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인물을 다룬 동명의 1998년작 드라마에 대한 내용은 삼김시대(드라마) 문서 참고하십시오.
김영삼 | 김대중 | 김종필 |
1989년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회동한 삼김. |
1. 개요
△ 삼김시대의 시작을 알린 뉴스(1987.11.28.)[1] |
삼김시대(三金時代)는 제3공화국 군사정권 시대인 1960년대 초반부터 민주화 이후 2000년대 전반기까지 30년을 넘게 정치계를 풍미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명의 거물 정치인이 정치 활동을 이어가던 시기를 뜻한다.[2]
이들은 모두 성씨가 김씨로 같았기에[3] 헷갈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니셜을 따서 일명 YS(김영삼), DJ(김대중), JP(김종필)로 불렸다. 셋 중에서 상대적으로 출신이 이질적인 김종필을 제외하고 민주화 투사 출신인 두 사람만 묶어 양김이라는 분류법도 많이 쓰였다.[4][5]
2. 역사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집권한 시대는 90년대지만 본격적인 역사는 군사정권의 시대이던 60년대, 70년대,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김영삼은 이승만 정부의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만 26세 5개월의 나이로 최연소 당선되면서 삼김 가운데 제일 먼저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며 통합야당 민주당에 합류했고, 조병옥을 비롯한 민주당 구파 소속 정치인으로 경력을 쌓아갔다. 김대중의 정치적 대부는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유일한 총리이자 실질적인 집권자가 되는 민주당 신파의 장면 부통령이었다.[6][7] 김종필은 4.19 혁명 전부터 정군활동을 내세우며 정치적 입지를 모색하고 있었으며, 결국 박정희와 함께 5.16 군사정변을 통해 정계에 벼락처럼 등장하게 된다.
1969년 11월, 이미 4선 의원, 원내총무였던 42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1970년 1월 3선 의원인 46세의 김대중이 출마하면서 삼김정치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진산의 일선 후퇴(진산 파동)와 함께 신민당의 대선 경선은 김영삼 우세구도로 구성되었으나, 막판에 이철승 계파를 끌어들인 김대중의 역전승으로 제7대 대선은 박정희와 김대중의 한판 승부가 된다. 박정희는 부정선거 의혹을 크게 일으키며 대선에서 승리했고, 김대중이 정권의 탄압과 납치로 주춤한 사이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가 되면서 양김은 정계의 전면에 부상한다. 김종필은 3선 개헌 반대로 박정희에게서 한발 멀어졌지만 10월 유신에 동조함으로써 실세 국무총리로 전면에 나섰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뒤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는 직선제 개헌을 거쳐 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신민당의 김영삼/김대중의 격돌이 예상되었으나,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자 이들은 정치활동을 금지당하면서 매치는 7년 뒤로 미루어진다. 전두환 정부 시대에 김영삼-김대중 "양김"은 계속 민주화 투쟁에 나섰고 결국 12대 총선의 신한민주당 돌풍과 함께 정계에 복귀한다. 반면 이 시기 김종필은 미국 등을 떠돌면서 정계와 아예 거리를 두었다. 군사정권과 투쟁하지 않았던 김종필이 13대 대선을 앞두고 신민주공화당 창당 및 대선 출마를 발표하면서 다 된 밥에 숟가락을 얹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988년 5월 28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총재 회담. 왼쪽부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 대통령 겸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
1987년 민주화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로 3김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 총선에서 DJ의 평화민주당이 70석을, YS의 통일민주당이 59석을, JP의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각각 획득하며 세 당 모두 125석에 그쳐 과반 확보에 실패한 여당 민주정의당을 압박하기에 충분한 의석수를 확보했다. 3김은 각각 PK, 전라도, 충청남도의 지지를 바탕으로 합종, 연횡했으며, 김영삼과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차례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삼김시대가 30년 넘게 지속되면서 90년대 중반부터는 삼김시대에 대한 피로감도 일부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김영삼, 김대중의 정당이나 다름 없었던 통일민주당-신한국당과 평화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는 물론,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자유민주연합은 삼김이 공천을 포함한 전권을 갖고 있었으며, 대선 후보 경선은 사실상 추대식이나 다름 없는 요식행위였다.