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李芾, ?~1276년남송의 관원이자 군인으로, 자는 숙장(叔章)이고, 호는 긍재(肯齋)이며 현재 호남성(湖南省) 형양시(衡陽市) 출신이다.
2. 생애
2.1. 초기
생년 미상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똑똑했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아첨하지 않으며,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올바르고 기민하게 일을 처리하였는데, 간사한 인물들은 그를 속이지 못했다고 한다.그는 조상의 업적으로 일찍부터 남안사호에 임명되었고, 후에 기양위가 되었으며, 구황의 공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불이 기양현(祁陽縣)의 지현(知縣)을 하면서, 통치를 잘한 공적으로 호남안무사의 막관(幕官)이 되었다. 이 당시 이불은 영주(永州) 현지에서 장기간 항복하지 않은 도적을 성공적으로 처리하였다. 이불과 참의(參議) 등형(鄧炯)은 1,300명을 이끌고 도적 장시선(蔣時選)의 소굴을 공격하였고, 장시선 부자를 생포하였으며, 잔당은 스스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불은 마침내 상담현지현(湘潭縣知縣)이 되었다. 상담현의 유력자들은 전임 지현의 관리에 훼방을 놓았으나, 이불은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호적을 조사하고 세금을 추가 징수할 때 이들을 피하지 않아 세금과 노역이 공평하게 되었다 한다.
2.2. 가사도의 미움을 사다
그는 송 도종 덕우 원년 임안부(臨安府)의 부윤(府尹)이 되었다. 당시 남송 조정은 재상 가사도(賈似道)가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전임 부윤은 모든 일을 우선 가사도에게 보고하여 실행하였다. 그러나 이불은 가사도에게 보고하지 않고 또한 복왕부(福王府)에서 사람을 죽인 사건과 가사도의 집안 사람이 화공 무기를 마음대로 사용한 사건으로 인해 가사도에게 벌을 받았다. 가사도는 간관(諫官) 황만석(黃萬石)으로 하여금 탐장죄(貪贓罪)로 이불을 무고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부윤에서 파직되었다. 그는 사실상 청렴한 관리였다.2.3. 원나라 군대와 맞서다
원나라의 군대가 악주(鄂州)를 공격하였을 때, 이불은 다시 기용되어 호남제형(湖南提刑)을 맡았다. 이때 호남 각 현(縣)은 도적의 소요에 시달려 백성들이 달아나는 상황이었는데, 이불은 백성들을 징발하고 무장시켜 자경단을 조직하게 하였고, 민병들을 다시 형양 일대로 소집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또한 가사도의 군대가 무호(蕪湖)에서 패배하자 조정은 이불의 관직을 회복시켜 이불로 하여금 담주(潭州)를 관리하면서도 호남안무사(湖南安撫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호북(湖北)의 주군(州郡)은 모두 몽골군에게 점령되었다. 이불의 친구가 만류하였으나 이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내가 어찌 내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다가 실수할 수 있겠는가? 나는 대대로 국은을 입었지만, 이제 조정에서 나를 등용하여 온 가족을 국가에 바쳐야 한다.
그러고 임지에 부임하였다.아릭카야가 이끄는 군대는 담주(潭州)[1]를 침공하였고[2] 이불이 1275년 7월 담주에 도착했다. 이때 담주의 군대는 모두 징발되었으나 원나라의 선두부대는 상음(湘陰)과 익양(益陽) 각 현으로 진입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현지의 일부 토호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은 동시에 호북, 사천 등지에 지원군 파병을 청하였다. 이불은 이러한 힘을 모아 담주 사람들과 함께 원병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불은 대장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적을 맞섰으나, 불행히도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동년 9월, 이불은 또 다른 대장 계명에게 군사를 이끌고 저항하라고 명령했지만, 원군의 공세가 너무 강하여 송군이 출병하기도 전에 원군이 이미 담주를 포위했다.
혼란 중 이불은 2천명만을 소집한 뒤 유충효(劉孝忠)에게 명령하여 각 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10월, 성 내 탄약과 식량이 바닥났다. 원나라 군사들은 서벽(西壁)을 공격하였고, 유충효 등은 전력으로 응전하였으며, 이불은 위험을 무릅쓰고 친히 독전하였다. 부상당한 장사들에 대해 이불은 친히 안무하여 위로하였고, 매일 충의의 도로 이들을 격려하였다. 사상자 대부분은 한데 모아졌고, 사람들은 성을 올라 싸웠다. 원나라에 투항을 권하는 자들은 죽여서 군사들에게 보여주었다.
동년 12월 성 내 상황이 악화되자 병사들이 말하였다.
"형세가 이렇게 위급하니, 우리는 죽어도 아깝지 않지만,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불은 이 발언이 군심을 흔들까 염려하며 말하였다.나라가 평소에 너를 두텁게 키운 까닭에 오늘을 위해 여제를 사수할 것이고, 후언이 있는 자는 내가 먼저 너를 죽일 것이다.
1276년 1월 원나라 군사들이 성을 넘었지만 격퇴하지 못한다. 형주태수(衡州太守) 윤곡(尹谷)은 온가족과 함께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으며, 참의(參議) 양진(楊震)은 꽃밭 연못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불은 웅상각(熊湘閣)에 앉아 부하 심충(沈忠)을 부른 후 그로 하여금 자신을 포함한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여 모욕을 면하게 하였다. 심충은 거절했지만, 이불이 단호히 지시하자 심충은 울면서 승낙하였고 이불을 포함한 전 가족을 칼로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 심충은 후에 집에 돌아가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다시 불이 난 이불의 집으로 와서 불에 몸을 던져 죽었다.
2.4. 사후
담주의 소식을 들은 남송 조정은 이불을 단명전대학사(端明殿大學士)에 증하고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3. 평가
담주 백성들은 이 일을 듣고 가족이 모두 자살하고, 성에 빈 우물이 없으며, 숲에 목을 매는 사람이 많은 것과 비교된다고 말했다.이불의 일심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고상한 품성과 사적을 당시 사람들에게 칭송했을 뿐 아니라, 영원히 명성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