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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헴(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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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바이오그래피
2.1. 밴드의 결성2.2. 밴드의 본격적인 활동과 보컬리스트 데드의 자살사건2.3. 사타닉 서클의 결성과 유로니무스 살인사건2.4. 밴드의 해체와 재결성
3. 디스코그래피
3.1. Deathcrush3.2. Projections of A Stained Mind3.3. Live in Leipzig3.4. De Mysteriis Dom Sathanas3.5. Wolf's Lair Abyss3.6. Grand Declaration of War3.7. Chimera3.8. Ordo ad Chao3.9. Esoteric Warfare3.10. Daemon

1. 개요

파일:external/40.media.tumblr.com/tumblr_mz4tuwUnTU1smb8ifo1_1280.jpg
왼쪽부터: 네크로버처(베이스), 유로니무스(기타), 데드(보컬), 헬해머(드럼)[1]
Freezing Moon의 2016년 라이브[2]

노르웨이블랙 메탈 밴드. 로고 위에 작은 글씨로 'The True'를 덧씌워 The True Mayhem이라는 명칭을 같이 사용한다. 유로니무스에 의하면 자신은 베놈(Venom), 바쏘리(Bathory) 등의 스래쉬 메탈탠저린 드림 등의 크라우트록을 즐겨 들었으며 밴드의 이름도 베놈의 곡 Mayhem with Mercy에서 따왔다고 한다.

실질적인 노르웨이 블랙 메탈의 시초격인 밴드로서 블랙 메탈계에서는 가히 레전드로 받들어지고 있는 밴드이며, 어둠과 오컬트적인 색채를 가장 잘 표현한 밴드라고 알려져 있다.

음악적인 면으로는 블랙 메탈의 레전드라고 칭송받는 밴드이지만, 정작 멤버들의 문제로 사건사고가 많았어서 전성기 당시엔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했다. 그 사건사고들 중에도 유로니무스 살인사건과 데드 자살사건이 유명하다.

2. 바이오그래피

2.1. 밴드의 결성

1984년 노르웨이오슬로에서 베놈켈틱 프로스트의 곡들을 카피하는 스쿨 밴드로 처음 결성되었으며 1986년 데모 <Pure Fucking Amageddon>를 100장, 1987년 EP <Deathcrush>를 1000장 한정으로 발매하면서 데뷔하였다. 결성 당시 멤버는 메시아(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맨하임(드럼). 보컬인 메시아는 메이헴이 활동하던 동네인 랑휴스(Langhus)와는 멀리 떨어진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Pure Fucking Amageddon>은 네크로버처가 보컬을 맡았다. 이후 메시아의 가족은 더 먼 릴레함메르(Lillehammer)로 이사를 갔고 메시아는 메이헴을 탈퇴했다.[3] 그래서 <Deathcrush> 녹음시에는 매니악이라는 새 보컬리스트를 고용하였다.


1985년 4월 20일, 유로니무스가 살던 동네 Ski에서 진행된 축제 겸 밴드경연이었던 Norwegian Championships of Rock에 출연한 메이헴. 그야말로 극 초기 시절 메이헴의 공연영상으로 메시아가 메이헴과 함께한 유일한 공연이기도 하다. 해당 경연에서 메이헴은 꼴등을 먹었지만 멤버들은 어차피 대중을 엿먹이기 위해 나온 것이므로 이걸 우승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공연 멤버로는 메시아(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맨하임(드럼).

<Deathcrush> 앨범의 녹음이 완료된 후,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지 않던 매니악과 맨하임이 밴드를 나갔고 네크로버처와 유로니무스는 새 멤버들을 모집한다. 그 결과 스웨덴에서 Morbid(모비드)라는 데스 메탈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을 맡고있던 데드와 노르웨이 여러 지역의 메탈 밴드에서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던 드러머 헬해머가 밴드에 가입하고 메이헴은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리허설과 작곡을 시작한다.

2.2. 밴드의 본격적인 활동과 보컬리스트 데드의 자살사건

파일:external/www.metal-archives.com/41_artist.jpg
데드 생전의 모습

데드의 본명은 페르 윙베 올린(Per Yngve Ohlin)으로 1969년 1월 16일, 스웨덴에서 3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페르가 아직 어렸을 때 그의 부모는 이혼했으며 이후 페르는 학교에 입학했지만 또래들과 잘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단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던 1982년의 어느 날 참다못한 페르가 평소 그를 괴롭히던 일진들에게 반항을 시도했다가 보복으로 린치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척추가 골절되고 내장이 파열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페르는 고통을 참으며 가까스로 집에 도착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진 페르를 보고 놀란 새어머니의 응급처치 후[4] 페르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어 의료진의 노력으로 구사일생하였다.

이후 의식 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페르는 자신이 사후세계에 다녀왔다고 믿으면서 그 경험에 몰입하여 공포 영화, 헤비 메탈에 깊게 빠져들었다. 페르의 사후 그의 동생 앤더스의 인터뷰에 의하면 페르는 키스(KISS),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AC/DC, 메탈리카(Metallica), 베놈(Venom), 소돔(Sodom), 바쏘리(Bathory) 등 여러 록그룹들을 좋아했으며 특히, Bathory에 깊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Bathory의 리더인 쿼손이 레코드점 Heavy Sound에 사인을 하러 왔을 때 페르는 친구들과 함께 그의 사인을 받으러 갔다가 쿼손이 마치 슈퍼 스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고는 "변절자"라며 비난한 뒤 이후 그들의 음악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5]


페르가 출연한 스웨덴의 둠 메탈 밴드 Candlemass의 Bewitched 뮤직비디오 (1986년). 비디오 중간에 여럿이 모인 젊은이들 중 맨앞에서 혼자 입을 벌리고 좀비 흉내를 내며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금발 청년이 페르다.

1986년 페르는 전학간 학교와 레코드 가게 Heavy Sound[6] 등에서 친해진 친구들과 함께 모비드(Morbid)라는 이름의 데스 메탈 밴드를 결성하여 보컬리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닉네임과 기믹을 하나씩 설정한다는 모비드의 활동 지침에 따라 페르는 '데드'라는 닉네임을 쓰기 시작했다. 데드(시체)라는 스테이지 네임은 페르의 죽음에 대한 집착을 잘 보여준다. 모비드 활동 당시 페르는 특히, 흡혈귀에 매료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모비드의 유일한 앨범인 <December Moon>. 같은 해에 발매된 메이헴의 EP인 <Deathcrush>와 마찬가지로 17분짜리의 소규모 EP이다. 1987년 12월 6일12월 7일에 녹음되어 1987년 12월에 발매되었다. 앨범의 1번 트랙이 시작될 때 데드가 "Tjena alla monsterdiggare(안녕하신가, 괴물 팬 여러분)"라고 하는데 스웨덴의 유명 어린이 TV쇼에서 나온 대사로 모비드 시절, 데드가 라이브를 할 때 즐겨썼던 멘트였다고 한다.

