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20:16:51

사마착

司馬錯 [1][2]
생몰연대 미상

1. 개요2. 생애3. 후손4. 대중 매체에서
4.1.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에서의 묘사

1. 개요

전국시대 중후반기의 진나라명장. 기록상에는 혜문왕(惠文王) 때부터 언급된다. 그는 춘추시대부터 수백년 동안 진나라를 괴롭혀왔던 , (巴, 蜀)[3]을 기어코 멸망시킨 장수였다.

2. 생애

사마착이 진나라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316년에 혜문왕은 대국적 정책을 정하고자 하였는데 이 조정회의에서 사마착은 연횡책으로 유명한 장의(張儀)와 설전을 벌인다. 장의는 전국시대 주요 국가들을 굴복시켜야 강대국으로 인정받는다고 주장하며 동쪽으로의 진출을 주장했다. 사마착은 장의와는 다르게 파, 촉을 점령하여 나라의 뒤를 안정시키고 드넓은 땅을 차지해 경제력을 끌어올려 강대국으로 발돋움해야 한다고 안목있는 주장을한다. 격론 끝에 결국 사마착이 주장한 의견을 받아들여 혜문왕에게 10만명의 대군을 얻어 안정적으로 파나라와 촉나라를 공격하고 오랜기간 후방에서 진나라를 괴롭혔던 파, 촉을 사마착이 기여코 멸망시켰다. 그리고 촉을 멸망시킨 이후 사천 지방에 봉지를 얻었다.

사마착이 파, 촉을 멸망시키자 높은 생산량을 가지게 된 진나라는 더욱 부강하게 되었고, 제나라(齊)의 민왕연나라(燕)의 소왕에게 털려 몰락한 상황에서 초나라(楚)와 비견되는 2강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중(漢中)과 파, 촉을 동시에 먹은 진나라는 양방향으로 초나라를 칠 수 있게 되었으며, 이후 촉나라 병사를 이끌고 초나라로 쳐들어가 수도 영을 함락시키고 천도하게 만들었다. 이후 초나라는 영토가 계속 쪼그라들게 되었다.

기원전 301년, 구 촉나라였던 사천 지방에서 촉후인 영휘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했고, 기원전 292년에는 백기와 함께 위나라(魏)의 원을 빼앗았다가 돌려주었으며, 다음해에는 위나라의 지, 등 땅을 빼앗았고, 기원전 289년에는 위나라의 원, 하옹을 빼앗았으며, 기원전 286년에 위나라의 하내 지방을 공격하면서 위나라로부터 안읍을 할양받았다.

기원전 280년에는 농서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사천 지방을 지나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서 초나라의 검중을 점령했다.

활동 영역으로 보면 남쪽 방면의 군사 행동을 맡은 것으로 보아 정남장군 비슷한 직책이었던 듯 하다.

3. 후손

손자 사마근(司馬靳)은 무안군(武安君) 백기를 상관으로 섬겼으며, 장평대전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조나라의 수송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조나라 군사 40만명을 생매장하는 비극에 제대로 일조했다. 백기의 최측근급으로 가깝거나 혹은 그 일파의 인물로 분류되었는지 이후 백기가 숙청당할 때 함께 휘말려 죽었다. 사마근이 죽은 후 그의 후손들은 군사 방면의 직책을 맡지 않았는데 그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사마천이다.[4]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위나라사마의(司馬懿)와 같은 집안 사람이다. 다만 사마의초한쟁패 시대 항우에게 책봉된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의 후손으로 사마착의 직계 후손은 아니다.

4. 대중 매체에서

4.1.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에서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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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錯이라는 한자의 뜻과 음이 '어긋날 착' 말고도 '둘 조'라고도 읽히기에 《사기》 <본기> 번역본을 보면 좌경 조니 사마착이니 뭐니 혼동되게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모두 동일인물이다.[2] 사기의 주석인 사기색은에 의하면 錯의 음은 '七各反,又七故反,二音。'으로 착, 초 두가지 음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착이나 조 어느 식으로 읽어도 틀린 것은 아니다.[3]삼국지》의 촉한할 때 그 촉 지역 맞다.[4] 8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