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4:23:37

톡토르

1. 개요2. 생애
2.1. 원 사신2.2. 다루가치
3. 가족관계


脫朶兒(탈타아) · 脫脫兒(탈탈아)[1]
(? ~ 1271)

1. 개요

원나라의 인물. 고려에 다루가치로 부임했다.

2. 생애

2.1. 원 사신

1268년 10월, 명위장군 도통령으로서 무덕장군 통령 왕국창, 무략장군 부통령 유걸 등 모두 14명의 일행이 고려가 준비했다는 병력 1만과 군함 1천척을 확인하기 위해 고려에 파견된다. 고려 국왕 원종이 직접 승천부에 나와서 톡토르 일행을 맞이했으며, 12월 열병을 마치고는 원으로 돌아간다. 톡토르는 원종의 배웅을 받고 고려 대장군 장일(張鎰)과 동행하며 귀국길에 오른다. 추밀원부사로 있던 무신 임연은 톡토르를 환송하는 자리에서 집권자 김준과 그 무리를 제거할 것을 원종과 함께 계획했는데, 김준 일당이 불참해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12월 21일 야별초가 동원돼 정변이 일어났고, 김준이 제거돼 임연이 새로운 집권자가 된다.

1269년 6월 임연이 재상 이장용 등의 동의로 원종을 폐위한 뒤 안경공을 옹립하니, 원종 복위를 명분으로 최탄서북면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톡토르 일행은 9월에 원 조정에 말(馬)을 요청하고 대부성(大富城)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10월 최탄 등 30명이 성으로 다가오니 톡토르는 그 이유를 묻는다. 최탄이 말하기를,
高麗卷土, 將入海島, 盡殺北界諸城人. 故吾等殺諸城守令, 欲入告于上國.
고려가 육지를 끊고 해도로 들어가려 하니, 북계 여러 성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여러 성의 수령을 죽이고 입조하여 상국에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려사절요』 권18, 원종 10년 10월 기사.
톡토르는 "근처 여러 성에도 관리가 여럿 있는데, 어찌 그들을 죽이지 않았는가?"[2]라고 물었고, 최탄이 "공께 먼저 알리고 그 뒤에 죽이려고 했습니다."[3]라고 답하자 "세 성의 수령은 모두 잡아올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라."[4]라고 명령한다. 의주부사 김효거 등 여러 수령이 와서 톡토르와 대면했는데 이들은 최탄이 무고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음을 알린다. 톡토르는 명령을 번복했고 김효거 등 22인은 원으로 압송된다.

2.2. 다루가치

원종과 이장용의 입조로 원에서는 폐위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고, 1270년 2월 기존에 고려에 보내던 안무사를 혁파하고 톡토르와 초천익을 다루가치로 파견한다. 원종과 그를 호송하는 군사와 함께 고려에 들어간다. 2월에 대도를 떠난 원종 일행은 병사를 거느리고 행군해야 했기 때문에 4월 28일에야 대부성에 이르렀다. 고려측 기록에서는 톡토르가 5월에 부임했다고 하는데, 톡토르 역시 왕 일행을 따라갔기에 고려에 이른 뒤 5월부터 정무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달에 임연 사후 정권을 잡은 임유무가 강화도에서 저항을 계속하려다 목숨을 잃는다.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원종의 결정을 삼별초가 거부했고 끝내 삼별초의 난이 발발한다. 8월 배중손 등이 진도로 들어가니 톡토르는 9월에 강화도를 직접 순행하며 허실을 살핀다. 같은 해 11월 다루가치가 고려 양가의 처녀와 결혼할 것을 요청하고 요청이 받아들여진다. 초천익은 부다루가치였으므로 고려인과 결혼한 다루가치는 톡토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2월 평장사 류경, 정당문학 유천우와 노비를 두고 다툰다. 나장 목동(木同)이 양민을 노비로 만들고 다루가치 톡토르에게 팔았는데, 고려의 재추가 이를 문제삼아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왕이 요청을 따르지 않자 류경과 유천우가 멋대로 유사에 공문을 보내 해당 노비를 면천해 양민으로 삼으려 했고 톡토르는 화를 내며 원종에게 이를 알린다. 공문을 멋대로 보낸 류경은 파직되고 유천우는 인물도(仁勿島)에 유배된다. 그런데 1271년 1월 유천우의 어머니가 톡토르게에 와서는 "내 아들과 류경은 죄가 같은데, 유독 내 아들만 섬으로 유배됐습니다. 청컨대 그 죄를 면해주시오."[5]라고 말한다. 톡토르는 화를 내며 류경도 섬으로 유배보냈고 둘은 3월에서야 다시 소환된다.