모비드의 리더였던 데드는 자작곡들의 가사를 단독으로 작사하고 데뷔 EP 앨범 자켓의 디자인까지 직접 신경쓰며 밴드의 전체적인 컨셉트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도맡아했다. 그러나 모비드의 데뷔 EP <December Moon>을 마지막으로 밴드의 기타리스트이자 데드와 함께 모비드를 결성한 멤버였던 John Hagström이 부모님에 의해 반강제로 밴드에서 탈퇴하자 밴드 활동에 의욕을 잃은 데드는 갑작스레 모비드를 해체한다.

이후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예술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데드는 1988년, 메탈 팬진에 멤버 구인 광고를 실은 메이헴에 가입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떠난다. 데드는 1988년에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오가며 메이헴의 리허설에 참여했고[7] 1989년 무렵에 풀타임으로 메이헴의 보컬리스트로서 활동하기로 결정했지만 하필이면 이때 메이헴의 활동 자금이 바닥나서 메이헴은 밴드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데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스웨덴으로 귀국했다.


메이헴의 리허설 모습이 찍힌 유일한 영상. 참고로 영상은 1989년, 메이헴이 일시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기 직전에 찍혔으며 처음에 비친 금발의 청년이 바로 데드이고 밴드 연주 시 오른쪽에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이 유로니무스이다. 촬영은 Lasse Olstad라는 사람이 했다고 한다. 당시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8]

데드가 스웨덴으로 귀국하자 모비드의 멤버였던 드러머 엘지 페트로브(L.G. Petrov)와 기타리스트 울프 ‘우페’ 세델룬드(Ulf ‘Uffe’ Cederlund)가 니힐리스트(Nihilist)라는 밴드와 연합하여 인툼드(Entombed)[9]라는 이름의 새 밴드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데드에게 자기네 밴드에 보컬리스트로 가입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지만 데드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다시 예술대학 입시를 준비 중이었던 데드는 1989년 말에 유로니무스가 "부모님의 지원으로 자신이 직접 레코드 회사 Posercorpse Music을 설립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메이헴을 재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것"이라는 편지를 보내오자 메이헴에 재가입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향한다.
파일:euro dead necro.jpg
▲ 유로니무스, 데드, 네크로버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ead_%26_euronymous.jpg
▲ 왼쪽부터 : 데드, 유로니무스


메이헴의 첫 공연인 Live in Jessheim (1990.2.3)
당시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다시 모인 밴드는 리허설을 거듭한 끝에 "Funeral Fog"와 'Buried By Time And Dust"라는 제목의 신곡 2곡을 새로 완성했고 1990년 2월 3일 노르웨이의 Jessheim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유로니무스는 공연 직전 Nella라는 매니악의 절친한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무대에 꽂아놓을 돼지 머리를 샀다는 것과 밴드의 첫 라이브에서 밴드 멤버들이 콥스페인팅을 하고 무대에 오를것이며 보컬인 데드가 공연 중 자해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었다.

밴드의 첫 공연에서 데드는 '모싱과 스테이지 다이빙을 하면서 폼만 잡는 가짜 관객들'을 공연장에서 쫓아내기 위해 유로니무스가 미리 준비한 돼지 머리[10] 등의 소품을 관객들에게 던졌고 공연 막바지에는 Chainsaw Gutsfuck을 부르면서 나이프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깨진 콜라병으로 자신의 오른쪽 팔을 그었다. 결국, 상처가 너무 깊어서 데드는 공연이 끝난 직후 구급차를 타고 급히 응급실로 실려갔다고 한다. 유로니무스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공연장에 구급차를 대기시켜 놓았었다고... 이후 데드는 Mike라는 팬이 보낸 팬레터 답장에 '예상했던 것보다 깊게 그어져 버렸다, 관중들은 내가 피를 흘리는 광경을 보고 즐기는 것 같았다'라고 적었다.


두번째 공연인 Sarpsborg, Norway 공연 (1990.2.28)
당시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데드의 부상이 어느정도 나아진 1990년 2월 28일 밴드는 노르웨이의 Sarpsborg에서 두번째 공연을 펼쳤다. 이들은 해당 공연에서 '죽음의 느낌을 관객들에게 확실하게 전달하여 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싶다'며 무대를 암전 상태로 만들고 숲에서 모아온 썩은내가 나는 까마귀의 시체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무대에 올려놓았다.

Jessheim과 Sarpsborg에서의 공연 후 메이헴은 노르웨이에서 제일 컬트적인 밴드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노르웨이의 라이브 클럽들은 밴드의 공연을 보이콧하얐다. 노르웨이에서 공연을 진행할 수 없게되자 밴드는 대신 오스트리아의 글라이스도르프(Gleisdorf)에서 공연을 하려 했지만 밴드가 오스트리아로 떠나기 직전에 모종의 이유로 공연이 취소되었다. 이 즈음 유로니무스는 자신이 소유한 레코드사 이름을 Posercorpse Music에서 D.S.P.(Deathlike Silence Productions)로 변경한 후 본격적으로 레이블 경영을 하기 시작했으며 밴드는 1990년 4월, The Freezing Moon과 Carnage의 스튜디오 버전을 녹음했다. (이 녹음본은 훗날 컴펄레이션 앨범 Projections of A Stained Mind에 수록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후 유로니무스는 오슬로 외곽에 위치한 자신의 가족 별장을 밴드의 새로운 연습실로 만들었으며 네크로버처를 제외한 밴드 멤버들은 새로 마련한 연습실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전개하였다. 완벽주의자였던 데드와 유로니무스는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곡이 만들어질 때까지 리프나 가사를 계속 수정했다고 하며 결과적으로 동독 라이브에서 불려진 신곡은 "Pagan Fears" 1곡 뿐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나머지 미완성 곡들은 훗날 유로니무스와 기타리스트 블랙손(Blackthorn)이 재작업하여 De Mysteriis Dom Sathanas 앨범에 수록되었다. 앨범 제목도 생전에 데드가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헬해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밴드는 그리 원만하게 굴러가지 못했다고 한다. 밴드의 중심축인 데드와 유로니무스는 블랙 메탈과 밴드 운영에 대한 견해 차이 및 성격 차이로 심하게 대립했으며 네크로버처는 동거중인 여자친구가 임신해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빠서 연습에 잘 나오지 않았고[11] 헬해머 본인도 밴드의 지지부진한 활동에 실망감을 느껴서 세션 드러머 활동을 병행했다고 한다.

