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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옥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구미시 CI.svg경상북도 구미시 출신/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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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병옥.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토모노키 헤이교쿠(友軒炳玉)
이명 장개돌(張介乭)
본관 상장군계 인동 장씨[1]
출생 1914년 8월 22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왜관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251)[2]
사망 1947년 8월 1일[3]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병옥은 1914년 8월 22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왜관동(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251번지에서 아버지 장필상(張泌相, 1873 ~ 1933. 1. 3)과 어머니 광주 이씨[4]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인동면 인의동(현 구미시 인의동) 642번지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고, 인동면 구평동(현 구미시 구평동)에서도 거주했다.

그는 1936년 6월 칠곡군에서 비밀결사 동지구락부(同志俱樂部)에 가입하여 구락부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동지구락부는 박용칠(朴容七)·장재성 등이 일본에서 결성한 재동경조선유학생연구회 및 일본공산당 인민전선파와 연계를 맺고 국내에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결성한 항일비밀결사였다. 그는 동지구락부에 가입하여 사회과학서적을 학습하고 민족의식과 일제의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취하다가 1938년 2월경 체포되었다.

1940년 3월 12일부터 그해 11월 18일까지 대구지방법원에서 그에게 5차례 구류갱신결정 처분을 내렸다. 이후 1941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의 예심에서 대구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미결 구류통산 본형 전부)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47년 8월 1일 이른 나이로 별세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남산파(南山派) 32세 병(炳) 항렬.#[2]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왜관면 왜관동 251번지가 본적이고 인동면 인의동 642번지는 주소지라고 한다.[3] 인동장씨대동보 권14 218쪽에는 8월 10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이상지(李相止)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