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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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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시아2. 유럽
2.1. 조러관계2.2. 조영관계2.3. 조불관계2.4. 조이관계2.5. 조독관계2.6. 조오관계2.7. 조정관계2.8. 조백관계2.9. 그 외
3. 아메리카
3.1. 조미관계
4. 관련 문서

1. 아시아

1.1. 조명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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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때 막 원을 몰아내고 불안한 처지이던 명나라에 곧 칭신하여 명 태조 주원장의 호감을 샀다.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가며 명나라에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사실 이는 요동 정벌을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 준비였다. 홍무제요동 문제 등을 두고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고려와 다르게 명의 지배 질서에 순순히 따름으로써 대체적으로 큰 정치적 갈등을 겪지 않았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는 변경 안정을 위해 조선의 원병 요청에 응하여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여 조선의 군사권 및 일본과의 평화협상을 주도하였고, 이후 한동안 요동아문 등이 조선이나 대, 대여진 교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후금이 요동을 정복하고 정묘호란 등을 일으켜 명과의 관계를 갈라놓고자 했고, 마침내 병자호란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과 명의 위계적인 관계단절시켰다.

1.2. 조여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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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여진 제부족 간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급격하게 변화했다. 과거 원나라의 다루가치 시절 함경도를 지배했던 조선 왕실은 여러 여진 부족들에 대해서도 간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이후로도 많은 여진 부족들이 조선에 사대하여 조공을 바쳤으며 조선 역시 이들을 교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동시에 적대적인 부족들과는 여러 차례의 전쟁을 벌여 그들이 성장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나라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건주부를 중심으로 여진이 통일되었다. 이로써 형성된 만주족은 결국 후금을 세워 조선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상국이 된다. 이후의 양국 외교사는 아래 문단에서 서술한다.

1.3. 조청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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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대 후반 후금이 급격하게 성장하자, 광해군은 비밀 외교로 친후금적 행보를 보이며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지지 세력의 부재와 그에 따른 공론 형성의 실패 그리고 신료들과의 갈등으로 국정이 혼란해졌으며, 반대 세력이 그 틈을 타 계해정변을 일으켜 집권하였다. 인조 정권은 반정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배명 행위를 내걸었기 때문에 사대부의 여론에 따라 '친명배금' 노선을 견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모문룡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으며, 후금과의 사개 왕래를 중단함으로써 홍타이지를 자극했다.

홍타이지 및 아민은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각각 강도맹약평양맹약을 맺어 단절됐던 조선과의 관계를 수립했다. 이후 1636년에 이르러 홍타이지는 자신의 존호례 동참에 대해 극렬하게 거부하는 조선의 여론을 확실히 깨닫고 조선을 기망하다가 이듬해 기습적으로 유린함으로써, 명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시키고 조선에게 신속을 강요했다. 그렇게 조선은 청에게 막대한 세폐를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며, 소현세자봉림대군 등이 인질로 잡혀간 심양관을 통한 내정 개입으로 인조의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효종김자점을 비롯한 친청파를 숙청하고 일본 방어를 빌미로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청의 감시 및 간섭으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효종과 송시열의 죽음 이후 북벌론은 유명무실해졌으며, 이후 강희제남명 세력들을 제압함으로써 조선에게는 일말의 반기를 들 여지 조차 사라졌다. 강희제가 준가르 등을 축출하여 더이상 조선에 대한 견제가 필요없어지자 강희 후반부터 양국 관계를 상당히 안정될 수 있었다. 거기다가 건륭제가 조선의 주문(奏文) 위식을 문제삼은 것을 계기로 정조가 사대부의 대명 의리를 무릅쓰고 전례를 왜곡하여 별사까지 파견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사대한 끝에 건륭제의 칠순 진하에서 그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아편전쟁으로 난징조약이 체결되자, 서양의 통상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조선은 도광제에게 난징조약의 범위에 자국을 포함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청은 그에 따라 영국 선교사 및 상인 등에게 조선의 출입을 자제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톈진조약으로 청이 사실상 완전히 개항되어 버리자, 청 측은 서양인들의 조선 출입 요구에 대해 중국은 속국에게 봉교(奉敎) 여부를 강요할 수 없다고 불개입 의사를 보였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며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조선은 문인들은 본격적으로 청의 관원들과 접촉해서 국제 정세와 그들의 권고를 수집했다. 청 측은 원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리면서 열강과의 타협을 권고했으며 신미양요 당시에도 미국에게 조선에 접근하지 말 것을 권고할 뿐이었다. 청일수호조규와 이후의 조일수호조규 체결 과정에서 청 측은 조선의 외교에 개입하지는 않지만 조선을 암중의 보호할 수 있다는 의지를 피력하며 종주권을 관철하고자 하였다.

