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朱禩孫, 1214~1280남송의 관원으로, 자는 기재(杞材), 문창(文昌)이며 호는 남산(南山)이다. 사천성 낭중 출신이다.
2. 생애
그는 일찍이 성도에 거주하다가 1236년 몽골군에 의해 성도가 함락될 때 몽골군은 대학살을 벌였고, 성도의 백성들이 50명씩이나 묶여 몽골군에게 난자당하였다. 주사손은 그 밑에 깔려 찔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피는 모두 입에 들어갔다. 주사손은 한밤중에 마침내 깨어나 시체더미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1244년 중진사가 되어 경호 지역에서 벼슬 생활을 하였고 경호안무제치사(京湖安抚制置使) 이증백(李曾伯)이 1254년 사천선무사(四川宣抚使)로 전임하자, 주사손은 태사령(太社令)으로 이증백을 따라 들어가 사천선무사의 기무를 담당하였다.
1256년에는 신임 사천선무 겸 제치사 포택지(蒲择之)의 추천으로 지노주 겸 동천로안무 직책을 담당한다. 노, 서, 장녕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였고 몽골군이 운남 지역에서 북상하는 것을 막았다.
1260년 광서경략안무사 겸 지정강부(知靜江府)[1]로 관직이 바뀌었고 1265년에는 지태평주(知太平州)[2]로 옮겼다가 연강제치부사 겸 지황주로 옮겼으며 1268년 10월에는 송 도종에 의해 사천안무제치사 겸 지중경부(四川安抚制置使) 겸 지중경부(知重慶府)에 이르렀다.
1274년 송 공제가 즉위하였던 해에 경호사천선무사 겸 지강릉부(知江陵府)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원군은 백안의 통솔 아래 양양에서 대거 남하하여 기세를 꺾고 12월에 악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1275년 3월 아릭카야가 강릉을 침공했고[3] 4월 8일 성이 무너질 때 제치사 고달은 주사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에 투항하였고 주사손은 독약을 먹고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죽지 않고 결국 고달, 청양몽염과 함께 투항하였다. 이후 원나라의 대도로 압송되어 몇 년간 연금 생활을 하다가 1280년에 사망하였다. 함께 투항하였던 고달은 관참지정사로 임명된다.
3. 기타
- 송사와 원사에는 별도의 열전이 수록되어 있지 않고 다른 역사서에 그의 행적이 산재되어 있다.
[1] 지금의 계림[2] 지금의 안휘성 당도[3] 바얀의 군대가 장강의 흐름을 따라 동진할 때, 고세걸이 원나라 군사들의 후방을 노리고 있었다. 아릭카야는 가거정으로 하여금 악주를 지키게 한 이후 그의 부장 장영실과 함께 이를 막으러 출전하였고 고세걸의 군대를 동정호의 도화탄까지 추격하여 그를 항복하게 한 뒤, 고세걸로 하여금 악주 수장 맹지소를 투항하게 하였다. 이후 고세걸은 처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