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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 이 식민지 조선을 공업지대로 활용하기 위해 한반도 북부, '북선(北鮮)'지역에 실시한 공업화 정책 사업. ‘북선개발’이라고도 불린다.2. 북선(北鮮)이란?
용어 ‘북선(北鮮)’은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용어로, 주로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함경도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경우에 따라 평안남북도와 강원도를 모두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후자의 목적으로 사용된 케이스는 일제시기 발행된 신문의 지방판으로 통상 북선판과 남선판의 2개의 지방판이 발행되곤 했다. 조선 시대 용례로 동북면(東北面), 관북(關北) 혹은 북도(北道)라는 용어도 있었다.
3. 상세
3.1. 1910~1920년대 초반기
북선, 즉 함경도는 조선 왕실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변방으로 상대적으로 도외시되던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초기, 즉 1910~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다르지 않아서 이 당시까지 북선의 주요 산업은 어업과 농업, 축산업 등 1차 산업 위주였다. 하지만 각종 지하자원과 산림자원이 풍족해 개발 잠재력이 높아 ‘개척의 땅’이라는 인식을 당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지역이었다.이런 풍족한 지하자원과 산림자원을 두고도 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열악한 북선 지역의 교통 상황 때문이었다. 북선 지역을 공업지대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교통 문제 해결이 필수라는 것이 당시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당시 북선지역의 철도, 도로 등 교통 시설 자체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철도의 경우 경성과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선이 1914년 개통되었고, 그 이북으로도 동해안을 따라 함흥-성진-청진을 거쳐 만주까지 연결하는 함경선이 착공하였다. 또, 지역 개발을 위한 시책을 총독부 당국에 요구하는 움직임 또한 있었다. 1920년대 초 원산상업회의소를 기반으로 북선상공연합회를 개최하여 ‘북선’ 지역 일대에 대한 요구 사항을 총독부 당국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아직 부족한 수준이지만 교통망이 점차 구축되어 감에 따라, 북선 지역의 경제성을 감지한 당시 회사들의 북선 진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경우 1912년 원산지점을 설치하여 북선에서의 사업을 실시한다.
1910~1920년대 초는 북선개척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 ‘개척’의 땅으로써 당대 사람들에게 공론화되였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3.2. 1920년대 후반기
1924년 6월, 일본에서는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출범하였고, 시모오카 주지(下岡忠治)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개발정책인 ‘산업제일주의’라는 일종의 슬로건을 주창한다. 이 슬로건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시모오카 정무총감은 북선지역에 주목한다.시모오카 역시 북선지역을 두고 개발의 필요성을 인지하였는데, 시모오카는 앞선 총독부 관계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슬로건인 ‘산업제일주의’를 북선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재정난을 겪더라도 북선개발에 예산을 쏟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기도 하였지만, 뒤에 후술하겠으나 조선사업공채[2]의 삭감 움직임과 맞물려 이를 곧바로 실현시키지는 못하였다. 물자 수송이 철도와 항만 설비 부족으로 인하여 여전히 한계가 있었던 점 또한 북선개발을 즉시 시행할 수 없었던 원인이었다.
시모오카가 1925년 급사한 뒤 후임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유아사 구라헤이(湯浅倉平) 또한 ‘산업제일주의’를 계승하여, 동시에 함경도 지역의 수력발전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마침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공업이 발달하던 시기라 일본 당국의 전력수요가 급증하고 있었고, 북선 지역의 전력 생산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는 1925년 부전강에서, 장진강전력주식회사는 1926년 장진강에서 각각 수력발전소 건설권을 허가받게 된다. 이때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는 부전강 수력 개발 사업을 위해 조선수전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되고, 1931년 제1발전소를 완공하여 이때부터 수력발전이 시작되었다. 후술하겠으나, 이것이 1930년대에 구체적으로 진행된 “북선개발”의 원동력이 된다.