유로니무스는 노르웨이의 청소년 공산주의자 클럽 Rød Ungdom의 일원으로 활동한적이 있었고[12] 그곳에서 알게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악하고 독단적인 리더십을 흠모하는 스탈린주의자였다. 그래서 유로니무스는 스탈린처럼 자신도 밴드 운영에 독재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고자 하였는데 메이헴에 가입하기 전에 모비드의 리더로써 활동했던 경험이 있었던 데드는 유로니무스의 이러한 독단적인 밴드 운영에 유일하게 반기를 든 메이헴의 멤버였고 덕분에 유로니무스와 자주 다퉜다고 한다.

블랙 메탈 씬에 대해서도 의견 차가 발생하였다. 유로니무스는 헬스 엔젤스같은 바이커 갱들처럼 자신을 리더로 하여 일정한 사상과 목적을 가진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블랙 메탈 씬을 구축하려 했지만 데드는 블랙 메탈이 펑크 문화처럼 그저 주류 문화에 대한 거부 혹은 반대를 표출하는 개인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 코드로서만 자리 잡아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블랙 메탈 씬이 어떠한 정치적 이념과 결부되지 않고 사회의 관습에도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며 유로니무스의 의견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위태롭게 밴드가 굴러가던 중 메이헴은 유로니무스가 속해있던 공산주의 단체의 의뢰를 받아들여서 1990년 11월 동독에서 공연을 하게되었다. 동독에서의 공연이 결정되자 데드는 무대 밖에서도 자신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보여지고 싶다면서 일부러 음식을 거의 먹지 않기 시작했으며 동독 투어에서 데드는 땅 속에 묻어놨다 동독으로 떠나기 직전 꺼내서 챙긴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콥스페인팅을 한 채 공연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후 메이헴은 노르웨이로 귀국하기 전인 1990년 12월, 터키 이즈미르에 들려서 한 차례 공연을 진행했으며 이것이 밴드의 마지막 공연이 되고 말았다. 메이헴이 터키 라이브를 위해 열차를 타고 이스탄불[13]로 이동하던 중에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데드는 계속 코피를 흘렸다고 한다.

종합해보면 메이헴의 활동 당시 밴드의 라이브 공연은 다음과 같이 총 6번 이루어졌다.
February 3rd 1990 - Jessheim, Norway (The Great War bootleg)
February 28th 1990 - Sarpsborg, Norway (Live in Sarpsborg album)
November 23th 1990 - Annaberg, Germany[14]
November 24th 1990 - Zeitz, Germany (War and Sodomy bootleg)
November 26th 1990 - Leipzig, Germany (Live in Leipzig album)
December 1990 Izmir, Turkey[15]

투어 종료 후 1991년이 되자 네크로버처는 밴드를 탈퇴하고 멤버들과의 연락도 완전히 끊었고 핼헤머도 자신의 할아버지 집으로 거처를 옮겨서 노르웨이 전역을 돌아다니며 세션 드러머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멤버들의 이탈로 정상적인 밴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유로니무스는 자신과 사이가 나쁜 데드를 배제한 채로 따로 집을 구해서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블랙 메탈 전문 레코드 점의 개장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데드는 메이헴의 연습실에 홀로 남아 숙식을 해결하다가 1991년 4월 8일[16], 칼로 자신의 손목과 목을 긋고 산탄총으로 머리를 쏴서 목숨을 끊었다. 1969년 생이었으니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Red Harvest의 드러머이자 Enslaved 드러머였던 Cato에 의하면 데드는 자살 당시 오슬로 외곽에 위치한 연습실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었고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때때로 오슬로 시내로 나와서 여러 메탈 팬진들을 담은 비닐봉투를 들고 그것이 팔릴 때 까지 계속 거리에 서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데드에게 연민을 느껴 이따금 잡지를 구매하거나 술을 사주었는데 얼마 못가서 데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다음은 데드의 유서 전문이다.
Excuse the blood, but I have slit my wrists and neck. It was the intention that I would die in the woods so that it would take a few days before I was possibly found. I belong in the woods and have always done so. No one will understand the reason for this anyway. To give some semblance of an explanation I'm not a human, this is just a dream and soon I will awake. It was too cold and the blood kept clotting, plus my new knife is too dull. If I don't succeed dying to the knife I will blow all the shit out of my skull. Yet I do not know. I left all my lyrics by "Let the good times roll"—plus the rest of the money. Whoever finds it gets the fucking thing. As a last salutation may I present "Life Eternal". Do whatever you want with the fucking thing.

P.S. I didn't come up with this now, but seventeen years ago.
/ Pelle.[17]

유서의 내용을 보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 "이것(인생)은 한낱 꿈일 뿐이고 나는 곧 깨어날 것이다" 등의 내용이 있는데, 데드는 자살 이전부터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온 생명체이며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유년 시절의 사건 이후 자신은 불멸의 존재이며 이곳에서의 인생은 잠시일 뿐이고 죽은 뒤 다른 세계(혹은 사후세계)로 갈 것이라고 믿었다. 몇몇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데드의 증상은 코타르 증후군의 증상과 맞아떨어진다고 한다. 이 병은 자신이 사실 죽었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내부 장기나 혈액을 잃어버렸다거나 매우 희귀한 경우 자신이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병이다.

유서 마지막 줄에는 "나는 이것(자살)을 지금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17년 전부터 생각해왔다" 라는 말이 쓰여져 있다. 이는 데드가 약 5살 때부터 자신이 주변 사람들과 다르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의 남동생 앤더스가 데드 사후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형은 어렸을 때부터 종종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집에 손님들이 방문할 때면 어머니는 형이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신경써야 했다." 고 말했다.

참고로 자살할 당시 데드가 입고 있는 옷에는 I ❤ transylvania 라고 적혀 있었는데 데드는 생전에 트란실바니아의 건축물, 특히 성을 좋아했다고 한다.

한편, 오랜만에 데드를 만나러 메이헴의 연습실에 갔다가 데드의 시체를 발견한 유로니무스는 시체를 보자마자 근처 상점으로 달려가서 일회용 카메라를 산 후 데드의 시신을 훼손시키고 그 주위에 일부 사물을 늘어놓은 뒤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데드의 자살 현장에서 데드의 뼈조각들 일부를 빼돌려서 팬던트 목걸이 여러개를 만든 뒤 귀중한 것이라며 동료 뮤지션들에게 선물했다.[18] 데드의 뼈조각을 선물받은 이들은 자신들이 유로니무스에게서 데드의 뼈조각을 받은 사실을 계속 부인하다가 2005년 선물받은 사실을 인정했다.[19] 또한, 유로니무스와 그를 따르는 일련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담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데드의 시체가 발견된 방을 수시로 찾아가 밤을 지샌 후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이후 유로니무스는 기자들에게 인터뷰 약속들을 잡아서 "나는 메이헴이라는 밴드의 기타리스트 유로니무스라고 한다. 밴드의 보컬인 데드가 블랙 메탈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데드는 좋은 가수에다 중요한 사람이었고 블랙 메탈러인 우리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서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데드의 자살을 통해 블랙 메탈은 세상에 널리 알리질 것이며 나는 우리들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라는 발언을 통해 데드의 자살을 언론에 대서특필되게 하여 자신과 블랙 메탈을 홍보하였다.


