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飛雷 (炸藥發射筒)飞雷 (炸药发射筒)
중공군이 국공내전에서 사용한 대포.
2. 기원
지면에 구멍을 파서 화약과 자갈을 채운 뒤 적이 다가오면 폭파하는 포와 지뢰의 혼합 무기라 할 수 있는 푸가스는 이미 16세기부터 사용되던, 굉장히 오래된 기술이다.그러나 원통에 뭔가를 넣고 발사한다는 발상은 제1차 세계 대전때 나왔다. 전쟁 초기에 극심한 포 부족에 시달리던 열강 군대들은 사석포에 가까운 임시 박격포를 마구 만들어냈는데, 이들 중에는 나무로 된 포신을 가진 포도 있었고, 압축공기를 이용한 공기 포, 스프링으로 포탄을 발사하는 포, 심지어 새총까지도 사용되는 판국이었다.
이때 발상의 전환을 한 사람이 바로 영국 육군 공병 장교인 윌리엄 하워드 리벤스이다. 그는 이미 리벤스 화염방사기라는 영국스러운 물건을 만든 바 있는데, 화염방사기가 너무 크고 무거운 데다 사정거리가 짧다는 것에 아쉬움을 품고 개량형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리벤스 투사기(Livens Projector)로, 그냥 원통에 소이탄이나 화학탄을 넣어서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서 쓰는 원통은 정밀가공을 통해 만들어진 진짜 대포의 포신과 달리 그냥 원통이어서 만들기 쉬웠고, 화염방사기를 들고 가거나 독가스를 살포하는 것보다 사거리가 월등히 길어지므로 대량으로 쓰였다. 너무 저렴한 방식이라 독일군도 이를 따라하기 시작했고, 이 발상은 중국에까지 알려지게 된다.
3. 개발
개발자인 가오원쿠이(高文魁, 고문괴)
1947년 국공내전 당시 물자부족과 생산시설 열악 등의 여러 이유들로 중화기가 부족하던 중공군의 상황을 타파하고자 젊은 육군 공병 군관인 가오원쿠이가 제안, 만들게 되었다.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드럼통의 평평한 면 중 하나를 뻥 뚫은 뒤 다리를 붙이면 끝. 급한 상황에선 대충 흙을 쌓아서 다리를 대체하기도 했다. 실전에서도 다른 거 없이 뚫린 구멍에 화약뭉치를 넣은 뒤 터트리지만, 경우에 따라 주위 착탄지점에 파편을 뿌려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서 자갈, 쇳덩이도 넣기도 했다.
4. 실전
| 집결호에서 구지디의 9중대가 방어 중인 모습 |
선전영화 특성상 과장이 심하고, 실제와 다른 연출임을 감안해야 한다. 국공내전 후반에 착안, 채용되어 국민당군을 상대로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하나 당시 지리멸렬 중이었던 국민당군을 상대로의 충격효과는 실제보다 크게 발휘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고, 6.25 전쟁 당시에도 저지전 수단으로 급조해서 활용하여 국군의 추격을 늦추는 성과를 발휘했지만 성능과 위력의 한계로 소련제 및 중공제 화력수단이 보강된 이후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5. 위력
비록 구조는 단순하고 정밀 타격과는 거리가 멀었어도 드럼통은 군대에 널린 물건이고,[1] 중공군도 쪽수가 매우 많았으므로 대량으로 만들어 쏴제끼면 무시못할 효과를 냈다. 대충 성능은 20㎏ 화약뭉치를 150~200m까지 날려보낼 수 있으며 기본 살상반경이 5m 정도. 그냥 화약뭉치만 넣고 쏘는 것이 기본이지만, 때론 자갈이나 짱돌을 넣고 쏘기도 했으며, 화약뭉치와 자갈을 동시에 집어넣고 쏘기도 했다.급조무기의 일종으로서 근거리 화력수단으로서는 충격효과가 있었음은 전사적으로 확인이 되지만, 살상 효과는 크지 않았다. 살상반경이 5m라는 말은 실제 각개 전투에서 산개 병력의 인원간 간격이 5~10m임을 감안하는 경우 전열 내에 정확히 맞아야 한 명이 죽을 정도 수준이고, 20m 이내에 폭압과 파편에 의한 부상은 일으켰으나, M2 60mm 박격포의 살상반경이 35m였음을 감안하면 형편 없는 수준을 넘어선다. 비뢰포가 과장된 내용대로의 위력이 맞았다면 6.25 전사에서 비뢰포는 방어전 상황에서는 반드시 채용되었어야 했을 것이나 그런 일은 없었고, 중공군이 지리멸렬 퇴각하는 상황이었던 용문산 전투 당시 급조되어 추격해오는 국군을 잠깐 저지하는 성과를 내는 정도였다.