[8][9] 결국 2000년대에 이르자 삼김정치는 패거리 보스정치, 권위주의의 대명사로 낙인 찍히게 된다. 김대중이 당선된 15대 대선은 역설적으로 "삼김정치"가 처음으로 청산대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이회창, 이인제, 그리고 민주당에서 불어온 "제3후보론"(조순 후보론)이 대표적이었다.[10] 그래서 그 후 대선에서 노무현과 이회창은 3김 정치 청산을 주로 내세웠고, 그 이후는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당청분리가 얼마나 잘 지켜지는가에 대한 말이 많더라도, 한국의 보수정당과 민주당은 대통령, 당대표, 원내내표 등으로 역할을 분리시켰고, 대통령이 당권, 선거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기류가 자리잡을 수 있었다.[11]
2009년 8월 18일에 김대중이, 2015년 11월 22일에 김영삼이, 2018년 6월 23일에 김종필이 차례로 숨을 거두면서 삼김은 대한민국의 현대 정치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2022년에도 여전히 대한민국 정치권의 거물들 상당수는 삼김에 의해 정치권에 등용되었거나 삼김에 의해 정치 인생이 바뀐 인물들이 절대다수이고, 여야중진 대부분이 삼김시대에 정치를 시작했다.[12]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삼김의 영향력을 물리적으로 받지 않는 정치 세대가 정치권에서 주류를 차지하려면 적어도 20년은 더 지나야 할 정도로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삼김의 비중은 대단했다.
3. 2강 1중, 김종필의 입지
김종필은 박정희 정부에서 총리를 역임하고 박정희의 가장 큰 정치적 적수들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서도 각각 여당 대표위원[13]과 총리를 역임했다는 진기록을 세우기는 했지만 실상 대통령을 역임한 김영삼이나 김대중에 비하면 유력한 대권후보로 부각되지는 못했다.[14][15] 즉, 삼김정치는 사실 김영삼/김대중의 양김정치에 김종필이 추가된 구도였다. 애초에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선 주자로 격돌했던 인물인데 비해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박정희 정권 말기까지만 해도 김종필의 정치적 커리어가 김영삼, 김대중 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권주자로 박정희와 격돌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소장파 정치인'(소위 40대 기수)으로써 기존 정치인인 박정희와 대결한 구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당장 세대로 봐도 1910년대생인 박정희에 비해 삼김씨는 1920년대생으로 반 세대 젊다. 즉 박정희 다음 세대로써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던 김종필과 박정희 다음 세대로서 소장파 대권 도전자이던 양김씨의 경력은 비슷한 레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김종필이 김영삼/김대중에 비해 정치적으로 도태된 것은 박정희 사망 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국내에 남아 탄압을 감내하면서 저항하여 정치적 위상을 높인 양김씨에 비해 김종필은 사실상 굴복하고 미국으로 도피하면서 대중적 관심 바깥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애초에 김종필 자신도 이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잘 알았기에 80년대 말 정계에 복귀한 뒤로는 3당 합당이든, DJP연합이든 캐스팅보터 이상의 역할을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같은 이유로 민주화 운동가였던 DJ와 YS에 비해 유명세가 딸렸고, DJ가 가진 전라도, YS가 가진 부울경 기반에 비해 JP의 충청도 기반 위력은 작은 편이었다. 