지속적으로 지적받은 교통 문제 또한 구체적인 정책 단위로 관심을 받게 된다. 1927년 시행된 조선철도12년계획의 5개 신설 구간 중 만포선, 도문선, 혜산선, 동해선 북부 구간이 조선 북부에 해당하는 노선인 점을 통해 북선지역의 철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910~1920년대 초 착공한 함경선이 1928년 원산-회령간 전 구간 개통되기도 하였다. 길회선 종단항을 둘러싼 청진, 웅기, 나진항 사이의 경쟁 구도 또한 북선지역의 개발 열기를 촉진하였다. 당시 북선 지역은 투자가 등한시되던 곳이었는데 함경선이 개통됨에 따라 식산은행이 북선지역에 대한 대출 비중을 늘렸고, 조선총독부에서도 북선지역에 대한 농림업 차원의 조사를 진행하는 등 북선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3.3. 1930년대
1931년, 우가키 가즈시게가 신임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우가키는 조선의 공업화를 통해 일본 제국 내지-식민지 조선-일본의 세력권인 만주를 하나의 경제블록으로 묶으려는 ‘일선만(日鮮滿)블록’ 정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일본 민간자본의 유치를 통해 조선을 공업지대로 만들고자 하였다.한편 같은 해인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으로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감행하게 되는데, 지역인 북선지역은 일본 제국 내지와 만주를 지리적으로 잇는 길목이기 때문에 만주사변 이후 북선지역에 대한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만주사변은 조선총독부, 특히 우가키의 일선만블록 정책 구상을 더욱 앞당기게 된다. 만주에 주둔하여 실질적으로 만주국을 지배하는 관동군의 수송문제와 맞물려 만주, 북선지역에 대한 교통 문제 해결은 일본 제국 차원의 사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만주사변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북선개척사업을 촉진하게 되었고, 1932년 공식적으로 ‘북선개척사업’이라는 이름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북선개척사업은 먼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개마고원 일대의 원시림을 개발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한편, 당시 조선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던 조선 남부의 과잉 인구를 조선 북부로 이주시켜 장기적으로는 일본 내 실업자 문제까지 해결하는 것을 꾀하기도 하였다. 일본 내 실업자 문제는 아래 후술.
북선지역의 교통 문제를 더욱 해결하기 위해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우선적인 개발이 진행되었다. 조선철도12년계획의 경우 남부 지역보다 북부 지역 철도가 먼저 시공되었고, 북선지역의 원시림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북선척식도로, 북선척식철도 건설이 이루어졌다.
한편, 이 과정에서 길회선 종단항을 두고 청진, 웅기, 나진항이 1920년대 후반부터 경합하였는데, 일본 육/해군과 조선총독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사이의 협의 끝에 일본 육군의 의사에 따라 종단항이 나진으로 결정되었다. (조선과 관련 있는 사람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음에 주목하자.) 하지만 이러한 경합 과정을 통해 북선지역의 토지투기열이 상승하는 등 결과적으로 북선지역의 개발 자체는 촉진되는 계기가 되었다.
3.4. 전시 총동원 시기
1936년 우가키 가즈시게의 후임 조선총독으로 미나미 지로가 부임하였다. 우기키와 마찬가지로 미나미 또한 북선지역에 기초한 조선 공업화를 핵심 사안으로 생각한 인물이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본이 전시 총동원 체제에 들어가면서 북선지역이 대륙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핵심 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그 결과 일본 대자본이 북선지역에 진출하는 비율이 늘어나며 설립된 공장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므로 이 시기는 북선지역의 공업화가 촉진된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대륙병참기지로서의 북선지역의 역할과 맞물려 대체로 전시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중화학공업, 군수공업 위주로 발달하였다. 북선지역에 설립된 공장의 수도 늘어나면서 공업화가 이루어지니 북선지역에서의 공산액 (공업을 통해 생산된 물품의 가격 총액) 또한 조선 내 타 지역에 비해 급격히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액의 구체적인 추이는 아래 표 참조.
