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3:09:03

백정

형평운동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한국사의 계층 백정을 제외한 동음이의어에 대한 내용은 백정(동음이의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백정1.jpg

1. 개요2. 고려3. 조선시대4. 구한말~일제강점기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5.1. 2010년대 이후
6. 기타7. 백정이 직업 또는 모티브인 캐릭터

1. 개요

백정()은 고대부터 내려오던 한반도에 있었던 계층에 대한 호칭이다. 현대의 인식으로는 옛날에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서 파는 일을 했던 소위 도축업자로서 조선시대에는 평민 하류에 속해 천민노비보다 사회적 인식이 나빴으며 조선 전기에 중대한 사회문제로 취급받았다. 때문에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백정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연히 함부로 도축업자 또는 관련 종사자를 이따위 멸칭으로 부르면 매우 큰 실례이니 조심하자.[1]

그러나 정확하게 도축, 발골, 정형을 담당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백정이라고 불린 것은 조선시대 세종 이후의 일이었다. 이전에는 백정은 일반 백성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조선 세종 이후 백정이 다른 뜻으로 바뀌고 나서도 도축업자가 백정일 수는 있었지만 모든 백정이 다 도축업자는 아니었으며 백정이 아닌 양인 도축업자도 있었으니 모든 도축업자가 백정도 아니었다.[2] 도축업자는 백정의 일부였으며 백정은 도축업 이외에도 다른 직업군을 포괄하고 있는 다른 의미의 단어였다. 엄밀히 따지면 직업군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혈통 혹은 신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백정의 어원은 중국 수나라(隋)에서 온 말로 당시 뜻은 그냥 일반 백성을 뜻하였을 뿐이다.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고 세금을 걷어야 하니 국가에서 인구조사를 하였는데 지역에서 군인이나 향리 등의 직역을 부여한 집을 정호(丁戶)라고 불렀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집을 백정호(白丁戶)라고 불렀다. 백정은 백정호에서 나온 말이며 여기서 백은 하얗다는 의미였다가 다른 한자로 바뀌어서 00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인이 알게 된 백정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하면 바로 고려시대 화척(禾尺)이라고 불리는 무리였다. 수척(水尺)·양수척·무자리라고 불렸던 이들은 이들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화척으로 불렸다가 조선 초에는 백정(白丁)이라고 바뀌어 불렸다.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악명 높은 범죄집단으로 떼지어 유랑하며 걸식, 강도, 방화, 살인 등 각종 범죄를 자행하였다. 고려 말의 홍건적 침입 때는 길잡이 노릇을 하였으며 왜구를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나라에서 화척을 비롯해 제주 사람과 재인을 모두 찾아내 서북면 수졸(戍卒)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싸움도 잘하니 달래고 집과 관직을 주며 정착하게 했지만 천성이 유랑자들이라 쉽지 아니하였다는 문헌이 있다.[3]

조선 태조 이후 성종 때까지 조정은 이들을 호적에 올려 파악하려고 하거나 토지를 지급해 농업을 생업으로 삼도록 하였고 그러한 자에게는 신공을 면제시켜주는 정책을 계속 펴나갔다. 아울러 독립된 집단생활과 자기들끼리의 혼인을 금지하는 한편 일반 양인과 함께 살게 하면서 혼인을 장려하였다. 지방 관아에서 이들을 찾아내 각 방(坊)과 촌(村)별로 보호하게 하고 장적을 만들어 형조·한성부·감영 및 각 고을에 보관했다가 출생·사망·도망 등의 사항을 기재하도록 하는 등 철저히 점검하였다.[4]

역사채널e - 외면당한 진실, 백정이라는 동영상은 구한말 외국인이 목격한 서양적 외모를 지닌 이를 백정이라고 하고 있는데 원문은 백정이 아닌 항구에 있던 조선인을 묘사한 것이다. 다른 이들의 기록에서도 조선 아이의 눈이 파랗고 머리색은 적갈색이며 상류층의 경우 서양인 종과 비슷하다고 서술했다. 물론 이런 지나가듯 써놓은 서술의 신빙성은 별로 높지 않고 정말 그런 케이스를 목격했다 하더라도 백정이라는 근거도 없다. 동영상에서 주장하는 백인 계열, 즉 몽골 밑에서 용병 민족으로 이름을 날렸던 타타르족들이 고려에 정착했다고 하더라도 일부일 뿐 그들이 친족들을 이끌고 와서 대규모로 떠돌이 생활을 했을 확률은 한없이 낮다. 게다가 한반도에 가장 많이 섞여든 이민족은 거란, 여진 같은 몽골로이드 계열로 애초에 겉보기로는 한민족과 별로 구분되지 않고 특히 여진은 유전적으로도 차이가 거의 없어 더욱 구분되지 않는다.

2. 고려

고려 시대까지는 백정이란 자기 조상 대대로 자신의 땅을 가지고 농사짓는 농민, 즉 자영농을 칭하는 말로 의미가 조선시대의 백정과는 전혀 다르다.[5] 고려시대에 백정이 어떤 계층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고려시대의 사회제도를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고려시대의 양인이라는 계층은 생각보다 많은 계층이 포함된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 이유가 고려는 신분제가 급속도로 변화하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까지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세습귀족들은 고려 초 광종의 개혁(특히 과거제도 실시)에 따라 많은 귀족은 물론 왕족들까지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고려시대의 상류층으로는 문벌기반의 정부고관들과 그래도 지방에 지지기반이 있었던 대지주에 속하던 호족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중류층으로는 하급관리와 초기에는 지방의 향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계층 간의 결혼까지 엄격하게 제한되던 천민 계층을 제외한다면 이외의 계층은 모두가 양인으로 분류되던 게 고려 사회였다.

그러나 지방의 향리들은 전까지 중앙관리였던 귀족들이 중앙에서 실권을 잃고 대거 낙향하고 자신들이 하던 일을 직접 하기 시작하고 중앙에서 지방관들이 파견되기 시작하자 점점 영향력을 잃고 점차 평민으로 격하되었으며 이전까지는 중앙정치에서 소외되어 천민 취급을 받던 향, 소, 부곡민들이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가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위치가 점점 더 올라가 양인에 속하게 되었다.[6] 이처럼 일반적인 고려시대 양인은 꽤 폭넓은 계층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백정이라 불리던 자영농들은 양인 중에서는, 그리고 고려 신분제 전체를 통틀어서도 중산층이라고 불릴 만한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었으며 실질적으로 고려를 떠받치고 있는 이들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흔히 아는 백정은 양수척(楊水尺), 수척(水尺)[7], 화척(禾尺), 무자리라고도 불렀다.[8] 이 명칭은 조선 시대에도 사실 그대로 불렸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무리를 지어 떠돌아다니며 천업에 종사하던 양인 계층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에는 도부 또는 도한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향소부곡민과 함께 양인 중에서는 최하급 계층으로 분류되었으며 일반 농민들과 같은 형태로는 국가에 대한 조세 부담을 지지 않았고 노비와는 달리 어디 한 군데에 매여 살지도 않았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사냥, 축산, 도축/고기판매업(화척), 무두질/가죽제품 제작(양수척 = 조선시대엔 갖바치로 불림), 고리, 예악/배우, 망나니 활동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고리는 버드나무 가지나 지푸라기를 엮어 갖가지 물건을 만드는 것으로 일명 고리짝이라고 불렀다.