이 점에서, 김종필의 충청(충남) 지역색 자체가 호남의 김대중, 영남(PK)의 김영삼이라는 지역 구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게다가 DJP 연합이 1차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일시 붕괴되면서 충청도의 제1정당은 민주당계 정당이 되었으며, 한때 충청지역은 물론, 수도권 일부와 강원일대에서도 선전했던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은 군소당 수준으로 사라지게 된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정국에서 김종필의 세력은 "(신민주)공화계"로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김종필의 민주공화당 세력은 신군부의 탄압으로 몰락한 80년대조차 관제야당의 형태인 한국국민당으로 남아있었기에 김종필은 이들과 정치활동규제에서 해금된 측근들을 규합하여 87년 정국에서 자신의 세력을 복구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삼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의 당내 소계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의 당내 숙청이 시작되자 역시 자유민주연합으로 뛰쳐나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15대 총선에서 "녹색돌풍"을 일으키며 제3세력으로 입지를 다시 굳혀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비록 김종필의 위력이 양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대세를 파악하는 안목과 더불어 자신의 한계를 알고 명확하게 선을 그어 정계의 주요 세력으로 두 번이나 부활하여 할거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4. 영향
이들 세 사람의 일생 그 자체가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정치사와 매우 밀접하게 맞물리기 때문에 이들을 빼놓고서 대한민국 정치사를 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의 양김은 당시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존재나 다름없었다. 당시 야당(민주당-신민당-민주한국당)이 지리멸렬한 상황이었기에 야당의 대선 후보이자 민주화 투쟁에 온몸을 다 바친 YS나 DJ의 존재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전설 그 자체였다.[17] 거꾸로 말하면, 군부 독재세력에게 김영삼과 김대중은 눈엣가시 그 자체였다.[18]삼김이 직접적으로 공천권을 장악하여 격돌한 1996년의 15대 총선에서 삼김은 차세대 주자 격인 인물들을 대거 육성했는데, 이들은 현재까지도 주요 정치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386세대의 주요 정치인들은 그 경력을 대개 1996년을 전후해 시작했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한국 정치에서 대표적인 양대 계파가 되었다.[19] 그리고 이 두 계파는 국민의힘 등 보수계 정당과 더불어민주당 등 민주계 정당의 직계 조상이 된다.[20][21]
다만, 두 당은 DJ가 밀어준 노무현 대통령과, YS가 밀어준 이회창 총재 시대 이후로 계파 색이 많이 옅어져 상도동계 / 동교동계의 본래 성향은 많이 사라졌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회창과 노무현은 자신을 키워준 김영삼, 김대중의 계파들을 쳐내고 권력을 장악하며 양김과 갈등을 쌓았다.
5. 여담
셋 다 젊었을 때의 인물이 워낙 좋아서 화제가 되기도 한다. JP, DJ, YSDJ, YS, JP 3명 모두 대한민국 남성들의 평균수명보다 오래 살아[22] 이들의 건강관리를 도운 주변인들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 특히 다리가 불편해 몸관리에 제한이 따른 DJ나 뇌경색으로 한 손을 못쓰게 된 상황에서 10년을 더 살아간 JP 같은 경우는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의 헌신 없이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23] 다만 김종필 총리는 부인 박영옥 여사도 암투병을 하면서 남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홀로 부인을 간병하는 등 사실 남의 헌신을 받지는 않았다.
세 정치거물들이 활동시기가 겹치고 모두 성이 김(金)이다 보니 이들을 줄여부를 때는 구분이 안되는 성씨 한글자 대신 각각 이니셜인 DJ, YS, JP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전이나 이후로나 삼김 이외의 거물급 정치인들은 우연히 성씨가 거의 겹치지 않기도 했고, 삼김의 임팩트가 워낙 컸다 보니 다른 정치인들에 대한 이니셜은 대부분 널리 쓰이지 못했다. 예외적으로 이명박의 경우 성씨인 이(李)가 본인보다는 이회창을 지칭하는 약칭이었기 때문에 MB라는 표현이 널리 쓰였다.[24] 삼김 이후의 대통령들 중 이명박을 제외한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은 활동 당시 자기 정도의 인지도를 지녔던 동성 정치인이 없었기 때문에 노(盧)[25], 박(朴), 문(文), 윤(尹)등의 성씨 약칭이 곧잘 쓰였다.
