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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추존 황제 문조 익황제 | 文祖 翼皇帝 | }}}}}}}}} | ||
면류관 곤복 어진 | |||
출생 | 1809년 9월 18일 (음력 순조 9년 8월 9일) | ||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책봉 | 1812년 8월 12일 (음력 순조 12년 7월 6일) | ||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사망 | 1830년 6월 25일 (향년 20세) (음력 순조 30년 5월 6일) | ||
한성부 창덕궁 희정당 서협실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능묘 | 연경묘(延慶墓) → 수릉(綏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 | ||
1812년 8월 12일 ~ 1830년 6월 25일 (음력 순조 12년 7월 6일 ~ 순조 30년 5월 6일) | |||
조선 왕세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 |||
1827년 3월 15일 ~ 1830년 6월 25일 (음력 순조 27년 2월 18일 ~ 순조 30년 5월 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휘 | 영(旲) | |
부모 | 부왕 순조 모후 순원숙황후 | ||
형제자매 | 1남 4녀 중 장남 | ||
배우자 | 신정익황후 | ||
자녀 | 1남 (양자 1남)[1]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자 | 덕인(德寅) | ||
호 | 경헌(敬軒), 학석(鶴石), 담여헌(淡如軒) | ||
사당 | 문호묘(文祜廟) → 효화전(孝和殿) → 종묘 정전 15실(宗廟 正殿 15室) | ||
묘호 | 익종(翼宗) → 문조(文祖) | ||
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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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조선: 효명세자(孝明世子) → 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 (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 대한제국: 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 (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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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세자 및 추존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제24대 국왕 헌종의 아버지. 대한제국 고종 때 1대조의 양아버지로서 묘호가 조(祖)로 격상되고 황제로 재추존됐다. 아들 헌종이 아버지 효명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면서 올린 묘호는 익종(翼宗)이었는데, 고종이 국왕으로 즉위할 때 '익성군(翼城君)'으로 봉해지고 익종과 효유대왕대비(신정왕후 조씨)의 법적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아들 자격으로 1899년(광무 2년), 황제로 재추존하면서 문조(文祖)로 묘호를 바꿨다.[4]
2. 생애
2.1. 출생
효명세자의 이름은 영(旲)이며, 1809년(순조 9년) 8월 9일[5],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조와 순원왕후의 적장자로 태어났다.왕비의 원자 탄생은 명성왕후가 숙종을 낳은 이래 150년만의 일로, 창덕궁 인정전에서 백관이 모여 원자의 탄생을 하례하였다. 이때 순조는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모후인 효의왕후, 생모인 수빈 박씨에게 치사(致詞)와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렸으며, 생모인 수빈에게 세자나 세손에게만 쓰는 '저하(邸下)'의 경칭을 사용하여 부르도록 하유하였다.[6] 또한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구환과 증렬미, 요역 등을 탕감하라고 하교하였다.[7]
2.2. 세자 책봉
1812년(순조 12년) 7월 6일, 왕세자에 정식 책봉되었으며[8], 이 때 나이가 만 3세였는데 만 1세 전후로 세자에 책봉된 사도세자 못지 않은 많은 기대를 받으며 자라났다. 효명세자는 정말 오랜만에 세자로 책봉된 정실 왕비 소생 원자였으며, 왕비 소생 세자는 숙종 이후 처음.[9]1819년(순조 19년) 3월, 경희궁 경현당에서 관례[10]를 치르고 그해 10월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가례[11]를 올렸는데, 이 사람이 후에 고종 때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는 신정왕후 조씨이다.
외모도 출중했고 재능이 뛰어난 인물(한마디로 금수저면서 엄친아)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지내던 아버지 순조도 적장자 아들이던 효명세자에게 정말 기대를 많이 걸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제작에 직접 관여했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효명세자가 화원들에게 동궐도를 그리게 한 데에는 왕권 강화책과 연관이 있지 않나 해석한다.
