선의 피보호국화로 보고 있으나, 이홍장 등은 조선에 대한 군현화, 조선통상대신 즉, 감국(監國) 파견 제기에 그런 것은 현실적인 이유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의 라디젠스키와의 협약 과정에서도 "조선국왕의 자주지권(自主之權)"을 거론하였다. 1885년 파견된 원세개도 어디까지나 장정을 통한 상무위원 파견에 불과한 것으로, 주차관(Resident)이라 하더라도 인도 번왕국의 영국 주차관에 비할만큼의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고종의 폐위 등을 건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실제적 상태에 대해서는 조선이 국제법[公法]에 의거한 상국(上國)의 속국이나 반주지국으로 해석했다. 그는 조선이 자주국(自主國)이되 중국의 관할 내지는 통할을 받는 데 지나지 않음과,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에 귀속된 것 같이 조선을 대할 생각이 없음을 피력하였다. 이홍장도 고종에게 영국령 인도[印度]와 이집트[埃及殷] 그리고 베트남과 같은 서양의 '보호지방', 즉 보호국과 달리, 조선은 만국공법의 도에 따라 "교섭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모두 통서(統署)가 이행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만국공법을 따른다면 조공국(tributary state)과 속국(vassal state)도 "그들의 주권이 해당 질서의 영향을 받는" 경우 종속국(dependent state)이나 반주권국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159]
      • 종주관계, 보호관계, 식민제국과 식민지, 연방정부와 지방정부 등의 위계적이고 종속적인 관계에 있는 국제, 국내 질서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는 현실과, 중국인들이 국제법을 한역하는 초기에 번역어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혼재는, 청 지식인들이 서구의 사례들을 자의적으로 조선에 적용하자고 주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봉신국(vassal state)와 같은 종속국(dependent state)이 속국(屬國)이나 속방(屬邦)으로, 식민지(colony)는 속부(屬部)나 속토(屬土)로 번역되었지만, 이러한 혼재 때문에 혼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상국(上國) 또한 종주국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나 보호 모국 등을 가르키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청의 일부 관료와 지식인들은 속국 문제에 대해 청의 속국과 서방의 문제에 대해 종속국과 보호국, 보호령, 식민지 등을 비교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홍장과 청 조정 등이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들의 의견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지 않은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160] 독점적인 군사적 '보호'의 주장이 제기되고 갑신정변 이후 한성에 원세개 휘하의 청군이 주둔하면서 그것이 현실화되었지만,[161] 원세개(袁世凱)는 1886년에 집필한 「조선대국론(朝鮮大局論)」에서 조선을 부용국(附庸國)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공법편람》에 따르면, "부용(A state which is under the protection of another or by protected)"은 "주권적 국가일 수 있지만, 절대적인 주권국은 아니다.(may be sovereign in some respects, but states. not absolutely sovereign)"라고 하였다. 또한 《만국공법》 역시 '보호(Protection)'를 반주국의 주요 성질로 거론하고 있다.[162] 1881년 프랑스의 튀니지 보호국화 이전에 존재했던 중세 보호국들은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자주 내지 독립성을 누렸다. 《만국공법》 단계까지의 보호국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식민지로 바로 직결하는 보호국은 아니었다.[163]
  • 조선이 북경의 지근거리에 위치한 이상, 북경 중심의 패권에서 조선이 택할 수 있는 플랜은 전무하였고, 자주성은 그에 비례하여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164] 전통적인 종속관계 역시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관계라는 점에서 실질적인 측면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국왕이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지 않고, 조공과 정삭을 행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고,[165] 실제로 중국은 이성계, 중종, 광해군, 인조의 국왕 책봉 및 광해군의 5차례 세자 책봉, 경종의 세자 책봉을 기각, 선조고종의 폐위 논의 등 책봉권을 두고 내정 간섭을 일으켰으며, 그 외에도 조공 품목과 수량 문제(15세기), 징병 문제(15세기, 17세기), 임진왜란 중의 군권 행사 및 갖가지 간섭(16세기), 감군어사와 모문룡 문제(17세기), 인사문제 관여 및 두 차례의 심옥(17세기), 국왕 대한 벌은(罰銀) 처벌(17세기), 범월 관련 빈번한 칙령(17~19세기) 등 통시적으로 간섭을 행해왔다.[166] 결국 사대조공을 매개로한 종속관계의 본질은 한반도 왕조에 의해 천명된 것이 아니라, 중국 황제로 부터 조건부 형태로 부여받은 것이었다.[167]
    • 만국공법 유포 이전인 19세기 중반까지 속국은 곧 외국이었다. 즉, 속국과 자주를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현대인들의 인식과 달리, 19세기 중반까지는 속국이 곧 자주국이고, 그 속국이 내정을 '자주(自主)'한다는 언설은 현대어로 대응하자면 '자치(自治)'에 가까웠다. 그래야만 조선인들은 근대 번역어 '독립국'을 자주국으로 이해한 반면, 일본이 강화도 조약에서 조선을 만국공법상의 '자주국(sovereign state)'으로 선언하여 청의 간섭을 방지하고자 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168] 더나아가서 국제법적 종주-속국 관계와 조공책봉관계 모두 군신관계를 매개로 한다는 점, 근대의 서구적 속국이라고 하더라도 주권을 보유하고 있던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김옥균처럼 청 황제의 책봉을 받고 정기적으로 조공을 행하는 조선국왕의 지위를 재조정, 즉 조공책봉관계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 아닌 이상, 조선국왕과 그 국체는 청의 봉신(vassal)으로 묶여 있는 반주권국(semi-sovereign State), 속국(dependent state)의 범주를 벗어나 그와 대비되는 자주-독립(Sovereign, Independent States) 상태로는 볼 수는 없었다. 이를 토대로 볼 때 외교권을 일정부분 보장하는 반주권국의 개념을 조선에 적용하여, 미국 등과의 외교를 권고하면서도, 속방임을 관철시키고자 한 청 정책자들의 행보는 꼭 모순적이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169]