The Freezing Moon (Occultus 보컬 버전)

언론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유로니무스는 핼헤머에게 다시 연락하고 당시 자신의 룸메이트였던 Occultus라는 인물을 메이헴의 보컬리스트 겸 베이시스트로 받아들여서 메이헴의 활동을 재개하려 했으나 활동을 채 시작하기도 전애 데드가 자살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이용해 먹으려는 생각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유로니무스의 행실을 혐오한 Occultus가 밴드를 탈퇴하여 무산되었다. Occultus는 데드와도 어느 정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며 네크로버처가 밴드 활동에 흥미를 잃고 잠시 밴드를 나갔을 때 후임 베이시스트로 메이헴에 가입해서 밴드의 리허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Occultus는 유로니무스와 함께 블랙 메탈 전용 레코드점 Helvete의 기본 컨셉을 고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참고로 데드의 시체 사진들은 유로니무스가 자신의 레코드점 Helvete에 전시해 두었다가 유로니무스 사후 유족들이 소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로니무스가 콜롬비아에 거주했던 블랙 메탈 뮤지션 Bull Metal[20]에게 보냈던 데드의 시체 사진이 남아있었고 결국 유로니무스 사후인 1995년에 데드의 시체 사진이 앨범 자캣으로 쓰인 부틀랙 앨범 <Dawn of the Black Hearts>가 발매되었다.[21] 해당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자 남동생 앤더스를 포함한 데드의 유족들은 웹사이트 운영자들에게 연락해 사진을 지워 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의 지워주지 않았다고 한다. 유로니무스의 행동에 대해 앤더스는 "어떤 마음이였는진 이해한다, 하지만 그 행동이 옳은 것은 아니다" 라고 말했다.

메이헴의 베이시스트인 네크로버처는 2019년 LOUDWIRE 인터뷰에서 유로니무스가 데드의 자살을 그저 가볍게 취급하는 것을 보고는 충격을 받아서 그와 절교했었다고 밝혔다. 네크로버처에 의하면 자신과 연락이 끊긴 상태였던 유로니무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전화하여 "데드 녀석이 정말 멋진(Cool한) 짓을 했어! 그가 진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라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직후 자신이 '데드가 죽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사람이 죽었는데 멋지다는 것이 무슨 뜻이야?'라고 질문하자 유로니무스는 "진정하고 들어봐 내가 그 광경을 모두 사진으로 담았어"라며 흥분한 채로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밴드메이트의 죽음을 슬퍼하기는 커녕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유로니무스의 말들을 듣고 충격을 받은 네크로버처는 "무슨말인지 알아 들었으니까 그 사진을 처분하기 전까지 내게 연락하지 마! 이 개새끼야!"라고 외친 뒤 중간에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네크로버처는 자신이 데드의 시체 사진들을 마켓팅으로 쓰지 말라고 말했음에도 사진들을 퍼트린 유로니무스에게 화가 났으며 유로니무스가 카운트에게 살해당했을 때도 전혀 슬프지 않았고 오히려 카운트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유로니무스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었다고 한다. 다만 자신이 일을 저지르기 전에 카운트가 먼저 유로니무스를 죽였다고.

또한, 네크로버처는 "밴드 활동 당시 자신과 데드는 좋은 친구사이였다."면서 생전의 데드를 "라이브 공연에서는 마치 짐 모리슨이나 시드 비셔스가 환생한 것 같이 카리스마가 넘치면서도 동시에 예측 불가능한 면이 있었지만 사석에서는 굉장히 공손했고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는 나름의 독특한 유머를 가진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메이헴의 드러머이자 데드, 유로니무스와 잠시 동안 같이 살았던 헬해머는 데드의 생전 모습을 "그는 평소에 마치 핏기없는 시체같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항상 시체에 생긴 시반같이 새하얗게 워싱 처리된 청바지와 재킷만 입기를 고집했다. 그리고 혼자 스웨덴 출신인지라 나머지 밴드 멤버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라고 회상했다. 유로니무스에 대해서는 "나와 데드가 밴드에 막 가입했을 당시에는 매우 예의바르고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밴드가 악명을 얻게되자 점차 기괴하고 인정머리 없는 생각과 의견들을 내보였다. 데드가 갑작스럽게 괴상한 행동을 시작하거나 자해를 할때면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그를 말리려고 노력했지만 유로니무스는 오히려 데드가 그런 행동들을 더 하도록 부추겼다."고 증언했다.

헬해머는 "밴드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부터 유로니무스와 데드는 다투기 시작했으며 동독 투어 무렵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더 이상 친구사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고 설명하면서 "어느 날 밤, 유로니무스가 셋이 동거하던 연습실에서 데드가 끔찍이 싫어하던 신스팝을 크게 틀기 시작했고 음악 소리에 잠에서 깬 데드가 신경질을 내며 유로니무스와 말다툼을 하다 화를 못 참고 연습실 밖으로 나갔는데 이를 본 유로니무스가 따라 나와서 산탄총을 허공에 대고 쏘아대며 데드를 도발한 적도 있었다."는 일화를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헬해머는 지금도 "유로니무스가 연습실에 데드를 혼자 놔두고 산탄총을 치우지 않은 것은 데드가 그 총으로 자살하기를 원해서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메이헴의 드러머였던 멘하임은 유로니무스가 살해된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전의 유로니무스를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멋진(Cool한) 놈'이라고 불려지기만 한다면 하바네로를 가득 넣은 샌드위치도 먹을 사람"이라고 묘사했으며 데드에 대해서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마빈처럼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있었다."라고 회상했다.

터키 이즈미르의 공연 프로모터 Arcan[22]은 데드에 대해 회상하길 데드는 자신의 말에 연신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었으며, 과다출혈(코피+자해)로 인해 창백하게 질려있는 얼굴에다가 몸에는 상처가 없는 부위가 없을 정도로 전신에 걸쳐 많은 상처들이 있었다고 한다. 펍에서도 데드는 혼자 가만히 앉아 맥주를 홀짝였다고 한다.

버줌카운트 그리쉬니크는 "데드는 주로 메이헴의 연습실 한켠에 마련한 자신의 방에 틀여박혀 있었고 자살하기 전부터 이미 나와 같이 활동했던 노르웨이의 메탈 뮤지션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전설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나 또한 유로니무스가 메이헴의 연습실을 처음 견학시켜 주었을 때 연습실에서 숙식하던 데드를 만나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눈 것이 데드를 유일하게 본 순간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데드의 추모 헌정페이지에서 데드가 그린 그림과 편지 등을 더 볼 수 있다.