2.3. 대리청정
내가 신미년 이후부터는 정섭(靜攝)하는 중에 있던 때가 많았고, 비록 혹 약간 편안하다고는 하나 때로는 항상 기무(機務)에 정체(停滯)됨이 많았으니, 국인(國人)이 근심하는 것은 곧 내가 스스로 근심하는 바이다. 세자는 총명(聰明)하고 영리(怜悧)하며 나이가 점차 장성하여 가니 요즘 시좌(侍坐, 참관)하거나 섭향(攝享)하게 하는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멀리는 당나라를 상고하고 가까이는 열성조(列聖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하는 일을 본받아 내 마음이 이미 정하여졌다. 한편으로는 노고(勞苦)를 분담하여 조양(調養)을 편하게 하는 것을 돕게 하고, 한편으로는 밝게 익혀서 치도(治道)를 통달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종사(宗社)[12]와 생민(生民)의 복이다. 조정에 나와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에 대계(大計)를 고하니, 왕세자의 청정(廳政)은 한결같이 을미년의 절목(節目)[13]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 《순조실록》 28권, 1827년(순조 27년, 청 도광(道光) 7년) 2월 9일 (을묘) 3번째기사.[14]
- 《순조실록》 28권, 1827년(순조 27년, 청 도광(道光) 7년) 2월 9일 (을묘) 3번째기사.[14]
순조의 건강이 날로 나빠지자 1827년(순조 27년) 2월,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廳政)을 명했고, 이후 4년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직접 국사를 주관하였다. 왕이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자 신하들은 크게 기뻐하며 환영하였을 정도로 매우 기대받았다. 과거에는 임금이 세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면 신하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서 대리청정하라는 전교를 걷어달라고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이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는데 세종이 "아파 죽겠다"고 일갈하고 나서야 간신히 집행될 수 있었다. 숙종 때는 세자인 경종에게 대리청정이 명해지자 소론에서는 윤지완 등이 도끼 상소까지 하며 반대하는 등 분위기가 너무 험악했었다.[15] 영조가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세손의 반대파 홍인한,[16] 정후겸은 물론 김상철, 한익모 등 당시의 대신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나 결사 반대했다.
그런데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때는 남공철, 김재찬, 한용귀, 김사목, 이상황, 심상규 등 당시의 중신들이 전부 두 팔을 벌려 환영하며 비망기(왕의 서무 명령)를 그야말로 찬양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표현될 정도였다.[17] 이에 효명세자는 이전의 많은 사례에서 그랬듯이 의례적으로 몇 차례 거절을 했으나[18] 아버지 순조는 대리청정으로 장난치려는 게 아닌 정말로 진심이었고 전폭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빠르게 대리청정이 아들 효명세자에 의해 시행되었다.
효명세자는 20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공직 기강을 잡았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 아버지 순조 통치 시기는 순조가 잦은 병환으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기강이 상당히 해이해져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 실록 기사를 보면 직전까지와는 다르게 파직, 탄핵, 유배, 국문, 해임 등의 처벌과 관직 제수 및 시상 등 상벌과 관련된 기사가 쏟아진다. 관리들을 감시하고 부정부패를 감독해야 할 왕이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 내부의 여러 곳들이 고여서 썩어있었던 것. 효명세자는 "어느 수령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자 엄한 벌을 내리며 철저히 단속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상하를 막론하고 정승도 직접 제수하여 단순히 권한대행을 넘어서 인사권 문제도 다루는 등 실질적인 군주의 역할을 도맡아 진행했는데 이 때 기용된 인물 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는 박규수다.
순조는 이러한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을 월권이라고 언짢아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세자를 지원하면서 뒤에서 힘을 바짝 실어줬다.[19] 정치적 파벌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순조도 정치적인 의도가 있어 대리청정을 실시했던 게 아니라, 정말로 몸이 안 좋아서 아들에게 전적으로 믿고 맡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효명세자도 이에 질세라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표현하고 아버지 순조의 권위를 드높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순조의 '탄신 진연(誕身陳延)' 등의 주요 연회들을 조선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는 것과 더불어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 연회들의 핵심에는 '정재'라고 불리는 궁중 무용이 있었는데 효명세자는 정재의 대부분을 직접 수정하거나 다듬는 등 예술에도 더욱 재능을 드러냈다. 고구려무와 같은 창작 무용도 효명세자의 명으로 만들어졌고 동궐도 제작에 관여한 것과 각종 시와 문집에 효명세자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므로 그의 생애가 더 길었다면 할아버지 정조가 갖고 있는 문예부흥 군주의 이미지는 효명세자의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효명세자를 직접 발레 공연에까지도 나섰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견주어 '조선의 태양왕(太陽王)'으로 부르기도 한다. 검무(劒武)에 쓰이는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노는 독특한 구조의 칼을 도입한 사람도 바로 효명세자.