  • 본질적으로는 정치적 관계인 조선과 청의 조공책봉관계는 공법(法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던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청은 《대청회통(大清會典)》과 《대청통례(大清通禮)》의 편찬을 통해 조선을 법제, 예제적으로 청 질서 하에 두었으며, 조선도 전후기에 각종 의주 등을 통해 중국과의 법제, 예제적 관계를 명시하였다. 이들은 모두 국내 공법적인 성격을 띄지만, 동시에 세자의 국왕 즉위가 칙봉(勅封)을 통해 비로소 인정된다는 예제나 빈례(賓禮) 등을 통해 실제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권리(International right)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즉, 중화적 질서는 국제법 질서와 교집합에 있는 것이다.[170] 더군다나 휘튼의 만국공법에서는 오스만 제국종주권러시아 제국의 보호의 공존을 상정하고 있다. 봉건 시대의 유산인 종주관계는 새로운 근대 법제로 출현하는 보호국과 차이가 있던 것이다. 서구 열강의 중국 주변의 제후국들에 대한 침략과 진출 과정에서, 종주국과 보호국의 권력은 복잡한 일련의 갈등과 타협을 보여주었다.[171] 즉슨 서구의 국제법 체계의 종주-속국(suzerain-vassal) 관계도, 특정한 공통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이에 따라 제3국의 승인이 아닌 당사국들의 합의에 따라 제3국은 그들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정치적 관계였다. 서구 국제법상으로도, 전통적인 '관습'이나 '조약'에 의해서든 두 국가 사이에 종주-속국 관계가 성립될 때, 그 영향은 어떤 제3국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172]
  • 소위 "속국자주"라는 레토릭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른바 속국자주론은 문호 개방을 거부하는 조선 측의 입장에 대해 서양과의 통상 및 외교를 담당한 청 총리아문의, "조선은 비록 속국이지만 정삭(正朔)을 받들고 때마다 조공을 해왔을 뿐", "일체의 정교금령(政敎禁令)은 그 국왕이 자주(自主)한다"는 주장으로, 서양인들의 조선 여행 요구를 저지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종주국에 대한 서양의 요구를 제어하기 위해 난징조약 때와는 달리 톈진조약이 적용되는 범위에 조선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벨로네 측이 조선은 납공하긴 하지만 그 국사에 있어서는 자주할 수 있다고 해석했고, 이에 따라 청은 조선이 속국(vassal state) 또는 납공국(tributary state)에 해당하지만 자주(sovereign) 독립국(independent state)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국제법의 프레임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즉, 어디까지나 총리아문이 속국을 지키기 위한다는 본질이, 서양에게 실질적인 종주권을 부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버린 셈이다.[173]
    • 임오군란 전후 이홍장 등은 조선을 국제법 체계의 속방/소방(小邦, dependent state) 및 반주지국(半主之國, semi-sovereign State)으로 대우하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이 레토릭을 버리지는 않았다. 명분적으로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래 조선을 두고 자주(自主)라고 하였다. 즉, 명은 자주이되 실은 반주(半主)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조선을 번봉(藩封)과 속방(屬邦, dependent state)으로 조약에 명문화하였다. 실제로 반주(半主)도 주권이 있는 만큼 명은 자주라고 하는 청의 논리는 아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임오군란 과정에서 난을 진압라고 대원군을 압송한 마건충도 양자의 책봉관계를 통해 명분을 얻어낸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조선국왕은 내정과 외교를 자주할 수 있지만, 그의 주권은 황제의 책봉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며, 오스만 제국 종주권 하의 이집트를 제시했다. 한편 조중장정 의정과 더불어 조선이 속방조회를 통해 자국이 내정과 외교를 자주하되, 속방(dependent state)임을 시인한 이상 미국, 영국 등도 조선이 청에 조공을 바친다는 것을 종주권의 주요한 증거로 보고 판단을 유보하거나, 중국의 조공국의 명단(List of Tributary States of China)에 속한다고 간주하였다.[174]
  • 청 측 인사들이 조선과의 전통적 조공관계를 구미열강과의 근대적 조약관계와 차별화하는 발언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과정에서 청 측의 주복과 마건충은 어윤중의 입장을 의도적으로 위축시키기 위해, 통상장정을 만국공법에 바탕한 근대적 조약과 차별화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의 해명은 조약과 약장 및 장정과 조규를 혼동하는 논리적 비약 뿐만 아니라 국제법적 근거가 결여된 궤변에 불과했다.[175] 원세개와 김윤식도 "중국이 속방을 대하는 것과 서양은 다르다"거나 “서양은 내정과 외교를 자주할 수 없다"라는 논리를 전개했지만, 사실 청이 조선을 반주(半主).속국(屬國)으로 삼으려 한 점을 통해 볼 때 애초에 진실되지 않으며, 서양의 속방이라고 해서 주권이 무조건 몰수당하지는 않은 점을 볼 때 해당 언설은 국제법적으로도 타당치 않다.[176] 원세개는 조선이 사절 파견을 통해 자주를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청과 상의하고 요청하는 것이 조선이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 내(分內)'의 일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조선이 이를 행하지 않은 것은 서양인의 자주 관념에 경도되었다고 비난했지만, 사실 본인 역시 사절 파견 자체를 저지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꾼 것은 어디까지나 영국, 독일 총영사들이 속국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는 저지해야 한다고 조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요구하는 본분 조차도 사실 조선의 전권사절 파견이라는 유례없던 국면에 접어들면서 종주국이 종속국의 외교를 통제하는 국제법적 체계의 한 유형을 혼합한 것이었다.[177]

2.6. 청일전쟁 이후

파일:한청통상조약.jpg
한청통상조약
대한국(大韓國)과 대청국(大淸國)은 우호를 돈독히 하고 피차 인민을 돌보려고 절실히 원한다. 이러므로 대한국 대황제의 특파 전권 대신 종2품 의정부찬정 외부대신(全權大臣從二品議政府贊政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과 대청국 대황제의 특파 전권 대신 2품함 태복시 경(全權大臣二品銜太僕寺卿) 서수붕(徐壽朋)은 각각 받들고 온 전권 위임의 증빙 문건을 상호 교열(較閱)하니 모두 타당하므로 통상 약관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끝내고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청과의 조약체결에 따른 국교 회복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으로 청과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어 있었는데, 고종은 자주 독립 의식을 분명히 하기 위해 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대등한 조약 체결을 하고자 했다. 조선은 저자세로 청 상인 보호를 위해 파견되어 있던 탕사오이를 집요하게 설득하여 조약을 체결하고 했으나, 청은 국교를 회복할 경우 통상장정을 체결하여 통상관계를 수립하되, 수호조약 체결, 사절 파견, 국서 교환 등은 하지 않음으로써 속국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탕사오이는 러시아 제국과 일본에 의지하는 조선의 처지를 지적하고, 조선의 자주를 인정하는 청일 간의 강화조약의 한 절이, 조선과 청이 대등한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일본과 러시아 정부의 손을 빌어 탕사오이를 압박하자, 청은 탕사오이의 주선 하에, 한국 측에서 북경으로 사신을 파견하기 전에 의약전권대신(議約全權大臣) 서수붕(徐壽朋)을 조선주재 흠차대신으로 삼아 한양에 파견했다. 그는 “대청국 대황제는 대한국 대황제에게.....”로 시작되는 국서를 전달했으며, 마침내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되어 대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178]

