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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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는 식민 지배 하의 최고 통치 기구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입법·사법·행정권과 군 통수권을 포함한 절대 권력을 가지는 조선 총독에는 육·해군 대장이 임명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헌병 경찰제를 실시하여 한국인의 저항을 막고 자유를 억압하였으며 전근대적 형벌인 태형을 부활시켜 한국인에게만 적용하였다. 또한 조선교육령을 제정하여 일제의 식민 지배에 순응하는 한국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헌병경찰제도(憲兵警察制度)는 1910년대 일제강점기 무단 통치기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경찰 제도이다.
2. 내용
말 그대로 일본 제국 육군 헌병이 민간에 대한 경찰 업무도 수행하는 제도다. 유래는 프랑스 국가헌병대로 본토에서 자치경찰이 일반치안을 담당하나 특별히 치안이 곤란하거나 중앙정부가 담당하는 공안사건, 또는 경찰만으로는 부족한 테러•폭동진압등을 처리하는 국가경찰로 기능했다. 현대에 대입하면 헌병+방첩사+SWAT+정보경찰 정도이며 일본또한 프랑스처럼 본토에서도 헌병이 일부 경찰사무도 담당했으나 식민지 조선에 시행한 헌병경찰제도와의 차이는 일반치안도 담당했고 본토와 달리 광범위한 자율권을 부여하였다. 일본입장에서는 식민지 정책방침에 가까운 것.일본은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후 한국에 대한 식민지통치기구로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그 지휘자로 조선총독을 두어 식민지통치를 담당하게 하였다. 총독은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법·사법 및 군대(이른바 ‘조선군’)통수권까지 가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을 반드시 육군·해군 대장으로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한국을 일본군부의 지배하에 두고, 군사방식에 의한 무단 통치를 자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에 대한 식민지통치에 있어서 ‘법률’이 필요한 부문도 총독의 ‘명령’으로 행하도록 하였으며, 이것은 동서고금에 없는 특별권한이므로 총독의 법률효과를 가진 명령에 특별히 ‘제령(制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제는 조선총독에게 한국인의 모든 생사여탈을 자의로 결정할 수 있는 특별권한을 주어 한국인의 독립운동 등 저항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탄압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설령 명목상의 법률이 부분적으로 있었다고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법률에 의하여 통치된 법치지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군왕보다도 전제적인 조선총독의 명령(제령)에 의하여 전제·파쇼적으로 지배되고, 자의적으로 탄압된 특수지역이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부서로서 처음에는 6부를 두고, 그 밑에 6국 6과를 두었다가 이를 대폭증설하고, 지방행정조직을 개편하였다. 1911년 3월 조선총독부의 관리수는 1만 5115명이었다.
이 관리 중 한국인은 극소수로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며, 특히 고급관리는 그러하였다. 그것은 일제가 프랑스의 직접지배원칙을 채택하여 「조선총독부관제 조선인관계규칙」에서 한국인의 관리임용을 극도로 제한한 정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일제는 한국인에 대하여 생사여탈권을 쥔 조선총독 밑에 1만 5000여명의 일본인 관리들을 거미줄같이 늘어놓아 식민지통치의 행정조직을 편성한 것이었다.
또한 ‘무단 통치’라 하여 1910년 9월 10일 헌병경찰제도를 창설하였다. 헌병경찰제도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제도로서 헌병으로 하여금 일반국민에 대한 경찰행정을 담당하게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에 의하여 육군 헌병은 한국의 민간인에 대한 경찰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일본 육군 헌병은 육해군 장병 및 군속 뿐 아니라 내지 민간인에 대한 치안 업무도 맡았기에 이를 조선에도 적용한 것이다.
또한 일반경찰도 헌병제도와 결합하여 한국의 민간인을 군사적 방식으로 사찰하게 되었다. 이 헌병경찰제도에 의하여 일본 헌병사령관이 중앙의 경무총장이 되고, 각도의 헌병대장이 해당 도의 경무부장이 되었으며, 위관(尉官)이 경찰서장,경시(警視), 하사관이 경부(警部), 사병이 순사(巡査)의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였다.
물론 일제의 헌병경찰제도에 의하여 종래의 경찰제도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경찰제도는 그대로 남아서 군사적으로 지휘 관리되는 위에 다시 일제의 육군 헌병이 일반경찰직무를 수행하도록 개편된 것이었다. 1911년 일제의 헌병기관수는 935개소에 7,749명이었다. 한편, 1911년 일반 경찰관서는 667개소였으며, 일반경찰수는 6,222명이었다.
즉, 일제강점 후인 1911년의 헌병경찰관서수는 모두 1,602개소였으며 헌병경찰의 총수는 1만3971명에 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헌병경찰관서와 헌병경찰을 전국 각지에 조선총독부 행정조직과 함께 거미줄같이 늘어놓아 한국인을 탄압하는 무력조직을 편성한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헌병경찰제도에 의거하여 조선총독부의 행정관리에게도 그에 준하는 제복을 착용시키고 문관도를 대검(帶劍)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학교 교원들에게까지 제복과 함께 문관도를 착용하게 하여 한국인을 처음부터 무력과 폭력으로 탄압하였다.