고려사에서는 후백제 정벌 시 굴복하지 않아 압록강 밖으로 쫓아 보낸 자들이 시초라고 나온다. 국가의 부역과 호적에도 제외된 방랑인이라는 기록도 있으며 기녀들의 시초라는 기록도 나오지만 이들의 기원은 주로 북방 민족 출신으로 포로로 잡힌 거란인의 후손이나 동북면에서 흘러들어온 여진인 등 귀화했으나 정착 생활에 적응하지 않고 방랑생활을 하던 유목민족 출신들로 추정된다. 어째 집시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백정이 민폐나 어그로가 훨씬 심했다. 세종, 문종실록에 수록된 백정의 범죄기록과 전국 감옥의 살인, 강도범 절반이 백정이다. 조선 전기까진 남녀 구분 없이 말 타고 활 쏘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었고 유목민족들이 농경민족에게 행해 온 약탈도 그대로 저질렀다. 집시도 유괴나 절도, 구걸로 악명이 높지만 이쪽은 강력범죄라는 점에서 훨씬 심하다. 사실상 도적떼 무리였다. 하지만 집시와 고려 시대 백정은 기원 면에서는 차이가 있는데 집시는 고대 북인도의 농경민들이 모종의 이유로 유랑생활을 하게 된 것이 그 기원이고 백정은 전술했듯이 고려 사회에 흘러들어간 유목민과 범죄나 흉작, 전쟁 등의 이유로 마을에서 살 수 없게 돼 이들에게 합류하게 된 고려인들이 그 기원이다.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문서에는 전쟁 후 거란 유민 포로들을 '거란장'이라는 마을을 만들어 정착시키고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당대 상황을 추론해 보면 농경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들이 거뜬하게 간척 및 농경에 성공했을 리도 만무하고 곧 이어 여몽전쟁이 발발하여 기존의 고려인들 중에서도 대량의 유망민이 발생하게 된다. 이들은 이런 배경 속에서 쉽게 다시 정착촌을 이탈해 화척이나 양수척이 되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즉, 백정이란 고려 영토에서 살던 이민족들, 유목민인 거란인이나 수렵민인 여진인들이 고려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지킨 것이다. 버드나무 고리를 잘 만든 것도 가재도구가 이동에 편해야 하므로 자연히 익숙해진 것이다. 사냥과 축산, 도축 및 고기 판매업도 유목민 출신인 이들이 이것을 농경민들보다 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네들끼리 마을을 만들어 살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개중에 사회적으로 고려와 반체제적 문제가 있는 자들도 있었다.

한국의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고조선, 부여유목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축에 대한 향기가 역사 이곳저곳에 깊숙이 남아있다. 고조선의 단군 신화는 수렵시대의 전통과 관련이 깊고 부여의 4부는 인간이 목축화했던 가축을 상징하는 단어이며 건국설화에 돼지우리가 등장하고 국왕이 직접 행차하는 등 생활에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통을 이은 삼국시대 초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농사를 짓기 어려운 지역들은 반농반목의 생활형태를 영위했으며 고구려의 경우 다수의 말갈족, 거란족을 지배하는 위치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이민족들 사이는 계급상의 차별이 있었지만 그들을 생활방식으로 차별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 간의 차별은 존재했지만 짐승을 잡아 도축하는 것으로 차별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뭐 당연한 게 고구려는 초기 국내성에서 출발해 부여, 옥저, 동예, 숙신, 거란, 선비(연)와 겨루며 끊임없이 영역을 확장한 나라다. 고구려의 영역 아래 다수의 이민족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유목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거란은 고구려민들과의 접점은 거의 없었고 말갈은 이미 당시에도 농업과 유목, 수렵을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지 없이 떠돌아다니지도 않았을 뿐더러 고구려의 전쟁에 많이 동원되어서 고구려에서는 일부 지위를 인정받는 측면이 있었다. 그 중 전쟁에서 뛰어난 공을 올린 자들은 그들에게 벼슬을 주는 고구려의 풍습대로 고구려 지배 계층에 편입된 사례도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말갈이라는 말이 퉁구스계 종족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고구려 지방민을 통칭하는 단어라는 연구도 나온다.[9] 각설하고 수렵과 목축의 전통이 남아있던 고구려는 무덤에 수렵도가 말하듯 양인 이상의 성인 남성이라면 사냥과 도축 등은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즉, 고구려에서 짐승을 사냥해서 해체하는 일이 성인 남성이라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중남부 일대도 유목이 없었을 뿐이지 수렵이 횡행했던 생활형태는 비슷했다. 당장 산지가 평지보다 훨씬 많은 게 한반도의 지형 인데다 평지도 개간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어디든지 숲이 풍부하고 인구밀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신라, 가야에서도 수렵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러던 것이 인구가 늘어나고 숲이 개간되면서 수렵문화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

이후 삼국 모두 왕권 강화를 목표로 불교를 도입해 국교로 삼고 농업을 장려하게 되고 소고기는 먹기 힘들어진다는 말이다 남북국시대를 거쳐 고려대에 이르러서는 보덕, 원효나 도선과 같은 고승들의 활약으로 불교 사상이 민간으로 깊숙이 스며들게 된다. 따라서 고려에 자리 잡았던 대승 불교의 가르침 중 핵심인 자비와 불살생의 사상이 사회 깊숙히 자리잡고 사냥과 육식을 멀리하는 문화가 자리 잡자 자연히 도축 관련 업종을 천시하는 경향이 생겨났지만 일본과는 달리 고기를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왕이 불국토를 부르짖건 말건 귀족들이나 상류층은 계속 고기를 먹었으며 불국토 사상에 심취한(혹은 왕권 강화를 목표로 한) 고려시대 왕들이 왕명으로 육식을 절제시키고 심하게는 농사짓기 힘들다고 도축을 금지했지만 그래도 먹을 사람은 다 먹었고 하다못해 왕들이 고기 그만 먹으라는 말은 안 할 테니 좀 적당히 먹으라고 말한 기록이 많다. 이자겸이 한창 세도를 부렸을 때 뇌물용 고기를 하도 많이 받아 챙겨서 다 먹지 못해서 창고에 넣어둔 고기가 썩어나갈 지경이었다는 대목이 나오고 이규보 같은 사람은 허구한 날 술 먹으며 고기 먹는 자신이 싫어서 금주와 금육을 실시했는데 눈앞에 고기가 보이자 아무 생각 없이 먹게 되더라고 자아 성찰을 담긴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몽골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몽골의 영향을 받아 육식이 권장되고 목축이 장려되던 기간을 거치면서 다소 희석되었다. 이후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불교가 구석으로 밀려남으로써 끊어질 뻔했던 한국 고기 요리의 명맥은 어찌어찌 이어지게 되었다. 반면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어찌 됐건 살아남게 된 일본은 불교의 영향력이 더 강해져서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고기 요리가 사실상 멸종되다시피 했다.[10]