세 인물의 본관은 김대중과 김종필이 김해 김씨, 김영삼이 김녕 김씨이다. 특히 끼워맞춤으로 들어갔던 김종필을 제외하고 양김만 보면 한국 김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양대 계열, 즉 가야계 김씨 인물과 신라계 김씨 인물로 나눠진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삼김 3명이 함께 모여 회동을 하는 건 국민의 정부 이후에는 볼 수 없었다. 이유는 당연히도 1980년대 민주화 이후 삼김의 정치적 관계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단일화 결렬과 분열, 3당 합당, DJP연합 파기 등 여러 정치적 사건사고에 엮어들면서 상당히 틀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김대중과 나머지 김영삼, 김종필의 경우 정치적으로 함께 연합하는 사이였다가 결별한 이후에는 개인적인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다. 김영삼과 김종필의 사이도 민주자유당-자유민주연합 분당 사태 이후 크게 좋다고 보기만은 어려웠으나 2000년대에는 어느정도 화해하여, 함께 골프를 치거나 회동을 하는 등 말년까지 교류를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2006년, 정계은퇴 상태였던 삼김이 크게 대립하는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다. 2006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을 현직 대통령으로서 처음 방문하여 이른바 '동교동 회동' 을 가졌는데, 이는 차기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계 여권의 보스였던 DJ와 노무현의 정치적 의도가 담긴 회동으로 언론에 인식되었다. 이에 김영삼과 김종필은 12월 1일, 2년만에 단독 회동을 가지고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개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과 김종필은 DJ와 노무현의 대북 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는데, 심지어 "정신분열증" 같은 수위가 센 발언도 나왔다. 특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종필이 "행동할 가능성도 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면서, 일각에서는 삼김정치의 부활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언론을 통해 나왔었다. 실제 17대 대선 정국에서 김종필과 김영삼은 공개적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지했고, 김종필은 아예 1995년 민주자유당 탈당 이후 한나라당에 12년 만에 복당해 선거운동도 했다. 김대중 역시 정동영 전 장관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17대 대선은 삼김이 공식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마지막 대통령 선거로 남게 됐다.
1990년대 후반에 SBS에서 제목이 같은 드라마가 있었지만,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 토일 드라마로 1998년 2월 28일부터 1998년 5월 17일까지 방영했는데 공교롭게도 극중 김대중은 유인촌이 맡았다. 이명박 대통령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 온갖 말이 많았다. 그리고 길용우가 김영삼을, 정동환이 김종필을 맡았다. 당시 한국논단에서 만화처럼 유치하고 김대중 찬양하는 왜곡 드라마라고 온갖 비난을 해댔는데, 한국논단 항목에서 나오듯이 여긴 워낙에 문제가 많은 곳이다.
3명의 생년은 정확히 등차수열이다. 김대중이 1924년생, 김종필이 1926년생, 김영삼이 1928년생이다.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의 일본어 실력 이중 특히 김종필의 일본어 능력이 네티즌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6. 다른 삼김?
6.1. 제주도의 삼김
우근민 | 신구범 | 김태환 |
관련 기사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시행된 1995년 7월 1일부터 2014년 6월 30일까지 20년간 제주도에서는 이른바 제주도 3김이라고 불리는 우근민, 신구범, 김태환이 정가의 중심이었다. 민선 이전 관선까지 포함하면 1991년 8월 1일부터 2014년 6월 30일까지 23년. 보다시피 이들은 세 사람 중 한 사람만 김씨이지만 중앙정계의 3김과 그 구도가 비슷해서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26] 이들은 민선 1~5기 제주지사를 돌아가면서 맡았다. (1기 신구범(1995~1998), 2~3기 우근민(1998~2004), 3~4기 김태환(2004~2010), 5기 우근민(2010~2014))
