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4 13:20:26

진언상


1. 개요2.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그의 일대기
2.1. 첫번째 방문2.2. 두번째 방문2.3. 후일담
3. 여담4. 참고 자료

1. 개요

陳彥祥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했던 화교 상인이자 외교관.

태국자바섬, 두 개 국가의 사신으로써 조선무로마치 일본을 여러 번 오간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일대기를 통해 조선과 남방 국가들의 외교와 당대 동아시아 해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2.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그의 일대기

2.1. 첫번째 방문

조선 개국 1주년이 되던 1393년 6월, 섬라곡국(태국 아유타야 왕국)에서 보낸 사절단이 조선에 도착한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외국에서 온 첫 번째 공식 사절단이었다. 장사도(張思道)를 단장으로 하는 해당 사절단은 각종 특산품과 토인 2명을 조선 조정에 바쳤고, 조정은 그해 12월 사절단이 귀국할 때 예빈시[1]의 소경 '배후'를 회례사[2]로 동행시키며 그들을 후하게 배웅한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으로 향하던 중 왜구의 습격을 받아 빈털털이가 된 채로 조선으로 돌아오고, 장사도는 흑인 2명과 각종 갑옷을 바치며 귀국할 수 있도록 배 하나를 청한다. 다만 귀국 일정은 다시 12월로 잡혀 있었기에 그들은 그동안 조선에 머무르게 된다.
섬라곡 사람 장사도(張思道)를 예빈 경(禮賓卿)으로 삼고, 진언상(陳彦祥)을 서운 부정(書雲副正)에 임명하였다.
-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7일 2번째 기사

그리고 이때부터 진언상이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당시 진언상은 종4품 조봉대부 격의 서운관[3] 부정[4]직을 제수받았다고 언급된다. 서운관은 1394년 당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고 있었던데다 국가의 역법이나 기상, 시간 관리까지 할 정도로 중요한 기구인데, 이곳의 부정으로 임명했다는 것은 정황상 조선 조정이 험한 일을 겪고 살아돌아온 외국 사절단을 위로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들은 조선 조정이 구해준 배를 타고 선물 및 회례사와 함께 귀국길에 올라, 태국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이후 이야기는 조금 씁쓸하다. 조선의 선물을 받은 아유타야 왕은 다시 답례로 임득장(林得章)을 단장으로 하는 회례사를 보냈지만, 이들은 나주시 앞바다에서 또 왜구를 만나 죽거나 일본으로 납치되어 버렸다. 태국에 사신으로 간 조선인들 중 예빈 소경 배후는 이때 죽었고, 통사 이자영만이 간신히 탈출해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뒤 임득장과 일부 태국 사신도 일본에서 탈출해 조선에 도착했다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섬라곡과의 외교 기록은 실록에서 사라진다.

2.2. 두번째 방문

태국으로 돌아갔던 진언상은 10년 가까이 지난 1406년 8월에 이번엔 조와국(자바섬)의 사신이 되어 다시 조선으로 찾아온다. 당시는 마자파힛 제국이 인도네시아 제도의 패권을 쥔 때이긴 하지만, 실록에는 조와국으로만 표기되어 있어 정말 마자파힛의 사신인지는 의문이다. 어찌되었건 그는 일행 121명과 함께 조선으로 오는 도중, 군산 앞바다에서 또 왜구를 만나 수많은 승조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15척의 배를 끌고 갑작스레 나타난 왜구와 이틀 간이나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의 함선은 길이가 2,200료에 달하고 승조원이 120명 가까이나 된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거대한 종(Djong)[5]이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숫적 우위를 이용한 왜구에게 중과부적으로 밀린 것으로 보인다. 전사자만 21, 납치된 사람이 60인이었고 40인만이 살아서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고, 화물도 죄다 약탈당한 채 배만 건사했다고. 조선 조정에서 옷을 구해줘야 했을 정도라 하니 상당히 처참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와국(爪哇國)의 진언상(陳彦祥) 등이 돌아가니, 임금이 후(厚)하게 하사(下賜)하여 보냈다. 진언상이 의정부에 글을 올려 말하였다.

"영락(永樂) 4년 5월 18일에 어리석은 국왕이 저희들을 파견하여 ‘토산물(土産物)을 가지고 특별히 조선국에 가서 진하(進賀)하라.’하기에, 그해 5월 22일에 길을 떠나 해선(海船) 한 척을 타고 윤7월 초1일 미시(未時)에 조선국 전라도 진포(鎭浦) 바깥 군산도(群山島) 밖에 닿았을 때, 갑자기 왜선(倭船) 15척을 만나 당일(當日)에 둘이 서로 교전(交戰)하였는데, 초3일 오시(午時)에 이르러 적은 숫자로 많은 적을 대적하지 못하고, 어찌 할 수 없이 전부 겁탈을 당하여, 번인(蕃人) 21명이 죽음을 당하고, 번인(蕃人)으로 남녀(男女) 아울러 60명이 잡혀 가고, 현재 살아 남아 생명을 보전하여 해안에 상륙한 자는 언상(彦祥)과 남녀(男女) 합하여 40명입니다. 진하(進賀) 하려던 토산물과 제가 진헌(進獻)하려던 물건과, 그리고, 여러 사람이 배에 가득 실었던 물건들을 모두 약탈을 당하였는데, 지금 옷과 양식을 하사(下賜)해 주셔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저희 나라에도 도적을 만난 일을 믿지 않을까 적이 걱정입니다. 생각하건대, 입으로 말해도 증거가 없으니, 원컨대, 회문(回文)을 내려 주시어 증빙(證憑)을 삼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영락 4년 5월 18일에 어리석은 국왕이 저희들을 파견하며 ‘특별히 토산물을 가지고 가서 진하(進賀)하라.’하기에, 그해 5월 22일에 길을 떠나 새로 만든 2천 2백료(二千二百料)의 해선(海船) 한 척을 탔는데, 윤7월 초1일에 조선국 전라도 진포(鎭浦)바깥 군산도(郡山島) 밖에 닿았을 때, 뜻하지 않게도 왜적(倭賊)을 만나 겁탈을 당해 전부 없어지고, 본선(本船)만 남았을 뿐입니다. 지금 돌아가도 좋다는 사령(使令)을 받았으나, 배를 타는 수수인(水手人)들이 왜적 때문에 태반이 살해되고, 남은 사람은 잡혀 가서, 배를 탈 사람이 적습니다. 본선(本船)은 무겁고 커서 타기가 어려우니, 양양(洋洋)한 바다에서 소실(疏失)되지나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생명(生命)이 중하니, 이제 가지고 온 큰 배를 헌납(獻納)할 터인즉, 40료(四十料)쯤 되는 경쾌(輕快)한 소선(小船) 한 척과 바꾸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명년에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허락하였다.

