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9:13:58

고릉 전투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및 영향

1. 개요

기원전 202년(한 5년), 중국 초한쟁패기 시대에 전한(漢)의 군대와 초나라(楚) 군대가 고릉(固陵)[1]에서 벌인 회전.

광무산에서 대치하고 있던 한나라와 초나라는 휴전 협정을 맺고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갈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이것은 항우(項羽)가 인질로 붙잡고 있던 유방(劉邦)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데려오기 위한 꼼수였다. 초나라의 군대가 후퇴하자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은 지금이야말로 초나라를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고, 유방에게 진언을 올려 한신(韓信), 팽월(彭越) 등과 함께 연합을 이루어 항우를 포위할것을 제안하고 유방은 이를 받아들여 퇴각하는 초나라의 군대를 추격해 서서히 압박한다.

그러나 한신과 팽월이 약속한 기일에 맞추어 움직이지 않았고,[2] 초나라의 군대가 고릉(固陵)에 이르도록 포위망이 형성되지 않았다. 결국 퇴각하던 항우가 뒤로 돌아서 유방의 군대를 급습하였고, 한나라의 군대는 대패하게 된다.

2. 배경

한군과 초군이 광무산에서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을 때, 양국이 완전히 대등한 세력균형비를 가지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경제력이 보장된 관중 지역과 곡창지대로 이름난 오창을 가진 한나라 쪽으로 판세가 기울고 있었다.

당시의 초나라는 위협요소가 많았는데, 유수 전투를 통해 북방을 완전히 정벌하고 천하를 삼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한신, 계속해서 초나라의 후방을 파괴하며 보급선을 어지럽히는 팽월, 항우에게 몰살당한 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계속해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경포 등으로 인해 계속해서 광무산에서 유방의 한나라 본대만 상대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군량이 제때 보급되지 않아 먹을 것이 없어진 초나라 군사들은 계속해서 탈영을 했고, 이 와중에 수도 팽성마저 급습당하자 항우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대치상황에서 섣불리 군사를 물릴 수도 없으니 진퇴양난이었다.

그러나 유방 역시 이런 초나라의 실정을 알고도 쉽게 항우를 공격하기 어려웠는데, 항우가 유방의 가족들을 인질로 붙잡아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군은 대치상황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었으나, 국력 측면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초나라였다.

초군의 상태를 예의주시하던 장량과 진평은, 적절한 시기에 사자를 보내어 휴전을 맺자고 제의한다. 천하를 양분하여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항우 쪽에 있는 유방의 가족을 풀어주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대치 상황에 질려 있던 항우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조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인질을 안전하게 돌려받은 유방 입장에서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고, 때마침 장량과 진평이 진언을 올리자 퇴각하는 초나라 군대를 공격하기로 마음먹는다. 또한 한신, 팽월 등에게 사람을 보내어 약속한 날에 협공할 것을 명한다. 그런데 이들이 차일피일 출정을 미루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

3. 전개

항우 역시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휴전 협정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다만 광무산에서 대치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휴전을 구실삼아 퇴각하기로 했던 것이다. 팽성으로 후퇴하는 동안 한신과 팽월 등의 세력의 견제를 우려하여, 일부러 포위당하지 않는 장소를 골라 멀리 우회하는 루트를 선택했다. 유방이 쫓아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에는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을 듯.

그렇게 해서 초나라 군대는 고릉 지역까지 유방을 유인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항우는 종리매, 환초 등의 장수에게 명령해 군사를 매복시킨다. 당시 유방의 군사는 10만 정도, 초나라 군사는 3만 이하로 추정되는데, 상대적으로 적은 군사를 다시 나눈 데에서 항우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제대로 보급받지 못해 배고프고 지친 군사들이었음을 생각하면, 굳이 유방을 맞아들여 싸우기로 한 것은 가히 파격적인 결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유방 측에서는 한신, 팽월 등에게서 출정했다는 소식이 없자 점차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아군의 수가 많다고는 하나 점차 적국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형세가 불리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방은 고릉에서 공격 명령을 내린다. 포위의 계책을 진언한 장량 입장에서 몇 번 말렸겠지만 아마 유방이 들어먹지 않은 듯(...).

항우는 유방의 공세에 응전하여 또 한번 괴물같은 무력을 선보였고, 적절한 시기에 양쪽에서 튀어나온 종리매과 환초가 한나라 군대의 옆구리를 찔렀다.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한나라 군사들은 바로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유방은 어지러운 전황을 틈타 도주에 성공한다.