이 세 사람 모두 관료 출신인데, 신구범은 행정고시 출신으로 농림부 관료로 일하다가 1993년부터 1995년까지 관선 제주지사를 거친 후 민선 1기 제주지사를 지냈다. 우근민은 소령 출신 사무관 특채로 총무처 관료로 일하다가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관선 제주지사를 거쳤고, 이후 민선 2, 3, 6기 제주지사를 거쳤다. 김태환은 지방공무원 출신으로, 면서기부터 시작해서 관선 제주시장을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지냈다.[27]
다만 실질적으로 제주도 3김이라고 하기에도 거시기 한 것이 관선 제주지사 출신인 우근민과 신구범 두 사람이 1, 2, 3대 지방선거에서 세 차례나 대결을 치렀지만, 이 매치는 신구범 1승(민선 1기), 우근민 2승(민선 2~3기)이었고 김태환은 이 들보다 체급이 약했기 때문에 2, 3대 지방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 무소속으로 제주시장[28]을 지냈다. 이후 2004년에 우근민이 허위사실 유포로 인해 지사직을 잃으며 무주공산이 되자, 제주지사직을 사퇴한 김태환이 출마하여 내리 재선을 하게 되었다. 우근민이야 피선거권을 박탈당했으니 출마조차 불가능했고, 신구범은 두 차례나 연달아 낙선하면서 출마조차 하지 않았다.[29] 이후 2010년 5대 지선에서 김태환은 임기 중 주민소환까지 당할 정도로 여론이 나빠지면서 불출마, 신구범은 또 다시 불출마를 결정하면서 우근민이 당선되었다. 돌아가면서 지사직을 지내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우근민과 신구범의 대결구도에 가까웠고 무주공산이 된 지사직을 비슷한 연배인 김태환이 차지하면서 같이 엮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30]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제주 출신으로 젊은 소장파 정치인으로 부상한 원희룡[31]이 신구범을 꺾고 당선되면서 막을 내렸다. 2018년에는 민주당 측에서도 앞선 제주 3김이 아닌 문대림이란 새 후보를 내세워 원희룡에게 도전하는 등 그 영향력까지 사라져가는 모양새.[32] 2023년 현재 제주 3김은 부패와 각종 스캔들로 이제 도내에서의 평판 역시 별로 좋지 못한 편이다. 더군다나 이 들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비췄던 7대 지선 당시만 해도 칠순을 넘긴 고령이었는데, 당연히 정계를 은퇴했다.[33]
세 사람은 모두 1942년생(신구범 2월 2일, 김태환 5월 21일, 우근민 11월 4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세 사람 모두 북제주군(現 제주시 읍·면 지역) 출신인데 우근민과 김태환은 구좌읍 출신이고 신구범은 조천읍 출신이다. 구좌읍과 조천읍은 서로 이웃한 동네다. 또한 이들은 모두 공무원 출신이다. 그리고 우근민과 신구범의 경우 둘 다 관선 제주도지사와 민선 제주도지사를 모두 역임해 봤다는 점이 있고, 김태환은 관선 제주시장과 민선 제주시장을 모두 역임했다는 점이 있다.
6.2. 국민의힘 윤석열 캠프의 삼김
김종인 | 김한길 | 김병준 |
제20대 대통령 선거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캠프에 합류한 김종인, 김한길, 김병준을 이르는 말.
김한길, 김병준이 인수위원회에 참여했다.
대선 이후 이 셋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리는데, 김종인은 윤석열과의 지속된 분쟁 끝에 당내 영향력을 상실했고, 김병준은 인수위에 기용됐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직 김한길만이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윤석열의 최측근으로 남게 되었다.
6.3. 더불어민주당의 新(신) 삼김
김부겸 | 김동연 | 김경수 |
20대 대선 이후,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일극 체제로 돌아가자, 그에 맞서 언급되는 비명계의 거물급 정치인 삼인방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부인하지만, 이재명의 대표직 연임과 김경수의 사면 복권 이후, 여러 언론 매체에서 '민주당의 新(신) 삼김'이라고 불리고 있다.
6.4. 기타
재밌게도 축구계에 이들의 동명이인이 있다. 해당기사 울산 현대에 수비수 김영삼, 인천 유나이티드의 김대중, 경남 FC의 김종필이 있다. 김영삼은 2016시즌에 은퇴했고, 김대중은 상주 상무에 입대했다. 김종필은 2011년 프로 생활을 시작한 일본에서 줄곧 뛰다가 201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영삼이 울산에서 은퇴한 이후 인천의 김대중이 직접 영상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한자까지 같은 성우 김대중은 군대에서 같은 중대 내에 김영삼, 김종필의 동명이인이 있어서 이름 때문에 갈굼당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야구에서는 김응용, 김성근, 김인식 등 연배가 비슷한[34] 김씨 성의 감독 3명이 돌아가며 우승을 하던 시대를[35] 삼김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9년 프로농구 팀 원주 DB 프로미에 새로 들어온 김태술, 김민구, 김종규를 묶어서 칭한다.[36]
드라마 쪽에서는 김은희, 김은숙, 김순옥 이 3명의 인기 작가들을 소위 드라마의 3김이라 부른다.
