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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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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화에서 나오는 다양한 창옷들의 예시 |
조선시대 때 "창의"라 하면 "대창의", "창옷"이라 하면 "소창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전통적으로 한자를 높이여겨 부르던 문화가 적용된 듯.
본래 18세기 이전까지는 공통적으로 무가 있고 트임이 작았지만 이후로는 이것들이 달라지면서 구조적으로 옷의 옆과 뒤에 트임이 크거나 작고, 종류에 따라 삼각형으로 내려오는 무가 생략되어 직선으로 떨어지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창의와 비슷한 의복으로는 여성용 한복인 당의가 있다.
창옷은 조선말기까지 계속 존재해오다가 1884년(고종 21) 5월 갑신의제개혁시(甲申衣制改革時) 도포 등 다른 광수의와 함께 폐지되고, 1895년 3월 을미개혁에서 공사예복(公私禮服)에 주의만을 착용하게 함으로써 창의는 자연히 소멸되어갔다.
트임이 나있고 활동성이 편하다는 장점덕분에 군복으로 사용되어진 옷이기도 하다. 정확이는 소창의가 포졸복의 포에 쓰이고, 대창의가 구군복의 동다리와 소매/배색을 제외하고 구조가 동일하다.
2. 종류
2.1. 소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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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가 용도였던 만큼 비교적 튼튼하게 겹옷이나 누비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으며 하급관리나 군졸, 시종들이 입던 것인지라 이들을 가리켜 "창옷짜리"라는 멸칭이 존재했다.
2.2. 중치막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서 들여온 중단(中單)에서 변이된 옷으로, 비슷한 한복인 창의와 같은 중의(中衣)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한국 전통 복식으로 자리잡아 양반과 중인들 사이에서도 입는 외출복이 되었다.
사실 단순하게 봐서 소창의의 소매를 대창의와 같이 넓고 길게 하면 그냥 중치막이 된다. 때문에 대창의와 소창의의 형태를 모두가진 중간정도의 형태인지라 ‘중치’로 표현되었다고 파악된다.
2.3. 대창의
나름 품이 크고 급이 높은 옷이지만 동시에 도포의 하위호환으로 보았기에 평상복 및 도포와 관복 속에 입는 받침 옷으로 이용하였다.
2.4. 학창의
鶴氅衣[1]보통 와룡관 혹은 정자관과 함께 입었으며 보통 하얀색에 검은 줄이지만 파란색, 초록색, 황토색 등 여러가지 색깔의 옷을 입었다. 17세기에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되어지며 자료로 보아 이 즈음 중국과 교류하던 학자들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다가 18~19세기에 현지화를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 조선 중기, 김육[2]의 초상화와 장만[3]의 초상화 | 조선 후기, 와룡관과 학창의를 착용한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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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담
연암 박지원이 지은 연암집에 창옷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중존에게 답함
세상 사람들이 하도 바쁜 탓인지 남의 말을 흐리멍덩하게 듣고, 전하는 말도 어물어물하니 이 때문에 근일 말하는 자들이 더욱 조리가 없게 되는 것이오. 나는 자세히 말을 할 터인데, 그대 역시 너무 길게 끈다고 싫증 냄이 없을는지요.
내가 처음 영남 고을에 부임했을 때, 용소(龍沼)에서 비를 빌게 되어, 유 선생이라는 이가 축관(祝官)으로 와서 용소 위에 있는 절에서 재(齋)를 지냈는데, 수염과 눈썹이 하얗고 의복이 예스럽고 특이해 보였지요.
그래서
“선생이 입고 계신 것이 무슨 의복입니까?”
하고 물었더니,대답이
“학창의(鶴氅衣)입니다.”
하더군요.
이는 대개 벼슬아치의 사복을 ‘창의(氅衣)’라 칭하므로 ‘학(鶴)’ 자 하나를 더 얹어 그와 구별하게 한 것이오. 그 제도는 옷깃은 모나고 양 섶은 곧으며, 흰 바탕에 검은 선을 둘렀으며, 세 자락이 옆으로 터지고 양 옷깃이 맞닿아서 몹시 점잖아 보이더군요.[5] 그래서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소.