2.1. 헌병경찰의 특권과 태형제도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여 헌병경찰제를 만들고 무단탄압체제를 구축하고, 한국인을 완전무장해제시킨 다음 한국인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탄압하고 규제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에게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고 태형제도(笞刑制度)를 제정, 공포하였다. 일제는 1910년 12월 3일 총독의 제령 제10호로 「범죄즉결례」라는 것을 제정, 공포하였다.그 내용은 경찰서장 또는 각 지방 헌병대장은 ① 징역 3개월 이하, ② 벌금 100원 이하에 해당하는 처벌은 재판소의 재판 없이 판정하여 즉결로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그 처벌대상은 87개 조항이었는데 유언비어나 허보를 말하는 자로부터 전신주 부근에서 연을 날리는 자, 타인의 밭을 가로질러 건너는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상생활에 걸친 것이어서 해석에 따라 어떠한 언행이라도 헌병경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한국인을 불러다가 3개월까지의 징역이나 100원까지의 벌금을 재판 없이 즉결할 수 있었다.
1912년 3월에는 제령 제13호로서 이른바 「조선태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3개월 이하 징역이나 구류에 처할 자와 1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자는 헌병경찰이 필요에 의하여 형1일 또는 벌금 1원을 태1개로 환산하여 이를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일제가 「조선태형령」과 함께 제정한 「조선태형령 집행심득」에 의하면 ① 태는 대나무를 사용하여 만들 것, ② 기절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음수(飮水)를 설비할 것, ③ 수형자가 울고 부르짖을 경우에 대비하여 물에 적신 포(布)를 입에 물릴 것, ④ 사망자의 경우에는 그의 본적지 면장에게 통고할 것 등을 규정하고, 수형자를 형판에 엎드리게 한 뒤 두 팔과 두 다리를 형틀에 묶고 볼기를 벗겨 매질을 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이 야만적 제도를 만들면서 조선의 옛 제도를 부활하는 것이라고 뒤집어씌웠다. 조선왕조의 태형은 중범(重犯)에 대한 것이었는데도 야만적 형벌이라고 하여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하였는데, 일제는 경범(輕犯)과 일상생활에 관한 모든 것에 이를 즉결하는 새로운 야수적 탄압제도를 만든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인으로서 독립사상을 가졌거나 일본인에게 공손하지 않거나 헌병경찰의 기분에 거슬리기만 하여도 한국인을 연행하여 재판 없이 3개월까지 감옥에 처넣거나 하루에 30대까지의 야수적 태형을 예사로 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잔혹한 태형으로 말미암아 아무 죄도 없는 한국인 중에 사망자와 불구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농민들은 일제의 태형을 다른 어떠한 형벌보다도 싫어하고 무서워하였다. 왜냐하면, 극히 적은 수의 태형으로도 막심한 고통이 따를 뿐 아니라 귀가한 뒤에도 상처를 수개월간 치료해야 하므로 농삿일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태형을 당하면 생명을 잃거나 평생불구가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물론 징역 3개월을 원하였으나 이것도 수형자가 선택하지 못하고 헌병경찰이 결정하였다. 일제의 헌병경찰은 검사의 직무까지 대행하고 나아가서는 판사의 직무, 즉 사법부의 직무까지 대행하였으며, 그 집행방법까지 그들의 자의적 판단에 의하여 태형으로 집행함으로써 죄도 없이 인신의 사망과 불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한국은 일제의 헌병경찰에 의한 공포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인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떠한 트집을 잡혀 헌병경찰에 끌려가서 태형당하고 처벌을 당할 것인지 항상 불안에 떨었다. "순사 온다."는 말이 어린애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공포용어로 사용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사회는 일본군이 한 손에는 총검을, 다른 한 손에는 채찍(태)을 들어 한국인을 탄압, 학살, 착취하는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었다. 일본 헌병경찰의 총칼과 채찍 아래에서 한국인은 그저 지배자인 일본인의 노예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제의 강경책으로 쌓여있던 조선인들의 저항심리는 1919년 3.1 운동으로 대폭발을 일으켰고, 일본은 더 이상 무력에만 의지해서만은 조선을 통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는 3.1운동 외에도 그 여파로 벌어진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은 유혈 진압 때문에 당시 일제가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하는 중이기고 했고, 식민지 조선 뿐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온건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진행되던 무렵이라 강경파들의 입지가 좁아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총독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신임 조선 총독으로 해군 대장 사이토 마코토 제독이 부임하면서 일제는 문화 통치를 전면에 내세웠고, 헌병경찰제도는 폐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