스타크래프트에서는 김윤환, 김정우, 김명운 3명의 저그게이머가 2008년부터 각 해당팀의 주축선수가 되고 저그의 한축이 되어 3김저그라고 부른다.
연예계에서는 김유정, 김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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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록 1987년 13대 대선은 노태우가 당선되었으나, 당시 삼김의 출마선언 및 연설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치계에 영향을 미친 대한민국 정치사의 한 획이 그어질 그야말로 대사건의 시작점이었다.[2]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1998년, 2003년 대통령직 퇴임, 김종필은 2004년 17대 총선 비례대표 낙선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3] 성씨는 같지만 친족관계는 아니다. 본관도 서로 달라서 김영삼은 신라계 김녕 김씨, 김대중과 김종필은 가야계 김해 김씨다.[4] 민주화 투사로 거의 반평생을 군사독재와 맞서 싸워온 양김과 다르게 김종필은 구군부 2인자 출신이고 단지 신군부 세력과 대립한다는 점에서 양김과 접점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내내 2강 1약의 1약을 차지하는 위치였다. 변수로서는 매우 중요하지만 엎치락뒤치락하던 나머지 둘과 대등한 위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실제로도 김영삼과 김대중은 나란히 대통령을 역임했으나, 김종필은 두 차례(박정희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서 각각 제11대, 제31대) 국무총리 역임과 국회의원 9선으로 만족하고 내려와야 했다. 즉, 킹은 못되고 킹메이커 수준.[5] 다만 그 김종필도 2인자 견제가 심했던 박정희 정권 시절 찍혀 70년대엔 거의 정계 은퇴 수준의 탄압을 받았고, 김종필 본인도 이게 속에 쌓였던지 인척 관계인 박근혜와도 사이가 서먹했다. 말년엔 박정희나 육영수를 디스하는 인터뷰도 하는 등 군사정권 핵심 인사였지만 한편으론 피해자 포지션도 있었다.[6] 민주당 구파는 일제강점기와 그 이전으로 거슬러가는 구 지주 세력이 중심이 되었고, 민주당 신파는 신흥 자본가를 중심으로 했다. 김영삼의 집안이 거제의 유지 집안이었고, 김대중은 스스로 일어선 자본가였다는 점에서 이들은 출신 배경과 정확히 일치하는 계파로 정치 경력을 쌓게 된 것이다. 민주당 구파가 상대적 보수, 민주당 신파가 상대적 진보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도 이들에게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7] 민주당은 4.19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분열하여 구파의 신민당이 딴 살림을 차렸고, 군부독재 시대가 도래하고 나서도 구파의 민정당과 신파의 민주당은 대립했다. 이들은 한일기본조약 투쟁 국면에서 민중당으로 합당한지 1년만에 구파가 또 신한당을 차리며 재분열했다가 다음해 6대 대선을 앞두고서야 신민당으로 재통합하게 된다. 김영삼은 이미 신구파 분당 직전부터 이른바 구파의 '23인위원회'의 일원으로 신구 갈등의 핵심 인물로 개입하고 있었다.[8] 물론 합당을 거쳐야 했던 민주자유당이나 민주당(1991년) 등에서는 당내 다른 계파들과 경선을 치러야 하긴 했었다. 김영삼의 상대로는 박태준 등이 거론되었으나 상대적으로 중량이 약한 이종찬이 나왔고, 김대중의 상대로는 꼬마민주당 출신인 이기택이 나왔다. 두 후보 모두 60%를 넘기는 득표로 무난하게 경선에서 승리하였다.[9] 삼김시대가 끝나갈 무렵(15대 총선 이후 ~ 15대 대선 이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내에서 이에 대한 비토여론 역시 없지는 않아서 서울권 중진의원인 4선 정대철(당시 국회의원은 아니고 지구당위원장이었음)과 5선 김상현이 연합하여 각각 대선 경선후보와 당 총재에 도전했으나, 둘이 내분을 일으키면서 세력화가 이뤄지지 못 하고 둘 다 김대중 총재에게 패했으며 둘 다 동교동계에게 찍혀서 정권 교체 이후에도 그리 힘을 쓰지는 못 했다.[10] 14대 대선에서도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나 박찬종의 신정당이 개인정당으로서는 상당히 선전하기도 했는데, 특히 박찬종은 삼김정치 청산과 차세대 정치를 외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박찬종은 민주공화당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더니 신민당 창당 과정에서 벌어진 각목파동으로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더니 정계에서 잊히고 만다.