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0:10:33

파루크시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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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10대 황제
파루크시야르
ابو المظفر معید الدین محمد شاه فرخ‌ سیر علیم
파일:067b219bebfb8d2582d269cccb5c8ab7.jpg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아불 무자파 무인 웃딘 무하마드 샤 파루크-시야르 알림 악바르 사니 왈라 샨 파드샤 이 바흐르 우바
ابو المظفر معید الدین محمد شاه فرخ‌ سیر علیم
출생 1683년 8월 20일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아우랑가바드[1]
사망 1719년 4월 19일 (향년 35세)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델리[2]
재위 기간 무굴 제국 황제
1713년 1월 11일 ~ 1719년 4월 19일 (6년)
대관식 1712년 3월 29일
전임자 자한다르 샤 (제9대, 이복 백부)
후임자 라피 웃 다라자트 (제11대, 사촌동생)
부모 아버지 : 아짐 우쉬 샨[3] (1664 ~ 1712)
어머니 : 사히바 니스완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즉위 전
2.1. 재위
2.1.1. 사이드 가문과의 싸움2.1.2. 반란 진압
2.2. 폐위와 죽음

[clearfix]

1. 개요

무굴 제국의 제10대 황제. 삼촌 자한다르 샤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인물로, 잘생긴 호남이었지만 대제국을 통치하기에는 무능력했고 주변 측근들에게 휘둘리며 살았다. 결국 6년여 만에 자신의 신하였던 아짓 싱과 사이드 가문의 두 형제에게 살해당한다.

2. 즉위 전

파루크시야르는 1683년 8월 20일 데칸 아우랑가바드에서 아짐 우쉬 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96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벵골로 원정을 떠났다. 1707년에는 아우랑제브 황제가 죽기 직전에 파루크시야르를 벵골의 부왕이자 총독으로 임명했고, 그 이래로 벵골 지방 전체를 관할하는 총독으로 재위했다. 그는 아우랑제브 사후 황위에 오른 바하두르 샤 1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벵골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남았으며, 주로 초기에는 다카의 벵골 총독궁에 머무르다가 나중에는 서벵골 지방으로 본거지를 옮겨갔다.

1712년에 바하두르 샤 1세가 사망하자 또다시 후계자들 간에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다. 파루크시야르의 아버지인 아짐 우쉬 샨 역시 전쟁에 참여했지만 아짐 우쉬 샨은 자한다르 샤에게 패배하고 만다. 삼촌 자한다르 샤가 새 황제로 즉위하고 아버지는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파루크시야르는 바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의 친구들이 곁에서 필사적으로 말린 덕에 겨우 자살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꾸준히 복수심을 키운 파루크시야르는 벵골과 알라하바드 지방에서 군대를 모아 자한다르 샤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파루크시야르는 벵골의 수바다르[4]인 후세인 알리 칸과 자신의 동생이자 알라하바드의 나와브인 사이드 가문의 압둘라 칸과 함께 자한다르 샤에 반란을 일으켰다. 당연히 파루크시야르를 진압하기 위해 자한다르 샤는 압둘 가파르 칸과 12,000여 명의 대군을 파병했다. 압둘 가파르 칸은 압둘라 칸과 파루크시야르의 군대를 알라하바드 요새까지 밀어넣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압둘 가파르 칸이 전투 도중 사망하면서 그의 군대 역시 그대로 흩어졌다. 첫 시도가 실패하자 자한다르 샤는 또 아샨 칸 장군을 보내 파루크시야르를 상대하게 했지만 이들 역시 그대로 대패했다. 결국 1713년 1월 10일에는 자한다르 샤가 사무가르[5]에서 직접 파루크시야르와 격돌했고, 사무가르 전투에서 파루크시야르가 승리하면서 마침내 무굴 제국의 제권을 거머쥔다. 그는 2월 12일 델리붉은 요새를 점령했다.[6]

2.1. 재위

2.1.1. 사이드 가문과의 싸움

파루크시야르가 자한다르 샤를 꺾고 새로운 무굴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지만 그의 앞에는 난관 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제위에 오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압둘라 칸이 그에게 재상 자리를 요구했다는 것. 재상직은 이미 가지웃딘 칸에게 돌아가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파루크시야르는 그에게 대신 섭정직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압둘라 칸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파루크시야르가 압둘라 칸에 굴복해 압둘라 칸에게 재상직을 봉한다. 이렇게 압둘라 칸이 부득부득 재상직을 얻어내가자 파루크시야르의 마음속에도 점차 의심의 싹이 움터오른다. 언젠가 자신을 몰아내고 다른 황제를 옹립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특히 미르 줌라 3세와 칸 다우란 등이 황제 곁에서 계속 바람을 불어넣으며 압둘라 칸에 대한 의심은 날로 심해졌다.[7]