이처럼 아버지 순조와 아들 효명세자의 관계는 "권력은 부자 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격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리청정 시기에도 전혀 잡음이 나오지 않았으며, 부자 간의 돈독한 관계 덕분에 조정에도 모처럼 활력이 찾아오는 듯 했다. 그러나 잘될 것만 같았던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얼마 가지 않아 너무나도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만다.
2.4. 이른 죽음
아버지 순조와 여럿 신하들의 여러 기대 속에 대리청정을 잘 하던 효명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렸고, 1830년(순조 30년) 음5월 6일, 불과 22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20] 이덕일은 안동 김씨들의 독살설을 제기했지만, 이 사람이 제기한 수많은 독살설이 그렇듯 근거는 전혀 없다. 이덕일이 퍼뜨린 인식과 달리 세자가 대리청정 기간 동안 세도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가문간 싸움을 회피했던 김조순(1832년 卒)이 아직 살아있었으며 각혈(刻血) 후 어의들이 갖은 방도를 쓰다가 재야에 있던 정약용[21]까지 부르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인지 과로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워낙 창창한 나이에 급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에 사헌부, 사간원, 옥당, 춘방 등에서 왕세자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들을 엄하게 처벌하고 사망 원인을 정확히 조사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순조는 자식의 죽음으로 슬픈 마당에 그런 일까지 벌이고 싶지 않았는지 거절한다.https://sillok.history.go.kr/id/kwa_13005006_009 순조는 아내 순원왕후와 더불어 아들 효명세자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는데, 다음은 순조가 친히 직접 쓴 '지문(誌文)'과 '제문(諸文)'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한(恨)이 절절이 느껴진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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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이미 중전 순원왕후 소생의 왕자[25]와 후궁 소생의 영온옹주[26]가 죽었던터라 순조의 병은 깊어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순조는 효명세자의 죽음에 이어 2년 후 두 딸 명온공주와 복온공주까지 자신보다 먼저 요절하자 이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2년 뒤인 1834년(순조 34년), 세상을 뜨게 된다. 훗날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까지 요절하면서 정조로부터 이어진 직계혈통은 사실상 단절되고 만다. 그나마 사도세자의 자손인 철종이 순조의 양자로 입적(입승대통)하여 뒤를 이었지만 그마저 죽으면서 효종으로부터 이어진 모든 혈통이 완전히 단절되고 효명세자의 양자로 지정된 고종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법적으로는 사도세자의 후손이지만 혈통상으로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으로 무려 선왕 철종과는 17촌의 차이가 난다.
추존(追尊) 문조(文祖), 문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東九陵) 내에 동원이강릉 형식의 '수릉(綏陵)'. 본래 효명세자는 죽고 나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의 의릉(懿陵) 왼쪽 언덕 언저리에 장사 지냈었지만, 풍수에 관한 논의가 있어서 철종 때인 1855년(철종 6년)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으며 1890년(고종 27년) 4월, 대왕대비였던 아내 신정왕후 조씨가 승하하자 함께 합장(合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동구릉을 방문하면 팸플릿(지도 약도)을 하나 주는데 팸플릿에 적혀 있는 추천 관람 코스대로 동구릉을 관람하게 되면 가장 먼저 보는 능이 수릉이다. 사실 동구릉은 팸플릿의 추천 코스대로 수릉부터 걸어가서 관람하는게 오히려 집에 돌아갈 때 편하다.
3. 여담
- 효명세자가 안동 김씨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풍양 조씨를 적극 기용했다는 말이 있으나 대리청정 기간 동안 그가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는 모습은 보인 적이 없다. 김조순의 아내(효명세자의 외할머니)가 죽자 직접 찾아가 문상(問喪)하는 등 최고의 예우와 존중을 보여주었고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27]이 부임지에 첩을 데려가다가 난리난 적이 있었는데[28] 신하들이 김유근을 탄핵하자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탄핵한 신하들을 유배보내 버렸다.[29] 물론 왕권 강화를 꿈꿨던 효명세자였기에 안동 김씨를 마냥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았을 수 있으며 오히려 방심하게 했다가 동시에 제거할 타이밍만 잡으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안동 김씨를 견제할 마음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행하지는 않은 것은 사실이며 집권 기간 동안 처가인 풍양 조씨에 러브콜을 보낸 흔적도 없다. 효명세자는 1827년(순조 27년) 2월 9일부터 대리청정에 들어가서 1830년(순조 30년) 5월 6일 죽는데 그 동안 김유근, 김이교, 김이재 등 안동 김씨들은 고위 관직을 다 해먹었다.