하여튼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치면서 다양한 경로로 한반도로 유입된 외국인들이 이런 직업을 전담했다.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우선 전쟁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한반도와 관계를 맺었던 여진, 거란족들, 고려시대에 벽란도를 국제항으로 개항하면서 들어왔던 중동인들(아랍계, 이란계 등), 몽골과 항전을 벌이면서 몽골 밑에서 용병으로 뛰었던 타타르족이라고 추측되는 색목인들[11]까지 여러 민족이 고려에 들어와 있었다. 이와는 별개로 애당초 고기를 항상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건 귀족이거나 부자이거나 했다.[12]

이런 반체제적인 사상을 가지고 고려에 유입되지 못하고 겉돌던 이들은 왜구를 가장해 노략질하거나 거란의 침입 시에는 길잡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백정에 대한 편견은 있었으나 한국만큼은 아니었다. 고대 중국에서부터 제례에 바치는 희생은 군주에 의해 주관 및 분배되었고 포인이라고 불렸던 왕실 요리사들은 직접 도축을 집행했으며 심복 대우를 받았다. 정복국가인 북위, 요나라, 서하,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는 육식을 주로 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백정을 기술자로 존중해 주었다.[13] 유럽에서도 일부 계층이 안 좋게 볼 뿐이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백정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되었고 유대인종교적으로 깨끗한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종교 가르침 때문에 종교 지도자인 랍비가 백정 일을 하는 일도 있었다. 서양에서는 고기를 정형하고 배분하는 것은 승자 혹은 강자의 권위와 권리로 인정됐고 이러한 면면이 집안 남자들이 주도하는 BBQ 파티 등에까지 남아서 사회적인 대접이 매우 좋았다. 한국에 유난히 백정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것은 백정의 대다수가 이민족의 후예였고 한국 문화에 융화되지 않은 채 틈만 나면 민족의 전통을 시도했던 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14]

3. 조선시대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八賤
조선시대의 여덟 천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기생 노비 승려 백정
무격 광대 공장 상여꾼 }}}}}}}}}

조선 초 세종은 국가체제 정비 과정에서 양수척 등을 양인화시켜서 국력을 증진하고 동화시키려고 했다.[15] 그러한 의미에서 양수척 화척을 백정이라고 부르게 하면서 적극적인 정착유도정책을 꾀하였는데 문제는 양수척 화척의 생활상이 일반 농민들과 너무나도 달랐다는 것이다. 즉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을 타고 유랑하던 집단을 강제로 정착을 시키자니 개간된 땅은 부족하고, 농사일은 익숙하지도 않고, 말을 타고 무기를 휘두르던 버릇이 있으니 강도질의 유혹에 빠지고, 정착하고 싶어도 정착할만한 항산이 없는 경우도 많고, 고기를 먹고 살았으니 소고기 금지령에 대놓고 반하고 싶고, 기존의 거친 생활상으로 인하여 범죄에 대한 거부감도 약한 편이었으니 화척들은 백정에 편입되는 걸 원치 않았고 기존의 백정들 사이에서도 어마어마한 반발이 튀어나왔다. 백정들은 자신을 구백정이라고 부르고 화척들은 신백정으로 구분해서 동화되는 걸 꺼렸으며 이로 인해 기존의 농민들과 신백정들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시간이 흘러 구백정은 백성이라고 칭하게 되고 백정이란 말은 화척들만을 칭하게 되는 단어로 남았다.

세조 시절에 왕 앞에서 논쟁을 벌인 안효례와 최호원 사이에서 욕설로 '백정의 자손' 패드립이 시전됐다. 여기서 시전자는 상민이고 역으로 반박한 이는 양반으로 전 신분에 걸쳐서 백정이 욕으로 통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앞서 세종이 양인화를 시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화이다.[16] 반상제의 상민(常民)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등장한 것이다. 태종 때까지는 백정은 고려 시대처럼 일반 백성들을 가리켰지만 세종 때 양수척도 백정으로 편입하려고 하자 일반 농공상인부터 양반들까지 다 반대한 탓에 생겨난 현상이다.

결국 정착생활을 할 항산이 있었던 극소수 백정과 줄을 잘 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양인화에 실패했다. 세조 대에는 '백정들이 도둑이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안건이 과거 시험 문제인 책문으로 출제될 정도였다.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한성 인근에서까지 백정 도적 떼가 출몰해 토벌 논의가 벌어질 정도니 해결은 요원했다. 죽으라고 말을 안 들어 처먹으니 결국 별도 거주지에서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방관의 특별한 허락까지 필요한, 말 그대로 요주의 대상으로 굳어져 버렸다. 과거시험에서 강도의 8~9할이 백정과 재인이라고 할 정도였으며 살인, 강도범 380명을 조사하니 과반수가 역시 백정과 재인 무리였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사실 조선 조정은 의외로 전근대 왕조 국가 치고는 이례적으로 보일 정도로 강한 인내심으로 백정들을 어떻게든 안고 가려고 노력했다. 조정에서는 어떻게든 이들을 일반 백성과 동화시키려고 애썼는데 유랑생활과 수렵에 익숙하던 그들은 칼을 쓰는데 일가견이 있었고 말도 잘 탔기 때문에 조선에서 겉돌며 걸핏하면 산적으로 위장해 농민을 약탈하고 심지어는 관가까지 털었으며 조정이 추진한 양인들과 통혼과 동화는 양인들뿐 아니라 백정들도 거부했다. 당시 조선 백정 집단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느냐면 강도들을 잡으면 다 백정, 살인범의 절반은 백정, 가축 훔친 흔적을 조사하면 죄다 백정 마을로, 방화범을 잡으면 반은 백정, 마적단을 잡으면 모두 백정일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검거하기 쉽지 않은 게, 관리가 몇 번이나 우마를 잃고 그 흔적을 따라가니 백정 마을 앞이었으나 남녀 구분 없이 말 타고 활 쏘는 집단이다 보니 백정 마을에 들어가기 무서워서 처리를 못 할 정도였다. 백정 마적단의 난리는 세종, 문종, 세조 내내 골칫거리였다가 중종대에 수그러들고 명종대에 임꺽정이 난리 한 번 터뜨린 걸 마지막으로 끝났다. 이후 백정 도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사라지고 임진왜란 시기에는 이전의 서술과 달리 활도 못 쏴서 군인으로 쓸모가 없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로 변화했지만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적개심을 재고시키기엔 지난 600년간 트러블은 백정과 양인 사이에 너무도 뿌리 깊은 불신을 일으켰다.