[3]
한편, 공업화와 더불어 이 시기에는 개마고원으로 대표되는 북선의 고지대를 농업 및 목축업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고지대개발’ 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전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밭농사를 증산하려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를 위해 한반도 남쪽의 농가들을 북쪽으로 이주시키고 이들에게 진보한 농법을 가르치는 것을 도모하였다. 정책의 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강제성이 보이는 사업으로, 사업의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남쪽의 농민 중 일부를 추출하여 북선으로 이주시키겠다’는 발상 자체가 지극히 ‘하이 모더니즘’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4. 영향
4.1. ‘암흑지‘ 북선의 공업화 성공
1910~1920년대만 하더라도 북선지역을 공업화 지역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암흑지‘에 가까웠던 북선지역을 공업화 지역으로 발전시킨 것 자체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철도 부설과 항구 연결과 같이 과거에는 열악했던 교통 상황을 개선한 부분이 일제강점기 조선의 근대화에 있어 아주 무관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일본 제국 차원에서 ’북선‘ 의 위상을 조선 개발의 중심지로 변화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북한의 전쟁 준비에 공업화된 북선지역이 토대가 되어 주었던 것 또한 북선지역의 공업화가 유의미하게 일어났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4.2. 일본 본토의 실업자 문제 해결
일제강점기 당시 식민지 조선의 과잉인구가 일자리를 찾아 일본 내지로 도항하였는데, 이러한 상황과 전세계적인 대공황이 겹치며 일본 내지에서 많은 실업자가 발생하였다. 일본으로 도항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실제로 일본 내지 노동시장에서 일본인의 일자리를 뺏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의 과잉인구를 북선지역으로 이주시키고자 하였던 것이 북선개척사업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4.3. 중국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
일제는 북선지역을 포함한 조선 북부 지역의 교통망을 정리하고, 공장을 지어 자원 개발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선 3항(나진, 웅기, 청진])을 철도로 만주까지 연결하여 일본-조선-만주로 이어지는 물자 운송체계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조선 북부 지역의 교통 상황을 개선한 이유에는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고 이를 통해 조선을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고자 했던 일제의 생각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5. 논쟁 및 비판
5.1. 조선인에 대한 강제적, 폭력적인 성격의 사업
길회선 철도 종단항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북선개발은 당대 조선인과 지역사회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하향식 개발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육/해군과 조선총독부, 만철 사이의 협의 끝에 일본 육군의 의사에 따라 의사가 결정되었던 점은 곧 조선 지역사회, 조선인 의사는 이들에게 있어서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요인으로 생각한다고밖에 볼 수 없다.또한 북선개발의 방해요인이었던 화전민에 대한 탄압과 북선지역으로의 강제이주와 같이 공동체의 입장에서 지속가능하지 않은 강제적인 개발이었던 점 또한 비판의 여지가 있다. 화전을 정리하는 것 자체는 삼림 소실과 토사 유출로 인하여 생긴 피해를 막고자 한다고 하였으나, 화전민 발생을 근본적으로 막는 대책을 제시하지 않았던 점을 주목해 보면 결코 공동체에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5.2. 남북 불균형 발전: 6.25 전쟁 촉진
북선지역을 공업화, 병참기지화하기 위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일제는 자원이 풍부하고 만주와 가까운 한반도 북부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였다. 실제로 북선지역은 교통 문제도 이전에 비해 해소되었고, 공업화에도 성공하였다. 이후 한반도가 해방이 되고 이후 남북으로 분단되었을 때 북한은 상대적으로 일제의 개발 사업이 우선적으로 진행된 영토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북선지역에 설립된 많은 공장들과 교통수단은 결국, 북한이 남침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겠다. 공간적으로 불균형한, 제국의 이익만을 위한 발전이 결국 공동체에 지속가능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 제국으로 인하여 한반도가 설령 근대화라는 길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졌고 일제강점기를 통한 발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6.25 전쟁이라는 큰 피해를 통해 근대화의 혜택으로부터 단절되게 되어 그 의미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5.3. 식민지 근대화론: 조선을 위한 사업인가?
북선개척사업을 비롯한 조선에 대한 근대화 정책을 일제가 실시하면서, 지금까지도 제시되는 대표적인 주장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근대화'라는 소위 당시 세계적인 ’메타‘에서 다소 밀려나 있던 조선을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도록, 제국의 위상을 가진 일본이 기꺼이 이끌었다는 주장이다. 쉽게 표현하면 북선개척사업을 비롯한 모든 사업은 결국 조선을 위한 사업이었다는 주장이다.철도 설립과 같이 북선개척사업의 결과를 해방 이후 조선이 아예 활용할 수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일제의 ’의도‘에서만큼은 결코 조선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일제의 이익을 위한 사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근거가 있겠으나, 북선개척사업이 이루어질 당시 조선총독부의 예산편셩을 통해 일제의 의도를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 말 ~ 1930년대 초, 세계 대공황과 만주사변 등 일제의 입장에서 경제적 위기가 될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이 겹치면서 일본 정부는 긴축기조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근대화 정책을 집행에 필요한 예산인 조선사업공채를 적극적으로 삭감하였다. 구체적으로 철도 부설, 염전 확장, 북선개척사업 등이 재원인 조선사업공채 발행에 차질이 빚어짐에 따라 타격을 입은 사업인데, 만주사변을 위한 군사공채 발행을 위해 조선사업공채 발행을 삭감한 것이다. 이미 차지한 식민지를 근대화하는 것보다 군대를 확충하고 제국을 확장하는 것이 우선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사업공채 삭감에 따라 타격을 입은 사업 중 철도 부설과 북선개척사업은 사업비가 전액 삭감된 다른 사업들(염전확장 등)에 비해서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북선개척사업 또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예산 자체가 완전히 삭감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공채가 발행된 구체적인 정황을 보면 사업 운영에 있어 큰 차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도 부설과 같이 다년 계획을 통한 예산 운용이 필수적인 사업에 대해서도 일본 당국은 1년 단발성으로만 공채를 발행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매년 예산을 재검토받아야만 사업을 완성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고 이는 곧 사업의 장기적 안정성이 취약해진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사업공채의 발행 목적은 '사업에 필요한 대규모 자금을 장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총독부에서 사업 진행을 위해 15년간 6600만 엔을 요구하였음에도, 일본 정부는 2700~3000만엔을 배정하고, 그마저도 1년마다 단발성으로 조금씩 예산이 유동적으로 떨어져 나오게 하였는데 이러한 사업을 지속가능한 사업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분명 무리가 있다.[4]
조선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기에는, 이 사업의 장기지속 및 안정성을 전혀 보장하지 않는 표면적인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여 제국을 확장시키는 것과 더불어 일본의 자국 정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식민지 인프라를 기꺼이 개발해주는 것보다 명백히 우선순위에 있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었다. 북선을 개발하려는 의도 또한 조선의 병참기지화를 통한 중국 대륙 침략이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북선개척사업에 대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는, 적어도 이 사업은 조선을 위한 사업은 아니었다는 반론을 제시할 수 있겠다.
