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1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오하라 에이이치(大原榮一) |
이명 | 정락(鄭洛) |
본관 | 하동 정씨[1] |
출생 | 1908년[2] 4월 20일 |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하포리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5리) | |
사망 | 1971년 11월 11일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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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정칠성은 1908년 4월 20일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하포리(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왜관면 낙산리로 이주하여 이곳에 본적을 두기도 했다.# 왜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주로 신문배달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그는 1932년 왜관면에서 최소복(崔小福)·이석·이병기(李炳基)·김주석(金周錫) 등과 농민조합건설준비협의회를 조직하여 이 협의회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독서회를 결성·개최하는 한편 표면적으로는 칠곡군내 각지에 농민야학을 설치하면서 농민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상경하여 경성부 다옥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에 살다가 연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으로 재차 이주하여 살던 중 1933년 11월 13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기도경찰부에 검거되었으며#, 1935년 12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80일 산입)을 언도받아# 같은 달 23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36년 5월 23일에는 대전형무소에 이감되어 복역하였다.
1934년 6월 16일,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
1937년 6월 24일 출옥한 그는 침체된 칠곡지역의 농민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야학회나 독서회 등을 통하여 농민층의 대중적 기반을 확대해 갔다. 이 때 이들의 운동방침은 일제의 경계망을 피하기 위하여 농촌진흥조합이나 그 부속 야학회 등과 같은 어용조직에 들어가 농민을 의식적으로 계몽해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활동하던 중 1939년 가을에 다시 체포되어 1940년 한 해 동안 6차례 구류갱신이 결정되는 등# 2년 반 동안 미결수로서 고문당하다가 1941년 3월 7일에서야 대구지검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840일 통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71년 11월 11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2] 1934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11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