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을 지었을 때 | 풀었을 때 |
1. 개요
한복을 입을 때 저고리, 도포, 원삼, 창옷, 활옷 기타 등등을 비롯한 상의류의 옷자락을 여미기 위해 매는 끈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저고리 고름"이란 표현으로 사용한다. 이 외에도 고름과 비슷한 결합 장치가 몇몇 있지만 한복에서의 고름은 오로지 '상의를 여미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끈 형태의 장치를 말한다.[1]고름은 묶고 남은 천들을 늘어뜨린 "고", 묶으면서 만들어지는 "고리"로 구분하는데, 이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신분 구별이 가능했다. 백성들의 경우 자신 기준으로 오른쪽에 고를 만들어야만 했다. 형태는 착용자를 기준으로 고리가 왼쪽을 향하는 반 리본(외매듭) 모양이다. 양반의 경우는 이의 반대로 묶으면 되었다. 현대의 퓨전한복 같은 경우 형태 면에서 훨씬 자유로운 편이라 리본 매듯이 묶을 수도 있다.
옛부터 한복은 옷마다 고름을 하나씩만 썼고, 상의를 비롯해 남자 바지의 허리띠, 여자 바지 말기끈, 남자 한복 밑단을 정리하는 대님이나 행전, 심지어 갓이나 유건 등 모자류의 끈도 고가 한쪽 방향으로만 나오는 외매듭 방식으로 매었다. 다만 여자 원삼, 활옷의 대대 는 흔히 아는 리본 모양의 나비 매듭으로, 조선시대 이전에 고름 대신 허리띠를 두를 때 역시 매듭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매었다.
2. 역사
세간에는 옷고름이 몽골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이라거나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한복의 특색이라는 등의 이야기들이 퍼져있지만, 실제 옷고름이란 장치 자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한복 문화에서 존재했었다. 고구려 한복 옷고름'옷을 고정하기 위한 개념' 자체의 고름은 동아시아 문화권을 넘어 서양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공통적으로는 대체로 허리띠를 돕는 부속 장치같은 역할이었고 크기가 작으며 대게 감추어져 있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소실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과거 한복 문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던 이야기였다.
한반도에서의 경우 북방계 호복에 근간을 둔 한복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앞섶을 여미는 데는 허리띠를 사용하였다. 고름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과 달리 겉보다는 주로 옷 속에 숨어 결속을 돕는 속고름으로서 쓰였고, 이러한 형태는 삼국시대~고려시대로 이르는 긴 시간동안 유지되어 왔다.[2] 그러다 조선시대를 기점으로 한복 문화는 비교적 큰 변화를 맞이하였고 옷고름 또한 크기가 커지고 겉으로 눈에 띄게 드러나는 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말기에 원나라와 접하며 몽골풍이 들어온 뒤로 기존 한복 문화에서 약간의[3] 변화를 맞이했고, 조선시대로 이르러서는 점차 저고리가 짧아지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를 지지하기 위해 저고리에는 기존에 없던 겉고름을 추가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허리띠와 함께 사용하곤 했지만 현대로 가까워질 수록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는 만큼 고름이 크고, 길고, 두꺼워지면서 조선시대 중기부터는 허리띠의 역할을 고름으로 완전히 대체하게 된다.[4] 이후 조선시대 말기로 이르러 서양복식이 들어옴과 동시에 고름이 더욱 크고 넓어져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말기 한복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과거 옷고름이란 장치는 한반도 복식만의 특별한 개념은 아니었다. 호복의 영향을 받은 한푸나 기모노[5]에서도 옷자락을 고정시키기 위해 작은 끈으로 만든 고름이 달려있는 경우가 있다. 모든 한푸나 기모노에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지만, 중국 웹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나라 복식 저고리[6]와 입는 방법을 보면 작은 겉고름과 속고름이 달려있고, 기모노의 경우 남성이 간단한 일상복으로 입는 진베이 등에서 겉과 속에 고름이 있으며, 일부 유카타에서도 옷고름이 존재하고 있다.[7]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옷고름 역시 허리띠 만큼이나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넓고 길게 흘러내리는 고름이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한복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한복의 특징이자 특유의 멋이라고 할 수 있다.