[11]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군사정권이 갓 끝난 민주화 시대였던 삼김시대 역시 바로 현직 대통령이 선거를 이끌고,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 직접 전화를 걸어 공천을 주고, 당까지 쥐락펴락 하던 말그대로 보스정치 시절이었다. 그 중 예시로, 홍준표와 이낙연이 젊은 시절 각각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렇게 정계 영입되었다.[12] 특히 과거 자유당이나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쪽 인사들도 삼김과 얽히거나 삼김의 영향력을 받은 사람들이 꽤 많다.[13] 당시 여당 민주자유당에서 총재(대통령 겸임) 다음의 직위였다.[14] 이 세 인물이 노태우와 전면적으로 경쟁한 13대 대선에서도 김종필은 4대 유력 후보 4위, 그것도 한 자리 수 득표만을 거둔 4위였고, 다음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도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원내 4당이었다. 87년 대선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김종필의 3배가 넘는 표를 얻었다.[15] 특히 87년의 13대 대선 결과가 김종필의 정치적 입지와 그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 것이 4위 김종필의 8.1% 득표를 그대로 2위 김영삼의 28.0%에 더하더라도 1위 노태우의 36.6%를 넘을 수는 없었다. 0.5% 차이로 매우 가깝게 붙는 것은 맞지만 어찌되었든 노태우의 표를 넘지는 못한다. 즉, 0.2%의 군소후보인 5위 신정일 후보를 제외한 4대 후보군 중에서 유일하게 단독으로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흔히 김종필의 역할을 '캐스팅보터' 라고 설명하지만 실상은 캐스팅보터로써의 영향력에도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예를 들어 3당 합당 이후 양당 체제로의 재편성이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노태우(민정당)-김영삼(통민당)-김대중(평민당)의 3강 체제가 유지되었다면 김종필(공화당)은 캐스팅보터의 역할조차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3당 합당으로 민정당과 퓨전했지만 기어코 민자당의 주도권을 확보한 김영삼이나 시민사회운동세력+학생운동세력을 영입하여 세력을 확보한 김대중이 한국 정치 양대 정파의 실질적인 창업자가 된 것에 비하면 김종필의 정치적 한계는 명확했던 것이다.[16] DJP 연합이 무너진 직후 이인제를 중심으로 했던 새천년민주당이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원내교섭단체를 무너트렸으며, 17대 총선에서도 여당 열린우리당이 16대 대선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바탕으로 충청도 전역을 석권했다. 행정수도 이슈가 희미해진 노무현 정권 후반부터 충청권의 한나라당의 지지세가 크게 증가하였지만, 17대 대선으로 집권한 이명박 정권의 행정수도 폐기 기조로 18대 총선을 거치면서 도로 충남은 국민중심당-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에게, 충북은 민주당의 영역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19대 총선과 20대 총선에서 정계 전체가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양당구도로 이인제가 이끄는 자민련의 마지막 후신인 선진통일당은 새누리당에 흡수되었다.[17] 박정희 정부와 신군부 시절 반독재 특종으로 이름을 날렸던 조갑제 기자는 이 시기를 김영삼과 김대중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에 피가 끓던 시절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18] 대표적인 사건이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이지만 그 밖에도 교통사고나 폭발물을 동원한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19] 이들을 모방해 김종필의 계파는 청구동계라고 칭하는데, 3김 중에 제일 미약하고 인지도가 낮았다. 애당초 김영삼과 김대중이 각각 자기가 사는 동네의 이름을 계파로 갖게 된 이유는, 군부 독재 세력이 이들을 가택 연금하면서 이들의 집이 정치활동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20] 국민의힘의 실질적인 뿌리는 김영삼과 노태우, 김종필의 삼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이다. 