于吉
(? ~ 200년)
1. 개요
후한 시대의 도사로 서주 낭야국 사람.후한 순제(順帝) 시기 이전부터 살았다고 하는데 이 기록이 맞다면 200년 삼국지에서 나왔을 때 나이가 이미 10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다는 의미다.[1] 강표전과 수신기에 행적이 전해지며, 최후는 손책에게 사망하는것으로 같다.
2. 역사기록
《후한서》에는 우(于)와 비슷한 한자인 간길(干吉)로 기록되었다. 제자들을 거느리고 각지를 방랑하며 신비한 도술을 구사해 많은 백성들을 구했기 때문에 그 명성이 드높아 추종하는 세력이 많았으며, 그의 제자로는 궁숭(宮崇), 양해(襄楷) 등이 있어 이 책을 궁숭은 순제, 양해는 환제에게 바치려 했다고 전해진다.삼국지에는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쓸 당시에 기록된 기사가 아니라 배송지가 후대에 단 주석, 정확히는 《오서》 <손책전>에서 《강표전》과 그에 대해 평가를 단 《임지》, 《수신기》를 출처로 하는 대목으로 있다.
우희의 『임지(林志, 혹은 지림志林)』에 따르면, 후한 초기에 약초를 캐던 가운데 문득 도를 깨달은 백화(帛和)라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곡양(曲陽)의 천수(泉水) 강가에서 우길에게 2부 10권으로 된 유명한 도술서 태평요술을 주었고, 그는 당시의 도교 사상들을 정립하고 민간요법 등을 폭넓게 담아 도교에서는 신서(神書)라 칭해지는 태평청령도 170여 권으로 다시 펴냈다.[2]
《강표전》에서 손책은 제장들이 그를 버려두고 우길에게 몰려들자 제장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저자를 믿지 말라. 일찍이 교주자사 장진(張津)이 이같은 사도(邪道)를 믿고 따르다가 결국 남쪽 오랑캐(남이, 南夷)에게 죽임을 당했다." 손책은 어머니와 제장들의 구명을 뿌리치고 우길을 죽였다. 그러나 배송지는 손책이 장진보다 먼저 죽었기에[3] 강표전은 기록에 어긋난다고 서술하였다.
《수신기》에서는 손책이 허도를 습격하는 와중에 우길과 함께 길을 가다가, 장수들이 모여있자 질시하여 가뭄을 해갈하면 사면하겠다고 했으나, 비를 내리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후 손책이 혼자 있을 때마다 우길이 나타나서 손책은 점차 평상시의 모습을 잃기 시작했는데, 상처를 치료하던 중에 거울을 보았더니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이 아니라 죽은 우길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두려워진 손책은 거울을 깨트렸는데, 분개로 인하여 상처가 터져 손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4]
임지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손책이 우길을 죽였다는 기록은 애초에 우길과 손책의 시대가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만큼 신빙성이 있는 기사가 아니다.[5] 배송지 역시 강표전과 수신기의 기록을 모두 다루면서 양쪽 내용이 다른데,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서술하고 있다. 애초에 수신기는 야사이기도 하다.[6]
3. 삼국지연의
29편에서 홀연히 등장해 민심을 모으다가 손책에게 억울하게 죽고 나서 혼령이 되어 그를 저주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허공의 부하 삼총사와 함께 손책의 사망을 야기한 두 원인 중 하나.손책이 원소의 사신인 진진을 만나서 원소와의 동맹을 맺은 걸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던 중 장수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빠져나가자 그 이유를 알아본다. 알고 보니 우길이라는 도사가 왔다고 하자 백성이며 장수며 할 것 없이 그를 맞이하러 나간 것이었다. 이에 손책은 우길에게 백성들을 속이는 요망한 사기꾼이라고 비난했으나, 우길은 본인은 그 동안 백성들한테 아무것도 속이거나 빼앗은 것이 없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손책은 우길한테 너는 농사를 짓지도 않고 일도 하지 않는데 네가 먹는 음식이나 입는 옷은 그럼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이냐면서 더욱 비난을 퍼붓고는 당장 처형하라고 명한다. 이에 백성과 신하들은 물론이고 친동생인 손권을 비롯한 아내 대교와 모친 오부인까지 하나같이 우길을 두둔하며 말리자 손책은 더욱 화가 났다.[7] 그러자 여범이 "가뭄이 들었으니 비를 내리게 하라고 하시지요. 비를 내리면 살려주시고 못 내리면 그때 죽이셔도 늦지 않습니다."라며 손책을 만류하면서 동시에 후환이 없도록 절충안을 내고, 손책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우길을 불러다가 제단을 만들어줄테니 해갈의 단비를 내리게 하면 살려주겠으나 못하게 된다면 백성들을 기만한 죄를 물어 화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라 통보한다.
이에 우길은 묵묵히 수긍한 후 감옥으로 돌아왔지만 "내 명이 다했으니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고, 간수가 "비를 내리게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우길은 "설령 비를 내리게 하더라도 어차피 나의 천수는 다 한 상태이니 어차피 살아날 수가 없다."고 읊조린다. 다음 날 우길은 손책의 명령대로 화형대에 묶이고 장작이 거세게 타오른다. 이 때 먹구름이 몰려들었지만 막상 비가 내리지 않자 사람들은 통곡했으나 손책은 박장대소를 하면서 "거 봐라! 역시나 사기꾼이 아니지 않느냐?"라며 조롱했다.