“선생은 부디 산에는 놀러 가지 마시오.”
그가 그 까닭을 묻기에, 나는 웃으며 말했지요.
“예전에 밤에 모였던 때가 기억나는데, 좌중에 조경암이라는 이가 있었으니 옛것을 좋아하여 성실히 실행하는 사람이었소. 그가 일찍이 두 학동을 거느리고 구월산을 노닐면서 치관(緇冠)을 쓰고 심의[6]를 입고 다녔는데, 산성(山城)의 별장(別將)이 졸개 두어 명을 거느리고 뒤를 밟았던 거요.
조(趙)는 사뭇 그런 줄도 모르고 제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산 이름이 구월산인데 본래 이름은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했더라오. 그러자 성장(城將)이 별안간 호통을 치며 ‘과연 오랑캐〔兀良哈〕로다!’ 하며 좌우에게 눈짓을 주어 포박을 하려 드는 것이었소. 조는 성을 내며 ‘너는 어찌 남을 되놈이라 욕하느냐?’ 하니, 성장 역시 꾸짖으며 ‘네가 되놈 옷을 입고 되놈 말을 하니 되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소. 조는 하도 다급하여 정수리를 드러내 보이며 ‘너는 언제 상투 지닌 오랑캐를 본 적이 있느냐?’라 했소.
잠시 후에 절 중이 와서 알아보고 ‘이분은 여주 조씨 생원(趙生員)이오.’ 하자, 성장은 그래도 의심이 안 풀려 중에게 당부하기를 ‘이 손님은 밥도 주지 말고 산 밖으로 내쫓아라.’ 했더라오. 그래서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등에서 땀이 난다고 하여, 온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더라오.
나는 조에게 말하기를 ‘군자란 평상시에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삼가는 법이오.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심의를 증정했어도 소 강절(邵康節)은 늘 입지는 않았으니 이 어찌 평상시에 행동을 삼가는 군자가 아니겠소?’ 하니, 조의 말이 ‘그렇다마다요. 내가 한참 곤욕을 볼 때에 머리털이 있어 덕을 보았소. 지금처럼 연로하여 대머리였더라면 무엇으로써 해명했겠소?’ 하여 온 좌중이 더욱 크게 웃으며 그칠 줄을 몰랐다오. 지금 선생이 입고 있는 그 의복도 성장에게 의심 살 것이 아니겠소?”
유(劉) 역시 크게 웃고 나서는,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말하기를,
“이 옷은 우리 고장 임갈천(林葛川)과 노옥계(盧玉溪)가 물려준 제도입니다. 감히 묻자온대 성주(城主 사또)께서 입고 계신 것은 무슨 의복입니까?”
하기에,
“이 역시 이른바 창의라는 거요.”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유는 말하기를,
“명칭과 실상이 다 근거가 없습니다. 새 깃을 갈라서 옷을 만든 것을 창(氅)이라 이르는데, 창이란 본래 학의 날개로, 그 날개를 펴면 까만 선을 두른 것 같으니 이른바 호의현상(縞衣玄裳)이란 것이 이것이요, 옛날의 의복이란 검은 선을 두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창의라 이름 지은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른바 창의라는 것은 선을 둘러 가장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소매는 중의 장삼 같으며, 더구나 옷깃을 여미는 부분〔督袵〕이 항상 열려 있고 현무(玄武)는 엄정하지 않지 않습니까? 이는 단지 습속으로 그렇게 된 것뿐이니, 옛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성장의 의혹을 사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나서, 곁에 있던 통인(通引)을 가리키며 강개한 어조로 말하였소.