한청통상조약 교섭 과정에서 대한제국 여론이 두만강 대안의 간도의 영유권을 확보하고 한국민들을 보호하여 자주권을 표출하자는 방향으로 쏠리자, 대한제국 정부는 1885~87년 공동감계를 거치며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두만’과 ‘토문’은 동의어라는 근거를 확인함에 따라 철회하고 지방민의 허언으로 간주한 토문강 국계설을 다시 꺼내들어, 백두산정계비를 조사하는 등 간도 분쟁을 재개했으며, 러시아의 동삼성 점령을 틈타 1902~4년 동안 이범윤과 서상무(徐相懋)를 각각 북간도와 서간도(강북)에 시찰, 관리라는 명분으로 파견했으며, 그들은 무력 분쟁을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교수동삼성조약(交收東三省條約)을 무시하고 동삼성의 군사력을 증강하는 러시아가 동삼성을 아예 병탄할 것을 우려하여 청 측과 협상을 추진하기도 했다.[179] 또한 1900년 압록강 하구의 대황초평의 갈대 예취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180] 러일전쟁 이후 한국과 일본이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러시아의 대항마로써 일본을 우호적으로 보고 있던 청은 한국의 보호국화에 따른 망국을 차분하게 받아들였으나, 1907년 일본이 간도 한국민의 보호를 명목으로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설치하여, 1904년 6월 지방관원들이 체결한 선후장정으로 잠시나마 매듭지었던[181] 북간도 분쟁을 재개하면서 한국의 보호국화는 일본의 동북 침략의 매개로 이용되는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됐다.[182]

3. 관련 문서



[1] 윤은숙(2006), "蒙․元 帝國期 옷치긴家의 東北滿洲 支配 -中央政府와의 關係 推移를 중심으로-",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2] 조용철(2017), "조선 초기 여진 관계의 변화와 동북면 지역 진출 과정 - 世宗 14년(1432) 영북진 설치 이전 시기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233.[3] 한성주(2011), "조선전기 女眞에 대한 授職政策 연구",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4] 한성주(2011), "조선전기 女眞에 대한 授職政策 연구",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01~202.[5] 한성주(2018), "조선과 여진의 貂皮 교역 성행과 그 영향", 《만주연구》 25.[6] 박정민(2014), "연산군~명종대 여진인 來朝의 재검토", 《역사학보》 222.[7] 한성주(2018), "조선과 여진의 貂皮 교역 성행과 그 영향", 《만주연구》 25.[8] 이재경(2018), "명종~선조대 압록강 방면 여진족 집단들과 조선", 《한국문화》 82.[9] 장정수(2022), "선조대 말 건퇴 전투의 발발 배경・경과와 대(對)여진 관계상의 변화", 《韓國史硏究》 196, p. 107~127.[10] 장정수(2022), "선조대 말 건퇴 전투의 발발 배경・경과와 대(對)여진 관계상의 변화", 《韓國史硏究》 196, p. 125~129.[11] 조선은 우라(ula)을 대개 '후룬(hūlun)'으로 지칭하였다.[12] 장정수(2022), "선조대 말 건퇴 전투의 발발 배경・경과와 대(對)여진 관계상의 변화", 《韓國史硏究》 196, p. 127~135.[13] 장정수(2020), "17세기 초 朝鮮의 이원적 對女眞 교섭과 ‘藩胡規例’", 《明淸史硏究》 54.[14] 장정수(2020), "17세기 초 朝鮮의 이원적 對女眞 교섭과 ‘藩胡規例’",《明淸史硏究》 54, p. 26~44.[15] 1626년까지 사용한 누르하치의 인보로, 당시 신여도(申汝櫂) 및 몽학 통사(蒙學通事)는 이를 후금천명황제(後金天命皇帝)로 풀이했다. # 광해군은 처음에 누르하치를 건주위부하 마법(建州衛部下馬法), 건주위 마법 족하(建州衛馬法足下)로 지칭하고자 했으나, 번복하여 후금 황제로 칭하고자 했다. 그러나 《구만주당(舊滿洲檔)》 5월 28일 기사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전달된 답신에는 건주위 마파 족하(giyanjo u mafai bethei fejile)로 지칭되었다.[16] 계승범(2005), "조선감호론 문제를 통해 본 광해군대 외교 노선 논쟁", 《조선시대사학보》 34; (2007),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 《역사학보》 193.[17] 계승범(2007),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 《역사학보》 193, p. 15; (2009),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p. 175~211; (2019), "삼전도항복과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 문제" , 《조선시대사학보》 91.[18] 계승범(2019), "삼전도항복과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 문제" , 《조선시대사학보》 91.[19] 아민은 이미 누르하치의 비호 아래 1621년 12월 15일, 의주를 거쳐 모문룡이 거처한 임반을 습격하여 한인 500여 명을 도륙내고, 용천을 약탈하였다. 이때 용천에는 일시적으로 일부 후금군이 주둔하기도 했다.[20]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p. 68; 송미령(2008), "天聰年間(1627-1636年)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중국사연구》 54;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p. 107.[21]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p. 80~81, 137~138[22] ᡩᠣᡵᠣᠯᠣᠨ ᡳ ᠵᡠᡵᡤᠠᠨ ᡳ ᠰᠠᡥᠠᠯᡳᠶᠠᠨ ᠪᡝᡳᠯᡝᡳ ᠸᡝᠰᡳᠮᠪᡠᡥᡝᠩᡤᡝ᠈ ... ᠰᠣᠯᡤᠣ ᠪᡝ ᠣᠨᠴᠣᡩᠣᡶᡳ᠈ ᠴᠠᡥᠠᡵ ᠪᡝ ᡨᡠᠸᠠᡴᡳᠶᠠᡶᡳ᠈ ᠨᡳᡴᠠᠨ ᠪ ᡝ ᡩᠠᡳᠯᠠᡴᡳ ᠰᡝᠮᠪᡳ᠈[23]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p. 135.[24]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p. 39; 蔡弘秉(2019), "丁卯盟約(1627) 以後 朝鮮의 對後金 關係 추이와 파탄",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57; #[25] 만문으로는 "지금 확실히 결단하며 악화됐다. 변방의 대신들, 지략있고 현명한 자들을 모이도록 하라. 용감하고 굳센 이들에게 장려하라.(te umesi lashalame ehe oho. jase-i ambasa be bodohonggo mergese be isabu. baturu manggasa be huwekiyebu serengge ai turgun.)"라고 번역했다.[26]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p. 80~81, 144~146.[27] 정해은(2021), "정조대 어제전운시의 유입과 병자호란 기억의 재구성", 《역사와 현실》 122.[28]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p. 80~81, 151; 구범진(2020), "병자호란 전야 외교 접촉의 실상과 청의 기만 작전, 그리고 청태종실록의 기록 조작", 《東洋史學硏究》 150.[29] 아바타이에 관하여 부연하자면, 일단 아바타이는 실제로는 누르하치의 7남으로 홍타이지의 바로 위 '형'인 것이 첫째 거짓 정보이고, 둘째로는 이 인물은 홍타이지 살아있을 때 죽지 않고 순치 3년까지 생존했다. 참고로 훗날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급사 후 재가하게 되는(그러나 마찬가지로 요절하는) 둘째 남편이 이 사람의 아들.[30] ᠴᠣᠣᡥᡳᠶᠠᠨ ᡤᡠᡵᡠᠨ ᡳ ᠸᠠᠩ ᠠᠮᠪᠠᠨ ᠯᡳ ᡯᡠᠩ ᠣᠯᡥᠣᠮᡝ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ᡳ ᡤᠣᠰᡳᠨ ᠣᠨᠴᠣ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ᡡᠸᠠᠩᡩᡳ ᡳ ᡨᠠᠩᡴᠠᠨ ᡳ ᡶᡝᠵᡳᠯᡝ ᠪᡳᡨᡥᡝ ᠸᡝᠰᡳᠮᠪᡠᡥᡝ᠈ ... ᡨᡝ ᠠᠮᠪᠠᠨ ᠣᡶᡳ᠈ ᠪᡳᠶᠣᠣ ᠪᡳᡨᡥᡝ ᠵᠠᡶᠠᠮᡝ᠈ ᡨᡠᠯᡝᡵᡤᡳ ᡤᡠᡵᡠᠨ ᠣᡶᡳ ᠵᠠᠯᠠᠨ ᠵᠠᠯᠠᠨ ᡳ ᠠᠮᠪᠠ ᡤᡠᡵᡠᠨ ᠪᡝ ᠸᡝᡳᠯᡝᡴᡳ ᠰᡝᡵᡝᠩᡤᡝ᠈[31] 구범진(2020), "병자호란 전야 외교 접촉의 실상과 청의 기만 작전, 그리고 청태종실록의 기록 조작", 《東洋史學硏究》 150, p. 26.