5.4. 대중메체에서의 북선개척사업
만주 이주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에 비해 북선개척사업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은 그 수가 상대적으로 작다. 하지만 몇몇 문학 작품을 통해, 당시 문학인들이 북선개척사업의 이면적인 부분을 비판하고자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애초에 북선개척사업 자체가, 일제가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실시한 사업이기 때문에 만주 이주 문제와도 유사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5]함경선 철도공사를 소재로 한 김기림의 소설 <철도연선>은, 함경북도 성진역에서 영안역으로 가는 기차에 탄 한 승객이 다른 승객에게 한창 함경선을 부설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형 구조의 소설이다. 함경선 부설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비유하며, 함경선 역시 원활한 물자 수송 및 신속한 군대 이동을 위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함경선 주변에 있었던 모든 환경을 수탈하고 파괴하여 결국 기존의 전통 공동체를 강제로 와해하는 것은, 조선과 만주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설 속 ’박존‘ 가족에게 있었던 비극을 철도부설과 관련된 모순과 직접적으로 연결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공동체를 잃어버린 개인의 안타까운 감정은 짙게 묻어나고 있지만, 일제의 사업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는 논리적으로 비판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석훈의 소설 <이주민 열차>는 당시 화전민이 된 몰락 농민이 다시 북선지역으로 이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제의 농민 수탈로 인하여 화전민이 증가하였고 일제는 화전민의 이주 대책을 수립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화전민 발생을 막는 대책은 제시하지 않고, 이러한 과정에서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조선인 개인이었음을 지적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작품의 논리상 수용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당시 상황의 근본적인 모순을 파악하려는 부분이 없었던 점, 이 작품이 일본어로 먼저 발표되었던 점을 근거로 이 작품을 비판하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박화성의 <고향 없는 사람들>은 북선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개척사를 다루고 있는데, 평안남도 강서 동척농장으로 이주한 가족의 이야기를 토속 사투리 등을 활용하여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당시 척식회사가 이주민들을 착취한 개별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묘사하는 반면, 농민 이주의 근본 원인이 자연재해 때문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는 한계가 드러난다.
[1] 휴전선 이북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행정구역이다. 원산 같은 지역이 함경도였으며, 후창군은 평안도였다. 이는 북한에서 현재 쓰는 함경도 일대의 행정구역과 다르다. 분단 이전에 대한 정보가 줄어들면서 북한 행정구역을 이 당시에 적용하는 오류가 있는데 북한 쪽이 오히려 분단 후 행정구역을 급격히 바꾼 것이다.[2] 조선사업공채의 정확한 법적 정의를 찾기 위해서는 조선사업공채법 조선총독부법률 제62호 1조 참조.[3] 고태우. (2020). 식민지기 ‘북선개발(北鮮開發)’ 인식과 정책의 추이. 한국문화, 89, pp.189.[4] 박우현. (2023). 1930년대 전반 조선총독부 예산편성과 인프라 투자의 단기화 -1932년 조선사업공채 발행예산을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91, pp. 273-274[5] 아래 언급된 3가지 소설의 구체적인 줄거리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 참조: 이정은, (2014), 일제의 북선개척사업과 당대 소설의 대응 양상, 현대소설연구 57, pp. 354-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