- 만약 살아서 왕위에 즉위해 20~30년 정도의 재위기를 보냈을 경우 아편전쟁(1차 1840~1842년, 2차 1856~1860년)이나 흑선내항(1853년) 같은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른 사건들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30] 이런 격동기에 어린 나이에 즉위해 요절한 군주나 산에서 나무하다 갑자기 끌려온 군주가 아니라 강력한 권력의지를 가진 준비된 군주가 재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에서 국내의 많은 대체역사물 작가들이 그의 즉위를 역사의 중요한 분기로 취급하곤 한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나름 개혁을 시도한 흥선대원군의 집권까지는 무려 34년의 시간이 있는데, 이 정도면 거의 일제강점기 수준의 시간이니 조선을 일본마냥 열강 수준으로 만들지는 못해도 태국처럼 식민지배를 면할 체질개선 정도는 기대할만 하다.
- 고종은 그의 양자로서 즉위했기 때문에'(입승대통/立承大統)' 여러 차례 시호와 존호를 올렸다. 그래서 문조의 최종적인 정식 시호는 아래와 같은데 황제라는 칭호를 제외하고 자그마치 113자.[31]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 순조와 효명세자는 단과자를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청나라로 간 사신단이 챙겨오는 달고 기름진 월병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6살 때 외숙부 김유근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었는데 내용인즉슨 "지난번에 보내주신 두 봉지의 청나라 과자가 너무 맛있었으니 나중에 또 보내주시길 바랄게요 좀 더 사주세요."
4. 어진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 반소된 문조(효명세자)의 어진들 |
위 어진들은 복식 연구에서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지만, 한국 전쟁 이후인 1954년 12월에 발생한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인해 초상화가 불에 탔을 때 하필이면 세로로 불탄 것이 얼굴을 포함해 타버리고 나머지만 남아서 복구가 불가능하게 돼버렸다.
선원보감에 실린 문조 초상화 | 열성어진에 실린 문조 초상화 |
복원된 문조의 모사(慕寫)한 어진 |
5. 가계
순조와 순원왕후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동복 여동생 명온공주(明溫公主), 복온공주(福溫公主), 덕온공주(德溫公主)와 이복 여동생 영온옹주(永溫翁主)가 있다. 동복 남동생도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5.1. 친가(전주 이씨)
5.2. 외가(안동 김씨)
- 외고조부: 증 의정부좌찬성(贈 議政府左贊成) 김달행(金達行)
- 외증조부: 증 영의정 서흥부사(贈 領議政 瑞興府使) 김이중(金履中)
- 외조부: 영안부원군 충문공(永安府院君 忠文公) 김조순(金祖淳)
5.3. 처가(풍양 조씨)
- 장인증조부: 경상도관찰사 병조판서 문익공(慶尙道觀察使 兵曹判書 文益公) 조엄(趙曮)
- 장인조부: 지중추부사 숭록대부 효문공(知中樞府事 崇祿大夫 孝文公) 조진관(趙鎭寬)
5.4. 배우자 / 자녀
- 정비: (추존)신정익황후 조씨(神貞翼皇后 趙氏)
- 장남: (추존)헌종 성황제(憲宗成皇帝) 이환(李烉)
- 며느리: (추존)효현성황후 김씨(孝顯成皇后 金氏)
- 며느리: (추존)효정성황후 홍씨(孝定成皇后 洪氏)
- 서며느리: 순화궁 경빈 김씨(順和宮 慶嬪 金氏)
- 서며느리: 정빈 윤씨(貞嬪 尹氏)
- 서며느리: 화락당 숙의 김씨(和樂堂 淑儀 金氏)
- 차남(양자): 고종 태황제(高宗太皇帝) 이명복/이재황/이형/이희(李命福/李載晃/李㷩/李熙)
- 양며느리: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 양손자: 순종 효황제(純宗孝皇帝) 이척(李坧)
- 서며느리: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 양손자: (사시)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 이은(李垠)
- 서며느리: 영보당 귀인 이씨(永寶堂 貴人 李氏)
- 양손자: (추증)완효헌친왕(完孝憲親王) 이선(李墡)
- 서며느리: 귀인 장씨(貴人 張氏)
- 양손자: 의친왕(義親王) 이평길/이강(李平吉/李堈)
- 서며느리: 내안당 귀인 이씨(內安堂 貴人 李氏)
- 서며느리: 보현당 귀인 정씨(寶賢堂 貴人 鄭氏)
- 양손자: 왕자(王子) 이우(李堣)
- 서며느리: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梁氏)
- 양손녀: 덕혜옹주(德惠翁主)
- 서며느리: 광화당 귀인 이씨(光華堂 貴人 李氏)
- 양손자: 왕자(王子) 이육(李堉)
- 서며느리: 삼축당 김씨(三祝堂 金氏)
- 서며느리: 정화당 김씨(貞和堂 金氏)