한편 백정의 이미지인 도축업은 다른 이유로 백정이 전담하게 되었는데 성종기까지는 양인들도 도축업을 하였으나 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성에서 도축업을 금지하면서 양인 도축업자들은 몰락했지만 당시의 백정들은 사실상 법을 무시하는 법외의 존재들이라 마치 금주법 시대 마피아들처럼 도축업을 전담하게 되었다.[17]

사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저 조선 초기 백정이라는 집단이 완전히 이질적인 형태로 존재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실제로 고려시대에 이들은 신량역천에 포함되었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다.[18][19] 아니, 신량역천이라는 표현이 조선시대에 나왔다. 심지어 고려시대에는 어부나 목축업[20]도 신량역천에 포함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들을 일반농민들과 동화시키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들을 부르는 명칭을 바꾸려고 했던 것이 그 예인데 어간이라고 불리던 이들이 어부가 되고 소금 만드는 이들이 염간이라고 하다가 염부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중앙정부의 공식적인 정책 기준에서만 사실이다. 천민 문서에 서술되어 있는 이들의 대부분이 조선시대 법제상으로는 양인이지만 고려시대 이래의 신량역천 대우처럼 하는 일이 차이가 없었는데 시선이 변할 리가 없다.[21]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식은 극초기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이 반발하기 이전에 유목생활을 했던 이들에게 경제적 기반도 없이 사회적 차별을 받으면서 동화되라고 했으니 신백정이 반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목집단에 도축업을 금지하기도 어렵고 유목집단이라는 이야기는 땅 없는 사람들이라는 소린데 이 사람들을 제대로 정착하게 하는 정책도 사실상 없었다. 세종대에 신백정들을 정착시키려는 방안으로 제기한 것이 공물 좀 적게 걷고 땅 많이 가진 사람들 땅을 주자는 것이다. 전자는 근본적 해결책이 못 되고 후자는 조선시대에 제대로 실현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남는 땅이 있었으면 일반 농민들이 경작했겠지 중앙집권과 국력이 나름 있었던 조선 초기 중앙정부는 '섞어놓고 살게 하면 된다' 정도의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사민 정책만 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결국 신백정은 조선 내부에서 사는 여진부락처럼 되어 버렸다. 이는 이들이 유목적 성향을 잃은 뒤에도 변함이 없다는 것에서, 신량역천에 여진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백정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사실 재가승이 진짜로 여진족의 후예인지 불확실한 것처럼 이들이 진짜로 유목민족의 후예인지는 알 수도 없고 그런 기원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들의 행동과 풍습이 달랐다는 것이 주변과 차이를 만들었고 이 시각이 유목민족의 흔적이 있었더라도 거의 사라진 지 오래였을 조선시대 말기까지 갔을 뿐이다.[22]

임꺽정이 백정 출신으로 유기를 만드는 고리백정이었다. 이들은 어느 일정한 곳에 모여 살았는데 이런 마을엔 양인이나 포졸들조차 가까이하길 꺼렸다. 심지어 양반과는 같은 길에서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야기하려면 길 밑으로 내려가서 이야기를 한다든지.

하지만 성균관에 소속된 특수집단인 반인(泮人)들은 성균관에 제사용 및 식용으로 육류를 납품해야 해서 자연히 도축 일을 함께해야 했는데 이들은 공자님이 드실 고기를 바치는 몸이라고 오히려 세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게다가 반인들은 성균관 일을 도우면서 양반집 자제들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게 되고 이 양반들이 나이가 들고 출세하여 고관대작이 되면 그 친밀한 관계가 든든한 연줄이 되곤 했다. 그래서 반인들은 양반집 자제들, 궁에서 일하는 별감들과 함께 한성의 유흥가를 주름잡던 물주 중 하나가 되었고 이들이 살던 반촌(泮村)은 이러한 세력+성균관 출신 고위층의 비호로 인해 사실상 치외법권 유흥가 지역이었다. 오늘날의 대학 주변 유흥가를 연상하면 딱 들어맞으며 성균관이 620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반촌의 위치는 현재도 대학로 상권과 겹친다.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는 대신 납세의 의무가 적었으므로 생활이 곤란해지면 양인이 일부러 백정이 되는 일도 있었다. 실제로 능력만 있으면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도축업은 의외로 이익이 많이 남았다. 특히 소는 당시 중요한 노동력이어서 도살이 허가된 소 외에는 잡을 수 없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몰래 잡는 경우 더욱 이익이 많았고 이런 고기들은 주로 양반들의 밥상이나 잔치 등의 대형 행사에 주로 올랐기 때문에 더욱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수익이 많아도 신분상 옷차림이나 집의 수준에 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돈이 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래서 곳곳에서 어지간한 양반들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의 거부 백정들이 수두룩하게 출몰했고 이후 신분제 폐지 등의 사회 변화로 백정들이 마음껏 돈을 쓸 수 있게 되자 이들과 이들의 자손들이 형평운동에 앞장서고 신분을 벗어나고자 애를 썼는데 백정 일을 하면서 보통학교에 거금을 기부하고 형평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만민공동회에서 연설까지 했다. 훗날 교회 장로와 은행원이 된 박성춘, 그리고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 박성춘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제중원 의학교를 졸업하고 양의사가 되어 독립운동까지 한 박서양이 대표적이다.

과거 KBS에서 저연령층 대상으로 방영하던 모 역사 프로에서 나온 역사적 일화 중에는 조선시대 한 늙은 백정의 장례에 백정들이 관에서 꽃상여를 빌려 쓰려고 할 때 양인들의 반대로 수포가 되자 백정들이 남아도는 돈으로 더 좋은 꽃상여를 만들어 양인들의 기를 죽이는 일화도 있었다. 물론 양인들이 들이닥쳐 꽃상여가 바닥에 떨어지고 다툼이 일어나는 등 난장판이 일어나는 내용이 후술된다. 당시 백정은 양인들과도 따로 떨어져 살아야 했고 옷차림만으로도 신분이 구별되어야 했기 때문에 창옷(?衣)이라고 불리던 중치막이나 비단옷은 입지 못했으며 머리에는 이 아닌 패랭이를 써야 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백정들이 많이 가담했는데 이들의 요구 중에는 7종 천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는 것과 함께 백정들이 쓰는 패랭이 또는 평량갓을 벗겨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여기에 결혼할 때 말이나 가마를 못 타고 죽은 뒤에도 상여를 못 쓰는 것이 당시 법도로 취급받았다. 당연히 천민 취급이므로 평민의 아이들에게조차 존대를 해야 하고 서당은 당연히 못 갔다. 신분은 양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천민인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는 점에서는 고려 시대와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대표적인 천민인 노비조차 백정을 천하게 보았다. 물론 노비 주인의 뒷배가 있어서 백정이 노비를 사사롭게 막 대할 수는 없었지만 법정 싸움에 들어가면 명색이 양인인 백정이 유리했다는 점 정도가 그나마 나은 점이었다.

