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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훈(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아명 허도문(許道文)[1]
자 / 호 순가(舜歌) / 방산(舫山)
본관 김해 허씨[2]
출생 1836년 4월 14일
경상도 선산군 하고면 임은리
(현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사망 1907년 8월 23일 (향년 71세)
경상북도 진보군 하리면 읍내동
(현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괴정2리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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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허위의 맏형이며,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 허소의 5대조이다.

2. 생애

1836년 4월 14일 경상도 선산군 하고면 임은리(현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진사 허조(許祚, 1817 ~ ?)[3]와 어머니 진성 이씨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임은 문중의 종손인 5촌 당숙 허정(許𥘺, 1814 ~ 1890. 2. 4)에 입양되었다.

조부는 허운(許𠎉, 1789 ~ 1870. 10. 26)으로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막내 동생 허위가 1904년 의정부 참찬에 제수되자 비서원 승(秘書院丞)에 추증되었고, 양조부 허임(許恁, 1782 ~ 1855. 1. 4)은 1813년(순조 13) 증광 진사시에 3등 16위로 입격했다. 증조부 허돈(許暾)은 선산군 임은동 입향조로서 1810년(순조 10) 식년 생원시에 3등 41위로 입격했다. 마찬가지로 허위가 참찬에 제수된 뒤 장례원 좌장례(左掌禮)에 추증되었다.

그는 일찍이 양조부 허임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22세 되던 1857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복시(覆試)에서 낙방했고, 그 길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경전 연구에 몰두했다.[4] 장인 연안 이씨 이봉기(李鳳基)의 계속된 권유에도 번번이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29살 되던 1864년 허전(許傳)의 문하에 들어가 성호 이익, 안정복, 황덕길(黃德吉), 허전 등으로 이어진 성호학파실학을 배워 그 학통을 이었다. 1867년에는 개령현 남면 지천(芝泉) 방암산(舫巖山) 아래로 이주해 호를 방산(舫山)이라 짓기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도를 피해 진보현 북면 흥구리(현 영양군 입암면 흥구리) 비봉산 아래로 이주해 은거했다. 그해 경상도 위무사(慰撫使) 이중하(李重夏)의 장계를 통해 행실이 훌륭하다며 천거되기도 했다.

그 뒤 1895년 막내 동생 허위가 경상북도 진보군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경상남도 김해군 우부면 내리(현 김해시 내동)에 있던 경운재(慶雲齋)[5] 소속 재산 및 선산군 소재 자신의 소유 전답 3,000여 마지기를 매각했고, 이 대금의 전액을 허위에게 군자금으로 제공했다. 그리고나서 "盡心竭力(진심갈력)하여 危難(위난)할 때 報國(보국)하라"는 편지로 허위의 의병 활동을 독려했다.

이듬해인 1896년 4월에는 안동부 진보군 하리면 읍내동(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진보향교에서 '진보의진'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동군·영해군·청송군·영양군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고종의 해산 조칙으로 해산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뒤 낙향해 진보군 하리면 읍내동에 남덕정(覽德亭)을 짓고 '간운헌(看雲軒)'이라는 현판을 걸고서 은거했다.

1902년 7월 24일 혜민원 주사(惠民院主事)에 임용되었으나, 8월 11일 사직했다. 1904년 4월 5일에는 경기전 참봉임명되었으나 다음날인 6일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907년 도산서원병산서원의 원장을 두루 지내다가 그해 8월 23일 진보군 하리면 읍내동 남덕정에서 별세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1] '도덕(德)과 문장(章)으로 큰 인물이 되라'는 뜻으로 양조부 허임이 지어 준 아명이라고 한다.[2] 판서공파-회현파(會賢派)-임은(林隱) 문중 24세 艹 항렬.[3] 1864년(고종 1) 증광 진사시에 2등 4위로 입격했다. 사후 넷째 아들 허위가 의정부 참찬(정2품)에 제수되자 1904년 8월 7일 의정부 참찬에 추증되었다.[4] 그런데 1861년 3월 26일 승정원일기 기사에 따르면, 1859년 증광 생원·진사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진시장(陳試狀)을 제출해 1861년 식년 사마시 복시(覆試)에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유예를 허가받은 기록이 있다. 상을 당해 기년복(朞年服:2촌 또는 3촌 친척의 장례 때 입는 상복)을 입어야 하고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은 사람 또는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같은 해 초시에 합격한 자들이 이 진시장을 제출해 유예를 허가받을 수 있다.[5] 현재 이 위치에는 1956년 건립된 수인사(修仁寺)가 있다.