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14:12:14

김무영(야구)

파일:김무영사진.jpg
일본경제대학 야구부 No.
김무영
金無英
[1]
<colbgcolor=#088A08><colcolor=#fff> 출생 1985년 11월 22일 ([age(1985-11-22)]세)
부산직할시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대신초 - 부산대신중학교 - 하야토모고 - 일본경제대학[2]
포지션 중간 계투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08년 드래프트 6라운드 (소프트뱅크)
소속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9~2015)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16)
지도자 도치기 골든브레이브스 투수코치 (2017~2018)[3]
환태평양대학 야구부 코치 (2019~2023)
일본경제대학 수석코치 (2023~)
등장곡 MC 스나이퍼 - 민초의 난[4]

1. 개요2. 프로 이전3. 프로 경력4. 지도자 경력5. 연도별 주요 성적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했던 한국인 투수. 주로 중간계투로 나왔다.

2. 프로 이전

부산 대신중학교 시절부터 일본 고교야구에 관심[5]을 가져, 당초 예정된 경남고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 있는 하야토모 고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후쿠오카에 위치한 일본경제대학으로 진학했는데, 1학년 때만 해도 최고구속 140km/h를 넘지 못하는 평범한 투수였으나 방학 때 부산의 헬스클럽에서 체중과 근력을 대폭 증강시키며 구속도 향상되어 이후 최고구속 151km/h까지 던질 정도로 구속이 올라갔다. 그리하여 프로 스카우트들도 주목하는 투수가 되었지만, 4학년 때 어깨 부상으로 쉬는 바람에 결국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했다. 이후 시코쿠 규슈 아일랜드 리그의 후쿠오카 레드워블러스에서 NPB 신인왕 출신의 모리야마 료지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마무리로 활약하며 35시합 17세이브 방어율 0.41을 기록, 결국 지역 연고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에 드래프트 6위로 입단하게 되었다.[6]

신성현(前 히로시마 도요 카프, 고양 원더스, 두산 베어스)과 더불어, 일본에 야구 유학을 간 특이한 케이스. 또 고교와 대학을 일본에서 나온 관계로 NPB 룰에 의해[7] 외국인 선수로 간주하지 않는다.[8]

3. 프로 경력

2009년은 잔부상 등에 시달렸지만 1군 무대도 밟아봤고(비록 프로무대의 쓴맛을 보았지만) 2군에서 15.2이닝 2실점 평균자책점 1.15로 중계 및 마무리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2011년 후반기 1군에 등록되며 9경기 15.1이닝, 탈삼진 17개, ERA 2.35, WHIP 0.78의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참고로 2군 경기 성적은 29시합 40.1이닝, 탈삼진 44개, 방어율 0.22, WHIP 0.69.

2012년 개막을 1군에서 시작해 주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간계투로 등판했다. 그러다가 6월 23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전에서 3점 뒤진 8회에 등판해 1이닝 3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았고 이후 아카시 겐지와 혼다 유이치가 각각 동점과 역전 적시타를 쳐내 최종적으로 팀이 역전승을 거두면서 프로 데뷔 4년 만에 첫 승리를 거두었다.당시 경기 하이라이트 히어로 인터뷰를 한 것은 덤. 9월 20일까지 29경기 출전 1승 1패 3홀드 31.1이닝, 탈삼진 28개, 방어율 1.72, WHIP 1.21로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올렸다.

2013년에도 주로 중간계투로 출장, 23경기에 등판해 31.0 이닝, 방어율 3.48 WHIP 1.42 라는 작년보다는 좀 안좋은 기록을 남겼다. 2013년 9월 5일 닛폰햄과의 경기에서 프로 첫 선발등판을 했는데, 여기서 1 2/3이닝만에 6실점으로 무너진 탓이 컸다. 바로 전날 소프트뱅크와 니혼햄이 퍼시픽리그 역대 최장시간 경기(6시간 1분, NPB 기록은 1992년 한신-야쿠르트의 6시간 26분)을 치르면서 연장 12회를 치르는 동안 무려 10명의 투수를 소진한 탓에 급작스럽게 등판해야만, 했고 결국 좋지 못한 투구를 펼치며 아키야마 코지 감독에게 쓴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5월에는 마무리 투수 브라이언 팔켄보그가 상대 타자 머리에 던진 사구 때문에 바로 퇴장당하는 바람에 몸도 제대로 못 풀고 올라갔다 결승타를 맞고 진 경기도 있었고 추격조라는 보직을 감안해도 등판 타이밍에서는 다소 운이 없는 면이 없지 않았다.