4. 구한말~일제강점기

구한말~일제강점기에는 형평사 운동이라는 것을 벌여 그들의 권리를 더 받으려고 했는데 일제는 주민등록부에 도부라 적고 붉은 점을 찍어 여전히 차별했다. 그래서 이에 반발해 1920년대 무렵에 일어난 게 형평운동이었다. 사실 일본에서는 한국의 천민에 해당하는 부라쿠민들이 지금도 여전히 사회적으론 차별받는 것이 사회 문제가 된다. 이걸 다르게 본다면 그동안 사회에 어울리기를 거부하던 백정들이 드디어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려 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가 어떻게든 백정을 포용하려고 한 것이 시간이 좀 많이 걸렸지만 어떻게든 성과가 나오긴 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형평운동을 벌인 인물 중 장지필(張志弼)은 백정 부호인 장덕찬의 아들로 백정의 아들이기 때문에 양인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어서 가정교사를 들여 공부해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귀국해서 보니 도부라고 찍혀 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해서 내가 백정이라니! 형평사 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편견이라는 게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라 이후에도 실질적인 대우는 계속 그대로 이어졌다. 드라마 제중원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박서양도 백정 출신으로 많은 차별을 당했는데 1920년대 서울에서 의학 강의를 하다가 일부 학생들이 그가 백정 출신인 것을 문제 삼아 수업을 거부한 사태가 있었다. 일제의 민족분열 정책에 따라 많은 사회적 차별을 받았고 어느 정도였느냐면 백정들은 농민에게 자신이 이야기할 때도 그 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농민이 말할 기회를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학교 진학이나 직업도 도축 분야로만 제한되어 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백정에 대한 천대는 형평운동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예천 형평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1925년 8월 9일 예천형평분사의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인 예천청년회장 김석희가 한 말[23] 때문에 형평사 임원과 김석희 간 논쟁이 있었는데 그때 장외에서 관람하던 일반인이 그것을 백정들이 버릇이 없어졌다로 인식하고 그들을 박멸하자고 주장하여 며칠 동안 형평사를 공격하거나 형평사 임원의 집을 파괴하고 가족을 구타하는 일을 벌였다. 이에 평소 조선의 사회운동을 아니꼽게 보던 일본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한동안 예천이 무정부 상태가 되기도 했다.[24]

이런 형평운동에 대한 대립을 보여준 것이 백정 관련 풍습으로 알려진 도시전설 백정각시놀이다. 이규태는 생전 이 에피소드를 들어 조선시대부터 그랬다고 주장했지만 이규태의 글도, 그 외의 다른 글에서도 풍습이라기보다는 사건 사고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관련 글의 구조를 보면 모두 '백정의 아내가 동네 행사에 참여했다가 곤욕을 치르는 구도'인데 조선시대라고 가정하면 사는 곳부터 달랐기 때문에 이런 사건 자체가 일어날 수 없다. 애초에 심리상 양인이나 양반은 특히 공공장소에서 백정과의 접촉 자체를 굉장히 꺼렸는데 각시를 타고 말고 하는 보편적 풍습이란 게 생길 수도 없었다. 즉, 형평운동으로 대표되는 백정들의 사회적 신분의 상승이 있고 이에 대한 저항이 충돌하면서 벌어졌던 사건이 해당 일화다.

이런 사건 사고급 일화들을 몇몇 인물들이 일반적인 풍습인 것처럼 서술하고 이걸 박경리의 토지 등에서 인용하면서 널리 퍼진 것이다. 여기에 섹드립이 포함된 이야기가 추가되면서 인터넷상에서 유행한 결과 존재하지 않았던 풍습이 실존했던 것마냥 와전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쇠좆매의 잘못된 유행과 비슷한 감이 있다.

실제로 초기 항일의병이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백정 출신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물론 후기로 가면 일본의 탄압이 극에 달하고 독립운동이건 항일독립투쟁이건 잡히면 똑같이 고문당하고 사살당하니 신분 같은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약해졌다.

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동안 유지되고 있던 사회기반이 파괴됨에 따라 암묵적으로나마 남아 있던 신분제도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잃었지만 정부 수립 후 1970년대 산업화(새마을운동) 이전까지 소위 백정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지속되었다.

진주에서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양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형평사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서 백정들이랑 같이 차별을 받고 말년을 불우하게 보냈던 독립운동가 강상호는 1957년 12월 29일에 사망했는데 그의 장례식에 전국에서 백정 출신 인사들이 진주에서 모여서 장례를 9일 동안 성대하게 치러 줬다. 장례에는 끝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행진했고 진주 시내에서 장지까지 사람들이 넘쳤다고 한다.
오직 선생님만은 그 시대의 속칭 양반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분의 명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희사해 가면서 우리들의 고독한 사회적 지위의 인권 해방 계급 타파를 위하여 선봉에 나서서 오직 자유 인권 평등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들의 치학의 개방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만이 당해 오던 50만의 동포를 위해 주야고심 투쟁하지 않으셨습니까. 위대하십니다. 장하십니다.
옛 형평사원들이 독립운동가 강상호를 기리는 조사

황순원이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연재한 장편 소설 일월은 백정에 대한 차별이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백정이지만 신분을 세탁해 사업가가가 된 집안의 차남 기철은 백정을 연구한다면서 호의적으로 대하던 교수의 말에 넘어가 자기 집안의 역사를 연구하다가 이 과정에서 백정이라는 신분이 탄로 나 아버지의 사업은 망하고 국회의원을 꿈꾸던 형은 잠적하며 기철 자신은 어쭙잖은 자각이 집안을 망쳤다는 자책에 도망가 버린다는 비극적 결말로 끝난다. 이 사건은 1960년대 청파동의 어느 집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1970년대 산업화(새마을운동)가 일어나자 지방에서 양반, 평민, 백정이 모여사는 마을 상관없이 전부 새롭게 바뀌면서 암묵적으로 남아 있는 신분제도는 완전히 뿌리뽑히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나라 전체가 초기화된 것이다. 더욱이 사회 분위기가 능력만 있으면 모든 게 용납되는 사회로 바뀌면서 백정이나 노비 출신을 천대하지 않게 됨에 따라 백정에 대한 차별 분위기는 1970년대 이후 완전히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북방 유목민족의 후예였던 백정들은 6.25 전쟁과 1970년대 산업화(새마을운동) 이후 한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었고 한국인과 혼혈되었다. 즉 한국인의 혈통에는 농경민들 뿐만 아니라 유목민들도 존재한다.