2.3. 사타닉 서클의 결성과 유로니무스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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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 그리쉬니크와 유로니무스

1991년 6월, 유로니무스는 전부터 준비하던 블랙 메탈 전문 레코드점을 Helvete(노르웨이어로 '지옥'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개장[23]하면서 데드의 자살 사건을 이용하여 자신과 블랙 메탈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후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늘어나자 유로니무스는 이들을 규합해서 《사타닉 서클》이라는 조직을 결성, 본격적으로 절도, 묘지 훼손, 자신들과 방향성이 다른 뮤지션들에 대한 테러 행위 등의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헬해머는 당시 유로니무스의 모습을 "평상시 유로니무스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믿게 만들고 조종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는데 사타닉 서클을 결성할 즈음에는 그런 면모가 극대화되어 마치 ‘작은 폭군’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밴드메이트였던 데드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 헬해머는 블랙 메탈에 대한 관심을 끊었지만 Helvete 레코드점에는 이따금씩 놀러오곤 했는데 검은 가죽 자켓을 입고 허리에는 총알 벨트를 두른 채 나이프를 차고 있는 유로니무스의 모습과 유로니무스와 같은 복장을 입고 그를 전적으로 따르는 일련의 무리들을 보며 "젠장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 그전부터 유로니무스는 Old Funeral이라는 데스 메탈 밴드의 기타리스트이자 네오나치[24]활동을 하던 카운트 그리쉬니크라는 10대 소년과 친했는데 Old Funeral에서 탈퇴하고 《사타닉 서클》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원맨 밴드 버줌을 결성한 카운트는 특유의 호전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유로니무스의 명령을 충실히 받들어서 범죄 행위를 가장 많이 저지르는 조직의 행동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사타닉 서클에는 일종의 계급제도가 있어서 범죄 행위를 많이 저지를수록 계급이 올라갔는데 행동대장 역할을 맡았던 카운트는 곧, 유로니무스에 이은 2인자가 되었다. 1992년부터 유로니무스는 카운트의 영향을 받아 네오나치가 되었고 카운트의 원맨 밴드 버줌이 앨범 녹음을 할 수 있게 카운트를 지원하며[25] 카운트를 아예 자신의 오른팔로 키울려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한다.

노르웨이에 잠시 거주하며 사타닉 서클 멤버들과 함께 어울렸던 한 영국인 여성이 훗날 회고한 바에 의하면 유로니무스와 카운트는 항상 같이 어울려 다녔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면 어느 누구라도 한 눈에 그들이 매우 질이 안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기분 나쁜 아우라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평상시 카운트는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고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그가 무슨 사고를 저지를지 모른다며 우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 이유없이 카운트가 자신을 1시간 동안 가만히 처다봐서 참다 못해 그에게 말을 걸자 자신의 말을 씹고 그대로 자리를 떠난 적도 있었고 카운트가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와서 "검게 염색한 너의 머리를 다시 금발로 되돌리는게 좋을 거야."라며 조용한 목소리로 협박하고 사라진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

사타닉 서클은 1992년 6월 6일, 홀멘콜렌 교회와 판토프트 목조교회에 불을 지르고 잿더미로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교회 방화를 시작했으며 그 중심에는 유로니무스와 카운트가 있었다. 1992년 한해에만 무려 8건의 교회 방화가 일어났고 노르웨이의 국보로 지정된 대형 교회들이 방화로 연이어 소실되었다. 이 와중에 유로니무스는 1992년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사타닉 서클의 2안자인 카운트 그리쉬니크, 가끔 연락을 주고받던 헬해머의 도움을 받아서 베르겐의 그리그홀에서 메이헴의 데뷔 앨범 De Mysteriis Dom Sathanas 레코딩을 진행한다.[26] 1992년 8월에는 엠퍼러의 드러머이자 사타닉 서클의 멤버로서 유로니무스의 레코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파우스트가 릴레함메르(Lillehammer)의 한 술집에서 자신을 유혹한 게이 Magne Andreassen을 공원으로 불러내어 무려 37번의 칼질로 무참히 살해했다.
1993년 1월 말, 카운트는 블랙 메탈과 앞으로 발매될 메이헴의 데뷔 앨범을 홍보하기 위해 노르웨이의 대형 언론사인 Bergens Tidende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되는데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회 방화 사건의 용의자 중 한명이며 1993년 4월에 메이헴의 데뷔 앨범을 발표한 뒤, 앨범 표지처럼 노르웨이의 국보인 니다로스 대성당 (Nidaros Cathedral)을 폭파시킬 것"이라 경고했다. 이 내용을 들은 기자는 깜짝 놀라서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경찰에 카운트를 신고하였고 카운트는 경찰에 잡혀서 구치소에 수감된다. 카운트가 잡히자 유로니무스는 편지나 전화 등을 통해 "경찰에게 카운트에 대한 정보나 교회 방화 등에 대해 진술을 한다면 사타닉 서클로부터 피의 복수가 있을 것"이라고 동료 뮤지션들을 협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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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vete를 찾은 유로니무스의 아버지
왼쪽부터 : 아틸라의 부인 노라, 핼헤머, 유로니무스, 유로니무스의 아버지

카운트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노르웨이의 각종 언론들은 본격적으로 사타닉 서클에 대해 취재를 시작하여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변호사인 유로니무스의 아버지 Helge Aarseth[27]는 사타닉 서클의 두목으로 지목된 유로니무스의 얼굴과 아들의 얼굴이 닮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아들이 경영하고 있다는 레코드점을 직접 방문했고 자신의 아들이 유로니무스인 것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서 아들에게 블랙 메탈 및 이와 관련된 것들을 그만두라고 설득했으나 유로니무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자신의 아들이 테러리스트 단체의 두목이었다며 유로니무스를 경찰에 신고했다.[28] 그러자 유로니무스는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Helvete를 폐쇄한 후 다른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1993년 3월 카운트 그리쉬니크가 증거 불충분으로 구치소에서 풀려나자 유로니무스는 카운트가 전에 방화한,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판토프트 목조 교회(무려 12세기에 건축된 교회이다.)가 불에 탄 모습을 앨범 자켓으로 쓴 버줌의 새 EP인 Aske를 발매한다.[29] 그러나 카운트는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유로니무스는 단지 입으로만 블랙 메탈의 정신을 떠들뿐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전혀 없는 사이비"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구치소에서 나온 후 유로니무스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잠적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자 자신이 새로운 리더가 되어 노르웨이 블랙 메탈 씬을 다시 부흥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카운트는 자신의 본명을 Kristian에서 Varg "Qisling" Larssøn Vikernes[30]로 개명한 뒤, 새로운 레이블 Cymophane Productions을 창설하고 "나는 범죄행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기는 두려워하고 동료 뮤지션들에게 이념을 주입시키기만 했던 겁쟁이 유로니무스와는 다르다. 나는 감옥까지 다녀온 행동파다."라고 자신을 홍보하면서 노르웨이의 블랙 메탈 밴드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전에도 카운트는 블랙 메탈 씬이 노르웨이에 거주하는 아리아인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이 때부터는 아예 노르웨이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블랙 메탈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밴드들 전체를 혐오하고 배척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한다.