문조의 왕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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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저서 / 문화재
6.1. 관련 저서
- 《경헌집(敬軒集)》 12권, 시집 모음
- 《담여헌시집(淡如軒詩集)》, 시집 모음
- 《동궐도(東闕圖)》
- 《경헌시초(敬軒詩草)》
- 《학석집(鶴石集)》 6권, 문집
6.2. 관련 문화재
- 왕세자 입학 도첩(王世子入學圖帖)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07호
- 효명세자 예찰(孝明世子睿札)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07호
- 부산 범어사 황실축원 장엄수(釜山梵魚寺皇室祝願莊嚴繡) - 부산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
- 익종대왕 어진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7. 대중매체
사극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시기를 살았고 그마저도 일찍 죽었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다뤄진 일은 드물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다뤄진다면 주로 대체역사물에서 다뤄지는 편.- 근육조선의 작가인 차돌박E의 신작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에선 주인공들의 역사지식과 의학지식을 접하게 된 정약용의 치료로 원 역사에서처럼 급사하는 일을 피했다. 이후 영국을 방문하고서 조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귀국 후 개혁정책을 펼치고, 순조의 요동정벌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즉위한다.
- 주간 신(神)에서는 이산이 주간 신이 된 한국인 김철수에게 요청하여 소현세자가 효명세자로 환생하여 태어났고, 원래 역사의 순조가 될 왕세자 이공을 폐하고 이영을 왕세손으로 삼아 왕위를 이으며 영조, 광조[35] 못지 않은 위대한 업적들을 세웠고, '대한(大韓)'이라는 황제국이 되었음을 선포했으며, 종국에는 입헌군주국을 선포하였다. 사후 문조(文祖)라는 묘호를 받았다.
8. 관련 문서
- 고구려무
- 고종(대한제국)
- 김조순
- 김좌근
- 대리청정
- 동구릉
- 동궐도
- 박규수
- 범어사
- 부산 용두산 대화재
- 세도 정치(안동 김씨, 풍양 조씨)
- 숙의 박씨(순조)
- 순원왕후
- 순조
- 신정왕후 조씨
- 이달의 문화인물(2005년 11월)
- 조만영
- 처용무 / 춘앵전
- 헌종
-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문조처럼 비슷하게,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의 희망이었으나 요절했다.
[1] 효명세자는 신정왕후 조씨로부터 아들 헌종만 얻었으나, 추후 헌종이 자식없이 단명하고 철종 연간을 지나서서 철종도 후사 없이 30대에 사망하자, 대를 잇기 위해 당시 왕실의 제일 최고어른인 신정대왕대비가 흥선군의 차남 이명복을 다음 왕위을 잇도록 하기 위해, 효명세자의 아들로 양자 입적하고 왕위 계승을 하도록 정식 지명하게 되는데 바로 고종이다. 그렇기에 법적으로 고종은 헌종과 더불어 효명세자의 아들이다.[2]
1차 추상 헌종 13년 11월 19일
2차 추상 철종 4년 8월 20일
3차 추상 고종 3년 2월 16일
4차 추상 고종 3년 11월 17일
5차 추상 고종 5년 11월 8일
6차 추상 고종 12년 11월 26일
7차 추상 고종 13년 11월 11일
8차 추상 고종 15년 11월 29일
9차 추상 고종 19년 11월 18일
10차 추상 고종 23년 11월 27일
11차 추상 고종 27년 10월 8일
12차 추상 고종 29년 6월 24일
13차 추상 광무 5년 12월 26일[3]
1차 추상 순조 30년 5월 12일
2차 추상 헌종 즉위년 11월 19일
3차 추상 광무 3년 12월 23일[4] '종(宗)' 자를 쓴 기존 묘호 '익종'을 '조(祖)' 자를 쓴 묘호로 격상하고자 하니 태조의 직계 조상 추존왕 중에 익조(翼祖)가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었기 때문. 다만, 묘호에 있던 '익(翼)' 자는 묘호 대신 시호에 넣어 익황제(翼皇帝)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황제로서 묘호를 문조로 격상하여 추존했음에도 보통은 이전에 받은 묘호인 익종이나 효명세자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아서 유명하다.[5]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8월 9일 (정유) 2번째기사. #.[6]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8월 15일 (계묘) 1번째기사. #.[7]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8월 15일 (계묘) 3번째기사. #.[8] 《순조실록》 16권, 순조 12년(1812년, 청 가경(嘉慶) 17년) 7월 6일 (병자) 1번째기사. #.