현대에는 도축업자 등을 직접 백정이라 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뿐더러 그렇게 부르는 것 자체가 차별표현이지만 비칭이 되다시피 한 '백정' 대신 '육가공 기술자', '정형 기술자'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활동하는 지금에 와서도 아직까진 본인의 직업이나 직장 등에 대한 공개를 꺼린다고 한다. 외부인에 의한 작업장의 오염과 열악한 작업환경 문제도 있겠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아 왔던 점도 무시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 부분이 집중적으로 묘사된 작품 중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조금 오래되긴 했으나 허영만의 만화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편의 13화 대분할 정형 에피소드와 15권 돼지고기 열전 편의 두당 에피소드다. 이에 대해 안타까움이 해당 편의 취재일기, 후일담에서 작가의 탄식으로 극명히 드러난다. 마장동 축산물시장 문서에 소개된 일화들을 참고할 것.
예비 사돈댁: "네 아버지의 직업을 옛날엔 뭐라 했는지 아니? 백정! 백정들은 마을에서 같이 살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 모여 살 정도로 천대받던 천민 중의 천민이다! 아무리 세상이 개명되었다 해도 어렵게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통과한 기범이 색시로는 적합지 않아!"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대분할 정형」, p. 205
성찬 - "정형 기술자가 칼을 잡지 않으려는 이유가 뭡니까?"
조경기 -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정형 기술자? 아니야! 우린 백정이야! 암. 백정이고 말고!"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대분할 정형」, p. 198
김학도 - "사장님께 따님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더니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표정… 아직도 눈에 선해. 마치 나를 개돼지 보듯 경멸하는 표정으로 내뱉는 말. 『주제도 모르는 백정 놈!』 칼을 잡고 짐승의 배를 가르는 내가 백정이라면 고기를 파는 사장님은 뭐가 다르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식객 15권 돼지고기 열전, 「두당」, p. 97
식객 3권의 해당 에피소드를 일례로 들자면 상술한 바와 같이 예비 사돈댁이 문자 그대로 지랄육갑을 하며 혼삿길을 파토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름난 육가공 기술자였던 '무사' 조경기는 칼을 놓고 대형 음식점에서 화부 업무에만 전념하게 된다. 같은 조선시대에 법률만 다룬 것은 중인들이 보던 잡과의 하나인 율과로 선발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트집이다. 덤으로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구 외무고시), 의사 국가시험, 법무사행정사 시험도 조선시대 기준이면 역시 잡과 중 역과, 의과, 율과에 속한다. 다만 중인이 일반 농민보단 높았고 양반에 대한 숭상에서 보듯 '공부를 잘 하여 출세하는 사람은 모든 능력이 우월하다'는 관념[25]이 있었기 때문에 저런 관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따지면 법정 스님 같은 승려나 '광대'나 '기생'에 속하는 각종 한류 스타나 '공장'과 '무당' 같은 대한민국의 무형문화재 보유자는 모조리 조선시대 '팔천'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불합리한 일이 생긴다. 1894년에도 나라가 망해가는 걸 막으려고 과거제도까지 폐지시키면서 없애려 한 마인드가 한동안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조경기는 자신을 찾아와 정형 기술자로 대하는 성찬에게 자기와 같은 사람은 백정이라며 자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상대가 '검객'이라고 불리며 조경기와 함께 육가공계의 쌍벽으로 평가받는 강상기라는 것을 알자 조경기는 마지막으로 칼을 잡겠다고 선언한다. 나중에 드러난 것인데 조경기네 딸 혼사를 망친 원흉은 강상기였다는 암시가 나온다. 실력으로 밀리니까 예비 사돈댁에게 조경기가 정형업자라는 소문을 흘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조경기는 실력으로 강상기를 깔끔하게 꺾었다. 다행히 조경기의 딸은 도축업자에 대한 편견과 천시가 없고 직업이 7급 지방직 공무원인 남자와 만나 잘 살게 되었다. 결혼 전 남편이 아내로부터 그 말을 듣더니 "장인 어르신께서 정형 기술자이시니 우리 가족은 질 좋고 양 많은 고기를 원 없이 먹을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조경기는 성찬의 부탁만 들어주고 이후 다시 칼을 잡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 말에 기운을 차려서 다시 칼을 잡아야겠다고 했다. 어찌 보면 나름 해피 엔딩이다.

더불어 15권의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최고의 도축 기술을 선보이며 두당으로 일하던 김학도가 어느 고깃집 사장의 딸과 서로 사랑하여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고 아이까지 임신해서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사장의 멸시와 분노 등으로 일이 그르쳐져 딸은 자살하고 '돈아(豚兒)'라고 이름 붙였던 복중의 아이도 죽어 버리는 등의 비극을 맞이했고 이에 독기와 한을 품게 되었다. 이후 이름까지 바꾸고 악착같이 출세했으나 돈아의 이름이 새겨진 발골칼이 사라진 후 김학도의 방에서 죽은 연인의 혼령이 출몰하는 일이 벌어진다. 작중에서 그 한을 추적하는 중심 소재가 되었던 '돈아'가 새겨진 발골칼을 회수한 김학도가 자살한 옛 연인의 넋 앞에 칼을 바치며 해당 에피소드는 마무리된다.[26] 조경기 때와는 다른 새드 엔딩.

5.1. 2010년대 이후

그래도 2010년대 들어서 EBS 극한직업 편에서 육가공공장에서 정형사와 발골사들이 실명과 얼굴을 보이며 떳떳하게 그들이 작업하는 모습이 방송되는 모습을 보면 그 인식은 상당히 개선된 편이며 더불어서 2018년에 상위자격증으로 식육가공기사까지 신설되어 자리잡은 것을 본다면 완전히 양지로 올라왔음을 알 수 있다.[27] 산업화가 지속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고기에 대한 소비자들의 수요가 늘어서 도축업자들의 능력이 많이 필요해진 데다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도축업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개선되었고 방송을 통해 요리사들이 전문직으로 대우받으면서 이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도축업자들에 대한 대우도 덩달아 좋아진 것도 있다. 요리사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재료의 생산 과정도 똑똑히 이해하고 있어야 해서 요리사 지망생들이 도축업자들의 업무를 관람하거나 아예 이를 따라 배워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28][29] 당연히 이들에 대한 처우나 인식이 좋아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여전히 인식이 안 좋기는 하지만 이는 백정에 대한 인식 때문이 아닌 3D 직종으로서의 문제다. 육가공사가 왜 '극한직업 프로그램'에서 다뤄지는 건지 한 번 생각해 보자. 축산물단지 육가공사 초임 월급이나 임금 수준은 바닥을 기는 수준이고 일이 힘든 건 덤이다. 3D라는 인식이 만연하기 때문에 근로조건이나 환경 등의 개선이 매우 더디고 초과나 연장근로, 휴일근로에 대한 체계적인 연장수당에 대한 것이나 철저한 근로시간 준수 따위도 잘 안 지켜진다. 그나마 비슷한 계열인 조리사들이 온갖 똥군기에 시달리는 데 비해 사장이나 직원이나 수습이나 모두 사람 하나 한 방에 보내는 칼을 상시 들고 다니기 때문에 상호 간 존중하며 함부로 대하지 않는 수평적인 직장 분위기가 있다는 장점도 있다.[30]

사회 인식조차도 "그렇게 일하기 싫으면 공부해서 공무원이 되거나 회사에 들어가"라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처럼 멸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베테랑 도축업자들은 자기 건물이나 점포를 가져 엄연히 사장님 대접, 자영업자 취급을 받는다. 사실 비하나 존경 같은 인식을 떠나서 이제 도축업자라고 해도 세간의 인식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정도로 별 관심이 없다.[31] 오히려 국가기술자격증인 식육처리기능사라는 종목도 있을 정도이고 2018년부터는 식육가공기사 까지 시행될 정도로 기술을 가진 직종으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도축업자/정형사를 어떻게든 비하하고자 백정이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도리어 욕 먹기 십상이며 본인 이미지만 안 좋아질 것이다.

6. 기타

흔히 극악무도한 독재자살인마, 사이코패스에게 인간 백정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인간인 백정"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을 가축처럼 도살하는 백정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조지아의 인간 백정으로 불렸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있다. 다만 스탈린은 그가 죽은 다음에야 재평가를 통해 그런 별명이 붙었다. 왜냐하면, 그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던 시절에 그런 말을 내뱉었다가는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 사용하는 살생부에 이름이 적혀 숙청되었을 테니까.