한편 아지메르가 말와 지방의 아짓 싱에게 함락당하자 파루크시야르는 압둘라 칸의 형제이자 사이드 가문의 일원이던 후세인 알리 칸에게 그를 진압하도록 명령했다.[8] 그러나 무굴 궁정 내에서 사이드 가문의 반대파들은 귀가 팔랑거리는 황제를 꼬셔 몰래 아짓 싱에게 서찰을 보내 후세인 알리 칸을 꺾어달라고 요청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아짓 싱은 후세인 알리 칸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항복했고, 이를 계기로 후세인 알리 칸을 견제하려는 황제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어쨌든 라지푸트 지방은 다시 무굴 제국의 품으로 돌아왔고 아짓 싱은 제 딸을 파루크시야르에게 바쳤다.

2.1.2. 반란 진압

파루크시야르는 거의 재위 기간 내내 제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특히 선대 아우랑제브 황제가 무려 몇 십여년 동안 남쪽의 데칸 일대에 머무르며 상대적으로 기존 북인도 지방에 대한 통제가 약해졌고, 틈이 날때마다 북인도의 왕국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 1713년에는 자트족이 반기를 들었고 파루크시야르는 아그라 총독을 보내 진압하도록 했지만 당시 자트족의 지도자인 차우라만을 꺾는 데에 실패했다. 차우라만은 일시적으로 황제와 협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이마저 파행됐고 1716년에 공격이 재개되었다. 결국 2년에 가까운 전쟁 끝에 자트족들은 무굴 제국군에 밀려 다시 무릎을 꿇었다. 차우라만은 파루크시야르 앞으로 반강제적으로 끌려와 충성 맹세를 했고, 5백만 루피를 국고에 헌납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으면서 자트족의 반란은 진압된다.

반다 바하두르는 1700년대 초 바하두르 샤 1세의 재위기에 반란을 일으켜 한때 펀자브 일대를 장악하는 데에도 성공한 시크교 지도자였다. 자세한 내용은 바하두르 샤 1세 참조. 바하두르 샤 1세는 그의 반란을 억누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끈질긴 추격에도 반다 바하두르를 사로잡는 데에는 실패한 상태였다. 1714년에 2만에 달하는 대군이 시크교의 요새이자 반다 바하두르의 은신처 로파르 요새를 공격했고 결국 요새 람락에 성공했다. 8개월 간의 공성전 끝에 패배하고 드디어 사로잡힌 반다 바하두르는 철장에 갇혀 200여 명의 추종자와 함께 수도 델리로 끌려왔다. 파루크시야르는 이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수 백명의 포로들 중 단 하나도 개종하지 않았다고. 황제는 어쩔 수 없이 1716년 6월 19일 델리에서 반다 바하두르와 나머지 시크 교도들을 처형했다.[9]

외교적으로는 영국에게 무제한으로 인도 내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가장 큰 이유는 영국 의사 윌리엄 해밀턴이 파루크시야르의 병을 치료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매년 2,000루피 정도만을 제국에 바치면 마음대로 무역할 수 있었고 이는 대인도 무역에서 얻어가는 엄청난 이익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특히 영국은 당시 인도에서 가장 부유했던 벵골 지방에서 무관세 무역을 할 수도 있었다. 동인도 회사의 직원들은 이를 사익을 채우기 위해 남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관세 특권이 없는 인도 본지의 상인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분노한 당시 벵골 총독 알리바디 칸은 인도 상인들에게도 무관세를 적용하면서 영국 상인들과 동등한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했다.