[9] 경종은 사친 희빈 장씨가 궁녀에서 승은을 받은 승은 후궁인 시절 태어나 결국 인현왕후의 양자 자격으로 왕이 되었고, 영조는 궁중 무수리로 추정은 하지만 출신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숙빈 최씨 소생으로 왕세제 책봉 당시 부랴부랴 나이 차이가 얼마 안나는 계비 인원왕후의 양자가 되어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효장세자는 승은 후궁도 아닌 일개 왕자의 첩에게서 나서 중전 정성왕후 슬하로 입적했고, 사도세자는 궁녀 출신 승은 후궁이던 영빈 이씨 소생으로 역시 중전인 정성왕후의 양자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정실인 혜경궁 홍씨의 소생이지만 아버지가 동궁 시절에 태어났고 그마저 생부모를 살아 생전 왕과 왕비로 추존하지 못했다. 순조는 간택 후궁인 수빈 박씨 소생으로 중전 효의왕후 슬하에 양자로 입적했으니 정조를 제외하고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10]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3월 20일 (임자) 1번째기사. #.[11]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10월 14일 (계묘) 1번째기사. #.[12] 종묘와 사직.[13] 정조가 세손시절에 1775년(영조 51년), 대리청정을 하던 선례를 말한다.[14] #.[15]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노론은 오히려 좋아하였다.[16] 근데 이 사람은 세손의 작은 외할아버지이다.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이복동생. 자기 형의 외손자를 반대한 것.[17] "신(臣) 등은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여서, 내려온 비망기를 삼가 보고는, 기뻐서 발을 구르고 춤추면서 앙달(仰達, 우러러 여쭘)할 바를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 《순조실록》 28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2월 9일 (을묘) 4번째기사. #.[18] 대리청정이나 양위 등 민감한 사안은 자칫 '불충(不忠)' 문제로 걸고 넘어지거나 심하면 역모죄로도 치부될 수 있기 때문에, 하라고 해서 덥석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되었다. 아무리 어느 정도 합의가 된 사안이라고 해도 자신은 권력에 뜻이 없다는 식으로 한두 번은 석고대죄를 하며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미덕이자 의무였으며, 조선의 많은 왕들이 이걸 가지고 소위 '충성심 테스트' 내지는 '권력 기강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써먹기도 했다. 이런식으로 충성심 테스트와 함께 권력 기강을 잡기 위해서 아버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세자를 아들이 아닌 왕위에 도전하는 위험인물로 생각하여 늘 괴롭히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태종, 선조, 영조 등이 있다. 위에서 신하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는, 신하들도 적극 반대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불충 문제로 곤욕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19] 이러한 점은 순조와 증조부인 영조가 극명히 차이를 보인다. 영조의 사례를 보자면,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뭐라도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월권이랍시고 신하들 앞에서 대놓고 아들을 흉보고, 또 언제는 국사를 논할 때 자신에게 물어봤다고 그거 하나 결단치 못한다고 크게 면박을 주는 등 대리청정하는 세자에게 기대는커녕 다 세자 탓이라고 일삼았다. 애초에 영조는 순조와 달리 진심으로 대리청정을 맡기려던 게 아니라 아들을 테스트해보고 대놓고 면박을 주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20]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1830년, 청 도광(道光) 10년) 5월 6일 (임술) 3번째기사. #.[21]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귀양보냈다.[22] 한편 사도세자의 묘지문도 영조가 직접 썼다고 하는데 효명세자 관련 내용을 사도세자와 비교하면서 읽으면 내용은 정반대지만 비슷한 씁쓸함이 느껴진다.[23] 모든 벼슬아치와 유생을 의미함.[24] 임금의 적장자(嫡長子).[25] 효명세자의 친동생으로 대군(大君)에 봉해지기 전에 요절했다.