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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홍(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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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진홍(1914).jpg
(왼쪽부터 차례로) 1932년 3월 24일, 서대문형무소 촬영
1934년 5월 25일, 경기도경찰부 형사과 촬영
1935년 4월 11일, 서대문형무소 촬영
1938년 4월 8일, 서대문형무소 촬영
박진홍
朴鎭洪
이명 박소영(朴昭永), 최순녀(崔順女)
이영숙(李英淑, 李永淑)
출생 1914년 4월 3일[1]
함경북도 명천군 하고면 황암리 75번지
(現 함경북도 화대군 토원리)
사망 1950년 이후 (향년 36세 이상)
북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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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덕 때부터 난 문학소녀였고 사회생활이란 그리 오래되지 못했지요. 10년의 감옥생활을 빼면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라니까요. 그래서 이따금씩 꿈을 그리다가 현실 앞에 깜짝 놀라곤 해요.
1946년 11월 15일 독립신보 박진홍 인터뷰


대한민국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여성운동가, 정치인. 이재유김태준의 아내. 이관술의 제자. 일제강점기 여성 최장기수이며, 이순금과 함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가 가장 많이 만들어진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그녀를 주제로 하는 다음 논문이 있다. 오미일, <일제식민지 현실과 사회주의 여성 박진홍 -비밀지하투쟁의 레포로 활약> 이 문서는 주로 동작역사문화연구소장 김학규의 기사에 기반했다.해당 기사 김학규는 저서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에서도 박진홍을 이야기한다. 그 외 박진홍에 대한 자료는 김경일, 신영숙, 정현주, 이상경, 김성은의 《한국 근대 여성 63인의 초상》, 안재성의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속 약전, 김성동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속 약전, 이임하의《조선의 페미니스트 -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 속 약전, 김이겸과 윤석남의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속 약전 등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김경일의 학술서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안재성의 소설 <경성트로이카>와 평전 《이관술 1902-1950》에도 많이 등장한다. 임기상의 다음 기사도 있다: '내 이름은 항일투사'…일제와 맞선 '동덕'의 딸들 <임경석의 역사극장> 주인공이 되었다: 개교 이래 제일가는 수재의 퇴학, 긴 독립 투쟁사의 첫 장면 / 의사로 위장한 부부…독립운동, 세 번의 사지를 넘다 그리고 남편 김태준이 쓴 박진홍과 김태준이 연안 가는 이야기 <연안행>에 많이 나온다.

2. 생애

1914년 4월 3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고면 황암리 75번지(現 화대군 토원리)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1928년 화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가족과 함께 경기도 경성부 청엽정1정목(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1가) 15번지로 이주했고, 같은 해 4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똘똘한 박진홍을 공부시키고자 한 가족의 결단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워낙 가난했던 관계로 가정교사로 학자금을 마련해 천도교계 사립학교였던 동덕여고보에 입학한다.
파일:1932졸업앨범동덕여고.jpg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1932년 졸업앨범 속 학교 전경

동덕여고보에서 교사 이관술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이순금이효정을 만난다. 박진홍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경험하며 사회주의자가 되었다.[2] 박진홍은 동덕여고 개교 이래 최고의 수재로 불렸다.

"그(박진홍)의 머리가 명석함이라든지 또는 공부의 재주 있는 것이 단연 발군의 형세여서 학교성적은 동덕여고보 개교 이래 제일 가는 성적이었다."

"학교 교실에서 공부할 때마다 늘 선생에게 질문을 잘하기로 유명했으며, 어떤 때는 선생에게 질문해 선생으로부터 시원치 못한 답변을 들을 때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자기 자신이 일어서서 유창한 내용으로 설명까지 해 선생을 무안케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1937년 <매일신보>


"광주학생운동 1주년을 맞아 시험에 하얀 백지를 내는 백지동맹을 했어요. 그런데 가장 친하게 지내는 김백화라는 애가 시험을 써 내려갔어요. 나중에 왜 써 내려갔느냐고 하니까 양심적으로 말하지 않고 '너희들은 모르니까 못 써 내려갔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알면 왜 못 써 내려갔겠느냐'고. '그래, 나는 몰라서 못 써 내려갔다 치자. 그럼 (전교 1등하는) 박진홍이는 몰라서 안 썼겠느냐'고 하고, 그렇게 한 1주일 동안 싸움 나기도 했어요."
<독립운동가 이효정의 나의 이야기> 2009년 2월 28일 EBS 특집기획)