[32]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33] 한명기(2003), "병자호란 패전의 정치적 파장 -청의 조선 압박과 인조의 대응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119.[34] 이재경(2017), "병자호란 이후 朝明 비밀접촉의 전개", 《軍史》 103.[35] 한명기, 신병주 외, 《왕과 아들 : 조선시대 왕위 계승사》.[36] 김문기(2012),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 p. 338~342.[37] 김문기(2012),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 p. 342~346; 홍선이(2014), "歲幣 方物을 통해 본 朝淸관계의 특징 -인조대 歲幣 方物의 구성과 재정 부담을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55.[38] 전해종(1970),《한중관계사 연구》, p. 98~99.[39] 조선은 국왕명의의 주문이 거짓으로 판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연에 주문에 기재된 범주에서 각자의 책임을 인정하는 내부적 결론을 내리고 청사의 심문을 받아야했다.[40] 김경록(2015), "17세기 朝 ․ 淸관계와 ‘倭情’의 군사 ․ 외교적 활용", 《軍史》 94.[41] 손성욱(2018), "淸 朝貢國 使臣 儀禮의 形成과 變化", 《東洋史學硏究》 143, p. 278~283.[42] 이경석(2012), "조선 후기 ‘주자주의(朱子主義)’의 동향과 이용후생(利用厚生) 개념의 부상", 《개념과 소통》 10, p. 5~6.[43] 洪性鳩(2017), "청질서의 성립과 조청관계의 안정화: 1644∼1700", 《東洋史學硏究》 140, p. 9~10; 박지배(2018), "17세기 중반 러시아의 동북아진출과 ‘나선정벌’의 의미", 《역사학보》 240, p. 30~31; 송인주(2018), "淸朝의 順治~康熙年間 黑龍江 유역 통합과정과 ‘吉林將軍體制’의 성립― 샤르후다-바하이 부자의 활동을 중심으로 ―", 《명청사연구》 50.[44] 洪性鳩(2017), "청질서의 성립과 조청관계의 안정화: 1644∼1700", 《東洋史學硏究》 140, p. 9~10.[45] 우경섭(2018), "幄對說話와 효종의 비밀 편지", 《한국학연구》 50, p. 230~233.[46] 洪性鳩(2017), "청질서의 성립과 조청관계의 안정화: 1644∼1700", 《東洋史學硏究》 140; 민덕기(2020), "16~17세기 표류 중국인에 대한 조선의 인식과 대응 : ‘人情’과 ‘大義’ 및 ‘事大’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해항도시문화교섭학》 23.[47] 이재경(2019), "大淸帝國體制 내 조선국왕의 법적 위상 ―국왕에 대한 議處⋅罰銀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83.[48] 국내적인 징계에 해당하는 벌은이 청대에 들어 명대와 달리, 조선에 부과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을 독립된 번국으로 인정하면서도 직접 통치의 영역으로 일부 인식하였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김경록(2008), "조선의 對淸關係 認識과 外交體系 ― 조선후기 외교문서의 정리를 중심으로 ―", 《이화사학연구》 37, p. 157.) 다만 번부에 속하는 외번 몽골 왕공들과 달리 조선 내정에서 최종적 권한을 지닌 조선국왕의 법적 위상은 정동행성승상⋅부마⋅고려국왕이라는 복합적 위상을 가지고, 내정에서도 몽골 황제권에 의해 그 권한이 상대화됐던 몽골복속기 고려국왕의 법적 위상과도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이재경(2019), "大淸帝國體制 내 조선국왕의 법적 위상 ―국왕에 대한 議處⋅罰銀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83, p. 439.)[49] 이명제(2021), "17세기 청ㆍ조선 관계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65~273.[50] 이명제(2021), "17세기 청ㆍ조선 관계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74~281.[51] 손성욱(2020),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 조선인들의 북경 체험》, p. 154~162.[52] 이명제(2021), "17세기 청ㆍ조선 관계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90~291.[53] 김문기(2012),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 p. 351~361.[54] 그러나 상당한 세폐 감면과 별개로, 1716년에 세폐의 호대지와 방물의 백면지 품질을 지적받는 등, 여전히 질 좋은 종이나 세폐상목에 있어서도 결포를 대동법 전환 후 질 문제로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동법 시행 이후, 호조에서 주관하고 마련하였던 세폐를 선혜청과 나누어 분담하기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혜청이 제대로 비용을 전달하지 않아 도리어 호조의 부담이 가중되는 문제들도 발생했다. 세폐를 두고 벌어진 호조와 선혜청의 갈등은 1732년에 정식(定式)을 규정하면서 비로소 진정되었다.[55] 이영옥, 조청관계에 대한 편의적 이해 사례(2012)[56] 다만 영조대 이후 숙종대 백두산 정계에 대한 비판과 아쉬움의 성토가 끊이지 않았다.[183][57] 李康源(2015), "임진정계시 ‘입지암류(入地暗流)’의 위치와 ‘토문강원(土門江源)’의 송화강 유입 여부", 《대한지리학회지》 50, 6, p. 600; (2017), "임진정계시 두만강 상류 수계 인식과 경계표지물의 종점", 《대한지리학회지》 52, 6, p. 752~753.[58] 李康源(2017), "임진정계시 두만강 상류 수계 인식과 경계표지물의 종점", 《대한지리학회지》 52, 6, p. 753.[59] 金宣旼(2011), "雍正-乾隆年間 莽牛哨 事件과淸 淸-朝鮮 國境地帶", 《中國史硏究》 71.[60] 청은 내부적으로 군왕 이상에 대해서는 3품 이상의 문무관원을, 버이러 이하에는 5품 이하의 하급 관원을 배치했다.[61] 책봉없는 조공국(tributary state)를 나열하면, 조선, 류큐, 베트남, 싸얌, 버마, 란쌍에 국한될 뿐이며, 류큐의 경우는 서일본과 양속관계를, 싸얌, 란쌍, 버마의 경우에는 칙사의 파견없이 조공 사절에게 칙(敕), 인(印)을 수여하여 귀국케 하는 방식(領封)의 경우에 불과했다. 버마와 란쌍에 대한 책봉은 건륭제의 이벤트성 책봉이었을 뿐만 아니라, 란쌍국왕의 경우 책봉 당시 더이상 군주가 아니라 떠돌이 상태였다. 싸얌국왕의 경우에도 강희연간의 책봉은 아유타야 왕조, 건륭연간의 책봉은 톤부리 왕조에 대한 책봉으로 개별적 사례이다. 이런 사실은 조공책봉이라는 패러다임을 '동아시아'의 보편적 현상으로 일반화 할 수 없게 만든다. [184][62] 구범진(2008), "淸의 朝鮮使行 人選과 ‘大淸帝國體制", 《인문논총》 59; 허태구(2020), "정조대 대청 외교와 대명의리의 공존, 그 맥락과 의미", 《지역과 역사》 47, 148~150, 159.[63] 허태구(2020), "정조대 대청 외교와 대명의리의 공존, 그 맥락과 의미", 《지역과 역사》 47.[64] 조성산(2009),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對淸認識의 변화와 새로운 中華 관념의 형성", 《韓國史硏究》 145.[65] 김선민(2019), "1812년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으로 본 조청(朝淸)관계", 《중국학보》 90.[66] 이동욱(2020), "1840-1860년대 청조의 ‘속국’ 문제에 대한 대응", 《中國近現代史硏究》 86.[67]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박사논문, p. 81~90; 이동욱(2020), "1840-1860년대 청조의 ‘속국’ 문제에 대한 대응", 《中國近現代史硏究》 86.[68] 베이징에 주재하던 러시아공사 또한 “중국은 이웃국가로서 (서양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불쾌감을 인정하면서도 조선 정부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라고 보고한 바 있다. 