2014년에는 4월 30일까지 5경기 출전, 5이닝 3피안타 1피홈런 1실점으로 평균자책점 1.80을 기록중이었으나 이후로 2군으로 내려갔다. 7월 중순에야 1군으로 복귀, 7월 16일 지바 롯데와의 경기에 구원등판해 5이닝을 던졌다. 복귀 후 7번째 등판이었던 8월 13일 라쿠텐전까지는 평균자책 0.54였으나(종합 12경기 16 2/3이닝 3실점 1자책) 이후 9월 17일까지 13번의 등판에서 부진을 보이며(15이닝 12실점 11자책) ERA가 3.41로 치솟은 상태. 결국 9월 17일 이후로 더 이상 등판하지 못한 가운데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시리즈 예비 엔트리에 들었지만 최종 엔트리(25인)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한국 나이로 30줄에 접어들지만 아직 병역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아내도 일본인이고 생활 터전도 일본인 터라 귀화에 관한 권유를 많이 받지만, 본인은 귀화할 생각은 없는 모양.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이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였지만, 일단 류중일 감독은 김무영을 대표로 뽑는 것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고 검증이 되지 않았다 며 난색을 표했다. #[9] 다만 국내에서도 눈에 띄는 우완 투수가 적은데다 일본 타자들을 많이 상대해 본 경험을 내세운다면 김무영에게도 기회는 올 것으로 보였으나, 예비 엔트리에는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아시안게임을 위해 시즌을 잠시 쉬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정상적으로 리그를 진행하기 때문에 애초에 선발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2015년에는 시즌을 앞두고 가벼운 부상이 있다는 소식이 나왔으며 이후 계속 2군에 머물고 있다. 일부에서는 부상, 병역 문제 등 여러 이유로 의욕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결국 10월 4일자로 전력 외 통보를 받으며 소프트뱅크에서 방출되었다. 2군 리그 성적은 17경기, 1패, 평균자책점 5.68(19이닝 13실점 12자책), 5피사사구 16탈삼진. 2015시즌 부진의 이유는 역시나 오른쪽 팔꿈치 통증 때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지에서는 병역 의무 때문인가 하는 의문이 팬들 사이에서 나왔는데 현역 속행을 원한다고 나왔기 때문에 다른 팀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게다가 3년 간 1군 불펜으로서의 실적이 있기 때문에 데려갈 팀이 있을 거라는 의견이 중론.

방출 이후로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라쿠텐에서 영입 의사를 타진 중이라는 소식이 나왔다. 그리고 라쿠텐의 마무리캠프에 합류, 입단테스트에서 합격통보를 받았다. # 등번호는 호크스 시절과 동일.

개막전 엔트리에는 들지 못한 채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가 3월 31일에 곧바로 1군 엔트리에 합류했다. 4월 3일 세이부전 두번째 투수로 등판,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무려 564일만의 등판이었다. 그러나 4월 9일 니혼햄전에 7번째 투수로 등판해 1이닝 1실점을 기록한 뒤 다음 날 2군으로 다시 내려갔다. 시즌 최종 성적은 1군 2경기, 1홀드, 평균자책점 4.50(2이닝 1실점), 1피안타(1피홈런) 1피사사구 1탈삼진, 2군 21경기, 1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6.38(18 1/3이닝 13실점), 22피안타(2피홈런) 7피사사구 13탈삼진. 시즌 초반 잠깐을 제외하고는 줄곧 2군에 있었던데다가 2군에서도 갈수록 성적이 나빠졌고 등판 간격도 점점 길어지는 등(마지막 2군 리그 등판이 9월 7일) 라쿠텐에서조차 자리를 잡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일본프로야구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결국 10월 1일자로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10]

나이가 서른이 넘은데다가 위에서 언급했듯 병역 미필이라 국내 복귀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은 낮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유예기간 2년을 적용받지 않지만, 생활 기반이 일본에 있는데다가 국내 야구에 대한 거부감(각주에서 언급한 구타 문제) 때문에 애초에 돌아올 마음이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러나 라쿠텐에서조차 자리잡지 못한 터라 일본에서도 계속 뛸 수 있을 지는 미지수.

결국 2016년 시즌 종료 후 31세의 나이에 은퇴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은퇴 후에는 트레이너로 제2의 인생을 도전한다는 언급을 했다.

4. 지도자 경력

2017년 1월 12일 독립리그 신생팀인 도치기 골든브레이브스의 투수 코치를 맡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병역 문제 해결에 대해서 별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일본에 완전히 정착하기로 한 듯. 그럴 만한 것이 이미 선수 시절에 일본인과 결혼까지 해서 아이까지 딸려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11]

KBO리그 2019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역대 최초 비선수출신 지명자로 화제가 된 한선태를 지도했다.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도치기 골든브레이브스에 입단한 한선태투구폼 교정부터 일상 생활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고 한다.