1월 관노 숭겸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홍다구와 함께 숭겸 등을 심문한다. 숭겸 등은 다루가치와 관료들을 죽이고 삼별초 세력에 투항하려고 했다고 자백한다. 홍다구는 이를 원에 대한 공격으로 연결해서 본국에서 개경에 병력을 보내 고려를 습격할 것을 톡토르에게 제안했는데, 톡토르가 끝내 불가능함을 고집해 이뤄지지 않는다. 2월에는 대부도민의 반란이 진압된 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주모자를 국문하고 처벌과 포상을 내린다. 톡토르는 고려 남방에 주둔한 몽골군이 현지에서 벌이는 행패를 인지하고 원종에게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안무사를 보낼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김련의 딸을 며느리로 맞은 것도 이 시점이다.

3월 양주민 장세 등이 반란을 계획하다 들통나 복주된다. 그 일당 천서(天瑞) 등이 쌍성총관부에 의탁하려고 쌍성총관 조휘의 병사 400명을 데리고 양주 지주사를 사로잡은 뒤 화주로 도망치려 한다. 톡토르가 파견돼 효유했으나 천서는 백성 등 1천여명을 데리고 화주로 떠나버린다. 4월에는 초파일에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첩보를 전해듣는다. 고려는 4월 초파일에 관등을 하는 풍속이 있는데 이 때 혼란을 틈타서 누군가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이다. 톡토르는 이 말을 믿고 성 밖에서 머물며 여러 날을 보냈지만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에서 고려에 문서를 보내, 병력을 징발해 진도의 반적들을 토벌할 것을 요구한다. 5월에는 홍다구가 그 일당과 무뢰배 500명을 이끌고 토벌에 나서는데, 톡토르가 교외에서 사열하고 말을 분배한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재추와 자제에게 말을 요구했는데도 수가 부족해 군졸들은 열에 하나만 말을 탈 수 있었고, 행군 중 민가에서 말을 약탈하는 사건도 발생한다. 김방경, 흔도, 홍다구 등은 진도에서 대승을 거두고 삼별초는 제주도로 도망친다.

풍토가 다른 곳에 부임한 탓인지 고려에 다루가치로 부임한지 1년 반정도 된 시점에서 병을 앓는다. 고려의 국의가 약을 지어 올렸는데 톡토르는
내가 병으로 위태로워 일어날 수 없으니, 만약 (약을) 먹고 죽으면 너희 나라를 참소하고 헐뜯는 이들이 반드시 고려가 독살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6]
라며 거절하고 약을 입에 대지 않는다. 결국 1271년 10월 9일에 객지에서 병으로 죽으니 고려 사람들도 안타까워했다고 전한다.

3. 가족관계

  • 아들
  • 며느리: 김씨

1271년 2월 톡토르가 재상 가문에서 며느리를 들이고자 했다. 고려에서 며느리 후보를 보이니 톡토르는 외모를 보고 원에 입조하기 위해 집을 비웠던 김련(金鍊)의 딸을 고른다. 김련의 집안에는 데릴사위로 들여온 남편이 있었으나 두려워 집을 나가버렸고, 톡토르는 바로 혼인시킬 것을 주장하니 김련이 미처 돌아오기 전에 결혼이 이뤄진다.


[1]원사』에서 이렇게 표기한 경우가 있다.[2] 近處諸城官吏多在, 何不殺之.[3] 欲啓於公, 乃殺之.[4] 可執三城守以來, 餘皆令殺之.[5] 吾子與柳璥同罪, 獨吾子配島. 請免之.[6] 我病殆不起, 若飮此而死, 則讒構爾國者, 必曰高麗毒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