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7 03:15:38

김기림

<colbgcolor=#000><colcolor=#fff> 일제강점기의 시인
김기림
金起林 | Kim Girim
파일:김기림.jpg
출생 1908년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 276
(現 함경북도 김책시 림명리)[이북5도]
사망 미상[2]
사망지 미상
본관 선산 김씨
직업 시인

1. 개요2. 일생3. 문학세계4. 주요 작품5. 저서
5.1. 시집5.2. 기타
6. 미디어에서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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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시인이자, 비평가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본명은 김인손(金仁孫)이며 김기림은 필명이다. 아명은 김인손(金寅孫), 아호는 편석촌(片石村)이다. 최재서와 함께 대한민국 문학계에 모더니즘 이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활발하게 비평 및 시작 활동을 한 사람이다.

2. 일생

1908년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3]#의 양반 가정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지주 김병연(金丙淵)의 1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1년 서울 보성고보[4]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고 일본 도쿄 메이쿄 중학, 니혼대학 문학예술과를 거쳐 1929년 조선일보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6년 도호쿠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1939년에 졸업하였다.

김기림은 종래 1920년대 대한민국 시단을 지배하고 있던 내용 편향의 문학과 감상주의 문학의 지양을 외치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카프로 대변되는 계급문학과 백조파로 대변되는 감상적 낭만주의 시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시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림이 주장한 새로운 시는 건강하고 명랑한 '오전의 시'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근대적 감성을 담은 과학적 방법으로 쓰여진 시이다.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시는 기차, 비행기, 화물차 등의 근대적 사물을 다루면서 도시적 감각과 정서를 담은 근대성을 주된 정서로 다룬다. 또한 방법론적으로는 종래의 리듬 중시의 노래하는 시에서 벗어나 이미지와 의미, 음성 자질을 치밀하게 짜맞춘 과학적인 시이다. 문학사조론으로 볼 때는 차가운 이성을 강조하는 주지주의와 회화성을 강조하는 이미지즘의 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태준, 정지용 등의 모더니스트들과 함께 구인회 활동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시론, 평론 외에 실천적 창작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론가로서의 명성에 비해, 시의 문학적 성취는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 중에서는 정지용이 섬세한 언어 감각과 감정의 절제를 통한 생동감 있는 이미지의 창출로 가장 성공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방 이후는 모더니스트에서 일변하여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에 합류, 적극적인 현실 참여의 시를 쓰게 된다. 김기림뿐만 아니라 이태준, 정지용, 박태원 등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의 상당수가 좌익 계열로 돌아서는 게 인상적인데, 그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이미 조선공산당 불법화 및 카프 해산 등으로 이념성의 문학이 사실상 금지되었던 시기였으므로 사상과 관계없이 내면의 문학으로 침잠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렇다고 소련을 지지하는 시를 내세우지 않았고 김구와 같은 남북협상파에 가까웠다. 미국과 소련 모두 경계해야하고 하루 빨리 통일된 정부를 가져야 한다는 포지션.

1948년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이 미군정의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상당수의 인사들이 월북하는 가운데, 김기림은 결혼해서 자식과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처지라[5] 서울에 남아 대학 강단에서 시론을 강의하면서 후학 양성에 몰두해야 했다.

6.25 전쟁 발발 후 납북되었다. 이는 수필가 조경희가 부산에서 만난 김기림의 누나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김기림의 누나는 조경희를 붙들고 거리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조경희에 의하면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서 피난을 가지못한 김기림이 서울 사범대에서 회의를 마치고 을지로 방면으로 가던중 갑자기 지프차를 탄 2명의 남자(혹은 한명의 청년)가 찾아와서는 그를 서대문형무소로 끌고갔다고 한다. 이후 북한으로 납북되었다는것. 납북자들 대부분이 이후에라도 생사나 북한에서의 행적이 일부라도 확인되는 반면에 김기림은 아직까지도 생사가 확인되고 있지 않다. 일각에선 수감되어 있다가 인천 상륙 작전이후에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북으로 끌려가던중 사망한 이유로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게 아닌가라고 보고있다.

일부에서 그가 납북된게 아니라 월북한 게 아니냐는 주장을 펴지만, 남은 기록들과 여러 정황들로 봤을때 김기림이 자의로 월북했을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우선 김기림의 정치성향이 좌파적이긴 했으나 박헌영류의 남로당쪽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여운형좌우합작 노선 계열을 지지했다는 점이 꼽힌다. 이는 남로당과 조선문학가동맹이 불법화와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임화김남천은 월북했지만, 김기림은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남아 대학들에서 강의를 한 김기림의 행적을 통해서도 알수있는데 월북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남아있었단 점에서도 짐작할수 있다. 또한 자진 월북이라면 가족들을 안데려갈 이유가 없을텐데 가족들은 남겨두고 혼자갔다는 점, 북한에서의 행적은 물론 생사도 확인되지 않으며, 다른 월북문인들과는 달리 대접을 받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의 월북이 아닐것이라는 근거로 제시된다.#