1880년대 초 여서창(丁日昌), 하여장(何如章) 등의 건의가 채택되어 청이 조선에게 열강과의 조약을 권고하였지만, 조선은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하여장이 김홍집에게 《조선책략》을 건내자 조미조약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한편 하여장을 비롯한 청 외교관들은 유럽 속방들을 모방해서 조선에 대한 개입을 강화할 것을 요망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은 조선의 파병 요구에 응하여 조선의 내정에 개입해 군란을 진압하고 군대를 주둔했다. 나아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경제적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의 속방 지위를 국제법적 방식으로 명문화했다. 청이 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한다고 반발한 김옥균박영효 등 친일 개화파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조공 관계를 철폐했으나 3일만에 진압당해 실패했다. 다음해 청은 무역장정에 의거하여 원세개를 상무위원으로서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파견하였는데, 원세개는 조선 내정에서 국왕에 비견할만한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조선의 외교권을 통제하고자 상국의 윤허 후 출국을 관철했으며, 나중에는 '영약삼단'을 제시하여 청의 종주권을 드러내고자 했다.

동학농민운동의 세가 커지자, 민씨 척족은 청에게 다시 한 번 원병을 청했는데, 이홍장의 우려대로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선점함으로써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청은 결국 일본에게 패전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때 조선은 청으로부터 완전무결한 자주 독립을 보장받았다. 이후에도 청 측 인사들은 조선을 속국으로 취급했으나 실질적인 종주권이 탈각된 이상 별로 의미 있는 주장은 아니었다. 이후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양국은 평등한 국교를 수립했다.

1.4. 조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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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는 기존의 교린 관계를 맺어왔다가 임진왜란 이후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 정권이 수립된 후 통신사 파견을 통해서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고 운요호 사건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불평등한 조일 관계가 수립되었고 문호 개방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구한국 체제가 들어선 이후인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조선통감부의 감독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가 1910년에는 마침내 일본의 식민 지배권에 들어갔다.

1.5. 조태관계

태국과는 14세기 섬라곡국(아유타야 왕국) 시절 최초로 친선 관계를 맺었다. 아유타야는 조선 건국 후 최초로 외교 사절을 보낸 국가이기도 했다. 이때 온 사절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화교 출신 외교관이자 상인이었던 진언상이다.

조선 역시 이에 회답사를 보내고 태국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하려 했으나, 동중국해 일대에 날뛰고 있던 왜구 때문에 실패한다.

1.6. 조조관계

인도네시아의 조와국(마자파힛 제국)과도 조선 전기 태종 시기에 몇 차례 사신이 오간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시기 마자파힛의 사신으로 왔던 인물 역시 상술한 화교 상인 진언상이다.

마자파힛과의 외교 역시 왜구의 발호로 인해 동아시아의 바닷길이 엉망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끊어지고 만다.

1.7. 조유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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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국(류큐 왕국)과는 15세기 ~ 16세기 경 우호 관계를 맺었다. 앞선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류큐와의 외교와 무역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류큐 사신단은 주기적으로 조선을 왕래했고 조선 측에서도 신숙주가 사신으로 파견되어 해동제국기를 남기기도 했다.

류큐의 사신들과 상인들은 조선이 후추와 설탕을 비롯한 각종 동남아시아산 사치품과 각궁의 재료인 물소 뿔을 수급하는 주된 통로였다. 양국의 관계는 임진왜란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으나, 병자호란 이후 국가 대 국가 관계로서는 단절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청나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하였다.

2. 유럽

2.1. 조러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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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은 조선과 국경을 접한 유일한 유럽 열강이다. 과거 나선정벌 당시 최초로 접하였으나 서로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 채 단발적인 충돌로 끝났다. 본격적인 접점은 러시아가 1860년 연해주를 점령한 이후부터이다. 외교 관계의 시작은 1884년 맺어진 조러수호통상조약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남하는 19세기 말 조선의 운명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러시아의 남하에 위기감을 느낀 조선 정부는 개항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한편으로는 명성황후가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다소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으며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더욱 가까워졌다. 러시아는 정동에 주한러시아공사관을 두었고, 대한제국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러대한제국공사관을 두었다.