2019년 1월 17일 토치기의 코치직을 그만두고 환태평양대학 야구부 코치로 적을 옮겼다.[12]

2024년 6월 20일 소프트뱅크 소속 당시 동료였던 이대호의 유튜브에 출연하였다. 현재는 본인의 모교인 후쿠오카 경제대학교 야구부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고 한다. 목소리가 양상국과 닮았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9 소프트뱅크 1 1 0 0 0 0 9.00 1 1 1
2011 9 15⅓ 0 0 0 0 2.35 9 3 17
2012 29 31⅓ 1 1 0 3 1.72 31 7 28
2013 23 31 0 1 0 0 3.48 28 16 27
2014 25 31⅔ 1 0 0 2 3.41 28 8 23
2015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16 라쿠텐 2 2 0 0 0 1 4.50 1 1 1
NPB 통산
(6시즌)
89 112⅓ 2 2 0 6 2.88 98 36 97


[1] 일본 웹에 보면 金無 英(카네나시 히데)가 아니라는 드립이 있다(...). 물론 진짜 등록명은 金 無英(キム•ムヨン)이다.[2] 여담으로 2017 시즌부터 일본경제대학 출신 2차 1라운드 선수가 KBO 리그에서 선수로 있게 되었는데 바로 김성민이다.[3] 일본 독립리그인 BC리그 소속으로 2017년에 창단된 신생팀이다.[4] 선수시절 내내 이 곡만 썼다.[5] 고시엔에 나가고 싶어서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면서 이전에 알려졌던 선배들의 구타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얘기를 부정했지만, 일각에서는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부러 감추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일단 이런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해도 그런 걸 곧이곧대로 말하는 사람은 어지간히 원한을 품은 것이 이닌 한 없다. 어느 나라든 그렇지만 특히 동북아에서는 이런 말을 대놓고 하면 당한 사람도 같이 이미지가 나빠지기 때문.[6] 같은 드래프트에서 대학 2년 선배이자 구마모토의 사회인팀에서 뛰던 카츠키 료지가 지바 롯데에 6위로 지명받는 겹경사가 있었다. 이 둘은 일본경제대학 야구부 출신 최초의 프로 선수이다. 그리고 카츠키 료지 역시 김무영과 비슷한 커리어를 보여준 후에(오히려 김무영이 통산 커리어가 조금 더 좋았다) 2016년에 같이 잘렸다. 다만 카츠키 료지는 바로 은퇴하지 않고 구마모토의 사회인야구팀으로 돌아가서 몇 년 더 뛰고 은퇴. 여담으로 저 사회인야구팀이 슈퍼마켓 체인이라, 카츠키의 업무는 고로케 튀기기 였다고 한다. 쵸노 히사요시의 오뎅장수 드립과 비슷한 것인데 드립에 불과했던 쵸노와 다르게 정말 고로케 장사를 했다.[7] NPB에서는 외국인 국적 선수여도 9년 이상 일본프로야구에 재적했거나, 일본에 일정기간 거주 및 고교 대학 사회인야구에 재적인 경우 귀화하지 않았어도 일본인 선수로 취급해서 1군 용병 제한 명수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외에도 대표적으로 이 규정을 적용받은 케이스가 양다이강장이. 장이는 육성선수로 입단했으나, NPB의 경우 육성선수도 드래프트를 거쳐야 입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양다이강과 장이는 사촌관계로도 알려져 있다.[8] 참고로 KBO 또한 중학교 이상의 학교에서 재학 후 신인드래프트에 참여한 경우는 외국선수로 보지 않는다. 소소경장빈이 이에 해당하는 선수이다.[9] 객관적으로 2006년과 2008년 당시 메이저리그에서 A급 유망주였던 24~26세 추신수와 2014년에 NPB에서 1.5군급 성적을 낸 29세 김무영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후의 선수 커리어만 봐도 이는 충분히 증명이 되는 편.[10] 공교롭게도 카와모토 료헤이 등 2015 시즌 이후 동시에 라쿠텐의 입단테스트를 보고 동시에 합격했던 4명이 동시에 방출당했다.[11] 고등학교 때부터 유학을 시작해서 일본인과 결혼까지 했으면 일본 영주권이 있는 것이 확실한데, 이럴 경우 대한민국에서 6개월 이상 체류 혹은 2개월 이상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해외체류자 소집연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37세에 해당하는 2021년 12월 31일부로 전시근로역으로 편입됐을 것이다. 애초에 단순히 비자를 연장해가면서 일본에 체류해가는 것이라면 1986년생 미필은 2015~2017년 쯤 비자 연장이 불가능해서 강제귀국을 당했어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특별영주권이 있는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인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우에다 츠요시, 김무영처럼 일본인 아내가 있어 특별 영주권을 받은 축구선수 김민태도 군대에 안 가도 된다. 본인이 원한다면 한국에 입국해서 입대 신청을 할 수도 있겠지만.[12] 대학 야구부 중에선 냉정하게 약체지만 마타요시 카츠키를 배출해낸 성과도 있다. 지금은 독립 구단에서 뛰지만 소프트뱅크의 육성선수 지명을 거쳐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한때 주전 2루수까지 차지했던 카메자와 쿄헤이와 역시 지금은 독립 구단에서 뛰지만 2015년 세이부의 10라운드 지명을 받고 1군에서 4년간 30경기에 등판했던 마츠모토 나오아키(현재 큐슈 아지아리그 시모노세키 피닉스 팀의 감독 겸 선수다.)도 이 대학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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