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6:22:54

조하르 두다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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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fff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초대 대통령}}}]][br]{{{#fff {{{+1 조하르 무사예비치 두다예프}}}[* 체첸어로는 두딘 무사보 조하르(Дудин Муса-воӏ Джохар).][br]Джохар Муса́евич Дудаев[br]Dzhokhar Musayevich Dudayev}}}'''
파일:KMO_075193_00416_1_t222_142229.jpg
<colbgcolor=#2b7338><colcolor=#fff> 출생 1944년 2월 15일
소련 러시아 SFSR 체첸-인구시 ASSR 갈란초시 얄호로이
(現 러시아 북캅카스 연방관구 체첸 공화국 얄호로이)
사망 1996년 4월 21일 (향년 52세)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그로즈니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91년 11월 9일 ~ 1996년 4월 21일
서명 파일:조하르 두다예프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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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b7338><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무사 두다예프, 어머니 라비아트 두다예바
배우자 알라 두다예바(Алла Дудаева, Alla Dudayeva)[1]
자녀 2남 1녀
군복무 소련 공군(1962~1990)
체첸군(1990~1996)
계급 소장
학력 모스크바 공군학교
종교 이슬람
정당
[[소련 공산당|]](1968~1990)
체첸 민족 전국민 회의(1990~1996)
}}}}}}}}} ||
1. 개요2. 생애3. 암살4. 사망 이후5. 평가6. 여담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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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tabula.ge/7755_1.jpg

소련군인이자 체첸인 정치인으로,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며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체첸 지역의 분리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2. 생애

러시아 SFSR 소속 체첸-인구시 ASSR 남부 갈란초지(ГаланчӀож, 러시아어로 갈란초시·Галанчож) 구 회이하라차얄하라(Хьевхьарача-Ялхара, 러시아어로 얄호로이·Ялхорой)의 체초이(Цечой) 씨족 가계에서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2] 이오시프 스탈린의 민족 이동 조치로 인해 다른 체첸인과 함께 태어난 직후 가족과 함께 카자흐 SSR로 추방당해 어린 시절을 카자흐 SSR에서 보내고 13년 후 아버지와 함께 체첸으로 돌아왔으나 부친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고학을 하면서 성장했는데 전기설비공으로 근무하면서 야간학교에 다닌 후 모스크바 유리 가가린 공군사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성인이 되어 소련 공군에 입대해 폭격기 조종사가 되었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는데 19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무자헤딘 측에 맞서는 데 공로했으며 상까지 받았다.[3] 그리하여 공군 소장까지 진급하여 제326중폭격비행사단장까지 역임했을 정도로 출세했지만 체첸인은 불온민족으로 간주되어 소련에서 차별받았기 때문에 입대 당시에는 오세트인으로 출신을 세탁해야 했다는 굴욕적인 일화도 있다.

소련 말기 에스토니아에서 반소 독립 봉기가 일어나자 모스크바에서는 봉기를 유혈 진압하고 에스토니아 의회와 TV 방송국을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시위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을 위해 이동 급식차를 대절하는가 하면 시위대를 개인적으로 만나 차를 권하기까지 하였고 에스토니아 독립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소련 정부에서는 그를 체포하고 에스토니아 독립운동을 무력 진압하려고 했지만 당시 에스토니아 주둔 소련군에서 그의 위치가 너무 확고했기 때문에 소련은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에스토니아 주둔 소련 공군 부대는 1990년 에스토니아에서 철수하고 이듬해 에스토니아는 독립했다.

1990년 소련군에서 제대하고 체첸으로 귀환했다. 1991년 8월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소련 공산당 보수파가 몰락하자 1991년 9월 무장세력을 이끌고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 최고회의 및 방송사를 유혈점령하면서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을 사실상 해체했다.