그런데 그 순간 번개가 치더니 강이 넘치도록 비가 내리고, 모든 사람들이 우길을 칭송한다. 손책 또한 잠시 넋이 나갔으나 부하 장수들까지 옷이 젖건 말건 우길을 화형대에서 무사히 끌어내리며 절을 하자, 다시금 질투심과 분노가 치밀어서 우길을 죽이라고 명한다. 이에 좌우 사람들은 이미 약속대로 비를 내리게 하지 않았냐며 말렸지만 손책은 듣지 않고 죽이라는 명령을 고집했다. 그러고 한 병사에게 당장 우길을 죽이라고 협박하고, 주저하는 병사에게 "만일 저 놈을 안 죽이면 너부터 먼저 죽는다!"라고 하자 결국 병사는 어쩔 수 없이 칼을 빼들어 내리치고,[8][9][10] 우길은 그대로 목이 잘려 사망하며 시신마저 요사한 자를 경계하겠다는 손책의 명에 의해 공개적으로 전시당한다.
하지만 우길의 시신은 그날 밤에 바람과 함께 홀연히 사라지고, 이후엔 현실과 꿈을 가리지 않고 손책 앞에 계속 나타나며 조롱한다.[11] 하지만 이는 손책에게만 보일 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았기에 울화통이 터져가는 손책은 점점 수척해진다.[12] 이 와중에 손책이 우길의 환상에게 칼을 던졌다가 우길을 죽인 부하가 억울하게 목이 잘려서 머리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죽기도 했다.
오랫동안 환각과 분노에 시달리던 손책은 결국 온 몸의 상처가 터지면서 치명상을 입었지만 그제서야 이성을 되찾고, 병상에서 오부인, 손권, 대교 등에게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이야기의 모티브는 손책이 우길이 백성을 미혹했다는 이유로 제장과 오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살해당했다는 부분은 강표전, 우길이 비를 내리게 했으나 죽였다는 이야기는 수신기의 설화를 따 온 것이다. 또한, 일단 옥에 가두었다가 주변에서 그를 살려야한다고 간청하자 그를 질투해 오히려 죽이는 이야기의 구성은 손책이 죽인 유학자 고대의 죽음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4. 후대의 평가
이익이 저술한 성호사설의 11권에서는 좌자와 함께 괴이하면서도 거짓되고 미덥지 못한 무리라고 까였다.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우길/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다만 손책한테 죽은게 대략 200년이고 순제의 치세는 125년~144년이다. 8년 전까지만 해도 화제 시대 사람도 살아있었기에 순제 시기에 산 사람이 200년까지 살아있는 것은 고대 시기 수명이 짧았던 것을 감안해도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닌데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치 살아있지 못할 나이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강표전에서는 그저 100세에 가까울 것이라는 서술만이 있다.[2] 우희는 강표전의 기록에 대해서 평하면서, "후한 순제와 헌제 시대는 대략 50~60년이 되니, 우길은 백살이 가까웠을 텐데 죽을 죄가 아닌 것을 잔혹하게 죽였으니 아름답지 않다"라고 평했다.[3] 배송지는 왕범이 이주준추를 올린 것을 근거로 장진은 사섭의 전임자격으로 건안 16년(201년) 교주목이 되었다고 보았다.[4] 하지만 이 기록은 배송지 주에서 《오력》의 기록 뒷부분에 있는데, 《오력》에는 손책이 거울을 보고는 자신의 병세가 회복될 수 없음에 분개해 상처가 터져 당일 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송지는 《오력》의 기록이 신빙성이 더 높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도 오력의 내용이 현실성이 있다. 물론 수신기의 경우 태평도 신자들이 퍼트린 뜬소문이겠지만 현실성만 따져보자면 손책이 환각을 봤다고 할 경우 아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5] 다만 손책이 그 전부터 영토 내의 태평도 교단을 탄압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우길이 죽고, 그 망령으로 손책 역시 죽었다는 기록은 태평도 측에서 지어내서 퍼트린 이야기라는 주장도 있다. 임지의 기록이 맞다면 태평이란 이름 자체가 우길에게서 온 것이다.[6] 강표전은 진대(晉代)의 우박(虞薄)이 저술했는데, 수신기보다는 사서에 가까우나 역시 신빙성은 높지 않게 다뤄지고 있다. 형주의 영유권 분쟁에 대해서 강표전은 유비가 손권에게 형주를 빌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러 학자들에게 가루가 되게 까이는 대목이 신빙성이 낮은 대표적인 부분이다. 오나라 미화물이란 것이다.[7] 이문열 삼국지에선 원소의 사신으로 온 진진도 이를 만류한다.[8] 또는 본인이 직접 우길을 참한다.[9] 내리치기 전에 그 병사는 우길에게 용서를 빌지만, 우길은 괜찮다면서 어서 죽이라고 말했다.[10] 이문열 삼국지와 만화판에선 전자의 묘사를 따르고, 이현세 만화 삼국지에선 병사가 직접 나서는 후자의 묘사를 따른다.[11] 손책도 처음에는 눈 앞에 나타난 환각에게 주눅들긴커녕 요망하다고 꾸짖는 등 당당히 맞서지만, 결국 얼마 못 가 예전의 강건한 모습은 전부 잃어버리고 만다.[12] 판본에 따라 그 에피소드가 다양하여 마치 전설의 고향을 방불케 한다. 가령 도사들의 시설인 도관에 가서 마귀를 물리치는 의식을 진행하려 했으나 향만 사르고 절을 하지 않자 향 연기가 우길의 모습으로 변해서 손책을 꾸짖는다거나, 화난 손책이 도관을 불태우라고 하자 그 불타는 건물 속에서도 기와를 던지며 손책을 농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