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29 20:37:14

왕방연

王邦衍
생몰년미상

1. 개요2. 상세3. 시조4. 기타5. 창작물에서

1. 개요

조선 세조 때의 금부 도사이다. 단종영월로 유배갈 때 그를 호송해 간 금부도사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불명이나 정황상 조선 건국 후 왕씨 몰살이 한참 진행 중일 때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2. 상세

단종을 호송해 간 금부도사라면 당연히 세조실록에 기록이 있을 것인데, 정작 세조실록을 보면 왕방연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종의 강봉[1]과 유배를 다룬 세조 3년 6월 21일자의 기록에는 첨지중추원사 어득해에게 명하여 군사 50명을 주어 노산군을 영월로 호송하게 하였고 군자감 정 김자행과 판내시부사 홍득경이 이를 따랐다고만 되어 있다.출처 이에 대해 어득해의 명을 받아 김자행과 홍득경이 수행할 때 왕방연도 같이 있지 않았겠느냐고50명 중 하나라고 추측할 수 있다. 중추원 첨지사는 정3품 당상관이고, 군자감 정은 정3품 당하관, 판내시부사는 정2품이었으니 종5품인 의금부 도사는 이들과 같이 언급될 짬이 아니다. 따라서 50명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었다면, 실록에 이름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것이 당대 실록에서 왕방연의 존재를 추측할 만한 마지막 기록이다.

정작 왕방연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숙종실록의 기사로, 숙종 25년 1월 2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천지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단종 대왕(端宗大王)이 영월(寧越)에 피하여 계실 적에 금부 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정중(庭中)에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단종 대왕께서 관복(冠服)을 갖추고 마루로 나아오시어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하였었다. 그가 봉명신(奉命臣)으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貢生) 하나가 차마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천도(天道)는 논해야겠으니, 그 공생의 성명이 전해와서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으면 본도(本道)로 하여금 계문(啓聞)하게 하라."
그런데 이 기록을 따른다면 왕방연은 단종의 호송을 맡은 것이 아니라 사약을 운반한 금부도사가 된다. 숙종단종을 노산군에서 정식 임금으로 신원한 당사자인 만큼, 나름대로 단종에 대한 기록들을 많이 검토한 후 한 말일 텐데 어느 기록을 참고한 것인지조차 모호한 전설을 차용한[2] 데다 단종이 사사된 것이 아니다[3]라는 세조실록의 공식 주장을 뒤엎은 말이 된다. 그럼에도 이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세조 사후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 딱히 태클을 걸 사람도 이유도 없었거나, 이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다른 문서가 있었거나 둘 중 하나인 듯.

종합하면 왕방연은 단종의 호송을 맡은 사람 명단에 공식적으로는 없으며, 사약을 전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러한 야사의 인지도가 워낙 높아서, 일반적인 인식에서는 왕방연이 단종의 호송 임무와 사약을 전하는 역할을 모두 맡았다고 알려진 편이다. 당시 왕방연이 느꼈을 법한 그 비극적인 감정에 공감하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3. 시조

그가 단종을 호송하고 영월에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곡탄 언덕에 앉아 지었다는 시조 <단장가>가 있다. 문학 교과서에도 꽤 자주 실리는 네임드 시조로, 단종을 호송하고 오는 길에 지었다는 비화가 백이면 백 딸려나온다. 출전은 <청구영언>. 하지만 위에 언급했듯이 왕방연이 정말 단종을 호송한 뒤에 이 시를 지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원 출처인 청구영언 역시 왕방연 당대의 작품이 아니라 영조 대에 편찬된 책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을 잃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며 밤길을 가는구나.

4. 기타

  • 먹골역의 기원이 된 먹골배 설화의 주인공이다. 왕방연은 단종 호송 임무를 마친후 서울로 돌아와 벼슬을 그만두고 현재는 묵동이 된, 중랑천 가로 터잡아 살았다. 유배지로 떠나는 단종이 갈증으로 물을 마시고 싶어 했으나 물 한 그릇도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못했던 왕방연은 배나무를 심고 해마다 단종이 승하한 날이 되면 수확한 배를 올리고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 뒷날 왕방연이 죽고 무덤도 후손에 의해 이장되었으나 그가 심은 배나무는 남아, 먹골배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는 설화.[4]

5. 창작물에서

1990년 파천무에서 박칠용이 연기했다. 재밌게도 박칠용은 1994년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엄흥도를 연기한다.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허현호가 연기했다.


[1] '노산군'으로 봉해 흑역사 취급했다.[2] 신뢰도로 따진다면 <연려실기술>의 기록과 일치하기는 하지만, 시기상으로 따지면 연려실기술보다 숙종이 먼저다. 시대를 따지자면 선조 때 백사 이항복의 문집인 <지퇴당집>에 이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이것도 세조로부터는 한참 떨어진 시기의 저술이라 그냥 이런 기록도 있다 정도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3] 세조실록에서는 단종이 사약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장인 송현수와 금성대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자결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세조실록에는 왕방연이라는 인물이 나올 기회가 없다는 것.[4] 단 도시개발 정책으로 과수원은 없어졌고, 남양주시 별내면 일대로 재배지를 옮겨 남양주시 특산물로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