1991년 11월 9일 체첸의 새 의회 성립을 도와준 같은 체첸인이자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루슬란 하스불라토프의 뒤통수를 거하게 치고 체첸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연달아 독립하는 소련 내 공화국들에 이어 독립을 선언했지만 러시아 연방 내 소속 공화국들마저 독립의 열기에 휩싸일 것을 우려한 러시아 연방 정부는 체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체첸 전쟁을 반대하던 하스불라토프는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로 실각했다. 당시 그는 이웃 캅카스 제민족 국가를 끌여들여 연합국가를 건국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러시아 연방 정부와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정부는 1990년대 초반까지 체첸의 지위를 두고 협상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러시아는 수도 그로즈니 공항을 폭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체첸 전쟁을 일으켰고 그는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바탕으로 게릴라를 형성하여 저항을 이어나갔다. 러시아군은 천신만고 끝에 그로즈니를 함락시켰지만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두다예프 세력은 남부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3. 암살

파일:external/www.opoccuu.com/gibel-5.jpg

최후의 모습. 옆에 있는 차량은 라다 니바.

1996년 4월 21일, 외부와 통화하는 것이 인근에서 비행 중이던 A-50에게 감청당하면서 위치가 노출되었고, 곧바로 출격한 Su-25의 레이저 유도폭탄 공습에 의해 폭사했다.

본인이 소련 공군 소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이런 방식의 암살을 기획할 것을 알고 휴대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거는 방식으로 몇 번의 암살 시도를 피했으나 딱 한 번의 실수로 생명을 잃었다. 당시 보좌관이 받은 전화를 바꿔 받은 게 화가 됐다.

다만 러시아 정부에서 해당 암살작전의 세부사항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는 체첸 내부의 친러 부역자가 차량에 폭탄을 설치하고 기폭시켜 암살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4. 사망 이후

그가 사망한 후 체젠 지도부에서는 지속되던 러시아의 탄압과 외부 세력의 유입으로 온건주의자와 이슬람 근본주의파가 반목했고 온건파는 체첸에서 축출되었는데 이들은 우크라이나 등의 해외로 망명하거나 러시아 측으로 전향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람잔 카디로프의 아버지인 아흐마트 카디로프다. 그 와중에 샤밀 바사예프를 위시한 와하브파 세력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테러를 일으키면서 체첸 독립운동은 전세계적으로 지지를 잃었다.

이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축출되었다가 제2차 체첸 전쟁으로 돌아온 카디로프파는 체첸 행정부를 수립했고 아흐마트 카디로프 등은 러시아 정부와 협력하여 바사예프를 비롯한 극단주의 파벌의 주요 지도자들을 토벌했다. 극단주의 파벌은 이마라트 캅카스라는 조직으로 활동했지만 2016년 이후에는 체첸 내 세력은 거의 러시아군 및 러시아 국가근위대에 의해 토벌되었고 다게스탄 지역으로 세력을 옮겼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돈바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의 이름을 딴 체첸계 대대가 우크라이나 편에 붙어 참전하고 있다.