5.1. 과장된 위력
당시 중공군이 50-PM-37을 운영하는 경우 유효사거리 800m, 살상반경은 5m 인데, 위력이 너무 약해서 참전 초반 상당량 노획한 미군의 M2 60mm와 이를 복제생산 하여 만든 31식 60mm 박격포를 보급하고 사용하였다. 비뢰포가 충격과 공포의 절대무적 화력수단이었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M2 60mm 박격포는 유효사거리 1.8km 이내였고, M1 개런드의 유효사거리 역시 200~300미터, M1C 또는 M1D의 경우 500~600미터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비뢰포가 200미터 이내에서 운영되어야 하고, 과장된 일부 주장의 300미터 설을 긍정해준다 하더라도 숙련된 M1 사수들에게 비뢰포 운영 병력은 손쉬운 사냥감이 되었을 뿐임을 설명한다.
이는 아무리 낙후되었던 중공군 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저성능을 의미한다. 만일 비뢰포가 과장된 표현대로의 필살무기가 맞다고 주장한다면, 중공군을 어느쪽으로든 저능아집단으로 매도하는 매우 심각한 비하가 된다는 뜻이다. 또한 비뢰포가 한국전쟁 중반이후의 고지전에서 사용되지 않은 것 역시, 제식무기로서의 비적정성, 비효율성을 반증하는 사실이다.
즉, 중공군에서도 다른 현대적 화력수단이 있는 경우에는 비뢰포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군수효율상 5m 살상반경이라는 20kg의 작약탄 한 개를 보급하느니 비슷한 무게의 60mm 박격포탄 13발을 보급하는게 압도적으로 효율적인 사실은, 비뢰포의 과장이 솔방울 수류탄설과 비견되는 수준임을 설명한다. 비뢰포 1발은 78.5m²의 살상면적인데 반하여, M2 60mm 박격포탄 13발은 49,904.5m²이다. 31식 박격포 처럼 모방생산된 60mm 박격포탄의 살상반경이 25m라고 가정해도 25,512.5m²으로서 비뢰포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5.2. 과장의 원인
비뢰포의 과장된 위력은 선전 영화의 연출과 국민당군 출신의 지리멸렬 상황에서의 충격효과를 진술한 것이 더욱 과장되어 알려진 것 때문이고, 용문산 전투에서의 성과 역시, 반대로 중공군이 지리멸렬하는 상황에서 추격 섬멸을 위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북상하던 국군 병력을 놀래켜 저지한 정도였지, 국군과 미군의 뼈와 살을 찢어버리고 공세병력을 전멸시키거나 하는 그런 망상같은 일은 없었다.왜냐하면, 비뢰포에 의한 충격과 공포 효과나 살상효과를 진술하는 국군이나 미군의 기록을 찾기 어렵고, 알려진 살상반경 자체가 용문산 전투 당시 비뢰포로 인해 손실 한 병력 수준이 의미 없는 수준이었다고 볼 근거이기 때문이다. 살상반경 5m 이상이었다 주장한들, 살상반경이 90m가 넘지 못한다면 31식 박격포에 비빌 수준은 되지 못한다. 문제는 현용 자주곡사포 155mm 고폭탄의 살상반경이 50m이므로, 비뢰포의 한 발의 사격의 살상반경이 90m가 되어버리면, 열압력탄 수준의 초과학 무기라는 묘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에 더해서 200~300미터 비뢰포 운영병력과 그외의 진지 병력까지 청력에 손상을 입고, 상당수가 열폭풍에 의한 부상을 당함도 의미하게 된다.
별명으로 기름통을 썼다고 유통포로도 불리며, 이 무기에
6. 이후
중국군 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지만, 이것은 바퀴와 제대로 된 가대가 달린 물건. 전쟁 당시 쓰이던 형태는 맨 위의 모습처럼 그냥 드럼통에 다리만 달린 물건이다.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박격포가 아닌 임시로 만들어 낸 급조무기의 한계는 넘을 수 없었기에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으므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셈이다.
반세기가 더 지나 이것의 직계 후신(?)이 시리아 내전에서 등장하였다. 일명 지옥 대포. 송유관 같은 커다란 쇠파이프로 만드는데, 박격포 모양 추진체에 파편을 채운 가스통을 결합한 일종의 통 폭탄을 넣고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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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
[1] 기갑차량이나 수송차량에 쓸 연료나 식수등을 운반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