3. 매는 순서
1. 겉섶(착용자 기준 왼쪽)에 달린 게 긴고름, 앞길(착용자 기준 오른쪽)에 달린 게 짧은고름이다. | |
2. 짧은고름이 긴고름 위쪽으로 오도록 교차시킨다. | |
3. 짧은고름이 긴고름 밑으로 오도록 통과시킨다. | |
4. 아래쪽으로 나온 긴고름으로 Z자 접기로 고[8]를 만든다. | |
5. 위의 짧은고름을 아래로 접는다. | |
6. 짧은고름을 안쪽으로 반바퀴 감는다.[9] | |
7. 5,6번 순서에서 만든 고리[10]에다 (입은 사람의 기준으로 보았을때)오른쪽 방향으로 바깥쪽으로접어 짧은고리를 넣는다. | |
8. 긴고름과 짧은고름은 함께 안쪽으로 자연스럽게 접어 늘어뜨린다. |
출처
그냥 빼내는 가닥도 고를 만들어 넣으면 쌍고름이 된다. 이건 대대 등 허리띠 종류를 묶을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조선시대 저고리의 고름을 묶을 땐 잘 쓰지 않는다. 위에서 말했듯이 조선시대 이전 한복은 허리띠를 묶는 방식이나 매듭 위치가 자유로웠다.
4. 여담
매듭을 짓고 나서 긴고름과 짧은고름의 길이 차이가 1~2cm 정도 나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긴 고름과 짧은 고름의 길이 차이가 애초에 좀 나야 한다. 길이 차이가 거의 없으면 매듭을 지은 뒤의 고름 길이를 맞추기 어렵다.[1] 치마고름이란 표현은 없다. 말기나 가슴가리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치마끈은 그냥 끈이다.[2] 고구려 벽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단령 형태 복식들은 앞자락에 작은 겉고름을 달고 있으며, 일본 정창원(正倉院, 쇼소인)에서 보관하고 있는 의복 중 한반도 계통이거나 또는 한반도 복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옷에서도 작은 고름을 발견할 수 있다.[3] 한복은 긴 역사에 비해서 저고리, 바지, 치마, 포로 구성되는 기본 구조와 형태의 변화가 크지 않았고 초기의 고유한 형태를 오랫동안 잘 간직해 온 편이다.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허리띠 대신 고름으로 여민다는 점을 제외하면(허리띠로 여미는 방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도 '풍성한 A라인 투피스'로 입는다는 큰 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서 들여온 옷들은 따로 '관복'이라는 별개의 틀에서 기존 한복과 동시에 공존했다.[4] 다만 구한말에 사치를 금하는 목적으로 장려된 두루마기를 제외하면, 포 종류의 겉옷은 고름과 함께 허리띠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5] 다만, 초기 한푸는 원래 북방계 호복이 아닌 남방계 복식이었고 기모노는 지금 형태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호복보다 한푸와 더 가깝다.[6] 소매가 좁은 형태 등으로 미루어 보아 호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7] 다만 이렇게 고름이 달려 있는 유카타는 기존 유카타 착장의 불편함을 덜기 위한 것으로 현대에 와서 달리게 된 것이다. 에도 시대 이후로 성립된 기모노에는 원래 옷고름이 없다. 기모노로 분화하기 전 나라 시대, 아스카 시대까지의 옷에는 있었다.[8] 옷고름의 리본같은 개념.[9] 여기서 2~3번 더 감으면 아주 튼튼한 고름이 된다.[10] 이 사진에서 보이는 원래 고름이 시작한 부분과 매듭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