5. 평가

그는 체첸인 최초로 소련군 장성이 된 군인이자 체첸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소련 공군 시절 같이 복무했던 공군 장교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였고 체첸 독립전쟁에서 체첸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체첸 전쟁을 이끈 체첸측 지도자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중략)이제 정치 이데올로기는 세 번째 방법인 슬라브 화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슬라브 인들의 통일입니다.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슬라브화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인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화와 러시아 성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국가와 인민이 발전하는 길은 하나뿐이지만 나는 당신에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승리 기념일을 어떻게 축하했는지 기억합니까?"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세 구역의 수비대를 지휘했습니다. 물론 문명 세계의 가장 큰 자산은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좋아하는 악인에 대한 승리입니다. 1944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파괴되고, 추방되고, 거대한 지정학적 공간에서 연속적인 진영을 이루었고, 러시아인들은 즉시 이란과 갈등을 일으키고, 이란과 전쟁을 하고, 1953년에 다시 싸웠습니다. 1956년에는 그들은 헝가리를, 195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이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습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나고르노-카르바흐,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압하지야, 남오세티야, 인구셰티야, 북오세티야,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 발트해 국가, 타지키스탄 등등…사람들과 지상 문명의 파괴입니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가장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최고 권력층의 야만적인 범죄자들 중 단 한 명도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인의 탐욕은 점점 더 불타올랐고 체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처벌 받지 않는다고 나는 당신에게 확신할 수 있습니다. 무분별한 국가의 살인, 잔인함, 지구에 악을 낳는 사람들의 냉소의 가해자는 처벌 받지 않고 처벌의 불가피성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증오로 가득 찬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일종의 속임수를 떠안고, 일종의 마피아, 시칠리아 등을 만든 다음 전 세계가 무너뜨린 독일 파시즘에 대해 추측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소련과 러시아주의(파시즘)는 이 기지에 대해 추측했습니다. 이미 위기가 닥치자 유대인 시온주의를 내세우고 전 세계의 유대인들을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 카드가 작동하지 않아 그들은 또 다른 신화인 체첸 마피아를 찾아야 했지만 체첸에는 마피아가 없다는 것을 전 세계가 알게 되었습니다. 전체 마피아가 모스크바에 앉아 있습니다."
인터뷰 전반부에는 러시아인은 도덕성과 영성이 없다는 등의 차별적인 언행이 눈에 띈다. 1995년 이전 인터뷰에서는 자기는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등 최대한 러시아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과는 대조적인데 1995년에 러시아 측에서 공중폭격을 한 탓에 이에 분노한 듯 하다.
2022. 2. 28에 공개된 동영상. Дудаев говорил о войне России и Украины 27 лет назад
정치적 식견이 상당했다. 사망하기 전인 1995년에 찍은 인터뷰 영상에서 러시아는 체첸을 시작으로 캅카스 국가·크림반도, 이후로는 우크라이나·벨라루스까지 영토를 넓힐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렇게 되면 러시아와 군사적·경제적으로 동맹을 맺는 나라는 없을 거라고 했다. 다른 영상에서는 모험가적인 러시아의 정치인들을 세계가 심판하지 않으면 러시아와 근접국 사이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국제사회는 러시아에 의한 체첸 민족 학살의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려고 하고 있다. 이 문제를 간과한다면, 러시아 제국주의의 모순은 곧 우크라이나 등 서쪽으로 향한다. 그 때가 되면 유럽을 비롯해 세계는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1995년 12월 12일 인터뷰에서. 인터뷰 후 4개월 뒤에 폭살당했다.
인터뷰로부터 27년 후 실제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난 것을 보면 맞는 말이다. 유튜브 댓글창에도 그의 정치적 식견에 대해서 칭찬하는 댓글이 많이 달렸다. 예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언이라기보다는 소련군 소속 군인으로 20년 이상 소련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고 소련이 앞으로 어떻게 정치적, 군사적으로 활동할 것인지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정치적 식견에 비해 경제에 문외한이었던 것이 흠이다.

연이은 체첸 반군의 테러와 그의 사후에 일어난 체첸 반군의 내분과 막장화까지 겹쳐 체첸에서도 그의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군인 커리어로 체첸 내부 정치를 잘 하면 좋았겠지만 체첸 부족과 이슬람 근본주의자 양쪽을 포용하는 정치를 펼쳤는데 이것이 후일 독이 되고 말았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래의 내용이다.
1990년대 들어와 두다예프는 비슷한 전략을 추구하고자 1980년대에 캅카스 지역에서 나타난 이슬람의 부상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이슬람 성직자와 이슬람 정당의 지지를 받았으며 코란의 의식 절차에 따라 취임 서약을 했으며(옐친도 러시아 정교 총대주교의 축복을 받았다) 1994년에는 체첸이 이슬람법 샤리아의 지배를 받는 이슬람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첸 병사들은 체첸어로 성전을 뜻하는 '가바자트'라는 단어가 새겨진 녹색 천을 두르고 "알라는 위대하다"는 구호를 외치며 전장으로 나갔다.
출처: 새뮤얼 헌팅턴문명의 충돌 중에서
체첸 독립 전후로 러시아계 주민을 추방시켰기 때문에 체첸에서 추방당한 러시아인에게 평가가 좋지 않다.