김기림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설들만 남아있다. 우선 58년 간첩으로 체포된 북한군의 증언으로 북으로 끌려간 김기림이 정지용과 더불어 집필금지 명령을 받았다는 설이다. 이는 김기림이 해방이전 모더니즘 시를 썼는데 이런 모더니즘 시들이 북한 입장에선 퇴폐적으로 간주되어서 집필금지 명령을 받았단 것이다. 그러나 이 북한군의 증언은 정지용이 북으로 끌려가던중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게 유력한 정설로 받아들여지면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이 북한군이 김기림의 일은 정확하게 말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자의적으로 설명했거나 혹은 들은 확인되지 않은 풍문을 사실로 말한 게 아닌가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둘째는 김기림이 북한에 끌려가자마자 투옥되었는데 북한에 남아있던 친척들과 제자들,지인들이 탄원해서 풀려났다는 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석방된 김기림은 평양 극장의 말단직원으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던중 남편과 불화로 별거중이던 장내 아나운서와 사랑에 빠져서 연애를 했는데 이게 북한 당국에게 들켜서 자숙해야 할 사람이 연애질이나 한다면서 다시 재수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없다.

현재로선 김기림이 북으로 끌려가던중 정지용과 마찬가지로 폭격으로 사망한탓에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것이란게 가장 유력한 설명으로 보인다.

3. 문학세계

T. S. 엘리엇에게서 영향받아 주지주의 이미지즘 시를 주로 썼다. 동시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기교주의를 비판하며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전체시'의 창작을 주장하였다. 그의 초기 시들은 자신의 이론에 지나치게 충실하여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흩어져 있을 뿐 시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런 결점들은 착복되었다. 평론 면에서는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한국 시문학계의 한 전환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 주요 작품

5. 저서

5.1. 시집

《기상도》(장문사, 1936)
《태양의 풍속》(학예사, 1939)
《바다와 나비》(신문화연구소, 1946)
《새노래》(아문각, 1948) - 2019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인용한 "새나라송"이 실린 시집이다.

5.2. 기타

이론서《문학개론》(신문화연구소, 1946)
시론집《시론》(백양당, 1947)
수필집《바다와 육체》(평범사, 1948)
번역서《과학개론》(을유문화사, 1948)
시론집《학원과 정치》(수도문화사, 1950) 유진호, 최호진, 이건호 공저.
시연구서《시의 이해》(을유문화사, 1950)
이론서《문장론신강》(민중서관, 1950)

6. 미디어에서

1995년 시인 이상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금홍아 금홍아'에서 배우 박지일이 김기림 역을 맡아 연기했다.

Limbus Company에 김기림을 모티브로 한 이 등장한다.

7. 기타

1940년, 김기림은 한 설문[6]에서 20대 때 탐독했던 책으로 소설가 최서해의 『탈출기』(1925)를 꼽았으며[7], 30대 때 탐독했던 책으로 D.H.로렌스의 『아들과 연인』(Sons and Lovers, 1913)이라고 하였다.

평소에 김기림과 친한 사이였던 이상은 그의 유고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에서 '암만해도 성을 안 낼뿐더러 누구를 대하든 늘 좋은 낯으로 대하는 타입의 우수한 견본'이라고 김기림을 소개했다. 관련 기사

김기림은 1949년 이상의 작품들을 모아서 『이상선집』[8]을 출간했다. 이는 최초로 도서 형태로 간행된 이상의 작품 모음집이다. 여기서 김기림은 이상이라는 필명에 대해서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공사장의 한 인부가 실수로 그를 ‘이상(イさん)’ 하고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설명했다.[9]

일본에서 윤동주, 정지용에 이어 그의 대표작 바다와 나비의 시비(詩碑)가 그의 모교 도호쿠대학에 세워졌다. 관련 기사

[이북5도]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면 임명리 276[2] 한강 인도교 폭파일자인 1950년 6월 28일까지는 살아있던 것으로 보인다.[3] 소설가 최서해도 이 마을 출신이다.[4] '날개'로 유명한 이상보성고 출신이며, 둘은 같은 학교 동문이라 그런지 친분이 상당히 두터웠다.[5] 노천명과의 일화가 유명한데, 두 사람이 이어질 수 없던 이유는 김기림이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고 처음엔 노천명이 그를 사모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관계가 바뀌어 김기림이 매달리게 되었다고 한다.[6] 잡지 삼천리에서 한 당대 작가들 대상 '작품 애독' 관련 설문조사다.[7] 주지주의 문학의 대표주자이자 당대 알아주는 모더니스트인 김기림이 신경향파 문학을 탐독했다고 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게다가 최서해의 소설들은 프롤레타리아 문학답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데다가, 굉장히 극단적이고 투쟁적이다. 하지만 둘은 동향 선후배 사이였고 막역지우라 최서해가 말하길 '나는 김기림이의 시를 이해하면 한이 없겠는데 김기림의 시를 이해하지 못해서 항상 미안하다' 고 밝힌 적이 있었다.[8] 이상의 소설 3편, 시 22편, 수필 6편이 실렸다.[9] 하지만 이상의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이상은 그 이전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상'이라는 필명을 썼다. 본명은 김해경. 선집을 수록하는 중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