동덕여고보 4학년 때인 1931년 이순금·이경선·이병희·유순희·이효정 등과 함께 교육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한 다음 그해 6월 퇴학당한다. 이후 용산제면회사·대창직물회사에 여공으로 취업하여 노동운동을 벌였다.출처

1931년 12월 경성부내 각 학교의 동맹휴학을 이끌던 '경성학생알에스(RS)협의회' 주모자로 연행되면서 18세의 나이로 감옥생활을 시작한다. 출옥 후에는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 석산동(現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석산마을) 349번지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이재유와 동거하면서 '하우스키퍼' 및 레포(전달책)를 담당했는데 이때 이재유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어 임신한다. 그러나 1934년 1월 22일 '이재유 사건'으로 인해 경기도경찰부에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3], 임신한 상태로 투옥된 뒤 옥중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임신한 몸으로 고문을 당했기에 아이는 기형아로 태어났고, 박진홍의 어머니 홍씨가 키우지만 2년 만에 사망한다.출처
파일:이효정박진홍동상.jpg
서대문형무소에서 재회한 이효정과 박진홍(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제공)

1935년 1월에는 '용산 적색노동조합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36년 7월 30일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당일 투옥되었고, 1938년 5월 24일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경기도 경성부 팔판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팔판동) 20번지로 이주했다.

1937년 12월에는 '조선공산당 경성준비그룹 재건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고, 1938년 6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1938년 12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산입)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39년 7월 19일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경기도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정(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235-64번지로 이주했다.

1941년 8월 '경성 콤그룹 사건'으로 연이어 연행되었고, 1943년 10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합의부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1944년 10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선고받아 출옥했다. 31세 되던 1944년 10월에 비로소 10년에 걸친 감옥생활을 마감한 것이다.출처

출소 직후 김태준(1905)과 만나 재혼한다. 11월 국외 독립운동세력과의 연계를 위해 남편 김태준과 함께 무정·최창익·김두봉 등이 이끌던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이 활약하고 있던 중국의 연안으로 출발하여. 4월이 돼서야 연안에 도착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을 맞으면서 박진홍 일행은 1945년 9월 이번에는 연안을 출발해 그해 11월 서울에 도착한다. 그런데 만삭의 몸으로 출발한 탓에 이번에는 귀국 도중 만주국열하성(熱河省) 난평현(灤平縣)[4]에서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한다. 출산 때문에 귀국길을 멈출 수 없었던 사정으로 산후조리조차 할 수 없었던 박진홍은 가슴이 결리는 증상이 생기는 등 서울에 도착한 이후에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고 한다.출처

기차로 가는 것이 위험해 걸어서 출발한 박진홍은 다음해 4월이 돼서야 연안에 도착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을 맞으면서 박진홍 일행은 1945년 9월 이번에는 연안을 출발해 그해 11월 서울에 도착한다.출처

귀국한 직후 전국부녀총동맹 문교부장 겸 서울시위원장, 민전 사회정책연구위원 등을 역임한다.출처

남편 김태준이 남로당 문화부장 겸 특수정보 책임자로 1949년 11월 7일 사형당한 뒤 박진홍은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전인 1948년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는데, 이 때 이미 월북한 것인지 남편이 죽은 후 월북했는지 월북 시점이 확실하지 않지만 대개 남편이 죽은 후 월북했다고 여겨진다. 남편이 남한에서 사형 선고 받고 있는데 아내도 남한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평양 최고재판소 판사를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임기상의 기사: '내 이름은 항일투사'…일제와 맞선 '동덕'의 딸들

그 후 행적에 대한 명확한 사료는 없고 전쟁 중 액운을 만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진홍과 김태준의 자녀가 북한에 있는데 혁명열사 유가족 '증'을 빼앗긴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렸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 후 증을 다시 돌려줬다고 한다. 흔히 박진홍이 숙청되었다고 추정하는데 진짜로 숙청되었으면 자녀가 혁명열사 유가족 '증'을 받았을까 의문.출처

[1] 1932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935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참조. 1934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15년생, 193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박진홍의 이명 박소영)·193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16년 4월 3일생 등으로 다르게 기재돼 있다.[2] 출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김학규의 매일노동뉴스 기사[3] 1934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출생지가 경기도 경성부 송월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월동) 94-2번지, 본적이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으로, 사실과 달랐다.[4]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청더시 롼핑현(灤平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