[26] 순조의 유일한 서녀로, 어릴 때부터 몸이 불편하여 말을 못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복오빠인 효명세자가 굉장히 아낀 여동생이었다.[27] 효명세자의 외삼촌[28] 웬 아전이 김조순과의 면담을 요청했다가 거부되자 뛰어들어 김조순의 서제부, 종 2명, 주모를 베어버렸다.[29]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5월 24일 (기해) 1번째기사. #.[30] 참고로 조선에 최초로 교역을 요구한 이양선인 암허스트호가 효명세자 사후 2년 시점인 1832년이다.[31] 원래는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의 34자였다. 그러나 1863년(음력 즉위년), 1868년(고종 5년), 1875년(고종 12년)과 1876년(고종 13년), 1878년(고종 15년), 1883년(고종 20년) 음력 1월(임오군란 직후 / 신정왕후 조씨 왕대비 즉위 50주년), 1886년(고종 23년) 11월,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로 재추존한 뒤에는 1890년(고종 27년) 10월, 1892년(고종 29년) 1월(조선 건국 500주년), 1902년(광무 6년)인(고종 즉위 40주년) 등 10차례에 각각 8자씩 80자를 추가했다.[32] 친할머니는 정조의 간택 후궁인 현목수비 박씨이다.[33] 1848년(헌종 14년)에 태어나자마자 요절하였다.[34] 다만, 헌종도 지지 기반이 없는데도 재위 말년을 보면 알겠지만 혼자서 안동 김씨 세도를 흔들리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5] 원 역사의 정조
1차 추상 헌종 13년 11월 19일
2차 추상 철종 4년 8월 20일
3차 추상 고종 3년 2월 16일
4차 추상 고종 3년 11월 17일
5차 추상 고종 5년 11월 8일
6차 추상 고종 12년 11월 26일
7차 추상 고종 13년 11월 11일
8차 추상 고종 15년 11월 29일
9차 추상 고종 19년 11월 18일
10차 추상 고종 23년 11월 27일
11차 추상 고종 27년 10월 8일
12차 추상 고종 29년 6월 24일
13차 추상 광무 5년 12월 26일[3]
1차 추상 순조 30년 5월 12일
2차 추상 헌종 즉위년 11월 19일
3차 추상 광무 3년 12월 23일[4] '종(宗)' 자를 쓴 기존 묘호 '익종'을 '조(祖)' 자를 쓴 묘호로 격상하고자 하니 태조의 직계 조상 추존왕 중에 익조(翼祖)가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었기 때문. 다만, 묘호에 있던 '익(翼)' 자는 묘호 대신 시호에 넣어 익황제(翼皇帝)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황제로서 묘호를 문조로 격상하여 추존했음에도 보통은 이전에 받은 묘호인 익종이나 효명세자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아서 유명하다.[5]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8월 9일 (정유) 2번째기사. #.[6]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8월 15일 (계묘) 1번째기사. #.[7]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8월 15일 (계묘) 3번째기사. #.[8] 《순조실록》 16권, 순조 12년(1812년, 청 가경(嘉慶) 17년) 7월 6일 (병자) 1번째기사. #.[9] 경종은 사친 희빈 장씨가 궁녀에서 승은을 받은 승은 후궁인 시절 태어나 결국 인현왕후의 양자 자격으로 왕이 되었고, 영조는 궁중 무수리로 추정은 하지만 출신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숙빈 최씨 소생으로 왕세제 책봉 당시 부랴부랴 나이 차이가 얼마 안나는 계비 인원왕후의 양자가 되어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효장세자는 승은 후궁도 아닌 일개 왕자의 첩에게서 나서 중전 정성왕후 슬하로 입적했고, 사도세자는 궁녀 출신 승은 후궁이던 영빈 이씨 소생으로 역시 중전인 정성왕후의 양자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정실인 혜경궁 홍씨의 소생이지만 아버지가 동궁 시절에 태어났고 그마저 생부모를 살아 생전 왕과 왕비로 추존하지 못했다. 순조는 간택 후궁인 수빈 박씨 소생으로 중전 효의왕후 슬하에 양자로 입적했으니 정조를 제외하고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10]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3월 20일 (임자) 1번째기사. #.[11]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10월 14일 (계묘) 1번째기사. #.[12] 종묘와 사직.[13] 정조가 세손시절에 1775년(영조 51년), 대리청정을 하던 선례를 말한다.[14] #.[15]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노론은 오히려 좋아하였다.[16] 근데 이 사람은 세손의 작은 외할아버지이다.