노르웨이 내에서 카운트를 따르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나자 유로니무스는 주변 동료들에게 "카운트를 납치해서 전기 고문하여 죽여버리고 카운트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어서 퍼트릴 것"이라는 등 카운트에 대한 분노를 표하면서 그에게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로니무스는 Helvete를 다른 장소에 재개장하고 Emperor의 멤버들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 시작했으며 스웨덴의 블랙 메탈 밴드 Dissection이나 일본의 블랙 메탈 밴드 Sigh 등 노르웨이 밖에서 활동 중인 블랙 메탈 뮤지션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카운트 그리쉬니크는 자신과 같이 메이헴의 데뷔 앨범 작곡에 참여했던 기타리스트 블랙손(Blackthorn)을 통해 유로니무스가 살고있는 Tøyen가(街)에 위치한 공동주택의 위치를 알아낸다음 1993년 8월 10일, 새벽 3시에 유로니무스의 집으로 처들어가서 유로니무스를 불러낸 뒤 무참히 살해했다.[31]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유로니무스의 시체에는 칼로 찌른 자국이 23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카운트의 증언에 따르면 살려달라며 도망치는 유로니무스를 계속 찌르고 또 찔렀다고 한다.

일주일 후, 카운트는 노르웨이 경찰에게 붙잡혀서 살인, 방화, 강도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카운트는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며 유로니무스가 전화로 자신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살해협박을 자주 했으며 자신은 그저 자기방어를 했을 뿐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카운트는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교회를 방화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모두 정당방위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노르웨이 법은 오히려 그의 주장을 가중 사유로 적용했으며 카운트가 행한 모든 범죄 혐의들도 모두 인정되었다. 그 결과 노르웨이 사법부는 범행의 잔혹성을 고려하여 카운트에게 노르웨이 법정 유기징역 최고형량인 징역 21년을 선고했다. [32] 다만 카운트가 잡혔을 당시에는 무기징역이 있었기 때문에 예방적 구금 처분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노르웨이 사회 특성상 일부 위험인물을 제외하면 징역형을 만기까지 채우거나 형기를 연장하지 않는 관행 때문인지 카운트는 16년 만인 2009년 5월 24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2014년 가석방 기간 종료. 다만 범죄의 동기가 극도로 불순했던데다가 살인 방식의 잔혹함, 그리고 그 전의 국보급의 교회 방화, 사보타주 등의 혐의도 있어 전세계에서 입국 금지 블랙리스트에 올렸기 때문에 그 뒤에도 해외 입국은 불가능할 전망이라 지금까지도 유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블랙 메탈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인성이 엉망이었던 유로니무스의 생애는 25세로 끝나고, 각종 범죄 행위를 실천할만큼 호전적인 인성을 지닌 카운트 그리쉬니크는 20세라는 어린 나이에 살인자로 전락하여 사회에서 영구 추방당하게 되었다.

2.4. 밴드의 해체와 재결성

유로니무스가 죽은 뒤 드러머인 헬해머는 1994년 5월 24일 메이헴의 데뷔 앨범 De Mysteriis Dom Sathanas를 재믹싱하여 발매하고 공식적으로 메이헴의 해체를 발표하게 된다. 밴드 결성 10년만의 일이었다. 참고로 레코딩 멤버는 아틸라 (보컬), 유로니무스(기타), 카운트 그리쉬니크(베이스)[33] 헬해머(드럼), 데드(작사).

이후 1995년 유일하게 남은 멤버인 드러머 헬해머가 다시 전 멤버들인 네크로버처, 매니악[34]을 설득, 규합해서 Mayhem을 재결성했다. #

2004년, 매니악이 알콜 중독으로 밴드에서 해고당했고 현재는 아틸라가 정식 멤버로 들어와서 활동 중. Tormentor 해체 후 헝가리에서 교사로 일하던 아틸라는 메이헴의 데뷔 앨범 녹음을 위해 노르웨이에 와서 난생 처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문화와 육식 위주의 식생활(아틸라는 채식주의자라고 한다.)을 경험했고 이에 적응하지 못했기에 처음에는 핼헤머의 제안을 거절했으나 젊은 시절에 잠깐 몸담았을 뿐인 Tormentor의 음악을 존경하고 있다는 메이헴 멤버들의 말에 감동을 받았고 밴드의 보컬리스트로서 자신에 대한 대우도 파격적이라 고심끝에 메이헴의 새 보컬리스트로서 밴드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2023년 현재 아틸라는 "Mayhem은 단순히 내가 속한 밴드가 아니라 내 인생 전부와 마찬가지다."라는 인터뷰를 할 정도로 밴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2008년, 재결성 때 부터 참여한 기타리스트 Blasphemer가 밴드를 탈퇴하였고 Blasphemer 탈퇴 후 밴드의 기타리스트 자리는 Morfeus와 Silmaeth(프랑스 출신이라고 한다.) 라는 두 명의 멤버가 투어멤버로 들어왔으며 2011년 2월 Silmaeth가 나가고 노르웨이 기타리스트 Teloch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2017년 현재 공식적인 멤버는 아틸라, 네크로버쳐, 헬해머, 그리고 Teloch이다. 공연은 라이브 세션 기타리스트 Charles Hedgar 를 포함해 5인 체제로 진행하는 중. [35]

2012년 밴드의 리더인 핼해머는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음악은 정말로 사악하지는 않다(즉 다 컨셉이다.) 라는 인터뷰를 하였다.

2014년 밴드 결성 20주년을 맞아 새 앨범 <Esoteric Warfare>이 6월에 발매했다.

2023년 2월 3일 내한 공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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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디스코그래피

3.1. Deathcrush


메이헴의 첫 EP Deathcrush. 17분짜리의[36] 소규모 EP로 초판은 1987년, 1000장 한정 발매되었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메시아(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맨하임(드럼).

3.2. Projections of A Stained Mind


The Freezing Moon


Carnage

노르웨이의 인디 레이블 CBR에서 발매된 컴펄레이션 앨범으로 데드가 메이헴 제적시 남긴 유일한 스튜디오 트랙인 The Freezing Moon과 Carnage가 수록되었다. The Freezing Moon은 거의 라이브로 녹음되었다고 한다. 발매는 데드 사후인 1991년에 되었지만 녹음은 1990년 4월에 이루어졌다.

레코딩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3.3. Live in Leipzig


메이헴의 유명한 라이브 앨범.