그러나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전하게 되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게 되면서 관계가 끊어졌다.

2.2. 조영관계

대영제국과는 여러 차례의 이양선을 통해 처음 접하였다. 본격적인 외교 관계는 1883년의 조영수호통상조약으로 인해 맺어졌다. 이로써 당대 최고의 선진 열강이었던 영국을 통해 많은 문물이 조선과 대한제국에 들어왔으나, 국가 간의 관계로서는 가까운 편은 아니었다.

러시아와 갈등을 빚고 있던 영국은 1885년 거문도 사건을 일으켜 조선의 영토를 침탈하였고, 러시아-프랑스 연합과 독일 제국의 극동 해군력 증강에 맞서 일본 제국을 후원했다. 강력한 영국 해군으로도 이미 극동의 패권을 확고하게 장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하면서 간접적으로 경술국치에 기여한다.

영국은 조선의 수도 한양에 주한영국공사관을 두어 외교 업무를 처리했고, 조선과 그 후신 대한제국 역시 런던 켄싱턴에 주영대한제국공사관을 두었다.

2.3. 조불관계

조선과 프랑스는 좋지 못한 악연으로 시작하였으나 외교관계 수립 이후 가까워진 케이스다.

프랑스의 음차어가 불란서(佛蘭西)이기에 조(선)-불(란서) 관계라 한다.

조선의 개항 이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다수 조선에 진출하여 가톨릭을 포교했다. 이렇듯이 한국 가톨릭의 확장과 성장에는 프랑스가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벌어진 종교 박해는 양국 간의 군사적 충돌인 병인양요로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문화재들이 침탈당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양국이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이후 많은 프랑스 문화와 문물이 조선에 들어왔으나 정치적으로는 가톨릭 문제로 인해 충돌이 잦았다. 하지만 1895년 청일전쟁 이후 프랑스가 러시아 및 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을 일으켜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면서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 다수의 프랑스인 관료들이 조선과 대한제국에 고문으로 들어왔기 때문.

영일동맹에 맞서고자 했던 프랑스는 마이너 파트너로서의 대한제국의 가치에 주목하였다. 프랑스군 역시 러시아 제국군과 함께 대한제국군의 현대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04년 벌어진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며 외교 관계는 깨어지게 된다.

프랑스는 조선 수도 한양에 주한프랑스공사관을 두었으며, 대한제국 역시 프랑스 파리에 주불대한제국공사관을 설치했다.

2.4. 조이관계

서세동점의 시기 이전에도 이탈리아는 간접적으로 조선에 문화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중국에 파견된 이탈리아인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서구의 사상과 기술, 그리고 가톨릭이 동아시아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서학이라 불린 이 새로운 조류는 조선의 실학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중반 통일전쟁으로 태어난 신생 이탈리아 왕국 역시 여러 차례 함선과 사신들을 보내어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맺고자 시도하였으나 조선 측의 거절로 한동안은 고배를 마셨다. 양국이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1884년 조선과 이탈리아 왕국이 조이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이후부터다. 이탈리아는 1901년 한성에 주한이탈리아공사관을 세웠다.

다만 양국 간의 교류는 비교적 활발하지는 않았고,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며 관계가 끊어졌다.

2.5. 조독관계

독일과의 관계는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기 이전 북독일 연방 시절인 1866년에 시작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상인이었던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면서 본격적으로 양국이 접촉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격노한 조선이 쇄국을 더욱 강력하게 밀어부치게 된 계기였다. 양국의 본격적인 외교관계는 독일 통일 이후인 1883년 조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수립되었다.

