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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현(독립운동가)

파일:홍종현(독립운동가).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미쓰이 쇼켄(三井鍾顯)
본관 남양 홍씨[1]
출생 1890년 1월 3일[2]
경상도 군위현 서성면 양곡리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어리실마을 835번지)[3]
사망 1977년 1월 20일 (향년 87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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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종현은 1890년 1월 3일 경상도 군위현 서성면 양곡리(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어리실마을) 835번지에서 아버지 홍재복(洪在福)과 어머니 원씨(元氏)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홍종영(洪鍾英)이 있었으며, 누나가 있었으나 홍종현이 5살 때 요절하였다. 11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어 23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경상북도 영천군 신촌면 입석동(현 영천시 화북면 입석리)로 이주했다. 슬하에 아들 2명 홍순근, 홍순갑, 딸 2명 홍순록(사위 신기윤), 홍순화(사위 김호순) 등이 있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영천군 지곡면 오산동(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조주생(曺周生)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당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영천면 장날인 4월 1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전날인 11일 그는 마을 상점에서 붉은 목면(木棉)을 사들고 마침 같은 마을에 살던 조병진의 집으로 가서 깃발로 만세를 부를 것이니 태극무늬를 그려달라고 요청하여 그림을 받았다. 이어 조주생의 집에서 역시 같은 마을에 살던 조재복에게 동일하게 만세를 부를 것이라며 「대한독립만세 군위 양곡(良谷) 홍종현」이라고 깃발에 써달라고 부탁하여 받아냈고, 거사에 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했다.1919년 5월 8일 판결문

4월 12일 오후 3시 30분경 1천여명의 상인과 주민들이 모이자, 그는 영천면 창구동 영천공립보통학교[4] 교문 앞 시장에서 태극기와 독립만세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군중이 호응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마침 이곳을 순찰중이던 순사보 김배석(金拜石)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그해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직접 제작한 독립만세기는 몰수되었다. 그는 이에 공소하였으나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고, 상고심까지 갔지만 7월 5일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20년 특별 사면으로 4개월의 감형을 받고 형집행정지출옥했다. 출옥 후 경상북도 의성군 소문면 하동(현 의성군 금성면 하2리) 225번지로 이주하였다.[5]

1926년 6월 초순 순종황제가 붕어하셨으며, 순종황제의 인산일을 즈음하여 많은 사람들이 경성에 들어오고 인심이 다소 불안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기회를 얻어 군중들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조선민족의 독립을 이뤄내야겠다는 뜻을 품고 만세운동을 할 계획을 하였다. 6월 8일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소격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이(李) 아무개의 집에서 몰래 세로 1척 4촌(약 43.19cm), 가로 3척 4촌(약 102cm)의 종이로 태극기를 만들어 '대한독립만세! 우리 동포여, 우리는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자'라고 혈서를 썼다.

6월 10일 순종황제인산일 당일, 이 혈서가 쓰인 태극기를 들고 경성부 숭인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83번지[6]의 길 위에서 군중에 섞여 장례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오후 1시 20분경 상여가 그곳을 통과하자마자 갑자기 달리면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체포되었다.#
도순사 : 그대는 그와 같은 행위를 하다가 만약 죽는다면 가족들은 어떻게 하는가.
홍종현 : 나는 죽음을 결심하고 하는 일이므로 가족을 돌볼 필요는 없다.
도순사 : 본적지를 나설 때에 가족과 이별을 고하고 왔는가.
홍종현 : 이별을 고하고 오지 않았다. 만약 말한다면 그것을 저지할 것으로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다.
- 1926년 6월 11일, 경성부 동대문경찰서에서 사법경찰관 사무취급 도순사 시마다 요이치(島田與一)와의 신문 내용 중 일부.#
도순사 : 그대는 언제부터 독립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
홍종현 : 일한병합 이래 생각하고 있었다.
도순사 : 그대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홍종현 : 독립할 힘이 부족할지도 모르나 생각만은 버릴 수 없다.
도순사 : 그대는 대정 8년(1919)에 입감[7]했는데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홍종현 : 입감해도 사상은 바뀌지 않는다.
- 1926년 6월 18일, 경성부 동대문경찰서에서 사법경찰관 사무취급 도순사 시마다 요이치(島田與一)와의 신문 내용 중 일부.#
파일:홍종현(6.10 만세 운동).png
1926년 6월 18일, 경성부 동대문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그는 이 일로 인해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고 당시 사용한 태극기는 몰수되었다. 이에 그는 공소하였으나 8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이유 없음으로 원심 판결이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상고심까지 갔지만 10월 11일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공소이유가 없다며 상고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귀향하여 조용히 지내다가 1944년 모종의 독립운동 사건으로 검거되어 그해 12월 2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의 예심에서는 소위 병역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공무집행방해, 상해죄 등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불기소처분선고받았다. 그러나 곧 공판에 회부되어 1945년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이하여 곧 풀려났다.

이후 1977년 1월 20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당홍계 문정공파(文正公派) 32세 종(鍾) 항렬.[2] 192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92년 1월 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내량리·삽령리와 함께 남양 홍씨 당홍계 집성촌이다.[4] 지금의 영천시 금노동에 있는 영천초등학교를 말한다. 당시에는 영천향교를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고, 1929년 현 위치에 이전하였다.[5] 1945년에는 하2리 235번지에 거주했다.[6]수도권 전철 1호선 동묘앞역 10번 출구 근처[7] 入監. 감옥에 들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