서구에서도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듯하다. 도축업자가 서양에서 조선의 백정만큼 차별받던 계급은 아니었으나 영단어 butcher(도살업자, 정육업자란 뜻)엔 비유적으로 '잔인한 살인자'라는 뜻도 있으며 아군을 무수히 갈아 넣는 지휘관에게도 가끔 붙는 별명이다. 물론 이런 별명이 붙는다고 반드시 무능한 건 아니다. 아서 해리스나 더글러스 헤이그가 그 예시로 둘 다 런던에 동상까지 세워질 정도니 무능하다는 평가와는 거리가 있다. butcher는 사람의 성으로도 쓰이는데 이쪽은 Smith(대장장이) 등과 같이 조상의 직업이 성으로 붙은 경우다.

라틴어로는 Carnifex. 어원이 참 깔끔하다. Carn(고기) - i(발음을 위해 첨가된 음운) - fex(만드는 자). 아울러 Lanius라는 말도 백정이라는 뜻이며 폴아웃 2에 등장하는 노예상인 메츠거(Meztger)도 독일어로 백정이라는 뜻이다.

야구선수 정대현의 별명이기도 하다. 이대호 전담 투수로 불릴 만큼 이대호를 잘 상대했고 그 이대호의 별명 중 하나가 돼지였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한편 같은 야구선수인 백정현은 이름 때문에 백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터넷상에서 직업을 비하하기 위해 의사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보통 외과 계열 의사하면 메스를 들고 사람의 몸을 갈라 수술하는 이미지 때문인 것 같다.

정형기술자, 도축업자들을 멸칭할 때도 쓰이는데 본인들에게 "백정"이라고 부르면 절대 좋은 꼴은 못 본다. 식객에서도 자주 소재로 다룬 부분이다. 물론 이런 류의 표현이 그렇듯 도축업자 본인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백정으로 부르는 경우는 있지만. 비흑인이 nigga라는 말을 쓰면 쳐맞지만 같은 흑인이 nigga라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처럼 육가공 업체가 밀집한 곳은 절대 조직폭력배들이 설치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도축업/육가공업은 소 한마리 해체할 때 최소 두세시간 걸리는 중노동이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집중해서 뼈를 발라내고 살을 베어내는 작업을 하는 도축업자의 피지컬도 만만하지 않다.

특수직 공무원인 군인처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여 '합법적인 살인'이 가능한 직종, 일반 국가공무원인 경찰공무원과 같이 비록 직접적으로 죽이지는 않더라도 사람을 잡아들이는 일을 하는 직종, 그리고 불법적으로 음지에서 활동하는 살인청부업자와 같이 '살인 자체가 일인 직업'에도 종종 붙인다.

스포츠에서 백정은 주로 소속 선수들을 마구 혹사해서 끝내는 부상으로 나가떨어지거나 안 좋게 퇴단하게 하는 지도자를 주로 꼽는다. 특히 야구의 경우가 이게 가장 심한데, 이유는 노예(야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 한마디로 손쉽게 선수 한 명의 커리어를 작살낼 수 있는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김성근, 김경문, 조범현, 서정환 등이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는 정글러를 부르는 별명으로 자주 쓰이는데 짐승을 잡는 것에 정글에서 몬스터를 잡는 것이 비유되기 때문이다. 전 라인을 돌아다니며 라이너들을 도와주는 포지션에다 선호도도 떨어지다 보니 주로 멸칭으로 쓰인다.

