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20:00:11

지정환

<colbgcolor=#D3B6B0><colcolor=#fff> 지정환
池正煥
파일:external/www.korea.net/150316_Imsil_trip_8.jpg
본명 지정환(池正煥)[1]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
(Didier t'Serstevens)[2]
세례명 디디에[3]
본관 임실 지씨(任實 池氏)
출생 1931년 12월 5일
벨기에 브뤼셀
사망 2019년 4월 13일 (향년 87세)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4]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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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지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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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기에 태생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원로사목자 신부.

벨기에계 한국인으로 2016년 2월 4일 법무부에서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자에게 수여하는 국적 증서를 받아 법적인 한국인이 되었으며, '임실 지씨'로 창성창본하였다.[5] 따라서 한국벨기에이중국적자이다.

현재 한국에서 지정환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오늘날의 임실 치즈를 있게 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치즈 자체 생산의 길을 연, 명실공히 '한국 치즈의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겠다. 게다가 치즈 공장을 세운 이유도 가난한 농민들을 돕기 위해서였으며 일생을 약자를 위해 살아왔기에 존경을 받는 성직자이기도 하다.

2. 생애

1931년 12월 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 귀족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관련 가계. 1958년 가톨릭 사제가 된 그는 당시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에 해외선교사제로 파견갈 결심을 하고, 그 이듬해 부산항에 발을 디뎠다.

천주교 전주교구에 배속된 그는 전주시 전동성당의 보좌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러다 1961년 7월, 인사이동으로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되어 부안군으로 떠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형편이 어려운 농민들을 돕고자 30만 평에 이르는 땅을 간척하게 하고 간척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어렵게 일구어 낸 땅들은 고리대노름을 통해 부자들에게 넘어가고 말았고, 이를 보며 지 신부는 분통이 터져 '다시는 한국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4년 척박한 산골 동네 임실군에 위치한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뒤, 다시 농민들을 대면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조금만 개입할 생각으로 풀밭이 많은 임실에서 자라기 쉬울 산양을 길러[6] 산양유를 생산하였으나, 당시 한국에서 산양유란 낯선 식재료였기에 잘 팔리지 않고 남은 것이 버려지자 그 젖으로 산양유 치즈를 만들 생각을 하였다. 곧 이를 더 크게 벌여 군민들의 삶을 돕자는 생각을 떠올렸고, 벨기에 본가의 부모로부터 2천 달러를 받아 허름한 치즈 공장을 세웠다.[7]

하지만 치즈를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아 3년이 지나도 성과가 나오지 않자, 프랑스이탈리아 견학까지 가서 기술을 배워 와서 1969년에 비로소 치즈 생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유럽 치즈 산업체에서는 산업기밀이라며 기술을 알려주기를 꺼렸는데, 참으로 얄궂게도 가톨릭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8] 이탈리아 공산당(현 이탈리아 민주당) 당대표 비서로 일한 한 젊은이가 노트에 기술을 적어서 신부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석 달만에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보니, 그동안 같이 치즈 생산 작업을 했던 청년들이 계속되는 실패에 좌절하고 신부가 언제 돌아올지도 몰라 1명만 남고 다 떠나버린 상황이라 떠나간 청년들을 다시 불러 모아야 했다. 이렇게 치즈 생산에 성공하자 당시 농림부 장관에게 식품공장 설립 허가를 요청했으나, 장관은 치즈 사업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해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임실 치즈는 한동안 무허가 시설에서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제대로 된 치즈 공장도 없던 시절에 임실 치즈는 서울의 특급 호텔에 납품될 정도로 유통망을 넓혀갔다.[9] 후에 지 신부는 이 치즈 공장의 운영권, 소유권을 모두 주민협동조합에 넘겼다.

지 신부는 한국의 민주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유신체제에 항거하여,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저항운동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 시위 중에 체포되어 국외 추방 위기까지 갔으나, 당시 외신의 눈과 치즈 산업 육성에 이바지한 그의 공적을 인정했는지 추방 명령은 집행되지 않고 경찰에게 감시받으며 사는 정도로 끝났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는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에 제공할 우유를 차에 싣고 홀로 광주에 갔다가 참상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피로 누적 탓인지 1970년대부터 지 신부의 오른쪽 다리에 다발경화증이 발병했다. 몸의 신경을 조금씩 마비시키는 병 탓에 결국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3년간 고국 벨기에로 돌아가 휴양 겸 치료를 받고, 1984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인 '무지개 가족'을 전주 인후동에 설립하였다.[10]지 신부는 "내가 아프게 되었으니 이제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질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2004년 일선 사목에서 은퇴해 후임 신부에게 물려준 후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해 선종 때까지 운영하였다. 2016년에는 한국의 치즈 산업 발전과 민주화 기여 등 그간의 공로를 인정하여 정부가 대한민국 국적을 특별 부여했다.

이후 2019년 4월 13일 오전에 숙환으로 선종했다. 향년 87세. ‘임실 치즈 아버지’ 지정환 신부 숙환으로 13일 별세, 임실치즈 만든 지정환 신부, 선종 순간까지 치즈 걱정.

선종 이틀 후인 4월 15일, 어려운 시절 한국 치즈 산업을 태생시켜 임실을 치즈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지정환 신부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장지는 전주시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있다.