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이복동생. 자기 형의 외손자를 반대한 것.[17] "신(臣) 등은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여서, 내려온 비망기를 삼가 보고는, 기뻐서 발을 구르고 춤추면서 앙달(仰達, 우러러 여쭘)할 바를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 《순조실록》 28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2월 9일 (을묘) 4번째기사. #.[18] 대리청정이나 양위 등 민감한 사안은 자칫 '불충(不忠)' 문제로 걸고 넘어지거나 심하면 역모죄로도 치부될 수 있기 때문에, 하라고 해서 덥석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되었다. 아무리 어느 정도 합의가 된 사안이라고 해도 자신은 권력에 뜻이 없다는 식으로 한두 번은 석고대죄를 하며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미덕이자 의무였으며, 조선의 많은 왕들이 이걸 가지고 소위 '충성심 테스트' 내지는 '권력 기강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써먹기도 했다. 이런식으로 충성심 테스트와 함께 권력 기강을 잡기 위해서 아버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세자를 아들이 아닌 왕위에 도전하는 위험인물로 생각하여 늘 괴롭히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태종, 선조, 영조 등이 있다. 위에서 신하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는, 신하들도 적극 반대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불충 문제로 곤욕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19] 이러한 점은 순조와 증조부인 영조가 극명히 차이를 보인다. 영조의 사례를 보자면,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뭐라도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월권이랍시고 신하들 앞에서 대놓고 아들을 흉보고, 또 언제는 국사를 논할 때 자신에게 물어봤다고 그거 하나 결단치 못한다고 크게 면박을 주는 등 대리청정하는 세자에게 기대는커녕 다 세자 탓이라고 일삼았다. 애초에 영조는 순조와 달리 진심으로 대리청정을 맡기려던 게 아니라 아들을 테스트해보고 대놓고 면박을 주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20]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1830년, 청 도광(道光) 10년) 5월 6일 (임술) 3번째기사. #.[21]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귀양보냈다.[22] 한편 사도세자의 묘지문도 영조가 직접 썼다고 하는데 효명세자 관련 내용을 사도세자와 비교하면서 읽으면 내용은 정반대지만 비슷한 씁쓸함이 느껴진다.[23] 모든 벼슬아치와 유생을 의미함.[24] 임금의 적장자(嫡長子).[25] 효명세자의 친동생으로 대군(大君)에 봉해지기 전에 요절했다.[26] 순조의 유일한 서녀로, 어릴 때부터 몸이 불편하여 말을 못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복오빠인 효명세자가 굉장히 아낀 여동생이었다.[27] 효명세자의 외삼촌[28] 웬 아전이 김조순과의 면담을 요청했다가 거부되자 뛰어들어 김조순의 서제부, 종 2명, 주모를 베어버렸다.[29]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5월 24일 (기해) 1번째기사. #.[30] 참고로 조선에 최초로 교역을 요구한 이양선인 암허스트호가 효명세자 사후 2년 시점인 1832년이다.[31] 원래는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의 34자였다. 그러나 1863년(음력 즉위년), 1868년(고종 5년), 1875년(고종 12년)과 1876년(고종 13년), 1878년(고종 15년), 1883년(고종 20년) 음력 1월(임오군란 직후 / 신정왕후 조씨 왕대비 즉위 50주년), 1886년(고종 23년) 11월,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로 재추존한 뒤에는 1890년(고종 27년) 10월, 1892년(고종 29년) 1월(조선 건국 500주년), 1902년(광무 6년)인(고종 즉위 40주년) 등 10차례에 각각 8자씩 80자를 추가했다.[32] 친할머니는 정조의 간택 후궁인 현목수비 박씨이다.[33] 1848년(헌종 14년)에 태어나자마자 요절하였다.[34] 다만, 헌종도 지지 기반이 없는데도 재위 말년을 보면 알겠지만 혼자서 안동 김씨 세도를 흔들리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5] 원 역사의 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