1990년 11월 26일, 동독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공산주의 클럽에서 펼쳐진 공연을 실황 녹음한 것으로 데드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녹음된 레코드이다.

공연 당시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3.4. De Mysteriis Dom Sathanas


유로니무스가 있었던 시기에 녹음된 유일한 앨범이자 밴드의 첫 정규 앨범. 1992년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곡의 기악 파트가 녹음되었으며 1993년 4월 26일에 보컬 파트가 녹음되었다. 앨범은 유로니무스 사후인 1994년 5월 24일에 발매되었다.

앨범의 모든 가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메이헴의 보컬 데드가 생전에 작사한 것으로 그 중 'Freezing Moon', 'Funeral Fog', 'Buried By Time And Dust', 'Pagan Fears'는 데드 생전인 1990년에 이미 곡이 완성되어 있었으며 밴드의 라이브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나머지 곡들은 데드 사후 그가 남긴 가사들을 토대로 유로니무스와 사타닉 서클의 일원이자 원맨 밴드 Thorns를 이끌었던 기타리스트 블랙손(Blackthorn)이 작곡한 것이다. 블랙손은 데드가 남긴 6번과 8번 트랙의 미완성 가사를 완전한 형태의 가사로 완성시키는 역할도 맡았다고 한다.

레코딩 멤버는 아틸라(보컬), 유로니무스(기타), 카운트 그리쉬니크(베이스), 헬해머(드럼).

3.5. Wolf's Lair Abyss


유로니무스 살인 사건이 발생한 후 메이헴은 해체되었는데, 헬해머가 매니악과 네크로버처, 그리고 새 기타리스트인 블래스패머를 영입하여 밴드를 다시 꾸리게된다. Wolf's Lair Abyss는 처음으로 유로니무스가 참여하지 않은 곡들로 채워진 EP로, 원래의 메이헴 사운드와 상당히 다르다. 이 앨범부터의 메이헴을 "뉴 메이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3.6. Grand Declaration of War


유로니무스 사후에 처음으로 나온 정규 앨범. Wolf's Lair Abyss EP에서의 테크닉 위주 블랙 메탈 사운드를 더욱더 끌어올렸다. 1집과 그 이전의 메이헴 팬들에게는 대부분 혹평을 받지만, 오히려 메이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앨범을 최고로 꼽기도 한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3.7. Chimera


정규 3집 앨범. 매니악이 방출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녹음한 앨범이기도 하다. 1집과 2집의 사운드를 적절하게 섞어서 많은 팬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명반으로 불리기도 한다. My Death는 공연 때마다 빼놓지 않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앨범 크레딧에는 네크로버처가 베이스를 녹음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블래스패머가 기타와 베이스를 모두 녹음하였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베이스), 헬해머(드럼).

3.8. Ordo ad Chao


정규 4집 앨범. 1집에서 보컬을 녹음했던 아틸라가 다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녹음한 앨범이다. 기본적으로 3집의 사운드를 이어받았으나, 3집에 비해서는 별로라는 평이 많다. 앨범 크레딧에는 네크로버처가 베이스를 녹음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블래스패머가 기타와 베이스를 모두 녹음하였다.

레코딩 멤버는 아틸라(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베이스, 작사), 헬해머(드럼).

3.9. Esoteric Warfare


정규 5집 앨범. 블래스패머 탈퇴 후 새롭게 영입된 기타리스트 테로크와 찰스 헤드저가 처음으로 녹음할 앨범이다. 역시 3집부터 계속되고 있는 뉴 메이헴식 블랙 메탈을 들려준다. 4집 앨범 Ordo ad Chao에 비해서 더 낫다는 의견이 많긴 하지만 다소 지루하다는 평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팬들은 메이헴이 계속해서 앨범을 내주고 있는 것을 고마워하는 듯하다.

레코딩 멤버는 아틸라(보컬, 작사), 테로크(기타), 찰스 헤드저(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3.10. Daemon


정규 6집 앨범.