「북경주재 러시아 공사가 재상에게 발신한 지급공보 사본」(1871.07.14.), 근대 동아시아 외교문서 해제1, 203쪽.[69]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박사논문, p. 81~90; 이동욱(2020), "1840-1860년대 청조의 ‘속국’ 문제에 대한 대응", 《中國近現代史硏究》 86, p.13~23.[70]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박사논문, p. 377; 이동욱(2020), "청일전쟁의 기원: 청말의 종주권 관념과 속국정책의 변화",《청일전쟁과 근대 동아시아의 세력전이》, p. 43; "신미양요와 청의 조선 정책", 《中國近現代史硏究》 91.[71]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박사논문, p. 122~133; 이동욱(2020), "1840-1860년대 청조의 ‘속국’ 문제에 대한 대응", 《中國近現代史硏究》 86, p.22.[72] 이러한 일련의 청측의 태도들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들에서는 청이 전통적인 중화질서에 따른 ‘속방자주(屬邦自主)’로 일관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신기석, 韓末外交史硏究, 일조각, 1967, 44-58쪽 ; 권석봉, 淸末對朝鮮政 策史硏究, 일조각, 1986, 80쪽 ; 권혁수, 근대 한중관계사의 재조명, 혜안, 2007 참고) 최근에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 청이 서양 국제법에 근거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연구가 제출된 상황이다. (유바다, 「1876년 朝日修好條規의 체결과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 한국근현대사연구78, 2016 참고) 그러나 이 시기 청이 서양 국제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는지, 청의 종주권이 유효한 상황인데도 굳이 서양 국제법에 의존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라는 지적도 있다.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73]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박사논문, p. 122~133.[74] 이유원은 일본의 인천 개항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등 외교보다는 자급자족을 지향하였다고 한다. 김태웅, 「李裕元의 經世論과 國際情勢 認識」, 진단학보 128, 2017, p.147.[75]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 (40 pages)[76] 여기서 하여장이 조선을 전통적인 속국, 즉 번속이라고 하면서도, 이를 서양 국제법에 따른 속국과 동일시하여 청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전통외교와 근대외교의 관념이 착종된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 (40 pages))[77] 번부(藩部)란 청나라 행정구역 중 몽골·신장·칭하이·티베트 등 번속지역에 대한 총칭이다. #[78] 앞서 언급한 하여장의 건의중 상책인 군현화 즉 조선의 편입은 집권층들에게 청나라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심어주었고 특히 개화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조선의 국왕인 고종마저 개화쪽에 관심을 두기시작하면서 서양과의 수교방향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잡는다.[79]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 (40 pages)[80]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박사논문, p. 136~138; 李動旭(2018), "“數邦相合”的天朝: 西方聯邦觀念的引進對晩淸藩屬觀念的影響",《四川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3; 정동연(2020),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84.[81] 《만국공법》에서는 "진공지국(進貢之國, Tributary state)과 번방(藩邦, vassal State), 진공국과 서로 봉건적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은, 그들의 주권이 이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주권국가로 간주된다.(Tributary and vassal States. Tributary States, and States having a feudal relation to each other, are still considered as sovereign, so far as their sovereignty is not affected by this relation.)"라고 하여 봉건적 관계를 맺어도 그것이 허상에 불과하다면 주권을 가진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에서는 보호국(Protectorate)과 봉신국(Vassel State)이 명확히 분리되고, 보호국화가 능보호국이 피보호국을 식민지로 병합(annexation)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대부분의 봉건적 종주권이 20세기 초에 이르면 사실상 사라지는 추세였다.[185][82] 이동욱(2019), "청말 종주권 관념의 변화와 조선 정책의 전환", 《史叢》 96.[83] I do not deny the right of a semi-dependant state to make independent treaties, on the contrary if (as the article referred to asserts) the Kingdom of Corea is a dependent state in possession of sovereign powers as to its foreign and domestic relations; then I respectfully submit, that the United States has the right to treat with it irrespective of the suzerainty of China. It is eminently proper that the King of Corea should take the advice and be governed by the counsel of his suzerain the Emperor of China, and the United States has no cause whatever of complaint, but the privilege remains unimpaired for the two countries to negotiate upon terms of perfect equality and without any reference to, or acknowledgement of any other power that contained in themselves. #[84] 전문 14조로 된 해당 조약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즉각 이에 개입, 거중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보장한다. 미국은 조선을 독립국의 한 개체로 인정하고 공사급 외교관을 상호 교환한다. 치외법권은 잠정적이다. 관세자주권을 존중한다. 조미 양국 국민은 상대국에서의 상업활동 및 토지의 구입, 임차(賃借)의 자유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영토권을 인정한다. 조미 양국간에 문화학술의 교류를 최대한 보장한다.” 등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약은 다른 조약에 비해 무엇보다 불평등이 배제된 주권 독립국가간의 최초의 쌍무적 협약이었다는 점과 당대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의 일원으로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85]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p. 138~149; 정동연(2020),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86.