김영삼의 상도동계가 민자당에 합류하여 주도권을 쥐지 않았다면 군부 세력인 구 민주정의당계는 군사독재잔당이라는 원죄에 눌려 정치적인 성장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21] 민주당계 정당 역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동교동계를 밀어내고 친노계가 주도권을 장악하기는 했으나, 민주당계 정당 자체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시민사회운동세력이나 학생운동 출신 인물을 영입했다.[22] DJ 85세, YS 87세, JP 92세[23] YS는 삼김 중 가장 건강상태가 좋아 말년까지도 꾸준히 운동과 조깅을 즐기며 건강관리를 스스로 했다. 하지만 2008년, 부친상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시기상으론 노무현·김대중 前 대통령 서거 전후로) YS도 뇌경색이 갑자기 오면서 일상생활이 어려워졌다.[24] 다만 이회창 역시 흔한 성씨인 '이(李)'보다는 발음도 쉽고 한자도 단순하며 이회창을 연상하기 쉬운 '창(昌)'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였다.[25] 노무현 이전까지는 '盧'나 '盧 前 대통령' 같은 용어 모두 노태우를 가리키는 표현이긴 했다. 물론 노무현 활동시기에는 노무현 본인을 의미했다.[26]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제주정가 3인방'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27] 우근민 - 신구범 두 관선지사 밑에서 일한 이력이 있는 셈이다.[28] 2006년 이전까지 제주시장, 서귀포시장, 남제주군수, 북제주군수는 민선이었다. 2006년에 제주도가 특별자치도로 전환되고 두 개의 군을 없앤 이후부터는 다시 행정시로 바뀌고 시장이 관선으로 바뀌었다.[29] 그래서 김태환은 나머지 두 사람과 대결을 아예 하지도 않았다.[30] 6대 지선을 앞두고 무소속이었던 김태환 전 지사와 현직이었던 우근민 지사가 2주 간격으로 2013년 10~11월에 새누리당에 복당했는데, 이 둘이 6대 지선 출마를 노리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당 내에서 경선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31] 사실 친박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제주지사 탈환을 할 필요도 있었고, 더군다나 남경필, 정병국 등과 더불어 소장파였던 원희룡의 존재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니 겸사겸사 원희룡을 지원했고 이에 반발한 우근민 지사의 탈당 떡밥이 돌았으나 결국 경선에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32] 이 때 원희룡에게 악감정이 있던 우근민이 문대림을 지원했으나, 오히려 문대림을 팀킬하면서 낙선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3] 2002년 3대 지선 이후로 야인으로 지내던 신구범은 한나라당 - 창조한국당 - 새정치민주연합 등을 오가는 철새짓(...)을 하다가 2017년 이후 극우정당인 대한애국당에 입당해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등 극우 행보를 보이고 있고, 우근민은 도지사 재임 당시 집무실 성추행 사건이나 4.3 폭도 발언 등 크고 작은 논란을 발생시켰으며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지사직 상실까지 갔었다. 김태환은 도지사 퇴임 후 음주 뺑소니 사고를 치는 등 세 사람 모두 시끄러운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34] 김응용이 1939년생, 김성근이 1941년생, 김인식이 1947년생이다. 세 사람은 1960년대 한국실업야구에서 서로 선수로서 경쟁했는데 시대는 다소 달라도 크라운맥주 야구단에서 뛴 경험이 있다는 연관 관계가 있다.[35] 1997년까지는 김응용의 해태 타이거즈가 절대강자였고 김인식은 해태가 주춤했던 1995년과 2001년에 두산 베어스 감독으로서 패권을 잡았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부터는 SK 와이번스 지휘봉을 잡았던 김성근이 리그를 평정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김성근 대신 현대 유니콘스 감독으로 리그 최강자 역할을 했던 김재박이 삼김 안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연배로 보면 김재박이 까마득한 후배가 된다.[36] 다만 김민구는 음주운전에 의한 기량 하락으로, 김태술은 고령 선수라서 2021년 은퇴해 현재는 김민구와 동기인 김종규만 건재하다.[37] 음주운전 때문에 이미지가 완전히 하락한 지금은 김향기를 많이 끼워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