7. 백정이 직업 또는 모티브인 캐릭터


[1] 실제로 연령대가 높은 노인들 중에는 은근히 육가공업 종사자를 백정이나 화척이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경향이 아직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예의도 아닐뿐더러 시대에 맞지도 않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일단 도축업자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현대의 도축업자, 정확히는 육가공기술자는 아무나 할 수 없고 관련 자격이 필요한 전문직이다. 당연히 수입도 차원이 다르다.[2] 양인 도축업자는 우금령이 내려진 이후 몰락하게 된다.[3] 소수는 적응하여 살았으나 대부분은 유랑생활을 그리워해 못 버티고 사라졌다고 한다.[4] 출처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삼봉집(三峯集)』 『아언각비(雅言覺非)』 『성호사설(星湖僿說)』 「선초백정고」(강만길,『사학연구』18, 1964) 「조선시대 백정의 전신 양수척, 재인, 화척, 달단-그 내력과 삶의 모습을 중심으로-」(이준구,『조선사연구』9, 2000) 『花郎攷·白丁攷·奴婢攷』(鮎具房之進, 國書刊行會, 1932)[5] 세금을 내는 양인과 그 밑의 천민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존재한다. 마치 오늘날 시민권자와 불법체류자 수준의 차이다.[6] 그러나 향, 소, 부곡의 민들은 명목상으로는 양인에 속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인계층이었던 향리나 군, 현민들과는 확실한 격차가 있었던 거로 보인다. 이들은 외거노비만큼은 아니지만 서양의 농노와 비교될 정도로 군, 현민보다는 훨씬 더 강도 높은 세금과 역 등을 부과받았다.[7] 수척(水尺)은 계림유사에서 수작(水作)으로 나타나며 광대나 기생을 뜻했다.[8] 백정을 뜻하는 앞 단어들 뒤에 붙는 척(尺) 자는 길이를 재는 라는 뜻으로 당시 발음은 잫이었는데 요리사를 뜻하는 칼자이(刀尺), 사냥꾼을 뜻하는 산자이(山尺)처럼 어떤 일의 직종을 수행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물긷는 사람을 뜻하는 수척(水尺)을 무자이/무자리(巫玆伊)로 적은 것을 참고해 볼 수 있겠다. 화척은 도축업에 종사하는 천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벼 화(禾)자와 도축업이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모를 수도 있으나 화(禾)자는 당시에 음으로 슈로도 읽었으며 훈으로 곡물을 뜻하는 옛말 '쉬'로 읽었다. 즉 슈자이(禾尺)로 슈자이(水尺)와 음이 동일하다. '벼'는 ~을 베다(cut)라는 말의 어근인 베-와 비슷한 발음을 띠므로 이두와 비슷한 원리의 표기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까지도 이두는 중인 계층을 중심으로 계속 쓰였으므로 도축업에 종사하는 천민을 벼자이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겠다.[9] 더 나아간 연구에 의하면 단순히 지방민이 아니라 원래 퉁구스계가 주류였던 말갈인들이 부여가 물길이나 선비의 습격을 받아 멸망하거나 했을 때 공백을 틈타 지속적으로 남하하여 예맥인들의 거주지에도 섞여들어갔고 이로 인해 변방의 예맥인과 퉁구스계가 서로 영향을 받으며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고 고구려 중앙정부에 의해 싸잡혀서 말갈이라 불리게 된 것 같다고 한다. 따라서 백산말갈처럼 아예 예맥계가 주류인 경우도 있었고 속말말갈 같은 경우는 뒤섞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후에 여진족의 중심이 되는 흑수말갈 같은 경우는 금나라가 건국될 때까지도 크게 남하하지 않았기 때문에 꾸준히 퉁구스계가 주류였다.[10] 하지만 아예 씨가 마른 건 아니다. 해산물은 예외로 두었기 때문에 회와 초밥이 존재했으며 이걸 근거로 오리에게 물갈퀴가 있다는 이유로 물고기라고 주장해서 오리고기를 많이 먹었다. 해양포유류인 고래바다사자, 그리고 민물에 사는 파충류인 자라도 많이 잡아먹었으며 이 외에도 여러 고기를 갖은 편법을 써 가면서 잘만 먹었다. 물론 대놓고 길러서 먹어야 하는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는 비주류가 되긴 했지만.[11] 이들 중에는 위구르족 같은 전형적인 유라시안 튀르크인도 있었겠지만 오늘날의 튀르키예인이나 아제르바이잔인 같이 먼 조상이 튀르크계일 뿐 이란계나 캅카스계 같은 백인 혈통이 너무 많이 섞여 완전한 백인의 외모를 갖게 된 튀르크인도 있었을 것이다.[12] 현대 유목민들도 항상 고기를 먹지는 못한다.[13] 사실 한국도 삼국시대에는 백정과 비슷한 일을 하는 도축업자들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불교의 영향이고 뭐고 아직 농경의 생산력이 원숙하지 않아(삼국시대에는 현대인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시비법이나 우경의 보급도 아직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저런 걸 가리고 먹을 상황이 아니라 육류에 대한 수요도 높았고 인구 및 인구밀도가 상상 이상으로 낮아 아무리 사냥에 몰입해도 동물들이 멸종되거나 할 상황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 나라를 세운 고조선부여의 예맥계 민족들이 본래 반농반목민이라서 도축업 자체를 안 좋게 볼 이유도 없었다. 특히 엄청나게 추워 농경이 부여성 일대 같은 지역을 제외하곤 제대로 되지 않던 만주에 거주하던 고구려인들에겐 곡식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을 것이다. 그랬던 것이 삼국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생산력이 압도적인 농경에 대한 권장과 우위가 확산되다가 과도기인 남북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완전한 정주 농경문화로 바뀌게 되자 상황이 180도로 바뀌었다.[14] 북방 기마민족의 전통, 즉 약탈이란 풀 한 포기를 남기지 않고 모든 물자를 수탈하는 동시에 약탈한 마을의 사람들 중 수레바퀴보다 큰 남자는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다 죽이고 나머지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끌고 가거나 반항적인 여자는 그 자리에서 처벌하거나 하는 수준으로 시대적인 잣대를 고려하더라도 굉장히 악질적이었는데 그런 민족들이 부족단위로 떠돌아다니며 행정적, 군사적 영향이 미치는 마을은 조용히 생업에 종사하며 지나가고 만만한 마을은 털어버리는 형식이었다. 그 와중에 추적을 받으면 안 되니 왜구로, 홍건적으로, 마적으로 위장하기도 했기 때문에 고려시대 내내, 조선시대 초중기까지는 국가의 골칫거리였다.[15] 이슬람을 믿던 조선 내 위구르인들이 완전히 동화되어 사라져 간 것도 세종조부터로 추정된다.[16] 어원의 의도가 변질되었다는 점에서는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게이와도 비슷하다. 본래 동성애자들이 '호모'라는 멸칭을 혐오하여 '즐거운 사람(gay)'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했는데 이제는 게이도 동성애자를 이르는 말 혹은 멸칭으로 정착되어 버렸다.[17] 관련 문제를 다룬 블로그 포스팅 링크. 조선시대 백정차별이 심해진 이유는? 조선전기 백정 개판기(...) 대백정군사작전 조선전기 백정을 보는 시선은 이렇지 않을까. 백정에 대한 썰 추가[18] 신량역천 중에는 여진인 추정 정도가 아니라 원나라 시기에 고려에 이주해서 매를 기르고 낙농업에 종사하던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몽골어로 '-치'로 끝나는 직업을 의미하는 '00적'이라고 불렸으며 스스로도 달단인(북방 오랑캐식 표현)의 후예라고 주장하던 이들도 있었다.[19] 우유소 폐지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세금 피하겠다고 일반 농민들이 그들 사이에서 끼어 살았던 일도 많았다. 1집에 20명이 넘게 살았다는 기록도 있었을 정도였다.[20] 원나라가 제주도에 만든 말 목장이나 우유소 같은 낙농업 등.[21] 조선시대에 천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보면 결국 고려시대 신량역천들과 같은 뿌리, 같은 직업을 하고 있다. 봉화간은 봉수꾼이 되었고 수호간은 성문 문지기가 되었으며 역을 지키거나 뱃사공이라거나 공천이건 사천이건 상당수는 고려시대에도 신량역천이었다. 전문적인 기술을 요구하지만 더럽고 힘들고 어렵고 하고싶지도 않은 천한 일이라는 평가는 결국 거기서 거기였다.[22] 비교할 만한 사례를 들자면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에서 벌어진 육진의 난의 배경을 보면 유목민족인 선비족 출신의 지배층은 호한화합을 주도했고 꽤 성공했으나 중간층과 피지배층에서는 정책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커녕 불협화음이 잦았고 특히 선비족은 전통에 따라 군인으로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군대는 선비족 문화가 강해서 한족도 입대를 하면 오히려 선비족에 동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점차 한족에 동화되는 귀족층과 선비족의 전통을 유지함은 물론이고 나라가 안정되며 필요가 없어지자 천대를 받게 된 군인층 사이에는 신분과 더불어 문화 차이가 겹쳐진 알력이 발생해 결국 대규모의 반란으로 이어지고 만다.[23] '지금 새삼스럽게 형평사를 내세워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것이니 그보다 백정의 실질적 향상에 힘쓰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24] 김희곤 외 4인, '경북독립운동사 5', 청솔, 2014, p238~240[25]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공부만 잘 하는 사람이 국가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과거에 합격한 사람과 비슷한 고위 공무원도 나향욱 개돼지 망언 사건처럼 가장 조선시대의 성공한 선비 같은 사람조차 외국에까지 망언이 알려지며 나라 망신의 사례가 되기도 했다.[26] 김학도가 돈아의 이름이 새겨진 칼을 찾아오고 자살한 연인의 명복을 빌었을 때 침울한 표정이었던 연인의 혼령이 조금 누그러지는 기색을 보였으며 이후 성불한다.[27] 물론 이전에도 국가기술자격증으로 식육처리기능사가 있기는 하지만 첫 시행 시기가 1995년으로 의외로 역사가 짧은 편이다.[28] tvN의 요리 프로그램인 집밥 백선생에서 백종원돼지 반 마리를 통째로 들고 와서 해체하는 모습을 출연진들에게 보여준 바 있다.[29] 육류를 다루는 유투버인 육식맨과 돈 스파이크가 마장동 탐방을 하기도 했다.[30] 위의 식객의 '두당' 에피소드에서도 나이가 지긋한 도축업자가 실력 면에서 젊은 도축업자를 발라버리지만 그렇게 하대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도축업에 쓰는 칼은 어지간한 식칼보다 훨씬 날카로워서 아차 하면 바로 산업재해가 벌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31] 나이 먹은 사람 중에는 아직도 도축업자를 백정이라고 부르면서 차별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세간에서는 되려 그런 사람을 보고 평생 풀떼기나 먹고 살라면서 비웃고 무시하는 판국이다. 위에서 나온 식객에서도 진수의 칼럼에서 그런 인식을 가진 사람들을 두고 "그런 사람들은 하늘에서 고기가 떨어지는 줄 알 것이다."라며 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