[86] 유바다(2019),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p. 380.[87] 유바다(2017), "1885년 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袁世凱의 조선 파견과 지위 문제", 《史叢》 92.[88] 정경민(2015), "조선의 초대 주미조선공사 파견과 친청노선 강화", 《역사와 현실》 96, p. 260.[89] 이동욱(2021), "조선의 歐美全權公使 派遣에 대한 청 정부의 대응(1887~1890)", 《學林》 47, p. 311.[90]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p. 277.[91] 이동욱(2021), "조선의 에 대한 청 정부의 대응 歐美全權公使 派遣 (1887~1890)", 《學林》 47, p. 312~318.[92]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p. 277~281.[93] 첫째, 조선공사가 처음으로 각국에 도착하면 마땅히 먼저 청국공사관으로 나아가 具報하고 청국공사와 함께 外部로 나아가되 그 뒤에는 拘定하지 않는다. 둘째, 朝會公宴 및 酬酌交際 등이 있을 때 조선공사는 마땅히 청국공사보다 낮은 자리에 앉는다. 셋째, 交涉事大에 관계되는 緊要한 일은 조선공사가 마땅히 먼저 청국공사에게 협상한 후 그 지시에 따라야 한다(≪淸季中日韓關係史料≫4, 2379∼2382쪽). #[94] 이동욱(2021), "조선에 대한 청 정부의 대응 歐美全權公使 派遣 (1887~1890)", 《學林》 47, p. 317~324.[95] 그는 《청한론(China and Korea)》에서 정축약조가 중국의 일부인 만주 왕자에 의해 체결된 조공관계에 관한 조약으로, 무의미하고, 1644년 입관 이후에 종속 조약을 맺지 않았으므로 양자간의 종속 관계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조선은 외교권을 가지고 있지만, 봉신국(vassal state)은 그 권한이 없다고 하였다. (O. N. Denny, 1888)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청한종속론(A Reply to Mr. 0. N. Denny's pamphlet entitled: "China and Korea"》에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할 때 조선의 상태에 적합한 조선어는 '속국'이고, '조공(tributary)' 그 자체가 봉신국(vassal state)이 행해야 하는 책무로, 중국에서는 종속국을 중국어로 '진공국(進貢國)'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한 종속이란 주권의 절대적인 부정을 의미하지 않고, 봉신국의 주권 행사는 그 지위가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며, 단지 종주국과의 관계에서만 반주권을 가진 것이라 반박했다. 그는 데니가 봉신국과 조공국을 차별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권위있는 제대로 된 근거를 인용하지 않았다고 크게 비판하였다. (Moellendroff, 1930) 묄렌도르프의 주장대로 휘튼(Henry Wheaton)의 《만국공법》에서는 조공국(Tributary state)와 봉신국(Vassal state)를 병렬하고, 같은 범주로 취급하고 있다. (Henry Wheaton, 1855, pp. 1~55.) 블룬츨리의 《공법회통》에서는 조공국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지만, 봉신국(Vasallenstaten)을 반주(Halbsouveräne) 상태로 설명하고, 《만국공법》에서 조공국(Tributary state)으로 들었던 나폴리가 이집트, 세르비아와 같이 봉신국(Vasallenstaten)으로 분류되어 (J. C. Bluntschli, 1869) 따라서 양자간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고 봐야 한다. (유바다(2013), "兪吉濬의 贈貢國 獨立論에 대한 비판적 검토", 《韓國史學報》 53.)[96] 정경민(2015), "조선의 초대 주미조선공사 파견과 친청노선 강화", 《역사와 현실》 96; 이동욱(2021), "조선의 에 대한 청 정부의 대응 歐美全權公使 派遣 (1887~1890)", 《學林》 47.[97] 이동욱(2021), "조선의 에 대한 청 정부의 대응 歐美全權公使 派遣 (1887~1890)", 《學林》 47, p. 324~325, 328~329.[98] 이동욱(2021), "조선에 대한 청 정부의 대응 歐美全權公使 派遣 (1887~1890)", 《學林》 47, p. 331.[99] 《舊韓國外交文書》 8, "查士耳其屬國布加,遣使往英, 向由駐英土使帶引見英主, 是尚不止 同赴外部, 傳其國書副本, 未聞英廷有不接其國書之公例 ..."[100] 유바다(2019),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p. 290~306; 정동연(2020),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p. 131; 이동욱(2021), "조선의 에 대한 청 정부의 대응 歐美全權公使 派遣 (1887~1890)", 《學林》 47, p. 333.[101] 앞에 남아있는 것이 영은문의 주초이다.[102] 이는 민씨 척족의 허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청군이 왕조와 사직의 보존에 있어서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청관계를 형식적, 명목상 상하관계로 표현하고자 할 때는 의도상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기 어려우나, 상술했듯이 청은 당시 유일하게 남은 속국인 조선에 대해서는 종주권을 명확히하면서도 사직과 왕조의 보존를 표방하며 지원을 지속했으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철군의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식민지화 의도 따위는 없었다. 동학군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전봉준도 청군과 간접적인 제휴를 맺었었는데, 그 이유로 차라리 조공을 바치는 데 그치는 청과 간접적으로 연계하는 게 독립을 명분으로 병탄의 야욕을 드러내는 일본보다 더욱 안전하다고 판단했음을 고백했다.[103]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2012), 《한국군사사 9 근·현대 1》, p. 253~254.[104]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2017),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 p. 34~35.[105] 劉바다(2017), "1894년 淸日戰爭의 발발과 조선의 屬國 지위 청산, 《大東文化硏究》 98.[106] 근대 이전 동아시아에는 조공과 책봉이라는 외교 행위를 통해 중국과 주변국이 각각 上國과 屬國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주변국에 대해 포괄적인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를 전통적 의미의 종주권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서양에서 종주권(suzerainty)은 19세기 오스만제국이 약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이 시기 오스만제국은 서구 열강에 의해 막대한 영토를 빼앗겼는데, 이처럼 실질적인 주권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관념적인 종주권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근대적인 종주권 개념은 만국공법이나 공법회통 등의 서양 국제법 서적의 번역을 통해 동아시아에 유입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종주국에는 ‘上國’, 종속국에는 ‘屬國’, ‘屛藩’, ‘藩屬’, ‘屬邦’ 등 다양한 번역어가 사용되었다. (岡本隆司 編, 앞의 책, 2014, 2-3장 참고) 이러한 ‘번역의 중층성’은 중화질서와 조약질서의 혼동을 일으켜 양자의 혼재와 변용을 초래하였다. (정동연, 앞의 글, 2018a, 4장 참고) 청과 조선의 관계에서는 전통적 종주권이 주로 쟁점이 되었으므로, 본고에서는 ‘종주권’이라는 용어가 지닌 문제점을 의식하면서도 이를 중화질서의 맥락에 따른 전통적 종주권의 의미로 사용하도록 한다.