“총각이란 관을 아직 쓰지 않은 동자의 호칭이니 이른바 ‘총각관혜(總角丱兮)’가 이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땋은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드리워져도 오히려 총각이라고 이르면 되겠습니까? 아이를 가르침이 바르지 못하고 명칭과 의리가 모두 어긋났으니, 이 역시 등솔이 터진 창의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고장의 정동계(鄭桐溪)가 물러나 산중에서 살 적에 그 밑에 있는 동자들은 모두 땋은 머리를 풀어 쌍상투로 틀어 올렸지요. 이것은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우리 일가 두어 사람들이 삼동(三洞)에 놀러 가기 위하여 기생과 악공(樂工)을 빌려 달라 하기에, 나는 사절하며,
“그대들이 지금 찾아가는 그 산 전체가 바로 기생인걸요.”
했더니, 모두 놀라며 어째서냐고 물었소. 나는 웃으며,
“적상산(赤裳山)이 아니요.”
하였소.
그리고 농 삼아 앞에서 한 말을 들려 주며, 함부로 산에 놀러 가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이 고을에는 어진 이가 많소이다.”
하였더니, 그 손들이 발끈하여 일어나면서
“백성으로서 제 원님이 되놈 옷 입었다고 조롱하는 법이 어디 있소?”
합니다.
그 뒤 이웃 고을 원님들 4, 5명이 모였을 때, 영남 풍속이 거세어 원 노릇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였지요. 그때 누군가가
“되놈 옷과 심의에 대한 풍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고 묻기에, 나는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오. 그런데 또 어디서 들었소?”
했더니, 대답이
“그대 집안의 족형(族兄)과 친분이 있어 근간에 찾아갔더니, 이상한 소문을 파다하게 전해 줍디다.”
하는 것이었소.
아! 그 전하는 말이 비록 몹시 해괴했지만 굳이 변명할 가치도 없었소. 게다가 쟁반에 담은 음식이 계속 들어오고 거문고와 노래가 다투어 연주되었으므로 그 곡절을 자세히 알지도 못했고, 남들도 자세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이때 큰 눈이 갓 개고 초승달이 누르스름하여, 서로 손을 잡고 동산에 들어가서 뭇 기생을 시켜 촛불을 잡히고 수만 그루의 긴 대나무를 구경하였지요. 그 김에 부러진 대나무 가지를 다투어 주워서 술을 덥히고 고기를 구우니, 좌우에서 대나무 토막 터지는 소리가 대포처럼 번갈아 터져 나오고, 갈대숲 까마귀와 산비둘기가 날개가 얼어붙어 어지러이 떨어졌소.
술이 얼큰하자 서로 바라보며 말을 주고받기를,
“음산(陰山)에서 밤사냥할 제 초라함을 면치 못해, 초피 갖옷은 낡아빠져 뒤가 터진 것은 여전한데, 비파 소리 쓸쓸하고 줄 퉁기는 손가락은 추위로 떨어져 나갈 듯하네.”
하였지요.
한바탕 웃음과 해학이 흐드러졌으니 모두 다 한때 즐거움을 얻자는 것이었는데, 농담거리가 굴러다니다가 남을 해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대는 어찌 잊었소? 밤에 말 탄 이교(吏校) 수십 명을 거느리고 눈 속에 한껏 사냥을 했다는 말들은 모두 이런 따위가 번복되어 구실로 된 것임을 말이오. 그대는 왜 나를 위해 변명해 주지 않았소? 매란 밤에 풀어놓는 동물이 아니고, 산협(山峽) 고을 이교들이 어디로부터 그 많은 마필(馬匹)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말이오.
[출처]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세상 사람들이 하도 바쁜 탓인지 남의 말을 흐리멍덩하게 듣고, 전하는 말도 어물어물하니 이 때문에 근일 말하는 자들이 더욱 조리가 없게 되는 것이오. 나는 자세히 말을 할 터인데, 그대 역시 너무 길게 끈다고 싫증 냄이 없을는지요.
내가 처음 영남 고을에 부임했을 때, 용소(龍沼)에서 비를 빌게 되어, 유 선생이라는 이가 축관(祝官)으로 와서 용소 위에 있는 절에서 재(齋)를 지냈는데, 수염과 눈썹이 하얗고 의복이 예스럽고 특이해 보였지요.