레코딩 멤버는 아틸라(보컬, 작사), 테로크(기타), 찰스 헤드저(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1] 이 사진은 밴드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라이프치히에서의 공연 바로 직전의 대기실에서 찍은 것이다.[2] 멤버로는 아틸라 (보컬), 네크로버처 (베이스), 헬해머 (드럼) Teloch (기타), Charles Hedgar (기타)[3] 그러나 메시아는 탈퇴 후에도 멤버들과 친분을 유지했고 덕분에 <Deathcrush> 앨범 녹음에도 참여하였다.[4] 새어머니의 직업이 간호사였다고 한다.[5] 주류 문화에 편입되기를 철저히 거부하는 데드의 이러한 반골 성향은 데드와 팬팔을 했던 사람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데드는 타자기나 컴퓨터 통신을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손글씨만을 고집했으며 "나는 컴퓨터를 비롯한 첨단 기술을 싫어한다."고 편지에 썼다고 한다.[6] 헤비메탈이나 락 뿐만 아니라 당시 스웨덴에서 거의 유일하게 Sarcofago, Sodom, Possessed 같은 익스트림 음악들과 언더 밴드들의 데모를 취급하였던 레코드샵으로, 당대 스웨디쉬 데스 메탈의 생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스웨덴 익스트림 씬의 성지였다.[7] 이 무렵의 리허설을 통해 작곡된 신곡이 바로 메이헴을 대표하는 곡인 "Freezing Moon"이다.[8] 참고로 이 영상은 꽤나 많은 버전이 유튜브에 돌아다니는데 어느 영상의 유튜브 댓글에 실제 노르웨이 화자가 댓글을 달아서 영상 초입부 데드와 리세의 대화를 해석해주기도 했다. 대화 내용은 "진짜 찍히고 있는거야?" (데드) "잘 찍히고 있어"(리세) "그래?ㅋㅋ"(데드) "어ㅋㅋ"(리세) 라고 한다.[9] Possessed의 Seven Churches, 데스Scream Bloody GoreLeprosy 등으로 대표되는, 스래쉬 메탈의 변형 및 발전에 가까웠던 미국의 데스 메탈과 달리 당시 유럽 언더그라운드 시장에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던 하드코어 및 크러스트 펑크의 사운드 포징을 스레쉬 메탈에 결합한 스웨디시 데스 메탈의 대표주자로서 활동한 밴드. 1993년 10월 4일 발표한 3집 앨범 <Wolverine Blues>부터는 기존의 스웨디시 데스 메탈에 좀 더 리듬 위주의 리프 전개를 기반으로 하는 빌드업을 특징으로한 Death 'n' Roll 장르를 개척하였다.[10] 유로니무스가 도축업자에게서 구해온 것인데 보관을 제대로 안 해서 고기가 상한 상태였는지 한 관중이 장난으로 씹었다가 탈이 났다고 한다.[11] 이를 못마땅해한 유로니무스는 네크로버처의 여자친구에게 살해 협박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12] 유로니무스는 메이헴 활동 시기인 1990년 인터뷰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친구를 독살시키겠다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1991년 6월 Helvete 레코드점을 막 개장했던 시기에는 ‘LP 가격은 그걸 사가는 사람들이 지불할 수 있는 만큼만으로 책정되어야 한다'며 음반들을 소신껏 헐값에 팔 정도로 사회주의를 신봉했지만 1992년, 사타닉 서클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 부터 카운트 그리쉬니크의 영향을 받아 네오나치로 완전히 전향했다. 네오 나치로 전향한 이후부터는 Helvete 경영 방식도 음반들을 제값 받고 파는 걸로 바꿨다고 한다.[13] 우선 이스탄불에서 내린 뒤 버스를 타고 장장 8시간을 달려서 공연 장소인 이즈미르에 도착했다고 한다.[14] 유로니무스는 사망하기 하루 전 인터뷰에서 밴드가 행했던 공연 중 관객들이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인 공연으로 동독 투어의 첫 공연인 Annaberg에서의 공연을 꼽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해당 공연은 메이헴의 동독 투어 공연 중 유일하게 녹음본이나 영상물이 존재하지 않는다.[15] 터키 공연은 녹음본이나 영상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메이헴이 공연을 하던 도중 경찰의 단속으로 라이브가 강제 중단되고 장소가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메이헴의 멤버들은 공연 전 음향 담당자에게 라이브 테잎 레코딩을 부탁한 바 있었으나, 경찰이 강제 종료 시켜 혼돈스러웠던 정황상 테잎을 구할 수 없었다고 한다.[16] 추정 사망일자.[17] Pelle는 Per(페르)의 애칭 중 하나이다.[18] 시신의 살점을 떼어내어 스튜를 끓여먹었다는 끔찍한 루머까지 나돌았는데, 유로니무스가 살해당하기 하루 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시신이 굳어있어서 요리로 만들어서 먹지는 못하였다고 해명하였다.[19] 물론 사체손괴는 범죄인 만큼 당연히 법적 책임을 져야 정상이지만 유로니무스는 이미 그 전에 카운트에게 살해당했으니...[20] 2002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함.[21] 실제로 유로니무스가 찍은 데드의 시신 사진이며, 데드는 샷건으로 머리를 쏴 자살했기에 시신의 광경이 굉장히 참혹하다. 어지간히 고어한 것에 면역이 강하지 않은 이상 정신적인 내상이 강할 것이기에 찾아보지 않는 것을 매우 강하게 권장한다.[22] 유로니무스와 80년대 후반부터 연락을 주고받으며 유로니무스에게서 여러 희귀한 익스트림 밴드들의 소식과 데모 테잎들 그리고 Deathcrush 카세트 테잎을 받기도 한 사람이었다.[23] 유로니무스 사후, Helvete가 위치했던 공간은 한동안 빈터로 남아있다가 빵집이 자리잡았고 2013년부터는 일종의 관광 명소로 사용한다며 Helvete의 모습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현재는 Nosebleed 레코드점으로 운영 중.[24] 1987년부터 스킨해드 패션과 네오나치 활동을 시작한 카운트는 블랙 메탈씬에 나치즘을 제대로 도입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1992년 발행된 네오 나치 단체 블러드 앤 호너(Blood & Honour)의 정규 잡지에서는 카운트가 존 88(Zorn's 88) 소속의 네오 나치이며 화이트 아리안 레지스탕스 (White Arian Resistance)에도 소속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25] 버줌 1집에 수록된 <War>의 후반부 기타 솔로는 유로니무스의 연주이다.[26] 이후 유로니무스는 1993년 4월 26일에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헝가리의 메탈 밴드 Tormentor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했던 아틸라를 노르웨이로 초빙하여 앨범의 보컬을 녹음했다.[27] 유로니무스의 아버지 Helge Aarseth는 NRK 등 여러 미디어에 출연하였던 저명한 변호사이다. 그는 데드의 유족들이 인터넷에 올려져있는 데드의 시체 사진을 삭제하려고 시도했을 때 유족들을 직접 만나서 사과하고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에 한해서는 최대한 그들을 도와줬으며 그들에게 아무런 사례금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28] 2012년에 노르웨이의 한 저가 항공사가 승객들에게 '노르웨이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인물'이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하고 1등을 한 인물을 자사의 비행기에 그려 넣겠다는 이벤트를 열었는데 유로니무스가 1등으로 선정되자 유로니무스 부모님의 요청으로 이벤트가 중지된 적도 있었다.[29] 해당 교회는 12세기 교회 자체로서 의미도 있었던 건물이지만 세계대전의 화염 속에서 살아남은 건축물로도 의미가 있으며 목조 건축 양식을 찾아볼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노르웨이 건축물이었다.(다른 목조교회들은 세계대전 중 많은 수가 전소, 파괴되었다.) 우리나라에 비교하자면 반불교 세력들이 부석사 무량수전에 불을 지른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 뒤 해당 교회는 1997년에 복원되었다.[30] 참고로 Varg(바르그)는 노르드어로 늑대(Wolf), 그 중에서도 특히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펜리르스콜, 하티와 같은 마수에 가까운 괴물 늑대를 말하며(일반적인 늑대는 ulfr라고 한다) Qisling은 비드쿤 크비슬링의 이름을 본 딴 것이다. 참고로 바드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 판 이완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마디로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매국노.[31] 블랙손(Blackthorn)에 의하면 새벽 3시, 자신이 먼저 유로니무스의 집 앞에서 벨을 눌렀고 잠을 자다 깬 유로니무스는 짜증이 나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았으나 카운트가 레코드 계약 문제로 상의할 것이 있다며 다시 유로니무스를 불러내자 사업 문제로 자신을 찾아온 카운트를 보고 놀란 유로니무스가 순간 방심해서 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32] 훗날 노르웨이 연쇄 테러의 범인 브레이빅 또한 징역 21년을 선고받았다.[33] 유로니무스의 부모님이 믹싱 작업을 하고 있던 헬해머에게 베이스를 다시 녹음해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나 헬해머는 베이스를 연주할 줄도 모르고 베이스 세션을 다시 구하기 귀찮아서 베이스가 녹음된 트랙의 볼륨만 낮추었다고 한다. 즉, 살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연주가 동시에 실린 앨범이라는 것. 한마디로 고인드립인 셈인데 유로니무스에 대한 평이 전 멤버들에게조차 얼마나 나빴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008년에 베이스 볼륨을 줄이지 않고 그대로 믹싱한 버전이(정확히는 보컬리스트로 참여한 아틸라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었던 앨범의 러프 믹스 버전) Life Eternal이라는 제목의 EP로 발매되었다.[34] 메이헴의 Deathcrush EP에서 보컬을 맡았다.[35] #[36] 초판에는 Outro가 있어서 1분 정도 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