[107] 「북경주재 러시아 공사가 재상에게 발신한 지급공보 사본」(1871.07.14.), 근대 동아시아 외교문서 해제1, 203쪽.[108] 선행 연구에서는 청이 전통적인 중화질서에 따른 ‘屬邦自主’로 일관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신기석, 韓末外交史硏究, 일조각, 1967, 44-58쪽 ; 권석봉, 淸末對朝鮮政 策史硏究, 일조각, 1986, 80쪽 ; 권혁수, 근대 한중관계사의 재조명, 혜안, 2007 참고) 최근에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 청이 서양 국제법에 근거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연구가 제출되었다. (유바다, 「1876년 朝日修好條規의 체결과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 한국근현대사연구78, 2016 참고) 그러나 이 시기 청이 서양 국제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는지, 청의 종주권이 유효한 상황인데도 굳이 서양 국제법에 의존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109]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 (40 pages)[110]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김종학)[111] 「북경주재 러시아 공사가 재상에게 발신한 지급공보 사본」(1871.07.14.), 근대 동아시아 외교문서 해제1, 203쪽.[112] 최소자, 淸과 朝鮮: 근대 동아시아의 상호 인식 (서울: 혜안, 2005), 180-183.[113] 개항 이후 청의 내정 간섭 시기에 속국의 개념과 관련해 외교적으로 문제가 된 조공과 책봉의 성격에 대한 연구사 정리로는 구선희, “근대 한중관계사의 연구경향과 쟁점 분석,”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9) 참조.[114]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계승범)[115]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계승범)[116] 무엇보다 이러한 인식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속국=조공국’과 근대 국제법적 의미의 ‘속국=dependent state’를 혼동한 것이라는 점에서 전통적 조공책봉 관계를 국제법적 의미의 ‘종주국-종속국’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고 볼 수 있다.[117]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118]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119]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120] 전종익, 근대주권개념의 수용과 전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6, 203면.[121]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122] “A nation which has always managed its internal as well as external concerns in its own way, free fromthe interference of dictation of any foreign power, is juridically independent, and must be ranked in thecategory of sovereign states. The unerring test, however, of a sovereign and independent state, is its rightto negotiate, to conclude treaties of friendship, navigation and commerce, to exchange public minis-ters, and to declare war and peace with other sovereign and independent powers. These are rights andconditions compatible and consistent with sovereignty which, when possessed by a state, place it in thegreat family of independent nations; while states which do not possess such powers, must be ranked assemi-independent or dependent according to the expressed terms of the agreement.”[123]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124]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김종학)[125]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김종학)[126] 허태구, 禮의 窓으로 다시 바라본 병자호란[127]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128] 이규철, <조선 태종대 대명의식과 여진 정벌>, 만주연구 (2014); 이규철, (조선 성종대 명(明)의 출병 요청과 대명의식 변화, 《한국사연구》)[129] 정용화, <사대중화질서 관념의 해체과정: 박규수를 중심으로>, 한국국제정치학회 (2004)[130] 최용, <비대칭세력연합 이론을 통한 동아시아 외교사의 재해석: 신라-당, 고려-몽골(원), 조선-명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군사학논집 (2020)[131] 계승범, “조선시대 동아시아 질서와 한중관계: 쟁점별 분석과 이해,”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9), 135-139.[132]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 (계승범)[133]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134]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 (40 pages)[135] 《清光緒朝中法交涉史料》, 4권,〈内閣學士周德潤請用兵保護越南摺〉 광서 9년 4월 7일, p. 6., "中國所謂屬國 卽外國所謂保護 無故侵人之國 及侵和好之與國 皆萬國公法所必禁者也 査法越和約云 法國明知越國係操自主之權 非有遵服何國儻有匪梗 幷外國侵擾 法國卽當幫助 是明謂越南非中國之屬國而欲以自許幫助 假託保護 以自便其蠶食之謨 如日本滅琉球故智 然則中國欲爭越南 必先爭屬國之名 欲存屬國 必先存保護之實"[136] (中國之待屬邦內政外交由其自主泰西無之惟歲給廩俸而已 內政外交不得自主征收財賦歸諸上國名曰國君甚於守府法國保護安南未及數月已易其君安南昔亦被法愚弄今則噬臍莫及 朝鮮而歸俄人保護尙有南面稱孤之日哉旣無朝鮮又誰能侮, 《袁世凱全集》 1, pp. 51-52)[137]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김종학)[138]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 (계승범)[139] (신기석, 韓末外交史硏究, 일조각, 1967, 44-58쪽 ; 권석봉, 淸末對朝鮮政 策史硏究, 일조각, 1986, 80쪽 ; 권혁수, 근대 한중관계사의 재조명, 혜안, 2007 참고)[140] (유바다, 「1876년 朝日修好條規의 체결과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 한국근현대사연구78, 2016 참고)[141] 정동연,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硏究 2021, vol., no.158, pp. 159-198 (40 pages)[142] ‘종번(宗藩)’ 해석과 중국 대외관계 인식, 동북아역사 리포트, 2022년 2월 1일 제9호, 동북아역사재단, 손성욱[143] 외교사연구센터-중국연구센터 공동 콜로키엄 중국의 국가정체성: 역사학자와의 대화, 청사공정(淸史工程) 현황과 한국사 서술, 2021년 12월,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손성욱[144] 邵循正, 『中法越南關係始末』, 石家莊: 河北敎育出版社, 2000年. 1933년 淸華大學 석사학위논문.