그래서
“선생이 입고 계신 것이 무슨 의복입니까?”
하고 물었더니,대답이
“학창의(鶴氅衣)입니다.”
하더군요.
이는 대개 벼슬아치의 사복을 ‘창의(氅衣)’라 칭하므로 ‘학(鶴)’ 자 하나를 더 얹어 그와 구별하게 한 것이오. 그 제도는 옷깃은 모나고 양 섶은 곧으며, 흰 바탕에 검은 선을 둘렀으며, 세 자락이 옆으로 터지고 양 옷깃이 맞닿아서 몹시 점잖아 보이더군요.[5] 그래서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소.
“선생은 부디 산에는 놀러 가지 마시오.”
그가 그 까닭을 묻기에, 나는 웃으며 말했지요.
“예전에 밤에 모였던 때가 기억나는데, 좌중에 조경암이라는 이가 있었으니 옛것을 좋아하여 성실히 실행하는 사람이었소. 그가 일찍이 두 학동을 거느리고 구월산을 노닐면서 치관(緇冠)을 쓰고 심의[6]를 입고 다녔는데, 산성(山城)의 별장(別將)이 졸개 두어 명을 거느리고 뒤를 밟았던 거요.
조(趙)는 사뭇 그런 줄도 모르고 제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산 이름이 구월산인데 본래 이름은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했더라오. 그러자 성장(城將)이 별안간 호통을 치며 ‘과연 오랑캐〔兀良哈〕로다!’ 하며 좌우에게 눈짓을 주어 포박을 하려 드는 것이었소. 조는 성을 내며 ‘너는 어찌 남을 되놈이라 욕하느냐?’ 하니, 성장 역시 꾸짖으며 ‘네가 되놈 옷을 입고 되놈 말을 하니 되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소. 조는 하도 다급하여 정수리를 드러내 보이며 ‘너는 언제 상투 지닌 오랑캐를 본 적이 있느냐?’라 했소.
잠시 후에 절 중이 와서 알아보고 ‘이분은 여주 조씨 생원(趙生員)이오.’ 하자, 성장은 그래도 의심이 안 풀려 중에게 당부하기를 ‘이 손님은 밥도 주지 말고 산 밖으로 내쫓아라.’ 했더라오. 그래서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등에서 땀이 난다고 하여, 온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더라오.
나는 조에게 말하기를 ‘군자란 평상시에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삼가는 법이오.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심의를 증정했어도 소 강절(邵康節)은 늘 입지는 않았으니 이 어찌 평상시에 행동을 삼가는 군자가 아니겠소?’ 하니, 조의 말이 ‘그렇다마다요. 내가 한참 곤욕을 볼 때에 머리털이 있어 덕을 보았소. 지금처럼 연로하여 대머리였더라면 무엇으로써 해명했겠소?’ 하여 온 좌중이 더욱 크게 웃으며 그칠 줄을 몰랐다오. 지금 선생이 입고 있는 그 의복도 성장에게 의심 살 것이 아니겠소?”
유(劉) 역시 크게 웃고 나서는,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말하기를,
“이 옷은 우리 고장 임갈천(林葛川)과 노옥계(盧玉溪)가 물려준 제도입니다. 감히 묻자온대 성주(城主 사또)께서 입고 계신 것은 무슨 의복입니까?”
하기에,
“이 역시 이른바 창의라는 거요.”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유는 말하기를,
“명칭과 실상이 다 근거가 없습니다. 새 깃을 갈라서 옷을 만든 것을 창(氅)이라 이르는데, 창이란 본래 학의 날개로, 그 날개를 펴면 까만 선을 두른 것 같으니 이른바 호의현상(縞衣玄裳)이란 것이 이것이요, 옛날의 의복이란 검은 선을 두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창의라 이름 지은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른바 창의라는 것은 선을 둘러 가장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소매는 중의 장삼 같으며, 더구나 옷깃을 여미는 부분〔督袵〕이 항상 열려 있고 현무(玄武)는 엄정하지 않지 않습니까? 이는 단지 습속으로 그렇게 된 것뿐이니, 옛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성장의 의혹을 사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나서, 곁에 있던 통인(通引)을 가리키며 강개한 어조로 말하였소.