그의 사후 군권을 장악한 샤밀 바사예프는 정치력이 떨어지고 이슬람 극단주의에 입각한 통치를 시도하고 옆 공화국인 다게스탄을 침공해서 다시 체첸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죽고 나서 내부 권력투쟁 및 무자헤딘들의 트롤링으로 인해서 체첸 반군이 국제적으로 명성이 떨어지면서 자멸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최소한 세속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있어서는 괜찮은 역량과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아무리 그가 활동했을 때가 러시아의 암흑기였고 보리스 옐친이 무능함을 뽐내고 다녔다지만 엄연히 핵 수천 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의 수뇌부를 상대로 대놓고 희롱하고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기 때문이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자국의 독립을 도와준 은인으로 칭송하는데 지금도 그가 근무했던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인 타르투에는 그가 집무실로 쓰던 호텔 방이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는 등 그를 기념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그가 인터뷰할 때 러시아를 비판하고 러시아에 대한 정치적 식견을 보여준 것 때문에 고평가를 받고 있다.

대체적으로 외국에서는 평가가 좋은데 세속적인 면모를 보인 데다 두다예프 이후의 지도자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던 와중에 두다예프가 체첸군을 이끌 때는 전쟁 중 러시아군 인질을 참살하는 등의 행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6. 여담

  • 체첸인으로는 최초로 소련군 고위직에 오른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 체첸 독립운동 당시 이슬람을 내세우긴 했지만 종교적으로 극단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소련 공산당에도 가입했고[4] 에스토니아에서도 현지인들과 잘 어울려 다녔을 정도였다.
  • 갈색에 초록색이 섞인 파이아이를 가졌다. 가디언 등지에서 영화배우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할 정도면 잘생긴 축에 속하는 듯하다.
  • 러시아계 여성인 알렙티나 쿨리코바(Алевтина Куликова, Alevtina Kulikova)와 1967년에 결혼했다고 한다. 아내는 결혼 후 알라 두다예바로 개명했으며 예술가로 이치케리야 체첸 국기와 국장 도안을 제작했고 남편의 사후에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2명, 딸이 1명 있다. 가족들은 제2차 체첸 전쟁 때까지는 체첸에 남아 있었지만 전쟁 이후 고향 체첸에 돌아가지 않고 리투아니아로 이주했으며 딸은 결혼하여 독일에 살고 있다. 사실 돌아가고 싶어도 반러 체첸인 지도자들이 가족 단위로 암살당하는 것이나 유럽이나 튀르키예에 망명한 반카디로프 성향의 활동가들이 러시아 정부나 카디로프 소속 암살자에게 암살당하는 것을 보면 발언도 조심해야 하고 카디로프가 체첸 정부 수반인 이상은 체첸에는 못 돌아올 듯 하다.
  • 통합 러시아 소속 의원인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Владислав Сурков, Vladislav Surkov)가 그의 먼 친척으로 알려져 있다.
  • 독립을 원했지만 결국 그가 죽은 뒤 체첸의 종속이 더욱 심해진 것을 반영한 씁쓸한 밈도 나왔다.

7. 같이 보기



[1] 혼전성은 쿨리코바(Куликова)로 러시아계이다.[2] 체첸인은 민족 내부적으로 타이파(тайпа, 러시아어로 타이프·тайп) 형태의 씨족 자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3] 이때 아프간 마을을 상대로 전략폭격 임무를 수행했지만 훗날 인터뷰에서 이를 부정했다.[4] 일반적으로 소련과 중국공산당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당원으로 받지 않는다. 특히 소련 공산당은 엄격해서 자식에게 세례를 준 당원은 출당시켰을 정도다. 하지만 모든 공산당이 그런 것은 아닌데 쿠바 공산당피델 카스트로 말기에 종교인의 가입을 허용했고 아랍 지역의 공산당에는 무슬림-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