[145] 蔣廷黻 編, 『近代中國外交史資料輯要』 中卷, 上海: 商務出版社, 1934, p.364.[146] 외교사연구센터-중국연구센터 공동 콜로키엄 중국의 국가정체성: 역사학자와의 대화, 청사공정(淸史工程) 현황과 한국사 서술, 2021년 12월,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손성욱[147] 陳偉芳, 「甲午戰爭前朝鮮的國際矛盾與清政府的失策」, 戚其章 主編, 『甲午戰爭九十周年紀念論文集』,齊魯出版社, 1986. 李大龍, 『從“天下”到“中國” : 多民族國家疆域理論解構』, 人民出版社, 2015, pp.1691-199; 馬大正, 『當代中國邊疆硏究: 1949-2014』,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16, pp.185-193참조.[148] 陳志剛, 「關於封貢體系硏究的幾個理論問題」, 『清華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2010年 6期.[149] 陳尙勝, 「中國傳統對外關係硏究芻議」, 『安徽史學』, 2008年 1期, 24쪽.[150] 李大龍, 『從"天下"到"中國": 多民族國家疆域理論解構』 , pp.191-195. 李大龍은 '종번'대신 '번속(藩屬)'이라는 용어를 주장한다. 그의 번속이론에 관해서는 이석현, 「중국의 번속제도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 『중국 번속이론과 허상』 , 동북아역사재단, 2010, pp.25-31 참조.[151] 張雙智, 「淸朝外藩體制內的朝覲年班與朝貢制度」, 『淸史硏究』 , 2010年 3期.[152] T. F. Tsiang, "Sino-Japanese Diplomatic Relations, 1870-1894," Chinese Social and Political Science Review, XVII, 1933, p.53.[153] ‘종번(宗藩)’ 해석과 중국 대외관계 인식, 동북아역사 리포트, 2022년 2월 1일 제9호, 동북아역사재단, 손성욱[154] ‘종번(宗藩)’ 해석과 중국 대외관계 인식, 동북아역사 리포트, 2022년 2월 1일 제9호, 동북아역사재단, 손성욱[155]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인식과 달리, 1880~90년대 많은 식자층의 직접적인 보호 및 지방화 주장은 서태후광서제에 의해 묵살당했다. 즉, 원명대 한반도의 지방화가 공식적으로 논의된 적은 있지만, 청 조정은 이 방안을 공식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었다. - 손성욱(2019), "종번(宗藩)과 중화(中華)로 청제국을 볼 수 있는가 - 왕위안총 ‘조선 모델’의 가능성과 한계", 《동북아역사논총》 66.[156] Henry Wheaton,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37, Tributary and vassal States, pp.48~51. "Tributary and vassal States. Tributary States, and States having a feudal relation to each other, are still considered as sovereign, so far as their sovereignty is not affected by this relation."[157] Johannes C. Bluntschli, 《Das moderne Volkerrecht der Civilisierten Staten》, number 77, p.89. Entweder erheben sich im Laufe der Zeit die vasallenstaten zu bolljouveränen Staten, indem die Oberherrlichteit immer mehr zur bloßen Form und ohnmächtig wird, oder der oberherrliche Stat zieht hinwieder die verlichenen Hoheitsrechte an sich und einverleibt fich den vasallenstat.[158] 유바다(2013), "兪吉濬의 贈貢國 獨立論에 대한 비판적 검토", 《韓國史學報》 53.[159]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160] 이동욱(2020), "청일전쟁의 기원: 청말의 종주권 관념과 속국정책의 변화",《청일전쟁과 근대 동아시아의 세력전이》, p. 47~49.[161] 이동욱(2020), "청일전쟁의 기원: 청말의 종주권 관념과 속국정책의 변화",《청일전쟁과 근대 동아시아의 세력전이》, p. 49.[162] 유바다(2013), "兪吉濬의 贈貢國 獨立論에 대한 비판적 검토", 《韓國史學報》 53, p. 124.[163] 유바다(2021), "1905년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 이론 도출에 대한 국제법적 고찰", 《韓國史學報》 85.[164] 계승범(2020), "조선 시대 한중관계 이해의 몇 가지 문제",《동아시아사 입문》, pp. 573~574.[165]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166] 정다함(2017), "朝鮮 太祖代 遼東 공격 시도에 대한 재해석", 《역사와 담론》 84, p. 150~152; 손성욱(2020),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조선인들의 북경 체험-》; 계승범(2020), "조선 시대 한중관계 이해의 몇 가지 문제",《동아시아사 입문》, pp. 576~577.[167] 박원호(2007), "근대 이전 한중관계사에 대한 시각과 논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이론을 덧붙여-, 《한국사시민강좌》 40.[168] 계승범(2020), "조선 시대 한중관계 이해의 몇 가지 문제",《동아시아사 입문》, pp. 578.[169]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170]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4, 78~80.[171] 청이 현실적인 이유에서 전통적인 관례인 조문 칙사를 파견, 즉 조대비 문상을 통해 고종에게 빈례를 사실상 강제하여 국제법상으로도 조선이 독립국이 아닌 종속국임을 관철하고자 하는 등의 시도.[172] Zhang Shiming(2006), "A Historical and Jurisprudential Analysis of Suzerain-Vassal State Relationships in the Qing Dynasty",《Frontiers of History in China》 1.[173] 이동욱(2020), "1840-1860년대 청조의 ‘속국’ 문제에 대한 대응", 《中國近現代史硏究》 86.[174]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175] 權赫秀, "조공관계체제 속의 근대적 통상관계- 『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 연구", 《동북아역사논총》 28, p. 263~266.[176]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68~270.[177] 이동욱(2021), "조선의 歐美全權公使 派遣에 대한 청 정부의 대응(1887~1890)", 《학림》 47, p. 314~315.[178] 구선희(2006), "청일전쟁의 의미 조·청 ‘속방’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37, p. 92 ~ 125.[179] 은정태(2007), "대한제국기 ‘간도문제’의 추이와 ‘식민화’", 《역사문제연구》 17; 이화자(2009, "대한제국기 영토관과 간도정책의 실시", 《전북사학》 35; 李興權(2017), "19세기~20세기초 조선의 滿洲 이주민정책에 대한 연구",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채관식(2020), "대한제국기 지식인의 국경 문제제기와 영토 인식 - 장지연의 대한강역고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15, p. 209.[180] 정안기(2017), "20세기 초엽 황초평의 영토분쟁사 연구", 《영토해양연구》 13.[181] 김춘선(2009), "‘간도협약’ 체결 전후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 《근대 변경의 형성과 변경민의 삶》, p 190~191.[182] 은정태(2007), "을사조약 이후 청국정부의 한국인식", 《역사와 현실》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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