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4-07 00:52:23

이상백(1886)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상백
李相栢[1]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형사사건부에는 李相으로 기재되어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경주 이씨[2]
출생 1886년 8월 15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읍내면 진평동
(현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3]
사망 1965년 9월 17일
종교 기독교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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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상백은 1886년 8월 15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읍내면 진평동(현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인동교회의 목사였는데, 1919년 4월 7일 대구부 신정(현 중구 대신동)에 거주하는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그를 찾아왔다. 이영식은 일전에 있었던 대구 서문외(西門外) 시장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한 이 중 한 명으로서, 그날 이상백을 찾아와 독립선언서 20매를 보여주었다. 이상백은 독립선언서를 보고는 그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이상백은 자신의 집에서 이영식·이내성·이범성·이영래·임점석(林占錫)·임용섭(林龍燮)·박명언·권영해·허도언(許道彦) 등과 다시 만나,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고, 이들의 찬동을 받고는 3월 12일 오후 8시로 거사일을 정하고 사전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는 권용섭(權龍燮)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손으로 베껴서 제작하고, 3월 11일에는 자신의 집에서 이영식·이영래·임점석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2일 오후 8시, 인동면 진평동 뒷산기슭에 3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영식과 교대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곧 독립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이를 앞당기기 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밤이 늦도록 전개되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 8명이 모두 체포되었다.

이상백도 이때 같이 체포되었으며, 그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곧 항소하여 6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고, 징역 1년 6개월로 감형된 판결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5년 9월 17일 별세하였다.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수형인명부에는 李[2] 39세 상(相) 항렬.#[3]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성윤·박근술·박명언·박명출·박봉술·박삼봉·박순석·이내성·이범성·이영래·이윤약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