상황이 바뀌어 유방이 쫓기는 신세가 되고, 참호를 파고 버티는 유방과 다시 대치하고 있을 때 갑자기 관영이 나타났다. 고릉 전투 이전에 한신은 관영에게 초나라 지역을 평정토록 명령했는데, 관영은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팽성을 빠르게 함락시켰고, 주변 성읍은 줄줄이 항복해버린다. 그리고 한신이 움직이지 않아 한군이 곤경에 처하자 관영은 곧바로 유방 쪽을 우선하여 초나라 공격을 중단, 기병대를 거느리고 나는 듯이 고릉으로 돌진하여 진현[3]에서 항우를 쳤다. 유방도 이 기회를 놓칠세라 합공을 가했고 화들짝 놀란 항우는 결국 이번에도 물러나야 했으며, 곧 수도마저 함락되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비록 대승을 거두고도 항우는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돌려 회수를 따라 동쪽으로 후퇴한다. 조금 엉망이었지만 어쨌든 유방이 자체적으로 항우를 밀어내었으니, 전쟁을 장기화시키기가 힘들어졌음을 느낀 팽월과 한신도 은상이라도 획득하고자 유방에게 합류하였다.

4. 결과 및 영향

초나라의 승리로 끝났으나, 기울어가던 초한쟁패의 판국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고릉에서 싸우는 동안 초나라의 수도 팽성이 함락되는 결말을 맞이하였으니,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 항우에게 있어 최대의 위협은 북방에 버티고 앉아 초나라를 노리는 한신과 후방의 팽월, 그리고 남쪽의 구강 땅을 정벌하며 또다른 거대세력으로 커져가는 영포 등이었으며, 유방의 본대는 사실상 어그로 담당이었기 때문에 유방을 아예 붙잡거나 하지 못한 이상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 양상을 살펴보면 가짜 휴전 협정을 맺고 퇴각하는 초나라를 한나라가 추격하다가 한 방 얻어맞고 저지당한 전투로, 초나라 입장에서는 한나라의 추격을 잠시 막은 정도에 그친다. 오히려 고릉에서 주거니받거니 하는 동안 한군의 별동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으니, 전략적으로는 실패나 다름없다. 물론 항우 입장에서는 고릉에서 뒤돌아서서 한방 먹이지 않았으면 내내 한군에게 추격당하면서 병력이 줄어들었을테니 전투를 벌이기로 한 것 자체는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이겼다고 쓸데없이 또 대치를 선택하는 대신 한군이 비틀거리는 틈을 타서 재빨리 초나라 본토로 철수했어야 했다. 범증이 떠나고 난 다음부터 초나라 진영에서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없어졌는데, 고릉 전투는 그러한 점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 벌어진 해하 전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량이 계획한 초나라 포위망이 끝내 완성되고 항우는 최후를 맞이한다.

'항우는 퇴각하는 상황에서도 항우다' 정도의 감상 외에는 뽑아낼 게 별로 없는 전투라서, 초한지를 다루는 매체들은 대부분 고릉 전투를 잘 묘사하지 않는다. 이걸로 전세가 확 바뀌었으면 모를까, 초한쟁패의 커다란 흐름은 계속해서 초나라의 멸망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 이문열 초한지 정도가 예외적으로 한 장을 들여서 이 전투를 공들여 묘사하고 있다. 장의 제목도 '촛불은 꺼지기 전에 한번 빛난다'라는 아주 적절한(...) 제목이다.

다만 이 전투의 내막과 그 흐름에서 판단컨대,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제후들을 토사구팽한 것이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장량의 초기 계획대로 진행되어 한신, 팽월이 연합군을 끌고 왔다면 초한쟁패의 마지막 싸움은 해하 전투가 아니라 이 고릉 전투였을 텐데, 그들이 괜히 미적거리다가 초나라 포위계획이 늦춰졌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내어 날짜까지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았으니, 유방 입장에서 제후왕들을 괘씸하게 여긴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방은 거의 다 된 밥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마터면 자기 목숨이 날아갈 뻔 했으니, "제후 너네들은 나중에 두고 보자, 항우 끝장낸 다음에는 네놈들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참고로 영포는 고릉 전투의 책임과는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초나라가 후퇴하고 있을 때 유방의 지시대로 구강 지역을 평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포는 고릉 전투 직후에 회남 땅에 있는 주은을 회유하는 공을 세웠다. 항우의 측근이었던 주은이 유방 쪽으로 돌아서면서 구강 땅도 완전히 정벌되었고, 항우의 고립을 더욱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처음에 장량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서 부른 장수는 한신과 팽월이었으며, 영포는 고릉 전투 때 부르지 않았다. 영포가 해하 전투에서 참전한 것은 구강 정벌을 완수했기 때문이고, 유방도 영포를 의심하거나 견제한 정황은 없다.


[1] 허난성 타이캉 시[2] 흔히 영포도 같이 명령을 어겼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영포는 처음에는 초나라 남부를 공격하도록 따로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신과 팽월의 태업 때문에 위기에 빠지자 급하게 구원투수로 부른다.[3] 허난성 저우커우 시 회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