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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農工竝進. 1930년대 일제가 조선반도에 기초공업을 보급하고, 이를 바탕으로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실시했던 정책2. 정의
농공병진 정책이란 농업과 공업을 다 같이 발전시키자는 일제의 정책이다.3. 배경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이 발생하자, 일제는 경제난 해결차원에서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일본과 조선, 만주를 잇는 이른바 ‘일선만(日鮮滿) 블록’의 경제권을 구축해나갔다. 또한, 식민지 및 점령지의 개발과 수탈 구조를 통제, 관리하여 효율적이고 자급적 경제 체제를 만들어가고자 하였다.[1]당시 조선은 1920년대부터 이어진 산미 증식 계획으로 식량 생산량 자체는 증대되었지만 그것이 농민들에게 자급적으로 제공되는 비중은 제한적이었으며, 많은 양이 헐값에 매입되어 전쟁을 위해 활용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애초에 전통적 농업 기술의 한계로 생산량은 제한적인데, 심지어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로 그나마의 식량 생산도 어렵게 된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1920년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농촌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거나 채무에 시달리게 되는 등 농촌 경제는 크게 타격을 받게 된다.
또한 당대 조선반도는 식민사관/민족사관 등 역사적 관점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농촌의 경제는 전통적인 농업 기반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생산 기술이나 공업화의 발전이 미비한 실정이었던 것 만큼은 조선반도가 처한 객관적 현실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6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는 조선 통치의 정강 중 하나로 ‘농공병진’을 주요 정책으로 제시한다.
4. 양면성
4.1. 긍정적 측면
- 농공병진 정책으로 공업이라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농민들의 불만과 경제적 불안정을 해소할 수 있었다. 무너진 농촌을 재건할 뿐만 아니라, 소작농의 노동력을 공업인력으로 빨아들이는 성과까지 거두면서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움으로써 (일제의 관점이지만) 통치 안정화와 병참기지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 공업 기반이 부실하던 조선반도 내의 산업 구조가 다각화되고 공업 기반이 확립되었다. 결과적으론 병참기지를 운영할 인력이 필요했던 것일지라도, 교육에 제한이 있었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초급 기술자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도 덩달아 자리잡을 수 있었다.이는 일본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대응하여 조선인 스스로 기술 인력을 양성하고자 했던 조선인 기술자들의 노력 덕분인데, 일제 또한 농공병진 정책에 조선인 기술자들을 어차피 양성해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조선인 주도의 기술교육 시설들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조선공업전습소, 경성공업고등학교 등 일제의 관립 기술교육 기관들과는 독자적 노선으로써 조선무선강습소[2], 숭실전문학교[3], 이화여자전문학교 산업과[4] 등 조선인 기술자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여 산업현장에 배출하는 교육기관들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 산업화를 위해 도로, 철도, 항만 등 기반 시설이 대대적으로 확충되어, 조선의 산업 활동과 물류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일본제국의 전쟁 성과와 그 전쟁 물자 생산 및 조달 효율성을 향상시키기 위함이었으나, 내륙 지방에서는 해산물을 접하기 힘들 정도로 비효율적이고 원시적이었던 조선 내 물류 네트워크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4.2. 부정적 측면
- 위에서 언급한 긍정적 측면이 얼마나 긍정적인가와 관계 없이,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제국과 전쟁을 위한 물자와 자원 생산에 초점이 맞춰진 정책이었다. 즉, 조선의 공업화는 조선인들의 일자리 마련이나 삶의 질 향상보다는 대부분 전쟁을 위해 수출되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었다는 의미적 한계가 있다.
- 공업화 과정에서 물자 생산 등 공업 시설에서의 기술자들의 대우는 상대적으로 나았으나, 도로, 철도 등 인프라 건설을 맡았던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으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단지 농업 기반의 사회에서 공업이라는 대안이 등장했을 뿐 단순노동 중심의 기존 소작농에게는 별다른 삶의 질 개선을 기대할 수는 없었던 환경이었던 것이다.
-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내지에서도 농촌 인구를 강제로 공업 지대로 이주시켜 노동력으로 투입되었는데, 휴식이나 안전장비 등이 갖춰지지 않은 채로 혹독한 작업 환경이 지속되어 노동자 권리 보호를 위한 노동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조선은 물론 일본인 노동자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 이러한 움직임을 철저히 탄압하여, 산업은 발전했을지라도 노동자들은 여전히 피폐한 삶을 겪었다.
- 대규모 공업 시설과 인프라가 건설되면서 조선의 자연환경이 훼손되었다. 이는 내지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공업기지로써의 병참기지화가 진행되던 일본 내지(본토)에서도 1939년 신문기사 등을 보면 내지에서도 아시오 광독 사건 등 광산 개발로 인한 수질 오염 등 자연의 보존을 도외시하고 모든 국토와 국민을 단지 전쟁을 위해 갈아넣는 문제가 꾸준히 지적되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지속가능성보다 전쟁에서의 성과에 매몰되어 있던 일제 군부와 전쟁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 조선 내에서도 공업화 및 인프라 확충은 항만, 철도와 광산, 채석장 등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시행되었다. 그로 인해 농촌의 인구가 공업 중심의 도시로 몰려 과밀화되고, 경제 구조가 다소 왜곡되는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지역 간 불균형 발전 문제는 뿌리깊은 산업화의 파생적 산물인 셈이다.
- 이 시기에 마련된 조선의 공업기반 시설들은 단지 일제의 병참기지로써 역할에 그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후 한국전쟁의 군사적 물자 생산 기반으로도 활용되었다. 당연하지만 기술에는 의지가 없으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인 셈이다.
5. 농공병진 정책의 변질
농공병진 정책은 실질적으로는 제국과 전쟁을 위한 것이었지만, 표면적으로라도 조선반도의 농민들의 일자리 제공과 산업기반 개혁을 내세웠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농공병진 정책은 본격적으로 병참기지화 정책으로써 변질되어버렸다.[5][1] 일제가 계획하던 경제개발론은 일본은 정밀공업지대, 조선은 기초공업지대, 만주는 농업·원료지대로 개발하는 분업적 개발론 이었다.[2] 광운대학교 전자공학대학의 모태[3] 숭실대학교 공과대학의 모태[4] 이화여자대학교 엘텍공과대학의 모태[5] 일제가 북선개척사업을 실시한 이유도 이와 같다.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