2.2. 폐위와 죽음

1715년 파루크시야르는 총애하던 신하였던 미르 줌라 3세에게 황제의 직인과 옥새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부여했다. 사실상 미르 줌라에게 제국의 통치권을 넘긴 것과 다름없는 무모한 결정이었던 셈. 미르 줌라 3세는 이 권리를 이용해 재상인 압둘라 칸을 무시하고 입맛에 맞는 인물을 총독이나 부왕직에 임명하는 등 제 마음대로 국정을 처리했다. 아예 이 기회를 이용해 압둘라 칸과 그의 형제인 후세인 알리 칸, 이 2명의 사이드 가문의 형제들을 치워버리려 작정했던 미르 줌라 3세는 한발짝 더 나아갔다. 그는 압둘라 칸의 보좌관이었던 라탄 찬드가 뇌물을 수수하고 몰래 사무역을 했다는 혐의로 고발, 압둘라 칸의 목을 점점 조여갔다. 안그래도 파루크시야르 역시 압둘라 칸을 좋게 보고 있지 않던 터라 그를 제거하기 위한 밑작업에 착수한다.

압둘라 칸의 형제이던 후세인 알리 칸은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빠르게 눈치챘고, 황제에게 자신을 데칸 일대의 총독으로 임명해달라 요청했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면 아무리 황제라도 자신을 함부로 죽일 수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파루크시야르는 거절했지만 관직을 낮추어 그를 데칸으로 보내는 것은 허락했다. 후세인 알리 칸과 압둘라 칸은 자신들을 쳐낼 궁리를 하고 있는 황제를 갈아치우기로 마음먹는다. 후세인 알리 칸은 데칸에 도착하자마자 당시 무굴의 최대 적국이던 마라타 동맹의 샤후 1세와 연락했다. 그는 1718년 2월 조약을 맺어 샤후 1세에게 데칸 지방의 세수권을 넘겨주는 대신 마라타 동맹은 후세인 알리 칸에게 매년 1백만 루피를 상납하고 그를 위해 15,000여 마리의 군마를 준비하는 조건이었다. 이 모든게 황제의 재가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고 당연히 파루크시야르는 격노했다.

1713년에 파루크시야르는 아짓 싱을 타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아짓 싱은 가난하고 척박한 타타 지방으로 옮겨가기를 거부했고, 화가 난 파루크시야르는 후사인 알리 브라하를 보내 아짓 싱을 단죄하도록 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배신질에 익숙했던 파루크시야르의 기질이 발동했던 것인지, 그는 아짓 싱에게 원래부터 싫어했던 후사인 알리 브라하를 전투에서 꺾어준다면 상을 내릴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과거 후세인 알리 칸에게 했던 짓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 것. 그러나 아짓 싱은 이번에는 후사인 알리 브라하와 협상을 택했다. 그는 황제에게 항복하고 타타 지방으로 가는 대신 근시일 내에 부유한 구자라트 지방으로 옮겨줄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파루크시야르는 몇 년이 지나도록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약속을 어긴 데 분노한 아짓 싱은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아짓 싱은 그간 파루크시야르에게 불만이 많던 사이드 가문의 두 형제와 손을 잡고 막대한 대군을 끌어왔다. 그는 1719년 2월 28일 델리붉은 요새를 공격해 하룻밤의 전투 끝에 황궁을 함락하는 데 성공한다. 재상과 신하들 일부가 아짓 싱의 군대를 막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파루크시야르는 어머니와 후궁들과 함께 황궁 하렘에 숨어있다가 잡혀왔다. 아짓 싱은 그를 저잣거리로 끌어내어 바늘로 눈을 찔러 실명시킨 다음 고문한 후 죽여버렸다. 아짓 싱은 파루크시야르의 후임으로 라피 웃 다라자트를 선택해 그를 무굴의 제11대 황제로 즉위시킨다.

[1]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아우랑가바드.[2]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델리.[3] 바하두르 샤 1세 황제의 차남.[4] 무굴 제국의 행정구역인 '수바'를 총괄하는 관직. 총독 정도에 해당한다.[5] 현재 아그라에서 14km 떨어진 지방.[6] 자한다르 샤의 머리를 잘라 코끼리 장대에 높이 매단 채로 델리에 입성했다고 한다.[7] 이때 압둘라 칸이 자신의 형제인 후세인 알리 칸에게 보내는 서한에 황제가 자신들을 꺼린다는 내용이 들어있을 정도다.[8] 사이드 형제란 사이드 가문 소속인 압둘라 칸과 후세인 알리 칸을 의미한다.[9] 참고로 반다 바하두르는 꽤나 잔인하게 죽었다. 기록에 의하면 갈비뼈가 부러지고 산 채로 피부를 포로 떠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