-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9월 16일 2번째 기사

이후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의정부에 위의 두 장의 글을 올린다. 내용은 자신들이 당한 일에 대한 상세한 진술 및 자신들을 도와준 조선 조정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두 가지의 요구 사항이다. 하나는 자바 본국에 자신들이 왜구들에게 당한 일을 증빙해 줄 문서, 그리고 돌아갈 때 쓸 작은 배 한 척이었다. 그는 대신 자신이 타고 온 종을 조선 조정에 바쳤고, 다음 해에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떠났다.

2.3. 후일담

하지만 진언상은 다시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다. 다만 6년이 지난 1412년에 손자 실숭을 포함한 사절단을 조선에 보내어 근황을 알렸는데, 일본과의 외교로 바빴던 모양이다. 그가 의정부로 보낸 글에 따르면 두 번째 조선 방문 후 귀국하는 길에 배가 침수되어 일본 해안에 표류했고, 일본인 도적들에게 다시 약탈을 당했다고 한다. 천만다행히도 일본 국왕(정황상 천황이 아닌, 명나라에게 국왕으로 책봉받았던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로 보인다.)의 도움으로 구조되었고, 요시미츠는 군함 1척과 예물, 그리고 일본 사신을 동행시켜 진언상 일행을 자바로 보내주었다.

귀국 후에는 자바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회례사에 뽑혀 다시 일본으로 향했지만 풍랑으로 인해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회항했다. 1412년이 되어서야 하카타에 도착했지만 절차 문제로 교토행이 늦어지는 가운데 개인적으로 사신단을 꾸려 조선으로 보낸 것이었다. 비록 자바에서 조선행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관계로 본인이 오지는 못했지만, 진언상은 사적으로나마 손자에게 예물을 들려 보내며 자신이 받았던 도움에 감사를 표하는 글을 올렸다. 이후 한 달 뒤 진언상의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왜구의 포악성을 설명하며 호송을 요청했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해군력의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 요청을 기각했으며 이것이 진언상에 대한 실록의 마지막 기록이다.

3. 여담

그의 기록은 조선 초 조선과 남방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의의가 있다. 당시는 정화의 원정으로 대표되는 명나라의 해상 개척으로 인해 중국-동남아시아 국가들 간의 조공 무역이 대대적으로 확대되었던 시기였다. 여기에 신흥 국가였던 조선 또한 여러 주변국들의 사절단을 받으면 신왕조의 위엄을 세울 수 있었기에,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린 외교에 나섰다. 진언상 사절단의 방한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만 조선은 기미외교의 형식으로 동남아 국가들과의 외교를 바라보았던 만큼 적극적이진 않았다. 동남아 국가들이 여진이나 일본처럼 조선에 인접해서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도 아니었고 말이다. 진언상의 행적과 그가 올린 글에서 자국을 칭한 방식을 통해 알 수 있듯 동남아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상국' 조선을 찾아오는 형태였고, 그마저도 당시 심각하게 늘어났던 왜구들로 인해 엄청난 방해를 받았으며 진언상도 조선을 오가는 동안 왜구에게 3번이나 약탈을 당했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곧 명나라의 해금정책으로 중국과의 직접적인 연결점이 급감하고 중국산 물품의 가격이 폭등하자,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위험도에 비해 메리트가 없는 동중국해 이북으로 올라오는 대신 중국과의 조공 무역, 그리고 류큐 왕국과의 무역에 집중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태국-인도네시아의 직접적인 외교 관계는 단기간의 우호적인 기억을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4. 참고 자료

  • 조선왕조실록
  • 김동우, 《조선 초기 교린체제와 남방무역》, 부경대학교 글로벌정책 대학원, 2021년

[1] 조정의 각종 연회를 주관하던 관청.[2] 사신을 보내준 나라에 답례로 보내는 사신[3] 조선 조정의 일종의 천문관측 연구소.[4] 서운관에서는 판관(判官), 정(正)에 이은 제3의 직책이었다.[5] 정크선과 유사한, 당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주력이었던 30~500톤급의 거대 범선 종류. 최대 정원은 약 600명이었다. 자바인, 말레이인들은 이 함종을 바탕으로 동남아시아의 해상 패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아프리카남아메리카까지 항해했으며, 카락선을 타고 아시아에 엉덩이를 들이민 포르투갈과도 경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