“총각이란 관을 아직 쓰지 않은 동자의 호칭이니 이른바 ‘총각관혜(總角丱兮)’가 이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땋은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드리워져도 오히려 총각이라고 이르면 되겠습니까? 아이를 가르침이 바르지 못하고 명칭과 의리가 모두 어긋났으니, 이 역시 등솔이 터진 창의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고장의 정동계(鄭桐溪)가 물러나 산중에서 살 적에 그 밑에 있는 동자들은 모두 땋은 머리를 풀어 쌍상투로 틀어 올렸지요. 이것은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우리 일가 두어 사람들이 삼동(三洞)에 놀러 가기 위하여 기생과 악공(樂工)을 빌려 달라 하기에, 나는 사절하며,
“그대들이 지금 찾아가는 그 산 전체가 바로 기생인걸요.”
했더니, 모두 놀라며 어째서냐고 물었소. 나는 웃으며,
“적상산(赤裳山)이 아니요.”
하였소.
그리고 농 삼아 앞에서 한 말을 들려 주며, 함부로 산에 놀러 가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이 고을에는 어진 이가 많소이다.”
하였더니, 그 손들이 발끈하여 일어나면서
“백성으로서 제 원님이 되놈 옷 입었다고 조롱하는 법이 어디 있소?”
합니다.
그 뒤 이웃 고을 원님들 4, 5명이 모였을 때, 영남 풍속이 거세어 원 노릇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였지요. 그때 누군가가
“되놈 옷과 심의에 대한 풍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고 묻기에, 나는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오. 그런데 또 어디서 들었소?”
했더니, 대답이
“그대 집안의 족형(族兄)과 친분이 있어 근간에 찾아갔더니, 이상한 소문을 파다하게 전해 줍디다.”
하는 것이었소.
아! 그 전하는 말이 비록 몹시 해괴했지만 굳이 변명할 가치도 없었소. 게다가 쟁반에 담은 음식이 계속 들어오고 거문고와 노래가 다투어 연주되었으므로 그 곡절을 자세히 알지도 못했고, 남들도 자세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이때 큰 눈이 갓 개고 초승달이 누르스름하여, 서로 손을 잡고 동산에 들어가서 뭇 기생을 시켜 촛불을 잡히고 수만 그루의 긴 대나무를 구경하였지요. 그 김에 부러진 대나무 가지를 다투어 주워서 술을 덥히고 고기를 구우니, 좌우에서 대나무 토막 터지는 소리가 대포처럼 번갈아 터져 나오고, 갈대숲 까마귀와 산비둘기가 날개가 얼어붙어 어지러이 떨어졌소.
술이 얼큰하자 서로 바라보며 말을 주고받기를,
“음산(陰山)에서 밤사냥할 제 초라함을 면치 못해, 초피 갖옷은 낡아빠져 뒤가 터진 것은 여전한데, 비파 소리 쓸쓸하고 줄 퉁기는 손가락은 추위로 떨어져 나갈 듯하네.”
하였지요.
한바탕 웃음과 해학이 흐드러졌으니 모두 다 한때 즐거움을 얻자는 것이었는데, 농담거리가 굴러다니다가 남을 해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대는 어찌 잊었소? 밤에 말 탄 이교(吏校) 수십 명을 거느리고 눈 속에 한껏 사냥을 했다는 말들은 모두 이런 따위가 번복되어 구실로 된 것임을 말이오. 그대는 왜 나를 위해 변명해 주지 않았소? 매란 밤에 풀어놓는 동물이 아니고, 산협(山峽) 고을 이교들이 어디로부터 그 많은 마필(馬匹)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말이오.
[출처]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