식민지 경쟁의 후발주자였던 독일 제국은 아시아에 보유한 정치적 이권이 사실상 전무한 국가였으므로 오히려 문화적, 경제적 측면에서 조선에 깊게 침투할 수 있었다. 독일계 무역회사인 세창양행은 조선이 서양 문물을 들여오는 주요 창구로 기능했으며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외교 고문으로 활약했다. 다수의 독일인 상선사관들 역시 조선과 대한제국 선적 선박의 항해사나 선원으로 고용되어 활약했다. 독일 제국군의 각종 무기들 역시 조선으로 흘러들었으며 특히 크루프 사의 야포는 조선군과 대한제국군 포병의 제식 무기로 사용되었다. 작곡가 에케르트 역시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독일은 조선 수도 한양에 주한독일공사관을 세워 외교 업무를 처리했다. 조선과 대한제국 역시 주독 공사를 임명하였으나 독일에 공사관을 두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 독일은 1895년의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의 확장을 저지하였다. 1897년 독일이 한국과 인접한 청나라의 칭다오 조계를 확보한 이후에는 좀 더 많은 접점이 있었다. 왕자이자 해군 군인이었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아달베르트 폰 프로이센이 방한하였으며, 의화단 전쟁 당시 독일 제국 해군 함선들이 친선 우호 목적으로 제물포에 기항하여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양국의 외교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며 끝났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일본의 불법적 주권 침해에 반발한 고종의 외교적 호소에 호응했고, 조선 왕조의 비자금을 도이체방크에 입금해주었다. 이 비자금의 절반은 일본이 인출하였으나 나머지 절반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2.6. 조오관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여러 차례 함선과 사절단을 보내어 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고자 시도했다. 1880년대 조선의 개항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상인들 역시 여럿이 제물포로 건너가 호텔을 여는 등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가령 1880년대 제물포에 있었던 주요 서양식 호텔이었던 꼬레호텔은 독일계 헝가리인이었던 요제프 슈타인벡(Joseph Steinbech)이 운영했다. 살롱에서 다양한 종류의 주류를 제공했던 꼬레호텔은 제물포에 기항한 여러 국가의 해군 승조원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양국 간의 외교 관계가 수립되지 않아 이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때문에 당시 오스트리아인들과 관련된 업무는 오스트리아의 우방국이었던 독일 제국 공사관에서 대행하였다. 이후 1892년 조오수호통상조약으로 조선과 오스트리아는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국가적으로 크게 많은 영향을 서로 주고받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당시 조선과 수교했던 열강들 중 유일하게 조선에 상주 공사관을 두지 않았고, 주일오스트리아공사관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조선과 대한제국 역시 주오스트리아특명전권대사를 임명했으나 빈에 상주 외교공관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다만 의화단 전쟁에 참전했던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함선 몇 척이 제물포에 기항했던 기록은 남아 있다. 그리고 수교 당시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양국 우호의 선물로 보낸 두정갑은 아직도 오스트리아에 잘 보존되어 있다.

2.7. 조정관계

덴마크와 조선의 관계는 1889년 조선에 해관원으로 들어온 한 덴마크인으로부터 시작한다. 1897년 세워진 덴마크 동아시아 회사 (현 EAC Invest A/S) 역시 조선 측에 통상을 요구하였고, 결국 1902년 양국 간에 한정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이 맺은 최후의 외교 조약이기도 하다. #

덴마크의 음차어가 정말(丁抹)이기에 조(선)-정(말) 관계라 한다.

덴마크 역시 조선 및 대한제국과 자주 교류한 국가는 아니었으나 큰 영향을 하나 남겼는데, 바로 전신선 설치이다. 19세기 후반 덴마크 북부전신회사(Det Store Nordiske Telegraf-Selskab)는 극동을 포함한 전 세계에 전신선과 해저케이블을 부설하고 있었고 조선도 주요 고객 중 하나였다.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및 덴마크 북부전신회사의 기록물[1] 모두 기록되어 있다.

1880년대 후반 덴마크 전신회사가 조선에 전신선을 부설한 후 조선이 이전처럼 타국보다 늦게 외국 소식을 접하는 일들은 없어졌다.

2.8. 조백관계

조선의 후신인 대한제국과 벨기에는 1901년 한백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수교하였다. 조약 내용은 프랑스와 맺었던 조불수호통상조약과 거의 동일하다.

벨기에의 음차어가 백이의(白耳義)이기에 조(선)-백(이의) 관계라 한다.

벨기에는 1903년 조선에 주한벨기에영사관을 세워 외교 업무를 맡겼다.

2.9. 그 외

노르웨이의 경우 공식 수교를 맺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노르웨이인 상선사관들이 조선 및 대한제국 국적 선박들의 항해사로 고용되어 있었으며, 대한제국의 해관에도 여럿 근무했다. 이 중 한 명이 바로 1987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찰스 피더슨의 아버지, 브레데 피더슨(Brede Pedersen)이었다.#

3. 아메리카

3.1. 조미관계

미국과는 수호통상조약 요청을 계기로 대면한 적은 있지만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맺어지지 않았고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 호가 평양 입항을 시도하다가 화재가 발생하게 되고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면서 다소 악화되었으나 결국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에 따라 단교되었다.

4. 관련 문서



[1] 조선 관련 보고서는 160p부터 서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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