3. 여담

한국에서 50년을 넘게 생활했기 때문에 한국어를 그것도 전라도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2018년 8월에 경향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하러 가서 신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다른 차가 깜빡이를 켜지 않고 옆차선에서 불쑥 들어오자 “저런 썩을 눔”이라며 호통을 쳤다고. 스스로를 시골놈으로 칭하기도 했다.

한국어에 서툴렀던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신부가 버스를 탔는데, 외국인이 드물었던 시절이라 같은 버스에 탄 시골 영감님이 호기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러다가 영감님이 "장개(장가의 사투리)는 갔나?"라고 물었는데 마침 신부가 장계면이란 동네에 가본 적이 있어서 "4번 가봤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감님은 신부를 몹쓸 인간 취급하며 화를 냈다고 한다.

다발성신경경화증에 걸렸지만, 노환이 심해지기 전까지 날마다 3천보씩 목발을 짚고 걷는 연습을 했었다. 중증 장애인을 위해 본인이 건립한 무지개 가족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비장애인도 미사 내내 앉아서 있게 하는데, 이는 장애인들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11] 말년에는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에 활동했던 신부들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해 편찬하는 작업을 했다.

언론에서 본인을 영웅화하는게 싫어 인터뷰를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앙일보에서는 설득 끝에 이메일을 통해서 간신히 몇가지 문답만 주고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다만 아예 안한건 아니라, 조선일보에서 성공한 인터뷰 기사나 후술하는 경향신문 인터뷰도 있긴 있다.

피자 프랜차이즈 중 '지정환임실치즈피자' 라는 지정환 신부의 얼굴을 내걸고 홍보하는 업체가 있는데, 말 그대로 얼굴과 이름만을 빌린 수준이다. 원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설득 끝에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임실치즈가 잘 되면서 피자 브랜드까지 생겼어요. 그러다 나한테 와서 얼굴과 이름을 빌려달래요. 난 성직자일 뿐인데 무슨 사업이냐고 반대하다 피자가 잘 팔리면 임실치즈 소비에도 도움이 된다는 설득에 나중에 마음을 바꿨어요. 체인이 우후죽순 생기고 장사가 잘 되다보니 이권을 놓고 싸움이 벌어졌어요. 내가 이름 사용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야단법석 통에 괴롭더라고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변호사와 당사자들을 불러놓고 내 이름을 사용할 거면 사용료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매달 130만원씩, 5년 전부터는 매달 250만원씩 받는 돈이 장학재단에 큰 보탬이 됐습니다.”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 중에서 발췌
그러나 이 업체는 지정환 신부의 선의에 결국 먹칠을 하고 말았다. 임실 치즈 문서 참조.

생전인 2018년에 본인의 장례식에서 노사연의 노래 '만남'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훗날 노사연이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이 이야기가 첫 문제로 출제되었고, 지정환 신부의 관이 운구될 때 모든 사람들이 만남을 부르는 자료영상을 보고 깜짝 놀란 노사연은 "(만약 그때 내가 저 사실을)알았으면 갔었을 거야, 버선발로 달려가서 마지막을 함께 했을 텐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


[1] 본래 이름인 디디에에서 성(姓)인 지, 이름을 지어준 김이환 스테파노 신부(당시 전주교구 총대리, 1980년대에 환속하였다)의 이름으로부터 환을 따왔고, 정의가 환하게 빛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훗날 지정환 신부는 자신의 이름을 설명할 때 "의가 히 빛날 때까지 한다"는 뜻이라고 약간 각색하였고, 그게 실제로 언론에 타기도 했다.[2] 이름인 디디에는 프랑스어식이고 성인 엇세르스테번스는 네덜란드어식이다.(t'는 네덜란드어 정관사 het을 축약한 형태의 튀센부흐설이며 통상적으로는 't로 쓴다.) 벨기에의 네덜란드계 주민들은 이름은 프랑스어식이면서 성은 네덜란드어식인 경우가 많다. 벨기에와 접경국인 룩셈부르크의 독일계 주민들이 이름은 프랑스어식이면서 성은 독일어식인 것과 비슷한 사례이다.[3] 디디에(Didier)는 데시데리우스(Desiderius)의 프랑스어식 표기이다. 한국 천주교 교계에서는 데시데리오로 쓰이지만 스스로는 디디에를 한국어 세례명으로 썼다.[4]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5] 다만 사제독신제를 명시하고 있는 보편교회법에 따라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므로 지정환 신부가 선종한 현 시점에서 임실 지씨는 대가 끊어졌다.[6] 다른 교구의 신부로부터 받은 산양 2마리였다.[7] 그런데 정작 신부 본인은 어려서부터 치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정환 신부의 아버지는 아들이 치즈 산업을 위해 돈을 지원해달라고 하자 "치즈를 싫어하는 네가 무슨 치즈를 만든다는 거냐?" 하고 황당해했다고 한다. 돈 벌어서 다른 거 사먹으면 되잖아요[8] 냉전기 이탈리아 정치는 가톨릭계 우익 기독교민주당-좌익 이탈리아 공산당-중도 이탈리아 사회당 3축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공산주의 세력은 가톨릭 교회와 사제 계급의 영향력에 비판적이고 가톨릭 사제들도 공산주의를 좋아할 이유가 별로 없다.[9] 조선호텔(현 웨스틴 조선 서울)에 납품되어 평가가 좋자 서울의 다른 호텔에도 납품하기 시작했다.[10] 전주 인후동 쌍용아파트에 설립하여 1988년에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11] 미사에서는 복음을 읽는 부분이라든지 중요한 부분에서는 서서 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